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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시인과 대구
글/ 사진 김경식
금년은 경술국치(庚戌國恥)100주년이다. 그동안 우리는 참담한 상황을 극복하며,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분단 상황은
여전하고 우리 민족이 갈 길은 멀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아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국에 관심이 없으면 우리 국토의 역사와 가슴 뜨겁게 살아 왔던 조상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국토는 5000년 동안이나 선조들이 삶을 지탱하며 살아 왔던 곳이며, 후손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 가야 할 미래의 땅이다. 일제하에 우리 민족이 그토록 원하던 독립은 국토와 언어. 자유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 해방은 되었지만 불행하게 국토는 분단되고 어언 60년이 흘러갔다. 일제 식민지 기간보다 더 많은 기간을 남과 북이 원수로 생각하면서 살아 왔다. 이런 조국의 현실에서 통일이 중요한 이유는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온 배달겨레의 터전인 국토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달성공원에서 본 대구
비록 조국은 분단되었지만 민족의 공동체가 모두 한글을 사용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현실은 일제하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 통치기간의 억압적인 상황에서 문인들의 삶도 예외 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목숨을 걸고 문학적인 행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자각이 없는 문인들은 결국 친일의 길을 걸었다. 이런 문인들을 우리는 친일문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을 함부로 매도하는 행위는 아직은 위험하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당시를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논리 때문이다.
누구든 그 입장과 상황이 아니고는 누군가를 평가를 하기는 쉽지 않다. 일제 36년간의 통치라고 하는 것은 한세대가 넘는 기간이다. 조국의 해방은 당시 상황으로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제의 힘은 강했고, 그 통치는 잔인했다. 이런 절박한 억압 통치시대를 견딜만한 문인들은 흔치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걸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에 저항한 작가가 위대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끝까지 저항시를 쓰는 시인이 있었다. 만약 저항 문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제시대의 문학을 이야기 할 때마다 참담한 자괴감에 몸서리 칠 것이다.
나는 오늘 일제의 주구들이 순결한 국토를 겁탈하던 시기에 살았던 현대 시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그는 우리민족의 서정과 감성을 담아 가슴을 흔들던 저항시를 남기고 떠났다. 이상화(1902~1943) 시인이다. 이번 기행은 그의 고향 대구광역시를 찾아가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한다. 대구는 역사가 짧은 곳으로 아는 이가 많다. 그러나 대구는 신라와 고려 때에도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때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근무하던 고읍이다. 대구의 역사는 아득하다.
100년 전 대구 모습 (계산성당이 보인다)
대구지역에서 무문토기가 출토되었으니 청동기 시대 (대략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261년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3세기 중엽에 신라에 병합되어 발전하기 시작한다.
신라 때에 위화군과 달구화현(達丘火縣)으로 분현된다. 757년(경덕왕16년)에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달불성)은 대구현(大丘縣)이라는 지명으로 거듭난다. 신라 신문왕(689년)때에 경주에서 대구(달구벌)로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신라는 5악 가운데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을 중시하면서 숭배했다. 927년(태조10년)에는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공산전투가 있었다.
후삼국 시대 때 왕건은 대구를 자신을 살려준 동네로 생각했다. '반야월(半夜月)'이라는 지명은 하늘에 반달이 떠서 왕건의 도주로를 비춰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반야월로 인해 그가 생존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왕건은 지금의 수성구 고모동을 지나 앞산 북쪽 산기슭을 따라 성주지역으로 도피할 수 있었으니 대구앞산의 어디쯤에는 아마도 왕건이 머물던 터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대구지역은 후삼국 때에 후백제와 고려의 싸움터였다. 고려 초기에 대구는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누어진다.
12세기 무신의 난 이후 대구는 군사도시로 거듭난다. 인근의 청도, 밀양, 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민란으로는 1193년(명종 23년) 청도와 운문에서 일어난 '김사미의 난'이 대표적이다. 몽고 침입 때에는 공산성에서 항몽 투쟁을 전개한 것도 이 지역 백성들이었다. 1419년(세종1년) 대구현은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된다. 1466년(세조12년)에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고 경주에 있던 경상도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대구로 옮겨온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행정중심지 및 군사상의 요지가 된다.
대구 근대화 문화유산 거리에 있는 이상화 시인과 서상돈 선생 타일 흉상
1601년(선조 34) 대구에 경상도감영(慶尙道監營)을 설치하였다.
경상감영은 1601에 안동에서 대구로 옮겨왔다. 경상도 관찰사는 대구부사(大丘府使)를 겸직하였다.
1639년(인조17년) 가산산성을 쌓았고, 1736년(영조12년)에 대구읍성이 축조되었다.
1780년부터 대구의 한자 표기가 ‘大丘’에서 ‘大邱’로 표기가 바뀐다. ‘丘’자는 공자(孔子)의 휘(諱)자이므로 개명해야 한다는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지명을 바꾼다.
대구의 경상감영은 1910년 일제가 침탈하기까지 300년 동안 존재했다. 영조 때(1736년) 둘레 2.65㎞에 이르는 석성을 쌓았다. 그러나 1906년 박중양 관찰사가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허물었다. 왕의 허락도 없이 읍성을 허문 박중양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였다. 1906년이면 우리 왕의 명령을 받아야 할 자가 그런 짓을 한 것이다. 경상감영 선화당 앞뜰엔 1770년에 제작한 측우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강석 받침돌(보물 842호)만 남아 있다. 역시 박중양이가 당시 일본인 인천기상관측소장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전한다. 친일파를 처벌해야 하는 이유는 이런 자들의 행적 때문이리라.
이 무렵부터 해방 전까지 왜인들이 5만 명 이상이 벅적이는 곳이 대구였다. 해방 후부터 6,25 전쟁 피난시기를 거쳐 60~70년대까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녹향'이란 다방은 사라졌다. 다만 팻말만 그 시대를 희미한 기억 속으로 휘몰아 갈 뿐이다. 6,25 피난 시절에는 양주동, 이중섭, 유치환, 정비석 등 예술가들이 녹향에 드나들었다. 시인 양명문은 녹향에서 가곡이 된 ‘명태’라는 시를 썼다.
대구는 경북 남부 중앙에 있는 7구 1군 3읍 6면 134동의 인구 2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광역시이다.
대구는 북으로 칠곡군, 군위군, 동으로 경산시, 청도군, 서쪽으로는 고령군, 성주군과 남으로 경남 창녕군과 접한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동쪽 금호강 연안에 대구분지가 위치한다.
대구광역시를 관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특이하고 인상깊은 도시가 아니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대구는 경주나 부여, 공주 같은 역사적인 도시도 아니고 별난 음식이 있는 곳도 아니다.
그러나 대구는 많은 인물들이 나고 자란 곳이다. 고난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들의 삶과 죽음의 현장을 찾아 떠나는 기행은 언제나 가슴이 숙연했다.
3,1운동 길
이번 기행도 마찬가지리라. 대구는 우리나라의 근세사에 많은 인물을 키워낸 곳이기 때문이다. 박정희(대구사범), 전두환(대구공고), 노태우(경북고)대통령도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 이번 기행은 이상화 시인을 중심으로 진행한다. 그가 살았던 집과 계산성당, 서상돈고택. 약전골목, 제일교회 3,1운동길. 제일교회, 선교사묘역, 청라언덕, 달성공원을 답사하면서 대구광역시의 역사적인 건축물과 인물들을 조명한다. 결국 대구 문학기행은 아무래도 이상화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등 명시를 쓴 이상화(李相和)는 대구의 상징같은 존재이다. 이상화의 삶과 문학의 고향을 찾기 위해서는 대구로 가야한다.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온난화로 지구를 걱정하던 사람들은 이번 겨울에는 오랫동안 이어진 한파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도 겨울 한파는 몰려왔다가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봄은 머지않아 이 땅을 덮게 될 것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우리는 90년 전에 3,1운동의 펄럭이는 태극기의 모습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문인들에게 그 허탈감은 심각한 정도였다. 그 절망감을 승화시키기 위해 젊은 문인들은 서로 힘을 모으기 시작한다. 문학동인지의 창간이 그것이다.
창조(1919년 창간), 개벽(1920년 창간), 장미촌(1921년 창간), 백조 (1922년 창간) 조선문단(1924년 창간)등으로 작가들의 원고 발표지면은 많아진다.
이상화 시인 고택 가는 길
이상화, 박영희, 김억, 황석우, 박종화, 홍사용, 오상순, 변영로 등은 1920년대 초에 활동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3,1운동의 실패로 저마다 절망과 슬픔의 마음을 시로 표현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의 시에는 죽음, 어둠, 잠, 이별, 탄식 같은 단어들이 수두룩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상상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삶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시는 누군가의 간절하고 절박한 생각을 언어로 함축하여 표현한 문학이다. 시인이 사회적인 상황에 민감한 것은 이런 이유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한다면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저항적인 문인들은 자유가 차단된 곳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펜을 들 수 있었다.
중국의 고전인 ‘시경’ 서문에는 ‘마음속에 움직이는 바가 곧 뜻이 되고, 이 뜻이 가슴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절실한 언어로 다듬어지면 곧 시가 된다’고 했다.
결국 절박하고 절실한 속마음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통해 세상에 나오면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시는 작가의 절박한 생각의 표현물이다. 그러나 이 절박한 상황은 단지 자신의 상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합리와 부자유한 모순을 비판하면서 저항하는 것이 문인의 참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국이 위기에 처하거나 식민지 상황이라면 문인들은 개인적인 정서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식민 상황의 억울하고 부자유한 삶의 모습을 표현하며 독립의지에 불을 붙였다.
시인들은 주로 자신의 절실함과 절박한 상항을 표현한다. 이렇게 창작된 시가 보편성을 지니게 되면 많은 독자들에게는 자기정화를 시켜준다.
언어를 통한 대리만족을 할 수 있도록 시인은 말을 만들어 내는 존재인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는 시를 쓰기 위해 시인들은 노력한다. 그러나 이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물론 예언자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는 시인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인들은 현실적인 삶에서 자신의 언어들을 찾아왔다.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작가들은 자유가 차단되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고난을 당했다. 일제하의 저항 작품들은 작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다. 그들의 삶과 문학이 감동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상화 시인은 식민지 시절 민족의 울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 가슴을 저미게 하는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이 시를 읽으면,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확인한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
이 시의 서두는 두보의 춘망(春望)이란 시와 유사한 분위기를 지녔다.
당시 이상화 시인이 두보의 시 춘망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두보는 1300년 전에 자신이 처한
암담한 삶의 애환을 담아 시를 썼다.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나라는 망했지만 조국의 산하는 여전하고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장안성에 봄이 오니 초목은 무성하네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이별의 한스러움에 새소리에도 마음이 놀라네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봉화불이 계속해서 석 달이나 타고 있으니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고향에서 온 편지는 만금보다 귀하다.
-- 두보의 시 ‘춘망(春望)’ 부분
이상화 고택 입구
두보의 시 춘망(春望)의 역사적인 배경은 당나라(755년) 때에 발생한 '안록산의 난'이다. 당시 현종은 양귀비에게 현혹되어 당나라는 망조가 되어갔다. 이 빌미를 이유로 안녹산이 반란의 깃발을 들었던 것이다.
시 ‘춘망’은 안녹산의 난으로 두보가 장안에 감금되어 있을 때 쓴 ‘5언 율시’다.
그는 46세 때 봉선현에 살고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백수에서 붙잡혀 감금된다. 서기 755년 11월 가족을 만나러 봉선현에 갔다가 반란군에 포로 신세가 된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장안에서 절망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이런 공포 분위기를 상상하지 않으면 제대로 해석하기 어려운 시가 ‘춘망’이다.
당나라의 도읍지 장안은 안녹산의 난으로 함락되어 폐허가 된다. 그는 화려했던 장안이 쑥대밭이 되고 오랫동안 헤어진 처자식을 그리워한다. 시의 전반부에는 자신의 슬픈 심경을 표현하였으며, 후반부에는 자신의 심정을 피력했다.
그는 안녹산의 난으로 함락되어 폐허가 된 장안의 모습과 함께 난리로 헤어진 처자가 그리웠다. 늙어 가는 자신의 모습과 비통한 심정을 ‘춘망’에 서정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가 유명시가 된 것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국의 백성들도 끊임없는 전쟁과 부역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가. 이 시의 생명력은 이런 고난당했던 사람들을 통해 오늘날 까지 전달될 수 있었다.
두보는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 하다가 끝내 객지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 시가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두보의 이런 비극적인 삶 때문이기도 하다.
이상화 고택에 있는 그의 흉상
70년 전 대구의 한 청년도 일제의 암흑기에 시 한편을 쓴다. 우리 민족의 가슴을 흔드는 시였다.
제목이 의문형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다.
이 시가 발표될 무렵은 이미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한지도 15년이 지났을 때였다. 3,1운동으로 독립 될 듯 보였던 광복도 불가능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차디찬 겨울이 지나고 빼앗긴 조국의 땅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그 산야에 아름다운 꽃이 피는 상상을 하니 기쁨보다는 슬픈 마음이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으리라. 빼앗긴 나라에 봄이 오는 것은 슬프고
잔인한 것이라고 여겼던 이상화 시인은 논둑길을 걸었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은 즉자적인 농부에게는 기쁨이지만 일제의 수탈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대자적인 농부에게는 슬픔이다. 조국 전체가
남의 땅인데 지엽적인 땅의 현상들은 의미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개벽 70호(1926년 6월호)에 게재된 이 시는1920년대의 대표적인 저항시다. 나는 이 시의 저항의 의미론적인 시어에 감동을 받곤 한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은 곧 지평선의 표현이다. 이 지평선은 조국해방이 시작되는 땅이다. 이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작가는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는 신념의 언어를 토해낸다.
그러나 조국해방을 향해 그는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조국 해방의 이상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속울음을 울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건강한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3,1운동은 2만 여명의 동포들이 일제의 군경에 의해 살상되었으며, 약 5만 여명이 체포 구금된 세계사적인 대사건이다.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실패한 운동이지만 민족독립투쟁의 불씨를 살려주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우리의 동포들은 실망하고 탄식했다. 죽음과 투옥을 작심하고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조국의 현실은 더욱 암담했다. 백조, 폐허, 장미촌의 동인 문인들의 작품들은 이런 조국 동포의 상실감을 반영한 것이다.
낭만주의와 퇴폐주의적 경향의 시들이 오래갈 수는 없다. 식민지 조국에 사회주의적인 사상들이 희망의 바람으로 확산된다. 특히 1917년 소련혁명은 제3세계 민중들과 식민지 치하의 민중들에게 희망의 등불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상화 시인은 한 때 이런 사회주의혁명과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상화 고택
이상화의 아버지 이시우, 어머니는 김해 김씨는 4형제를 낳았다. 이상화는 둘째였으며, 큰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였다.
다섯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대구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이상화는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한다.
그는 대구에서 백기만 등과 함께 3,1운동을 일으켰다. 검거를 피해 서울에 있는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한다. 1921년 고향 친구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난 후에 ‘백조’ 동인에 가입한다.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와 함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이상화의 작품활동은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문단 등단 후 초기에는 '백조' 동인과 함께 문학활동을 하면서 '나의 침실로'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쓴다. ‘나의 침실로’는 ‘백조’3호에 실렸는데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1925년 박영희 김기진과 더불어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창립한다. 이 무렵 그는 저항시의 백미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다.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 동경에서 공부하던 중에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동포들이 살상당하는 참상을 목격하고 귀국한다. 대구 교남 학교(현 대륜 중고교)의 교사가 된다.
1925년 카프에 가입하고 사회주의적이 민족운동을 전환한다.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좀 더 강한 문학행위를 필요로 느꼈을 것이다. 이런 이유가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1925년 무렵 사회적인 책무를 느끼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제목의 저항시로 식민지하의 민족현실을 노래한다. 그는 백조동인의 나약하고 낭만적인 시인에서 향토적인 저항시인으로 거듭난다. "금강송가", "역천", "이별" 등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의열단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일제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주목되어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한다. 집안이 온전할 리 없었으리라.
저항시를 쓰면서 독립 운동 혐의로 몇 차례 감옥생활을 한다. 그는 살아생전 시집을 출간하지 못한 시인이다. 다만 백기만이 엮은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16편의 시가 수록되었을 뿐이다.
이상화 시인 고택 내부
1943년에 43세에 위암으로 최근에 복원된 그의 고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계산성당에서 이상화 고택은 지척이다. 아니 함께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당정문 우측으로 난 긴 담을 따라 걸어 가다가 끝나는 곳 왼쪽 기와집이 이상화고택이다.
이상화 고택은 시인 이상화(1901~43)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4년을 살았던 집이다. 1943년 이상화 시인이 사망 후에 이 고택은 한동안 요정이 되어야 했다. 주변이 재개발되어 철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대구시민들은 이 집을 살리는 운동을 벌인다. 약 50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와 모금액 8600만원을 들고 대구시청을 찾아갔다. 감동이었다. 결국 2006년 고택 주변을 구입한 건설회사가 상화 고택을 대구시에 기증하여 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이상화 시인이 심었다는 나무가 반긴다. 겨울이라 을씨년스럽지만 그의 시비를 읽으면 추위가 가시면서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의 시‘역천’이 새겨진 화강암 시비를 오른 손으로 만지며 읽어본다.
이때야 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 나흘 밤 열푸른 유리로 천장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 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 같은 길을 끄으며 바라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오를 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 밤에 좋아라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지게 보이는 저 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웃어 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가 되어
꾀이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이빨 같은 별에게로
옆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치듯 줄달음질을 쳐서 가더니
그리하야 지금 내가 어데서 무엇 때문에 이것을 하는지
그것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 것이 두려웁다.
걸림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 때와 어울려 한뭉텅이가 못 되어지는 이 살이
꿈과도 같고 그림 같고 어린이 마음 위와 같은 나라가 있어
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 하게 지쳤을 떠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넝쿨같이 몇 날 몇 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 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 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 이상화 시인의 시 ‘역천(逆天)’ 전문
이상화 시인의 시 '역천 '시비
이상화 시인과 대구 (하)
글 / 사진 김경식
겨울날 이상화 고택은 춥고 스산하다. 아무도 없는 그의 고택에서 나는 봄을 기원했다.
이상화 고택에는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할 수 있도록 그의 흉상이 서 있고 작품들과 글씨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에 그의 고택이 이렇게 복원 될 수 있었던 것은 대구시민들의 문화적인 역량의 힘이었다. 이상화 시인 때문에 대구는 문학의 고향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상화 시인의 호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호를 자세히 살피게 되면
그가 살았던 삶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화는 호를 4개 가지고 있던 시인이다. 처음에 그는 '무량(無量)'이라는 불교 용어의 호를 사용했다.
주로 문단에 나오기 전인 20세 이전에 그랬다. 의식적으로 물질적으로 무량이란 호처럼 별로 부족할 것이 없던 때였다.
두 번째 호는 '상화(尙火)'다. '항상 불같이' 란 뜻을 지닌 이 호는 주로 작품을 쓸 때 사용했다. 호의 뜻처럼 이 시기에 그는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한다. 1927년 이후에 그는 독립지사가 되어 제대도 문학 활동을 못한다.
세 번째 그의 호는'상화(想華)'다. 중국에서 지어 부른 호다. 지명수배자의 신분이라 작품활동은 못하던 불안 공포의 시기에 조국독립의 화려한 생각을 해 보려고 했으리라.
마지막 네 번째 호는 '백아(白啞)'다. 1936년부터 사용하였으며,'백치와 벙어리'처럼 살겠다는 결심이 녹아있다. 많던 가산은 모두 사라지고 절망이 가슴을 억누르던 시절에 역설적인 호를 사용한 것이다.
지금 주로 '상화(尙火)'로 불려지는 것은 그가 활발히 시작(詩作)할 때의 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1948년에 대구 달성공원의 시비(詩碑)에도 '상화시비(尙火詩碑)'라 새겼다.
다만 묘비에는 '시인백아이공휘상화지묘'(詩人白啞李公諱相和之墓)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 '백아(白啞)'란 호가 보인다.
이상화는 미남이었기 때문에 '고뇌의 재료'라고 김팔봉은 말했다. 그런 그에게 사랑이 왜! 없었겠는가.
그의 시 ‘이별을 하느니’는 연시(戀詩)다.
시 몇 줄에도 이별의 슬픔이 오롯하게 녹아있다.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남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꼭두로 오르는
정열에 가슴과 입설이 떨어
말보다 숨결조차 못 쉬노라
오늘 밤
우리 둘의
목숨이 꿈결같이 보일
애타는
네 맘 속을 내 어이 모르랴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우리 둘이 나뉘어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피울음 우는 두견이 되자
-- 이상화 시 ‘이별을 하느니’ 중에서
약전거리 상징물
이상화(尙火)와 아내 서순애 사이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공부 핑게로 상화(尙火)가 부인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 7년 만에 얻은 아들은 문둥병에 걸려 죽는다. 결국 그의 아내는 천주교인이 된다. 그러나 이상화 역시 불행했다.
조국은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 상태이고 원만하지 못한 삶의 편린들은 그에게 고통이었다. 통곡하고 싶었으리라. 그의 시 ‘통곡’은 이런 심정의 소산이다.
하늘을 우러러
울기는 하여도,
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닯아
하늘을 흘기는
울음이 터진다.
해야 웃지 마라
달도 뜨지 말라.
--이상화 시인의 시 ‘통곡’전문
대구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은 '계산성당'과 '구제일교회', 동산에 있는 '선교사숙소'이다.
이들 건축물은 우리나라 근대의 역사적인 공간으로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계산성당은 프랑스 선교사가
설계했으며, 1902년에 서울 명동성당을 건축했던 중국인 기술자들이 대구까지 내려와서 지었다. 고딕 양식의 계산성당 건축물은 당시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졌다. 계산성당은 100년의 대구 역사를 증언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계산성당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12사도와 함께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당시 대구의 초기 천주교 신자의 지도자들이다. 계산성당 마루돌은 허물어진 대구읍성의 돌을 깐 것이다. 이상화 시인의 시 ‘나의 침실로’는 그가 이 성당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진 시라고 전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이 성당에서 신부서품을 받은 것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한 장소이니 이 성당의 위상을 알 만하다.
일제하 천재화가 이인성이 그린 계산성당에는 감나무 그림이 보이는데 지금도 그 감나무는 살아있다.
이인성은 1912년 대구시 태평로 3가 56번지에서 태어났다. 11세 때에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3학년 때에 담임 이영희 선생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6세 때에 서동진 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16세)하고는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못한다.
서동진이 운영하는 대구미술사에서 수채화를 배울 때인 <촌락의 풍경>이라는 제목의 수채화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다. 이듬해 그는 제8회 조선민술전람회에서 대구 계성중학교 정문을 그린 '그늘'< 陰>을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한다. 나는 그가 계성중학교 정문을 배경으로 이 때 그린 것이 그가 입학하지 못한 학교를 그리워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31년 그는 자신의 후원자를 만난다. 고미술 수집 및 연구가였던 경북여고 교장 ‘시라가 주키치’이다.
그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크레용회사에 근무하며 밤에 그림공부를 하다가 이듬해에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이 때 자신이 다니던 ‘오모사마’라는 크레용회사 사장이 마련해 준 <아틀리에>에서 석고 데생을 연마한다.
이후 그는 <성당의 아침>, <가을의 어느 날>을 그리면서 1930년대 화가로서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라는 명성을 얻는다.
계산성당 내부
그의 나이 불과 26세에 추천 작가였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10년 전에 이미 그는 우리나라 미술평론가들이 '한국근대유화베스트10'에 1위로 선정한 작가다. 이 때 주목을 받았던 그림이 <경주의 산곡에서>(1935)이다. 박수근과 이중섭은 우리 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는 국민작가이다. 그러나 이인성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미술전문가들은 그의 천재적 재능과 조형적인 미적 감각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45년 그는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하고 이화여고의 미술교사가 된다.
좌익계열의 덕수궁에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주관한 해방기념미술전에 <녹량>을 출품한다.
좌익적 성향을 가진 ‘자유신문’에 연재된 김남천의 소설 <1945년 8.15>의 삽화를 그려 보기도 한다. 1946년 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 김주경)에 공동 부위원장에 선임된다. 그러나 1947년 조선미술가동맹을 탈퇴하고 김인승, 남관 등과 함께 우익적인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한다.
이런 그가 왜 우리에게 잊혀진 작가가 되었는가. 나는 1950년 6,25전쟁 때 당한 어이없는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나는 망우리공원묘역에서 그의 묘소를 참배했다. 그때서야 나는 그가 6,25때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았다. 1950년 6,25 전쟁 중에 서울에서 그는 경찰에 의해 어이 없이 총살된다.
검문 중에 이인성은 큰 소리로“천하에 유명한 이인성을 몰라보느냐?”고 하여 검문을 피했다고 한다.
잠시 당황한 검문자는 그를 돌려보낸다. 그러나 그가 ‘환쟁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검문 경관은 그의 집을 수소문한다. 끝내 그를 찾아 총으로 살상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천재적인 화가를 잃었다.
대구 계산성당은 그의 삶과 그림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엄동설한에도 나는 계산성당에 있는 이인성나무를 몇 번이고 바라 보았다. 그의 삶과 죽음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대구제일교회
제일교회는 대구 최초의 개신 교회다. 1994년에 이미 100주년을 맞았다. 선교사 베어드가 1893년 대구의 약령시 일대를 선교하며 세운 교회이다.
윌이엄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 1862-1931)는 미국 인디애나에서 출생하였다. 하노버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원, 시카고대학원, 펜실베이니아대학원에서 수학하고 하노버대학에서 철학박사(1903)와 신학박사(1913)학위를 받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대구의 명문 계성학당(계명대)을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제일교회의 초창기 이름은 야소교회당(耶蘇敎會堂)이었고, 두 번째는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였다. 약전 골목에 있는 구 제일교회 건축물은 1932년 한국의 전통 양식과 서구의 양식을 절충해 지었다. 담쟁이 덩굴이 인상적인 이 교회 건물은 지금은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다. 동산언덕으로 이전을 하였기 때문이다.
제일교회100년사를 읽어보면 이 교회가 대구에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작곡가 박태준과 현제명도 이 교회 출신이다.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서로 마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생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다. 서상돈이 세상을 떠날 때 이상화는 고작 12세의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화는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살던 집에서 서상돈 선생이 살았던 집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상돈 고택
서상돈(徐相敦,1850~1913)은 1871년부터 대구에서 지물행상과 포목상 등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이다. 계산성당 교인으로 신앙에 정진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조국해방에 걸었던 사람이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이 무렵 그는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며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에 의해 빚을 많이 진 조선의 조정은 곧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이유다.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일제에 진 빚을 상환하면, 온 나라가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무렵 그는 대구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며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한다. 그가 제안하고 전개하던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 운동도 실패로 돌아간다.
재개발에도 살아남은 서상돈고택은 이제 바로 옆에 있는 이상화고택과 이웃하며 대구의 자부심 있는 명소로 부활하고 있다.
약령문
대구의 상징은 약전골목인지 모른다. 한약방 거리는 800 미터쯤이다. 우리나라에서 한 지역에 한약방이 가장 많고 역사 깊은 한약 골목이다. 약전골목 복판 제일교회 옆에 약령시한의약전시관이 있다. 이런 약전골목을 걸어서 올라가면 장관동이다. 이곳에는 소설가 김원일의 피난시절 추억이 깃든 곳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6,25 피란 시절 경험을 담은 소설 '마당 깊은 집‘을 이 곳을 배경으로 썼다.
계산동은 영남대로가 지나는 대구의 상징적인 길이었다. 대구의 부자들이 많이 살았던 이 동네는 유명 인물을 배출했다. 민족의 지도자들에게 배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찾아 오면서 학문과 문화의 동네가 되었다. 일제하 독립운동가와 예술가들이 태어나고 활동했다. 계산동은 최근에 이상화 시인과 독립운동가 서상돈 고택을 복원하면서 계산성당과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가 되고 있다.
대구에 개신교 성지같은 언덕이 있다. 동산이다. 서문시장과 계산성당이 앉아 있는 읍성사이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동산은 동네의 작은 산이 아니다. 달성공원에 있는 토성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선교박물관
조선후기에 이미 동산은 헐벗은 산이었다. 애덤스와 존슨은 달성 서씨의 문중 땅이었던 이 산을 매입한다.
애덤스는 제일교회를 개척한 선교사이고, 존슨은 동산병원을 세운 분이다.
20세기 초에 이 언저리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산은 대구 시가지와 접해있는 고지대였다. 이 곳에 병원과 선교사 주택이 지어지고 정원이 조성되었다.
이 언덕 같은 산은 이제 각종 건축물로 빼곡하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이 곳에 묘역이 있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 묘역에 최초로 묻힌이는 애덤스 목사의 아내 넬리 딕(1866~1909)이다. 만삭의 몸으로 대구에 온 그녀는 43세에 자신의 고국을 떠나와 헌신하다가 이 곳에 묻혀 있다. 그의 묘비에는 영어로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자고 있다”는 마태복은 9장24절의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어 감동을 준다. 나는 묘역의 다른 묘비명을 읽으면서도 감동을 받았다.
넬리 딕 묘소
이 묘역에는 오래전부터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이 있었다. H. M. 브루엔(1874-1959) 부부 선교사의 삶과
선교였다.
헨리 M. 브루엔( Bruen, Henry Munro, 한국명: 부해리)은 1874년 10월 26일 미국 뉴저지에서 출생했다. 프린스톤 대학과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1899년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대구선교부에 부임한다. 선교사로 파송되기 직전에 마르다(Martha Scott)와 약혼하고,1902년에 결혼한다. 경북 서부지역은 브루엔( Bruen)의 선교지였다. 김천시의 21교회, 선산군 10교회, 상주군 5교회, 성주군 3교회, 고령군 3교회, 군위 봉황동교회를 설립하였으니 놀랍지 않은가.
애덤스 목사의 후임으로 대구제일교회 당회장을 역임하고, 경상노회(제7회) 노회장으로도 활동한 브루엔은 일제의 종교탄압 정책으로 버틸수 없어 1941년에 대구를 떠나야 했다. 그의 부인 마르다 S. 브루엔( Bruen, Martha Scott, 한국명: 부마태)은 1875년 펜실베니아(White Haven)에서 출생했다. 마르다 브루엔이 선교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교지 대구에서 안나(Anna,1905년생)와 해리에트(Harriette, 1910년생)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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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 브루엔 묘소
그러나 ‘마르다 브루엔’은 1930년 유방암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신명학교는 1907년 부루엔이 대구 최초로 세운 여자학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7년후인 1937년 6월에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가 수행원과 함께 신명학교를 방문, 강연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때 헬렌 켈러는 “미래의 역사를 짊어질 신명의 딸들이여, 꿈을 가져라. 하나님이 택한 딸로서 재능을 살려 아름다운 작품이 되라”강조했다고 전한다. 오늘도 부루엔의 영혼은 대구 시내를 내려다 보며 침묵으로 대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동산(東山)이란 언덕은 옛 대구읍성 남서쪽에 위치한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미국 선교사들은 이 언덕에 자신들이 살 집을 짓고 주변에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웠다. 이 학교가 신명학교이다. 신명학교는 대구 최초의 여학교였다. 병원은 동산병원이다. 지명 그대로다. 지금도 언덕 위에는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이국적인 주택이 줄지어 앉아 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살았던 그 모양 그대로다. 다만 지금은 교육, 역사, 의료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구지역 결혼 부부들의 웨딩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영화에도 제법 등장한다. 이 언덕에는 예전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져온 사과나무를 심었던 곳이다.
동산의 제일교회 옆에 지금도 자라고 있는 이팝나무는 ‘현제명 나무’라 부른다. 쌀밥 같다고 해서 이밥나무라 부르는 이팝나무에 꽃이 필 때 그의 가곡을 불러보면 의미 있을 것이다. 현재명(1903~1960)은 대구 남산동139번지에서 태어났다. 제일교회 현승환 장로의 동생으로 대구의 대남소학교, 계성중학, 평양숭실전문학교, 미국시카고GUN음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가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가 세운 제일교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국민이라면 한 번은 불러보았을 가곡 <고향 생각>은 그가 작사 작곡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식민지시절 우리 민족구성원들의 고단하고 슬픈 삶을 회상할 수 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 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 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찌해
---박태준 ‘고향생각’
동산 선교사 주택
선교박물관 뜰에는 100년이나 되는 사과나무가 있었다. 지금 그 나무는 죽고 그 곳에서 새가지가 나와 위태하게 자라고 있다. 1900년대에 존슨 선교사가 심은 사과나무다.
과거에 사과하면 대구였다. 대구사과의 고향이 이 언덕이다. 존슨 선교사가 없었다면 대구는 사과의 명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대구는 존슨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도시다.
동산의료원은 1899년 개원했다. 이미 110년의 역사를 가진 병원이다. 병원 관사로 사용하던 스윗즈(Switzer) 주택은 '선교박물관', 챔니스(Chamness) 주택은 '의료박물관', 블레어(Blair) 주택은 '교육,역사박물관'이 되어 사람들을 기다린다.
계산성당에서 이 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90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 골목 계단의 역사성은 대단하다. 신축된 제일교회와 담을 경계하면서 오르다 보면, 옛 사진 몇 장이 걸려 있다. 이 사진 속에는 대구의 옛 모습이 살아 있다. 계산성당에서 동산병원으로 이어진 계단식 길은 ‘대구 3`1운동 길’이라 부른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이 길을 따라 행진했기 때문이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이 곳 동산의 소나무 숲에서 모임을 가진 후에 시내로 진입했다.
동산의 작은 영역은 청라언덕이라 부른다. 이 곳에는 작곡가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동무생각’의 작사자는 노산 이은상이다.
동무생각 노래비
박태준(朴泰俊1901~1986)년 대구 동산동72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순조는 제일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다.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된다.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다. 이 무렵 그는 노산 이은상을 만난다. 노산 이은상은 이 학교의 설립자 이승규의 아들이었다. 훗날 노산은 이 학교에서 국어교사를 한다. 이런 인연으로 그들은 친밀한 관계로 발전한다.
어느날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한 여학생을 사랑하였던 자신의 고민을 이은상에게 털어놓는다. 노산은 대구에서 있었던 박태준의 첫사랑이야기를 듣고
“ 박 선생이 잊지 못할 그 소녀를 노래로 승화시켜 그 곡에 담아 두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노래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소?” 하고 시를 써서 박태준에게 건네준다. 이것이 가곡 ‘동무생각’이다.
동무라는 단어 때문에 남자 친구를 연상하지만 결국 ‘동무’는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학생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필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내가 네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은상 작시 박태준 작곡 '동무생각'
선교사 숙소의 공원 (청라언덕)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의 한자음에서 따왔는데 ‘담쟁이덩굴이 많은 언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제일교회 교인이었던 박태준은 유년시절에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학생을
바로 이곳에서 마주 친다. 이 여학생은 아마도 신명학교 학생이었을 것이다.
박태준은 이 소녀를 잊을 수 없어 번민한다.
지금도 동산의 선교사들의 주택과 담에는 담쟁이덩굴로 뒤덮였다. 아직도 청라언덕은 사연이 그대로인 이곳을 걸으며 그들의 숭고한 사랑을 밟는다.
이 시는 4연의 시이다. 1연은 봄을 노래한 대구 동산의 청라언덕이 작품의 무대이다. 2연은 노산의 고향 마산의 가포해변의 여름이 배경이다. 3연은 동산의 가을 분위기다. 4연은 서울의 겨울로 짐작된다. 가곡에는 4연이 3절로 불려지고 있다.
대구제일교회에서 신앙의 싹이 자란 박태준은 지금도 많이 부르는 찬송가 493장<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을 작곡한다.
달성공원은 대구 중구 달성동에 위치한다. 삼한시대에 부족국가였던 달구벌의 성터가 공원화 되었다.
달성공원 터는 고려 중엽 이후 달성서씨(徐氏)가 대대로 살아왔던 사유지였다.그러나 조선 세종(世宗) 때 서씨 가문이 국가에 헌납하였다. 공원으로 처음 조성된 것은 1905년이었으며, 현재의 종합공원으로 조성 된 것은 1967년이다.
달성공원에는 1600m 토성(土城)과 잔디광장, 동물원 ,관풍루(觀風樓),망향루(望鄕樓)가 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의 동상, 의병장 허위(許蔿)선생의 공덕비, 달성서씨 유허비(遺墟碑)가 공원의 역사적인 의미를 더해 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 이상화 시비(李尙火詩碑)가 서 있기에 달성공원의 품위가 더욱 돋보인다.
달성공원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문인의 시비가 서 있다. 이상화의 시비다.
1948년 3월14 수필가 김소운 등이 발의하고 구상 등이 참여한 역사적인 시비다.
시비 뒷면에는 수필가 김소운이 지은 글을 서예가 서동균의 글씨로 새긴
한국근대시인 최초의 시비이기 때문이다.
달성공원 이상화 시비
달성공원에 새긴 시비에는 당시 10세 된 아들 이태희가 시 ‘나의 침실로’ 한 구절 쓴 것을 새겨 넣었다. 그러나 그의 시 <나의 침실로>로 전문을 읽으며,
그가 절망상태에서 도달하려고 했던 삶을 회고하면서 대구를 떠나려고 한다.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寢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런지 -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 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느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
내 몸에 피란 피 -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 이상화 시인의 시‘나의 침실로’ 전문
백조3호 1923년 9월호에 발표된 시다. 박종화의 '시의예찬'도 함께 이 곳에 게재된다. 죽음을 예찬한 두 편의 시는 젊은 청년들이 쓴 시이기에 서럽다. 밤은 넓게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이며 좁게는 작가 자신의 절망적이며 현실적인 삶의 현장이다. 밤이 암담한 현실이라면 새벽의 밝음을 고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나의침실로’에서는 오히려 새벽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자에게 광명의 빛을 지니고 다가서는 새벽은 오히려 부담과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해야 하는 자의 슬픔은 ‘ 마돈나와 나’다. 이들은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과
같은 존재다. ‘나의침실’이란 은유의 상징적 단어는 사랑과 죽음이다.
시의 전반부는 1연에서 6연이다. 이 곳은 사랑의 장소다. 그러나 7연에서 12연의 후반부는 죽음의 공간이다.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있는 침실’이란 표현은 죽음의 장소를 암시한다. 이 죽음의 장소는 단순한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부활의 동굴’이다. 결국 죽어야 절망을 극복할 수 있고, 사랑의 가장 적극적인 행위와 저항하라고 표현한다.
달성공원
이상화는 성격적으로는 순수서정 시인의 길을 걸아야 하는 사람이었지만 일제시대 조국의상황은 그를 저항작가로 내 몰았다. 그의 시 창착은 주로 1922년부터 26년까지 4년간 주로 이루어 졌는데 원고들은
대부분 실종된 상태다.
임화(林和)는 이상화를 따르던 시인이었다. 시집을 출판하기 위해 임화는 이상화의 시 원고를 가져갔다. 임화는 해방 후에 월북과 사형을 당했으므로 그의 원고는 소실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원고 안에 어떤 시가 들어 있을까 궁금하다.
이상화의 친구인 월탄 박종화가 보관하던 그에게서 온 편지들과 시고(詩稿) 몇 편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화 시인의 제자 이문지가 출판하겠다고 가져갔는데, 이내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피난통에 이 원고들이 또 사라져 버렸다.
달성공원은 스산하다. 산보를 나온 대구시민들은 추위에 몸을 옴츠리며 봄을 기다리고 있다. 멀리에서 봄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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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치 대하소설 한 편을 읽은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많은 분량의 글을 쓰신 시인님의 노력이 너무 크네요. 비운의 시대에 맞바람을 맞은 시인들, 청춘의 젊은 기상이 아직도 남았는데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되니 참 안타깝습니다. 이글만 읽어 보아도 토요일의 문학기행, 답사는 다 한 듯 합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고향생각' 이나 '동무생각 '의 작곡 유래가 그렇게 애틋하네요.
너무나 좋은 글을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편하게 앉아 시인님의 노고가 쌓인 역작을 몇글자의 필서로 애찬하기가 항상 송구합니다. 암울했던 역사의 한 시대를 넘나든것 같습니다. 한 작곡가(박 태준)와 작사가(이은상)의 교분으로 이루어진 '동무생각' 그리고 현제명의 '고향생각'을 지었을때의 감정을 담아 저의 작은 악기로 그 곡들을 연주하고 싶군요. 감사합니다.
기행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이 이 글을 누가 읽으실까? 고민을 합니다.
너무 글이 지루하고 난삽하여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도영선생님, 이연송 교수님 같은 분이 계시기에
위로를 받아 다시 이 길을 가며,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수님, 이번 대구 문학기행 때 박태준 현재명 선생님 작곡의 노래
준비 부탁드립니다.
성원과 격려 감사드립니다.
미리 기행 글을 읽고 안 읽음이 당일 문학기행때 느끼는 감동과 의미가 엄청난
차이임을 알기에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어 이제야 다 읽었습니다.
대구에 대해서는 솔직히 지역명만 알았지 아는게 없었습니다.
문화 예술인들의 아지트 였다는것도 한국근대시인 최초의 시비가 대구 달성공원에
있다는것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소리내어 읊조리어 보았습니다
'그러나,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마지막 구절을 읊으면서 일제하의 국민들의 상실감과 허탈감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참으로 맘이 아려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인들은 주로 자신의 절실함과 절박한 상항을 표현한다. 이렇게 창작된 시가 보편성을 지니게 되면 많은 독자들에게는 자기정화를 시켜준다.".....
'자기정화를 시켜주는 문학의 힘'은 즉 '문학기행의 힘'인듯 느껴집니다.
이상화시인의 삶, 그 아픈 설움의 잔상들이 좋은 글속에 알알이 녹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낮과 밤의 되어 칡넝쿨마냥 얽히고 설켜서 가슴으로 다가섭니다.
우리들의 스승이 되어가는, 문학기행이라는 존재!
내일의 아침을 기다립니다. 부족한 제가,
봄을 찾아 떠나는 지금 이시간이 차츰 설레임으로 다가섭니다.
담쟁이덩쿨로 뒤덮였다는 청라언덕에서 모든 현실의 슬픔이 사라질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