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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왕릉여행◈ 스크랩 제21대, 원릉(元陵)-탕평책, 자신은 살았으나 아들을 죽이다. 영조, 정순왕후
길손旅客 추천 0 조회 170 12.10.26 08:3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제21대, 원릉(元陵)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영조(英祖)와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의 쌍릉(雙陵)

원릉(元陵)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길 217-14 (舊, 인창동 2-1) (동구릉東九陵) / 동구릉관리소 031-563-2909

 

영조 이금(英朝 李)

1694년(숙종20년) 9월 13일~1776년(영조52년) 3월 5일

조선21대왕 영조

아버지는 조선19대왕 숙종(肅宗)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숙빈최씨(淑嬪崔氏)입니다.

경종과는 배다른 동생으로 숙종의 서장자로서 경종을 이어 왕이 될 잠재적인 계승권자가 됩니다. 숙종25년(1699년), 연잉군(延?君)에 봉해졌으며, 경종이 즉위하면서 왕세제로 책봉되었는데, 이로 인한 당쟁의 발발로 신임사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화로 인하여 영조의 목숨도 위태로워 지자 대비 인원왕후(仁元王后, 숙종의 계비)를 찾아 세제의 자리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종4년(1724년), 경종의 급서로 조선 제21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영조21년) 11월 10일~1805년(순조5년) 1월 12일

조선21대왕 영조의 계비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오흥부원군 김한구(鰲興府院君 金漢耉), 어머니는 원풍부부인 원씨(原豊府夫人 元氏)의 딸입니다.

영조35년(1759년),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15세의 나이로 66세 영조의 왕비가 됩니다.

어린나이였으나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으며, 순조가 11세에 왕으로 즉위하면서 대리청정을 합니다.

 

영조는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와의 사이에서는 후사가 없으며,

후궁 정빈이씨(靖嬪李氏)와의 사이에서 '효장세자(孝章世子, 훗날 추존왕 진종)'와 화순옹주(和順翁主)를 두었으며, 영빈이씨(映嬪李氏)와는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 훗날 추존왕 장조)'와  화평(和平), 화협(和協), 화완(和緩)옹주를 두엇습니다. 그 외에 귀인조씨(貴人趙氏)가 있으며, 화길(和吉), 화령(和寧)옹주의 생모인 폐 숙의문씨(廢 淑儀文氏)가 있습니다.

 

 

 

원릉의 풍경

정자각과 비각이 보이고, 정자각의 뒤로 영조와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원릉입니다.

 

 

 

조선27대왕중 83세로 가장 장수한 임금이자, 재위기간 52년이라는 가장 긴 왕을 지낸 임금, 영조.

비록, 숙종의 서장자로 태어났으나, 5세에 '연잉군(延?君)'에 책봉되었으며,

경종1년에는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경종이 급서 하면서 즉위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궁녀의 하인'이라는 무수리 출신으로 궁궐 내에서 부리는 계집종을 이르는 말로 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주는등의 우물에서 물을 깃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숙종의 눈에 들어 왕자를 낳게 된것이지요.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왕자를 낳았기에 정1품인 빈(嬪)에 책봉이 되어 '숙빈최씨(淑嬪崔氏)'에 봉해집니다.

그러나, 같은 왕자라 할지라도 5살 위의 배다른 형, 경종과는 차별을 받았으며, 자라는 동안 은근히 멸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경종1년(1721년), 경종이 건강이 좋지 않으며 후사가 없음을 들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다는 노론의 주장에 따라 왕세제로 책봉되었습니다. 경종2년(1722년)에는 왕세제의 신분으로 경종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경종4년(1724년) 경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21대 임금으로 즉위하여 영조25년(1749년)까지 친정하였고, 이때부터 영조38년(1762년)까지는 아들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가 대리청정하였습니다. 이 후 사도세자가 죽고 다시 친정을 하다가 영조51년(1775년)부터는 '왕세손 산(王世孫 ? , 조선22대왕 정조)'이 대리청정하였습니다.

 

영조는 재위 52년동안 많은 치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 중 영조의 3대치적이라하여 당쟁의 폐해를 없애기 위한 '탕평책(蕩平策)'의 실시와 서민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준 '균역법(均役法)', 그리고 장마때마다 범람하던 하천인 '청계천(淸溪川)의 준설'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치적을 남겨 영조와 정조대에 이르는 동안 조선의 문화부흥기를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조52년(1776년) 3월 5일 보령83세로 경희궁에서 승하하였습니다.

능호는 '원릉(元陵)', 묘호는 '영종(英宗)'이라 하였는데, 고종26년(1889년)에 묘호를 개정하여 '영조(英祖)'로 추존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조는,

자신의 원비 정성왕후가 승하할 당시 자신의 아버지인 숙종 왕릉인 '명릉(明陵)' 인근에 정성왕후릉인 '홍릉(弘陵)'을 만들면서 자신 자리를 비워놓았지요. 이는 정성왕후릉의 한쪽이 비워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조가 승하하자 손자인 정조는 영조의 산후지지에 왕릉을 조성하지 않고, 당시 왕대비였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눈치를 보게 된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동구릉에 안장하면서 원릉(元陵)이라 하였고, 훗날 왕대비 정순왕후가 승하하면서 쌍릉으로 조성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릉(元陵)'은 쌍릉으로 조영되었습니다.

봉분은 병풍석은 두르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습니다. 난간석의 동자석주에는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간이 문자로 새겨져 있으며, 두 봉분을 난간석으로 이어 왕릉과 왕비릉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혼유석을 놓고 돠우로 망주석 1쌍을 세워 놓았습니다. 망주석은 기단부에 화려한 무늬로 장식을 하였는데, 좌측 망주석의 세호는 위로 향하고 우측 망주석의 세호는 아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중계공간으로 내려서면 화려하게 장식된 장명등이 중앙에 서며 좌우로 문인석 1쌍과 석마1쌍이 자리하고 있으며,

하계공간에 무인석1쌍과 석마1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석물들의 모습은 비교적 세밀한 조각이 엿 보이는데, 문인서고가 무인석 모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초지 아래로 내려서면 정자각이 중앙에, 그 옆으로 비각이 자리합니다.

원릉비각은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크며, 안쪽에는 세개의 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원릉의 비는 모두 세개로 1776년과 1890년에 건립된 비는 각각 '조선국영종대왕원릉'이라 새겨져 있으며, 처번째비는 정조어필이며, 두번째 비는 고종때 건립된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비는 정순왕후의 비로 '조선국정순왕후부좌'라고 새겨져 원릉이 쌍릉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원릉 정자각

 

 

 

'영조(英祖)'는 6세에 연잉군에 봉해졌습니다.

경종1년(1721년), 경종의 건강악화와 후사가 없다는 점을 들어 노론들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권하였고, 이에 경종은 왕세제로 책봉하게 됩니다. 그런데 노론들의 욕심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아예 경종의 건강을 핑계삼아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에 소론들이 반발하고 나섰으며, 이는 왕위에 대한 역모로 몰려 노론의 4대신과 60여명이 처형되었고, 관련자 170여명이 죽거나 유배에 보내졌습니다. 이른바 '신임사화(辛壬士禍)'입니다. 

당시, 역모사건에는 왕세제 연잉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연잉군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노론들의 대대적인 숙청에 목숨의 위태로운 지경이었지요. 이때 영조는 대비를 찾아가 왕세제의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경종4년(1724년) 경종이 갑자기 급서하였고, 연잉군은 조선21대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붕당체재의 치열한 당파속에 생명의 위협까지 겪었던 영조는 즉위하면서 소론을 배격하기 시작합니다.

소론은 천천히 제거하였고, 그 자리를 노론으로 채워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소론은 강경파인 '준소(峻少)', 온건파인 '완소(緩少)'로 나뉘게 됩니다.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의 강경파 김일경과 목호룡은 '경종독살설'을 주장함과 동시에 영조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들어 처형하였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1674~1740), 우의정 조태억(趙泰億, 1675~1728)등을 유배 보내고 그 자리에 민진원(閔鎭遠, 1664~1736), 정호(鄭澔, 1648~1736)등의 노론들을 앉히게 됩니다. 이로서 재위1년만에 목호룡의 고변사건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노론파들은 앞뒤가 없는 강경파들이지요. 하여 정권의 욕심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집단들인지라 허구헌날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과거 자신들이 당한 화에 대한 소론에 대한 복수에만 여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영조3년(1727년), 삼사(三司)에서는 소론 대신들을 오적(五賊)으로 간주하고 처단할 것을 영조에게 요청하자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며, 삼사의 민진원, 좌의정 홍치중(洪致中, 1667~1732)등을 파면하고 이것에 불만을 가진 우의정 이의현(李宜顯, 1669~1745)등의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의 온건파인 이광좌, 조태억등을 다시 불러  앉히게 되니 이를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 합니다.

이렇듯 노론과 소론의 고른 등용을 두고 노론과 소론을 서로 견제하여 왕권을 안정시키는 '탕평정책(蕩平政策)'을 펼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탕평책은 훗날 자신의 아들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이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던 영조4년(1728년),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며 '이인좌의 난(李麟佐_亂=戊申亂)'이 일어납니다.

소론강경파 김일경과 목호룡이 죽음을 당하고, 노론들이 실각을 하자, 소론 강경파와 남인이 '경종의 죽음에는 영조와 노론이 관련되어 있다.'면서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며, 경종은 영조와 노론들에 의해 억울하게 독살을 당하여 죽었기에 왕위계승이 부당하다."며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장남)의 증손 적파손(嫡派孫)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세우고자 일으킨 반란입니다.

이인좌(李麟佐, ? ~ 1728)는 남인 출신의 서자입니다.

남인들이 숙종의 갑술환국 때 축출되어 관직직으로의 진출은 어려웠던 상황이었지요. 그러던 중 영조의 즉위로 그는 남인들과 영남 지방의 소론들과 접촉하며 반란을 모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조4년(1728년) 3월 15일, 이인좌는 청주를 먼저 습격하여 청주성을 함락하여 스스로를 대원수라 말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병마를 모집합니다. 금군별장 남태징(南泰徵, ? ~ 1728)이 도성안에서 이인좌를 도와 도성안팍으로 공격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미환국으로 재기용 된 소론의 온건파에 의해 정변모의는 노출되어 봉조하 최규서(奉朝賀 崔奎瑞, 1650~1735)의 고변으로 반군의 계획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함에도 이인좌는 소상인들과 화전민들을 포섭하면서 안성으로 진격하자 3월 24일, 도순무군(都巡撫軍) 오명항(吳命恒, 1673~1728)을 보내어 안음과 죽산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난을 진압하게 됩니다. 관군에게 패한 이인좌는 죽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마을사람들의 신고로 관군에 체표되었고, 한양으로 압송 되어 다른 가담자와 함께 능지처참되었습니다.

이로서 짧은기간 이긴 하지만, 진천, 안성, 죽산등의 형세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내란이었습니다. 내란을 진압하는데는 소론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러나, 난의 주동자들 역시도 소론의 급진세력들이었지요. 노론들은 기회를 잡게 된 것이지요.

 

그러던 영조31년(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이 발생합니다.

이는 소론의 윤지(尹志)가 주동이 되어 나주에서 일으킨 괘서사건으로 노론을 축출하기 위하여 먼저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나주의 객사에 붙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하던 중 소론의 윤지가 관련 되었음이 증명 되었고, 거사 이전에 발각이 되어 처형당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소론이 연루되었고, 노론은 기세등등해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 균형이 깨지게 된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가 영조를 대신하여 장헌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때라는 것입니다. 노론들은 소론의 잔당들을 없애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장헌세자는 소론을 동조하지 않았지만, 노론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국 훗날 영조와 장헌세자의 불상사의 씨앗이 되됩니다.

어찌됐던 영조는 이러한 모든 난리가 노론세력으로 이루어진 폐쇄적인 인사정책에 문제가 있음을 두고 노론과 소론의 병용책을 주장하여 탕평책을 추진하는 계기가 됩니다. 

     

 

원릉 능침공간

왼쪽이 영조왕릉이고, 오른쪽이 정순왕후릉입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당파중심의 정책이 아닌, 임금 중심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는 노론의 우세였던 정권의 분위기에 탕평책으로 인하여 소론들이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하였지요. 작은 힘이었으나 남인들과 소론은 틈만 나면 정권을 잡을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지요. 그리고 노론은 이러한 움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작은 소용돌이가 발생하니, 그 소용돌이의 중심은 장헌세자 였습니다.

 

비록 영조의 둘째아들이지만, 영빈이씨의 소생으로 세자도 서자인것입니다.

총명하였으나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세자의 주위로는 모두 적이 된 연유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신임사화에 대하여 영조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던 것도 화근 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노론의 '오흥부원군 김한구(鰲興府院君 金漢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 경기감사 홍계희(洪啓禧, 1703~1771)와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던 윤급(尹汲.1697~1770)은 청지기 나경언(羅景彦, ? ~1762)을 사주하여 장헌세자의 비행 10조목을 형조에 고변하게 됩니다.

이른바 '나경언의 상변(羅景彦_上變)'입니다.

내용인 즉, 격간도동(膈間挑動)의 정신질환에 걸렸으며, 이로인해 난폭한 행동을 일삼고, 광기어린 행동을 서슴치 않았으며, 왕손을 낳은 애첩을 죽였고, 기생과 놀아났으며, 비구니를 궁중을 끌어들여 풍기를 어지럽혔으며, 학문을 게을리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부왕의 허락없이 평양을 몰래 다녔으며, 북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닌 일과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를 죽이려 했던 일등을 고변한 것이지요. 이 모든 고변의 맥락은 그를 정신병자로 몰아감과 동시에 세자가 궁중 내시들과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하였다." 라며 영조는 탄식을 합니다.

소식을 들은 장헌세자는 고변한 나경언과의 면질(面質)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영조를 더욱 노하게 만들었지요. 결국 대리청정을 맡은지 14년만에 역적을 죄명을 받고 자결하라는 명을 받게 됩니다.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로 강등시켰고, 뒤주에 가두도록 명하게 됩니다.

왜? 뒤주일까요? 쉽게 역모 사건이라 하면 사약을 내려 사사하는 것이 관례라 한다면 뒤주에 가둔다는 것은 '아사형(餓死刑)', 즉 굶겨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영조나, 장헌세자 모두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성군이라 칭하던 영조,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말하는 장헌세자, 누군가의 구명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던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오판이었습니다.

오히려 대신들이 영조에게 고하길, "누군가가 뒤주의 뒤로 물을 주고 있는것 같다."라고 말하게 된것이지요. 이번에는 뒤주에 못질을 하여 아예 숨구멍 조차 막아버립니다.

이때가 윤 5월 11일, 한여름은 아니더라도 이미 여름으로 접어 들었던 시간입니다.

그리고 8일, 2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도세자편은 '추존왕 장조(莊祖)'편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 후,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신주 앞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행동은 나라를 위한 어쩔수 없는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탕평책의 실패로 아들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 영조,

훗날, 노론의 견제를 막고자 사도세자의 아들 '산(?, 조선22대왕 정조)'을 왕세손으로 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일찍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고, 후사 없이 죽은 효순현빈을 승통세자빈으로 봉하면서, 세손에게는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라는 유교를 내립니다.

 

 

 

두 봉분을 연결하고 있는 난간석

제일 높은 기둥인 석주는 망주석의 모양을 닮았고, 서주와 석주 사이를 가로지는 회석주인 죽석을 작은 동자석주가 받치고 있습니다. 석주에는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간을 문자로 새겨 놓았으며, 봉분을 연결하는 난간석에는 사슬모양의 무늬를 새겨 놓았습니다.

 

 

 

영조는 태생적인 한계를 뿌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즉, 서자라는 위치의 왕이라는 것이지요.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고, 왕위계승 과정에서도 경종의 죽음과 맞물려 많은 말들을 남겼습니다. 이로 인해 영조는 더욱 왕위 정통성에 매달리게 되는 결과가 되었고, 그의 선택은 탕평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론을 가까이 할수록 자신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꼴이 되었고, 노론을 동조하자니 탕평은 애시당초 물 건너 가는 꼴이 됩니다. 거기에 더하여 탕평파(蕩平波)마저 생겨나면서 정세는 엉망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끝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에 있습니다. 노론의 힘을 키워주게 된 탕평책의 결과로 노론에 둘러쌓인 결과, 즉 자신의 정통성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키워진 노론에 밀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것입니다.

 

그러나, 영조는 각 방면으로 치적을 남긴 임금입니다.

형벌을 개정하여 자체로도 잔인하던 '압슬형(壓膝刑)'을 없애고, 사형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삼심제에 해당하는 '삼복법(三覆法)'을 시행하여 신중을 기하도록 하였고, 포도청에서 죄인에게 고문을 가하는 '전도주뢰형(剪刀周牢刑=주리)'을 없애고, 때려죽이는 형벌인 '난장형(亂杖刑)'도 없앴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억울함을 직접 알릴수 있도록 '신문고(申聞鼓)'를 부활시켰습니다.

제도적인 개혁도 이어집니다.

영조17년(1741년), 인재등용이 특정계급이나 특정당에 의한 당론의 폐습을 없애고자 '이랑통청(吏郞通淸)법'과 '한림회천(翰林回薦)규정'을 폐지하였습니다. 1750년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양민들이 부담하던 군포2필을 1필로 줄이면서 부족한 부분은 '어염세(漁鹽稅)' 및 '은결(隱結)'로 충당하여 서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게 됩니다.

영조36년(1760년)에는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며 홍수때마다 범람하던 청계천을 인부를 사서 노역을 주며 흙을 파내는 대대적인 준설작업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영조의 치적에는 많은 편찬사업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을 이루면서 국가의 교화정책을 중점으로 두어 영조 스스로도 책을 집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영조의 움직임은 훗날, 정조대에 이르러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노론과 소론을 모두 중시하여 중재와 공정한 등용을 위하여 실시한 탕평책의 실시, 그리고 악형의 폐지와 문화건설에 이바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탕평책의 실패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것은 스스로의 정통성 회복에만 너무 치우친 콤플렉스로 영조대의 평가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놓게 됩니다.

 

 

원릉 망주석

화사석과 옥개석을 제외한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에는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15세의 꽃다운 나이에 66세의 영조에게 시집을 온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솔직히 지금으로 말하자면 미성년자 약취에 해당하여 형법 제287조에 의해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게 됩니다...만,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용납이 되었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혼이 유행하던 형태입니다. 임금의 후궁 내지는 왕비 간택령이 내려지면 전국의 처녀들은 시집을 갈 수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참 더러운 법입니다.

 

암튼, 어린나이에 왕비가 된 김씨는 간택할 당시부터 총명함과 영특함을 빛내고 있었습니다.

대궐에서 초간택이 있던 날의 이야기도 전설같이 내려오고 있지요. 

다른 처녀들은 모두 방석에 앉아 있었으나 김씨는 앉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이에 영조가 이유를 묻자, "방석에 아버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라 답했지요. 즉, 방석에는 누구의 자제인지를 알 수 있도록 아비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그 이름위에 앉을 수 없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리고 영조가 묻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물이요, 산이요라고 대답을 할 때 김씨는 "시람의 마음입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다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인가?' 라고 묻자 저마다 아름다운 꽃들의 이름을 대었고, 김씨는 "면화(綿花=목화꽃)"라고 답했지요. 이유를 물으니, "사람들에게 따뜻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하는 이유"라고 답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느고개가 가장 넘기 힘든고개인가?' 라는 질문에 저마다 높은 재의 이름을 대었으나, 김씨는 "보릿고개"라고 답했다 합니다. 이는 김씨의 어린시절 가난한 집에 자랐음을 의미합니다. 서산 출생으로 집의 가난으로 여주의 친?집에 머물렀다가 마을에 전염병이 돌면서 마을을 피해 움막을 짓고 살며 가난과 배고픔을 직접 경험한데서 나온 말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비가 오는 밖으로 나가 궁궐지붕의 기왓골을 세어 보라 하였는데, 다들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때, 김씨는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답니다. 이유인즉, 추녀에서 떨어지는 낙수에 패인 땅을 보고 그 수를 맞추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오아비로 간택이 되고 상궁이 김시의 옷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 달라고 부탁을 하자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며 꾸짖었다고 하지요.

이래저래 정순왕후의 총명함은 실록의 기록에도 전할 정도로 영민한 모습이었으며 당찬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5세의 왕비 정순왕후,

그러나 그녀를 새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그녀보다 10살위였습니다. 

소론의 계열의 사도세자는 새 어머니인 정순왕후와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지요. 그러나, 노론은 정순왕후 뿐이 아닙니다. 영조도 그러하거니와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문씨(淑懿文氏)'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한 숙의와 사도세자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영조에게 허구헌날 사도세자의 모함을 하였고 영조는 세자에게 호통을 쳐서 내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긴시간이 지나면서 사도세자는 영조의 꾸중을 듣고 나서 어느날은 계단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가 하면 어느날은 우물속으로 뛰어들려고도 합니다. 

그러자 숙의문씨와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는 노론의 강경파와 함께 '나경언의 상소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게 됩니다. 이 때 정순왕후의 나이 16세였습니다.

   

 

 

 

 

영조 말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金龜柱, 1740~1786)와 경주김씨(慶州金氏)가문과 혜경궁홍씨의 아버지 홍봉한(洪鳳漢, 1713~1778)과 풍산홍씨(豊山洪氏)가문의 대립이 생깁니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게 됩니다.

즉, 사도세자의 편은 없었지요. 세자빈의 아버지 홍봉한 조차도 사위인 사도세자를 폐하고 그의 아들 이산(?)을 세손으로 세우고 싶어 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에는 영조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숙의문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세손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배후세력들로 세손이 장성하면서 앞날이 불안하였던 것이지요. 

이렇게 궁궐은 외척끼리의 싸움으로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며 서로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었습니다. 

 

그러던 영조52년(1776년), 보령83세로 천수를 누리던 영조가 승하합니다.

이로서 세손 이산이 즉위를 하니 조선22대왕 정조입니다.

정조는 즉위 직후, 생부 사조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던 숙의문씨를 폐서인시키고 그녀의 오빠 문성국(文聖國, ? ~1776)과 외척 정후겸(鄭厚謙, 1749~1776), 혜경궁 홍씨의 작은아버지 홍인한(洪麟漢, 1722~1766)등을 처형하게 됩니다. 이들을 탄핵하는데에는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도 있었지요. 정조는 먼저 그들을 처형하였고, 김귀주 역시도 처형하려 하였으나 정순왕후가 보호하자 왕대비의 신분인 그녀를 보아 유배하여 위리안치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과거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당시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었을때, 정순왕후의 보살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보은 이겠지요. 그래서 정조와 정순왕후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조의 즉위 이후에는 노론의 벽파가 몰락하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실제 정조에 대한 암살 시도가 발생할때마다 정순왕후의 자리는 가시방석이었겠지요.

정조24년(1800년) 정조의 지병이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그해 6월, 정조가 승하하게 되는데, 이때 정순왕후가 정조의 임종을 지켰다는 것으로 인해 정조의 독살설이 제기가 됩니다.

 

암튼, 그리하여 순조가 제23대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왕대비인 순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어린 순조의 뒤에서 조선을 자신의 발 아래 두고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정조대에 눌려 지낸 세월이 억울해서일까요? 정순대비는 순조 즉위 한달만에 스스로 여군임을 자처하며 자신이 통솔을 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곧 역모로 간주하여 다스리겠다는 선포를 하기도 합니다. 

순조1년(1801년) 1월, 정순대비는 '사학(邪學=천주교)'를 금한다는 하교를 내리게 됩니다. 

제일 먼저 정조대에 등용된 남인들을 축출하고 노론들을 등용하기 위하여 정조대에 유연하게 대처하던 천주교를 구실로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천주교를 역률로 다스리고 '오가작통법(伍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엄벌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이른바 '신유교난(辛酉敎難)', '신유옥사(辛酉獄邪)'라고 불리는 '신유박해(辛酉迫害)'입니다.

이로서 남인 대신들이 처형이 되었고, 주문모(周文謨)신부등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학살이 됩니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신자 100여명이 처형 되었고, 400여명에게 유배를 명합니다. 정초부터 시작된 피바람은 12월이 되서야 '척사윤음(斥邪倫音)'을 반포하며 끝이나게 됩니다.

아울러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인(恩彦君 ?, 1755~1801)'을 그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주문모신부에게서 영세를 받았다는 이유로 처형하였고,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洪樂任, 1741~1801)을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처형하였고, 자신의 6촌오빠 김관주(金觀柱, 1743~1806)등 정조대에 물러났던 노론 강경파들을 대거 기용하게 됩니다.

그러던 순조2년(1802년),

정순왕후는 정조의 유교에 따라서 자신과 대립되던 소론시파이자 조선 후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기틀을 만든 인물,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봉하게 됩니다. 이로하여 김조순은 영원부원군(永原府院君)에 봉해집니다. 이듬해 순조3년(1803년) 3월과 4월, 평양과 함흥에 큰 불이 나고, 12월에는 창덕궁에 불이나 선정전과 인정전이 불에 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로인해 흉흉했던 민심은 급기야 왕대비의 수렴청정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었고, 왕대비는 "본인의 뜻은 새해를 들어 거두려 하였으나, 근래 큰 재난이 있었으니, 지금의 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안될자리에 있기 때문이다."라며 스스로 수렴청정을 거둡니다. 그러면서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었는데, 이 때를 노린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부원군 김조순에 의해 벽파관료들이 대대적으로 숙청이 되고 왕대비 자신의 입지도 점점 작아지게 됩니다. 

이듬해 6월, 정순대비는 다시 수렴청정을 하겠다고 하였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순조5년(1805년) 1월 12일, 경복궁 경복전에서 춘추 61세로 승하합니다.

 

어린나이에 당찬 왕비로서의 체통을 지켜 나가던 정순왕후,

그러나 그녀 역시 당쟁속에서 벗어 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숨죽이며 지내던 영조와 정조대를 지나 순조대에 이르면서 여군주로서 권력의 중심에 스스로 들어 섭니다. 이로서 노론벽파인 자신과 대립되는 남인과 소론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천주교 탄압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습니다. 

수렴청정으로 인한 여군주의 권세, 결국 그녀 스스로도 당파의 중심에 들게 된것이지요. 이로서 신유박해는 훗날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이어지는 등 천주교탄압에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됩니다. 

 

       

 

 

 

원릉의 석물

문인석과 무인석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INFO...

원릉元陵 / 제향일 매년 (양력) 4월 22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길 217-14 (舊,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1) / 동구릉 관리소 031-563-2909, 031-564-2909

연혁 1776년(정조즉위년) 영조 안장, 원릉 조성

       1805년(순조5년) 정순왕후 안장 쌍릉 조성

관람시간 하절기 06:00~18:30, 동절기 06:30~16:30

관람요금 대인 1,000원, 소인 500원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주차요금 일 2,000원

가는길 지하철 : 중앙선 구리역 > 마을버스 2, 6번> 동구릉

버 스 : 88, 202번 청량리 > 상봉역 > 구리 > 동구릉

1, 1-2, 92 강변역 > 구리 > 동구릉

 

 

 

 

by 박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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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0.26 20:09

    첫댓글 요즘도 탕평책을 쓰라고 야단이지요 항상 그러나 정치란 그리쉽지않은듯 합니다
    왜높은분이 되면 아들과 형제분들이 시끄러운일에 연관이되고 조사도 하고 야단법석이 일어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좋은글 좋은사진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12.10.27 21:48

    훌룡한 사진에 충실한 역사공부까지~~
    잘보고갑니다... 잘지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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