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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이승하 시인의 블로그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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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 2023. 8. 30. 6:49
‘『문학나무』가 주목한 이 계절의 시집’에 『산산수수화화초초』를 다룬 적이 있었다. 이기철 시인은 1943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영남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3년 경북대학교 주최 전국대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에서 시 「여백시초」가 당선되면서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김춘수 시인과 만났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1974년 첫 시집 『낱말추적』을 시작으로 『청산행』 『전쟁과 평화』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흰 꽃 만지는 시간』 『산산수수화화초초』『영원 아래서 잠시』 등의 시집을 펴냈으며, 소설집으로 『땅 위의 날들』, 에세이집으로 『손수건에 싼 편지』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영국문학의 숲을 거닐다』 등을 펴냈다.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청도 낙산에서 ‘시 가꾸는 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대구문학상, 후광문학상, 김수영문학상, 금복문화예술상, 도천문학상, 시와시학상, 최계락문학상, 목월상 등을 수상했다.
이기철 시인
대표시 3편을 먼저 읽어본다.
산산수수화화초초
시인 卍海에게는 천의 산 백의 물 만의 꽃 백의 풀이 모두 우거다반이었다
억새 띠풀은 너무 여려 호랑이발톱풀이나 진정수리 부리쯤은 되어야 양지의 토분土盆에 담았다
기룬 것은 다 님이이게 천초만엽이 마음에 감겨 어찌 긴힛ᄃᆞᆫ 그츠리잇가
갈농사 서 말 소출로도 겨울을 난 것은 소작이 손이 산산수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산이 피운 화훼 내[川]가 키운 수초를 베옷 안에 길렀으니 가실佳實의 됫수가 문제랴
백담사와 심우장 사이 설악과 감악 사이 천의 산을 밟고 백의 내를 건넜으니 바다의 겹도 일만이어서 만해萬海다.
나는 지난 여름 혹서에 그의 만년층괴경 같은 산가山家 침묵의 뚜껑을 열고 염열 다섯 섬과 이별 한 말을 곱장리로 꾸어왔다
그의 손이 만진 햇빛은 모두 금, 그 사랑법을 훈차訓借하려다 그의 경해와 묵주의 음역을 백년 뒤에 돌려드리겠다고 묵서에 인주를 찍고 빌려왔다
산은 푸르고 물은 맑았다 꽃은 붉고 풀은 초록이었다 발걸음에 징소리가 났다
* 산산수수화화초초山山水水花花草草; 『한용운전집』 2권, 신구문화사, 불교 논설 7 ‘見性’에 나오는 말.
** 「정석가」 6연 3행,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별의 노숙
별은 침묵의 대척에 있다 사치를 본성으로 하나 성층에는 천차와 만별이 있다
유성 사이엔 보폭이 큰 성좌가 있어 육안으로는 걸음새를 파악할 수 없다
그의 속성이 보편이 아니라 특수이므로 반짝이다가도 이내 담천曇天에 몸을 숨긴다
그의 행적을 찾으려면 성층권에 들어 그 성적星籍을 펼쳐야 한다 거기엔 유독 별자리 여행가들의 각고의 탐색이 필요하다
그는 본래 유구의 생리를 지녔으므로 쉬이 그 자태를 드러내지 않는다
성급한 작명가들이 미자르니 카시오페아니 오리온이니 하는 기명奇名을 달아두었으나 별의 노숙에는 그런 호명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별은 다만 별자리에만 기거하고 무색무취의 어둠을 운반하는 데 생을 바친다
그가 한 번 몸을 드러내는 데는 백만 년이 걸려 그의 발본拔本을 건진 사람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춘향묘 앞에서
초가망석 불러도 절세가인은 오지 않고 중모리 장단 절창만 남아 있다 지리산 남쪽 자락 저 흰 돌 너럭바위, 뛰어내리고 소쿠라지는 수정렴 맑은 물가 단정학 같은 정자 한 채
전라명창 권삼득權三得이 콩 서 말을 지고 와 이 심산유곡 폭포수 아래서 소리를 배웠다는 용소龍沼, 콩 한 알에 소리 한 마당 콩 서 말을 다 던지고 득음했다는 명경지수
고고천변 일륜홍을 눈 비벼 맞으면 정령치 달궁계곡 노고단 세석평전, 저 큰 손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 솔그늘 고갯마루, 버들 푸르고 철쭉 붉으니 여기 주저앉아 수유를 천 년으로 맞은들 무슨 한 있으랴 아직도 골을 씻는 물소리 귀를 찢는데 가인도 명창도 가고 절창만 남은 진경산수, 어느 화옹畵翁도 베껴 못 그릴 돌올 청류벽
* 초가망석;판소리 사설, 혼을 부르는 노래
** 고고천변 일륜홍皐皐天邊 一輪紅;동틀 무렵 하늘가의 붉은 해. 「고고천변」은 판소리 사설 제목.
온고이지신의 정신으로 고색창연한 시를
이승하
이기철 시인은 시집 『산산수수화화초초』를 내면서 머리말에 “시를 통해 만난 선대인들과의 천 년 대화를 세상에 내어놓는 마음 두렵고 설렌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천 년 저쪽의 선대인들과 대화를 했다니 엄청난 시공간이다. 이 시집에 쓰인 용어에 대한 설명이 권말부록으로 16쪽에 걸쳐 나와 있고 일종의 도움말인 시인의 편지와 사색록이 13쪽에 걸쳐 전개된다. 그러니까 시인은 29쪽이나 되는 권말부록을 먼저 읽은 뒤에 시를 읽어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 29쪽에 나와 있을까? 용어 설명 중 한 개만 예를 든다.
대엽大葉; 민속악의 형식;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 혹은 중엽, 소엽, 부엽이 있다. 「정과정곡」 「정읍사」 등이 이 형식에 맞춰 부른 노래.
시인은 악곡, 악기, 판소리, 서전書典, 복식, 고시古詩, 돌, 종이, 고려의 노래 등에 대해 미리 설명을 해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번 시집의 소재가 된 것은 향가, 고려의 속요와 별곡, 국악, 판소리 등을 포함한 우리의 전통문화와 문학, 음악과 춤 등이다. 이번에 이 시집을 읽지 않았더라면 ‘보허자步虛子’라는 것이 당송 대에 들어온 고려의 악곡인 ‘낙양춘洛陽春’과 함께 송나라에서 들어온 고려의 악곡임을 죽을 때까지 몰랐으리라. 그야말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시로써 실천한 시집이 『산산수수화화초초』이다. 각주의 수만 해도 100개가 넘는다. 그러니 시인이 읽은 책의 수는 도대체 몇 권이었을까. 이 땅에서 태어나 예술혼을 불태우다 죽은 수많은 예인들을 시인은 만났던 것이다. 그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눴고 그들의 예술작품을 씨앗으로 받아 심고 가꾸며 60편의 시를 썼다.
일단 시집의 제목이 된 시부터 보자. 각주에 나와 있는데, 제목은 『한용운전집』 제2권에 나와 있는 불교논설 「見性」에 나오는 말이다. 일종의 언어도단이다. 산산山山, 수수水水, 화화花花, 초초草草는 누구든지 볼 수 있는 것인즉, 일체중생이 다 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견성이란 헛된 생각과 정신을 홀려 생각을 흐리게 하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자기 본래의 천성을 깨우쳐 안다는 뜻으로, 불교의 공부 방법이요 공부의 목적이다. 견성해야지 성불하는 것이다. 자기가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용운이 이 말을 한 것은 “기룬 것은 다 님”이라는, 『님의 침묵』의 머리말에서 했던 말과 일맥상통한다. “긴힛ᄃᆞᆫ 그츠리잇가”는 「정석가」 제6연 제3행에 나오는 말로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라는 뜻이다. 시인은 한용운으로부터 한두 가지를 배운 것이 아닌데 그중 가장 큰 것이 자연의 순리다. 자연은 화를 낼 때는 크게 내지만 대체로 평화주의자다. 투쟁보다는 평화를 꿈꾼다. 이것을 알고 있던 사람이 한용운이었다. “산은 푸르고 물은 맑았다”는 선문답 같은 말의 뜻은 간단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욕심을 내면 괴로움이 커지고 마음을 비우면 반대로 좋은 일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백담사와 심우장을 오간 만해는 자연에 순응하되 사회의 부조리에는 크게 발발하였다. 『님의 침묵』은 모두 다 사랑가인데 부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으로 받아들여도 되지만 이성에 대한 염염한 사랑의 노래로 이해해도 틀린 해석이 아니다. 「정석가」도 큰 주제는 임에 대한 영원무궁한 사랑이다. 「정석가」에서 『님의 침묵』으로, 또 『산산수수화화초초』로 이어지는 긴 사랑의 흐름에 고개를 끄덕인다. 일체중생이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면 견성하리니.
자, 이제 이제현의 『여요전주麗謠箋注』에 나오는 「거사련居士戀」이 이기철의 시에서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울타리 옆 꽃가지에 까치 우짖네 앵두나무 가시에 상거미도 줄을 치네 돌아오는 누이 님 귓가에 들리는 신발소리 경경고침상耿耿孤枕上에 잠 아니오네
연모한다는 건 그의 눈 속에 들어가는 것 그의 눈 속에 집을 짓는 것 그 처마 아래서 끼니마다 숟가락 젓가락을 부딪치는 것 바스락거리는 것 눈썹에 물방울로 매달리는 것
—나뭇잎 부딪는 소릴 들으면 그대 웃자락 스치는 소리 들리나니, 옷소매 끌어당겨 흰 끝동에 때 묻히고 싶나니 베겟모를 베고 누운 그대 귓밥을 파고 싶나니—
연모한다는 건 기쁨 반 근 슬픔 한 근 참빗으로 빗어주는 것 늦가을 새草처럼 희어지는 것 서리 끝에 잔가지 속절없이 부러지는 것 누군들에게 거사련居士戀 진한 연모 한 돈쭝 없으랴 연모한다는 건 문풍지 틈으로 얼굴 맞대고 세상을 내다보는 것 눈물이 강물이 되기 전에 열 장의 타월로 물기를 닦아주는 것
떠도는 자의 아내는 오늘밤도 달빛에 머리 빗고 노래하네 저고릴 벗으면 흰 살결 위로 꽃이파리 화르르 쏟아지네 도셔오소서 도셔오소서 서창을 열러ᄒᆞ면 앵화 발ᄒᆞ나나
―「떠도는 자의 사랑노래」 전문
각주에 설명이 되어 있는데, 「거사련」은 부역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노래를 지어 부르니 그 노래가 애달파 까치와 거미가 함께 노래 부르며 장단을 맞추었고, 그날 밤에 남편이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이 옛날 노래는 기다리는 아내의 노래다. 그런데 이기철 시인은 제목을 ‘떠도는 자의 사랑노래’로 지었다.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하며 떠도는 자가 부르는 노래인데 제1연의 “돌아오는 우리 님 귓가에 들리는 신발소리”는 돌아오는 우리 님의 귓가에 들리는, 나의 신발소리인가? “경경고침상에 잠 아니오네”는 아무래도 기다리는 자의 노래다. 기다리는 자가 훨씬 더 답답한 법이다. “떠도는 자의 아내는 오늘밤도 달빛에 머리 빗고 노래”한다고 한다. 이 외로움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 마지막 부분의 “도셔오소서 도셔오소서”다. 이는 「가시리」의 “가시ᄂᆞᆫ ᄃᆞᆺ 도셔오소서 나ᄂᆞᆫ”에서 가져온 것이고 “서창을 열러ᄒᆞ면 앵화 발ᄒᆞ나나”는 「만전춘 별사」의 제2연 3, 4행의 내용이다. 전자는 이별의 쓰라림을 노래한 것이고 후자는 남녀 간의 열렬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시인은 고려인들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도대체 이성을 연모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비유해서 노래해야 하나 고민했던 것이다. 연모한다는 것은 “그의 눈 속에 들어가는 것 그의 눈 속에 집을 짓는 것”이고 “기쁨 반 근 슬픔 한 근”이고 “서리 끝에 잔가지 속절없이 부러지는 것”이라 한다. 또한 “문풍지 틈으로 얼굴 맞대고 세상을 내다보는 것”이고 “눈물이 강물이 되기 전에 열 장의 타월로 물기를 닦아주는 것”이라 한다. 천 년 전의 사랑이나 오늘날의 사랑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 시의 화자는 더욱 고품격의, 고차원의 사랑을 한다고 해야 할까. 남녀상열지사는 예나 지금이나 문학의 중요한 소재고 주제였다. 「아박조牙拍調 사랑노래」 「나인羅人의 사랑법」 「파경破鏡」 등 사랑과 정념에 대한 시가 있는데 이런 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향가 중 하나인 「제망매가」를 재해석한 「의훈차 제망매가」 같은 작품을 보면 고전의 현대적 해석이 이번 시집에서 행한 여러 가지 작업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월명사의 「제망매가」는 누이동생[妹]을 잃고 쓴 것이지만 이 시는 학창시절의 친구를 몇 년 전에 잃고 쓴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생사를 누가 훈독할 수 있느냐 너의 길은 다만 두 물이 하나 된 합천合川, 그곳의 칠 부 능선 은행나무 아래, 나 예 미처 여기에서 길이 목놓는다 하랴 차탄에는 처소도 방위도 없어 가지를 좋아하던 너는 미타찰에 있고 쥘리앙 소렐을 좋아하던 나는 억새꽃 이우는 낙산에 있다 삶과 죽음의 길은 음차로는 다할 수 없는 무량, 살아서 울며 너는 양자 죽어서 웃음 머금은 미간 어찌 다르랴 솔방죽길 삼십 마정 이에 저에 나서 자라고 늙고 떠남이 다만 앞뒤 차례일 뿐, 너의 불사의방엔 물의 몸 다가갈 수 없어 잠자리 날개 홑옷 날리며 실음蟋音 빌린 향비파 한 금도 없이 사뇌가 한 줄 흉리에 담아 갈맷빛 하늘에 띄우느니
―「의훈차 제망매가」 전문
의훈차義訓借란 한자의 뜻을 에둘러 빌리는 표기법이라고 한다. 친구 윤춘묵은 고미가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소설 『인간의 조건』의 주인공 ‘가지梶’를 좋아했고 화자는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앙 소렐을 좋아했다고 한다. 시에 나오는 불사의방不思議方은 부안 변산에 있는 절 이름인데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너는 미타찰에 있고”나 “이제 저에 나서 자라고 늙고 떠남이 다만 앞뒤 차례일 뿐”이라는 구절은 「제망매가」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시는 패러디나 차용이 아니라 완전히 창작이다. 하지만 각주에 친구의 실명도 나오고 책 이야기를 했던 일화도 나오고 애끓는 마음도 표현한다. 「제망매가」를 썼던 월명사의 심정으로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이런 시를 씀으로써 시인은 ‘고인과의 대화’를 해보는 것이다. 대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놀기도 하고 귀기울여 말을 듣기도 하고 같이 여행길에 동행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고풍스런 어조와 고색창연한 정서를 지금의 독자들이 과연 알아들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시인과 비슷한 연배일지라도 우리네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지식이 아니라)가 없다면 이번 시집의 시편은 난해한 작품들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소회 하나. 지금의 교육제도 하에서는 한문은 물론이지만 한자 공부도 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이 山과 江은 읽을 줄 알지만 時와 詩는 구분할 줄 모른다. ‘祭亡妹歌’는 아무도 읽을 줄 모른다. 大韓民國을 한자로 쓸 줄 아는 대학생은 10%도 되지 않는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을 모르면 우리가 손해인데 중국어와 일본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아는 것이 필수. 중ㆍ고등학교에서 한자를 안 가르친 지 30년이 넘었다.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번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시는 키르기스스탄의 지명이 나오는 시다.
추가령구조곡을 무사히 넘은 봄이 이식쿨 호에 닿을 때까진 한랭 삼동이 소요됩니다
퍼블빛 금강초롱꽃을 만나기 위해서는 마식령을 맨발로 넘어야 합니다
바람이 론도로 불고 장수만리화가 황금빛 속옷을 흔들며 다가오기까진 몇 CC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나른 강에 봄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아블가습 씨와 아르실란 씨의 아궁이에 모닥불이 꺼지면 화양연화 같은 아지랑이 군단이 피어오를 것입니다
처녀치마꽃이 제 몸에 보라피톨을 칠하면 우리 생애 마지막 봄이 타쉬바샷 낮은 굴뚝에 도착하리라 믿습니다
그때 나는 몇 안 되는 가솔을 이끌고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낭림산 어느 객사에서 졸본아타로 가는 차편을 묻겠습니다
아직도 삼동을 넘으려면 모피 양발 두 켤레로 냉혹을 견뎌야 합니다
봄이 와서, 낯익은 봄이 와서 청천가람가의 버드나무 잎을 새롭힐 때
나는 0.5도 이하의 시력으로 회령남녘 아침놀을 열 필 숙고사처럼 바라보겠습니다
내 늑골 아래 잠든 북北이여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물소리 잘게 부수며 몸 성하기를!
―「이식쿨 호는 북로」 전문
이 시에 나오는 아불가습과 아르슬란은 인명이고 타쉬바샷과 졸본아타는 키르기스스탄의 지명이다. 화자는 어느 지점에서 북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른 강을 지나서 가면 이식쿨 호에 다다르게 되는 것인가. 숙고사熟庫紗란 삶아 익힌 명주실로 짠 비단이다. 시인 본인이야 여행을 한 것이겠지만 그 어느 때 식솔을 이끌고 엄동설한에 북으로 간 가족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추우면 남으로 가야 하는데 왜 북로를 택해서 갔을까.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추운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시인은 0.5도 이하의 시력으로 청천가람가의 아침놀을 열 필 숙고사처럼 바라보겠다니, 멋이 있다. 이기철의 60편 시는 이처럼 고졸한 멋이 있다. 시인이 옛것을 찾아보고, 옛 글의 체를 가져오고, 옛 사람의 자취를 더듬었기에 나오는 멋이 아니다. 시어와 시상에 깃들인 먹을 나는 품격이라고 칭하고 싶다. 말도 안 되는 말의 나열이 시랍시고 발표되는 사문난적의 시대에, 이기철 시인이 이룩한 고졸한 품격은 상찬되어야 한다. 이백의 시제를 빌린 「월하독작」도 좋지만 「서리자 명주필」 「죽지만독竹枝萬讀」 「파계운집」 「좌도서원에서 푸른 시간을 만나다」 「그리운 툰드라」 「가릉강 삼백리 촉도 산천」 「가항여항고샅골목」 「열치매 낟호얀 달」 「별의 노숙」 「춘향묘 앞에서」 「꽃의 탄트라」 등 금방 다 읽기가 아까운 시편이 이번 시집에는 즐비하다. 큰 상을 타시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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