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이 보기에는 시조만큼‘조선스러움’을 잘 나타내는 문학 장르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시조를 부활시키고 보급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 문학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며,
▣망각되어 가는 조선아(朝鮮我)를 바로 찾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최남선은 시조 부흥에 관한 논의가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의한 논의가 아님을 보이기 위해
▣「시조태반으로의 조선 민성(民性)과 민속」에서
▣시조와 우리 민족성과의 연계에 관한 이론을 전개시킨다.
그는 조선인은 회화적이기보다는 음악적이고,
속으로 마음을 파고 들어가는 종인이 아니라
겉으로 마음을 소리 지르는 종인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조선인의 생활 중 곡조에 의존하는 의사발표의 방법은
극히 오랜 옛날부터 존재하였던 것이며,
조선인이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민족임을 더 거론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 되고,
따라서 조선인의 시가는 의미 중심이 아니라
곡조 중심의 발전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30년대 중반 , 1940년 시대배경이 답인 거 같은 데요..
왜 공부할게 일케 많을 까요.
제 임의로 생각난대로 쓴게 많아 미리 이해바랍니다. 오타도 있고
개념설명이 잘못된 것도 있고 그래도 사전을 찾느라고 찾았는데
제가 워낙 속독이라 덜렁거립니다. 그래서 내생각대로 적은 건 용어가 확실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참고문헌 찾아 확인하기엔 그닥 중요치 않아서 그냥 썼습니다 그러니 틀려도 이해~해 주시길 바라면서 머리 식히기로 읽으시길... 답답한 머리 식히기엔 딱인 거 같아서 ...ㅋ~
김용준이 왜 응물상형(응물사형(應物寫形);사생에 충실):한 물건을 보면서 그대로 모사하기
화도론과 화격을 강조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 왜 이태준, 이병기가 추사 김정희의 서법과 조선후기 문인화, 골동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정지용이 동양의 달관과 안분지족의 삶에 대해 후기시에서 강조한 이유 등에 대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화도론
그림을 공부함에 있어 법식을 무시 하는 태도는 좋지 않고 일생동안 법식에만 묶여 있는 것은 더욱 좋지 않다.
처음 법식을 엄격히 지키다가 차츰 법식을 떠나 자유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니 법식을 지키는 궁극에 이르면 비로소 완전히 법식을 벗어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일제가 통일신라시대 문화를 중시했던 것과의 차별성이 무엇인지? 찾을 수가 없네요.
(이를테면, 김용준이 왜 응물상형의 화도론과 화격을 강조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 왜 이태준, 이병기가 추사 김정희의 서법과 조선후기 문인화, 골동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정지용이 동양의 달관과 안분지족의 삶에 대해 후기시에서 강조한 이유 등에 대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외에 이들 문장파 예술가들이 조선조 고소설들인 <한중록>, <호질>, <춘향전> 등의 '고전의 발굴과 복원작업'에 몰두한 이유에 대해서도 참고문헌을 세심하게 읽어서 사전에 답안지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육법; (六法)
1,기운생동(氣韻生動);멋(자연스럽고 생동감이 있게 그려라)
2,골법용필(骨法用筆);필력
3,응물사형(應物寫形);사생에 충실
4,수류부채(隨類傅彩)맞는 채색
5,경영위치(經營位置)구도(그림의 구성을 말하며 다른말로 풀어 말하면 디자인 이다)
6,전모이사(傳模移寫);모방과 창작
이 육법은 화가 라면 꼭 알고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가끔 방송등에서 기운생동에 대하여 설명이 나오는데 기운이 생동하고...결국, 이 말의 뜻은 멋 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면 갑자기 미술론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부담감이 생깁니다.
김용준이라는 화가는 왜 화도론과 화격을 강조했는지... ?
김정희의 서법은 ?
조선 후기 문인화, 골동품,
정지용이 동양의 달관과 안분지족의 삶..
골동품의 대표라고 생각하면 도자기가 먼저 떠오르죠.
공예에서는 일명 비색秕色이라고 일컬어지는 청자가 당 시대 이후로 가장 많이 산출되었다. 당시 이 청자는 궁중에서만 비밀리에 사용하는 색기色器라고 하여 비색秕色이란 이름이 나온 것이다
청자 라함은 고려의 대표적인 자기입니다.
☐화도론
공재 윤두서의 화도론: 공재의 그림에 대한 견문은 당대의 대수장가이자 뛰어난 감식안이었던 담헌 이하곤과 교류를 통해 더욱 넓힐 수 있었고 그리하여 역대 화가들과 중국의 명화에 대해 자신만의 확실한 소견이 있었는데 공재의 회화관은 자신이 쓴 <기졸>에 유명한 평론인 (화단에 이 실려있어 이를 통해 여실히 엿볼 수 있음
조선 초의 현동자 안견과 인재 강희안에서부터 공재와 동시대 화가인 창곡 홍득구에 이르기까지 20명의 화가에 대한 화평으로 되었는 이 글에서 공재는 선비 취향의 그림에는 대단히 높은 평을 내리면서도 화원의 그림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한 편인데 이는 결코 신분적 관점이 아니라 남종문인화를 추구했던 공재 회화관의 반영 이었으며 그는 실학적 입장에서 사실성을 추구했지만 그것이 화원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겉모습만 닮게 그리는 형사에 빠져서는 안되며 문인화의 사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음.
공재는 먼저 화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나음대로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한편 이어서 자기 그림에 대해 스스로 평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음
굳셈과 유연함 움직임과 고요함 강함과 약함 완만함과 급합 단단함과 활발함 각진 모양과 둥근 모양 원만함과 돌출 통함과 막힘 통통함과 홀쭉함 빠름과 느림 가벼움과 무거움 긴 것과 짧은 것 거대함과 세세함 등은 필법이다.
음과 양 고요와 격정 짙고 옅음 멀고 가까움 높이와 깊이 앞과 뒤 물들임과 깨트림은 묵법이다.
필법의 공교함과 묵법의 정묘함이 묘하게 어우러져서 신격에 이르고 만물에 물상을 무여함은 그림의 도이다 그러므로 그림에는 화도가 있고 화학(畵學)이 있고 화식이 있고 화공(畵工)이 있고 화재(畵材)가 있다.
(멀 원, 가까울 근: 쉽게 말하면 멀고 가까운 것을 화지에 나타내는 것으로 서양에선 발달했지만 동양에선 발달하지 않고 대략 원경법으로 설명됩니다. 가까운 건 심원법, 중간은 평원법, 먼 것은 고원법으로 표현되는데 대략 피카소의 입체적인 면을 생각하면 좀 쉬울 겁니다. 피카소는 아무데서나 본대로 다 섞어 놓은 것이구요. 동양의 풍경화(산수화)는 위에서 내려다 보고 그리고 밑에서 올려다 보고 그리고 정선의 (금강산전도)처럼 다 한꺼번에 그린정도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
그 원근법이 북학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구요. 선비들은 아주 놀랐습니다.
더 놀란 건 옵스큘라라는 카메라 전신입니다. 이것이 확대도 되고 축소도 되는데다 쉽게 환등기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네요. 카메라가 들어와서 원근법도 알게 되고 거기다가 사생법이 발달하게 되고 공재 윤두서의 얼이 깃든 자화상이 태어나게 된거지요.
말기에는 진경산수와 풍속화의 전통이 쇠퇴하고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남종문인화가 더욱 큰 세력을 굳혔으며, 이와 더불어 윤제홍(尹濟弘)·김수철(金秀哲)을 비롯한 개성이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고도 이색적인 화풍을 창조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있어 남종화법의 토착화는 한국 근대 및 현대의 수묵화가 남종화 일변도의 조류를 형성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한국화의 전통은 최말기(最末期)의 장승업(張承業)을 고비로 퇴조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일제시대의 전통문화 말살정책과 서양화의 대두 등으로 한국화는 더욱 위축된 길을 걷게 되었으나, 서화협회를 조직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던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을 비롯한 근대 초기의 작가들과 그들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한 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변관식(卞寬植)·김은호(金殷鎬) 등에 의해 현대 화단에까지 맥락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화는 전통성의 올바른 회복과 이를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야 할 과제와 함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16세기에 네덜란드는 무역을 많이 하는 강대국이었지요. 그래서 성화에만 있던 풍경화가 시민들에게 보급이 됩니다. 시민들이 잘사는 시대여서 교회나 성당에만 있던 성화에서 풍경화가 분리가 되어 시민들도 그림을 갖는 시대가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이 옵스큘라라는 사진기를 통해 그려지게 된 거지요. 여담인데 베르메르의 그림은 크기가 작고 아름다워서 미술관에 걸리기가 무섭게 도난을 많이 당하는 작품입니다. 베르메르는 작품도 몇 점 남아 있지 않은데요....ㅋㅋ
왜 난데없이 네덜란드 이야기냐구요. 이 네덜란드가 일본과 특별한 관계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랍니다. 명치유신이후 네덜란드와 일본은 문호개방을 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많은 것을 수출했지만(뺏겼는지 모르지만?) 그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판화와 도자기입니다. 앞에 언급했지만 도자기는 유럽에선 볼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때 유럽은 아주 낙후한 나라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차이니스 본이라는 물건이 탄생합니다. 중국 뼈? ㅋㅋ 좋은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고령토를 구할 수 없었던 영국은 소뼈를 갈아서 도자기를 만듭니다... 네덜란드는 지금도 도자기를 아주 예술적으로 만듭니다. 그 영향이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였지요. 도자기하고 골동품하고 연결을 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그 도자기는 일본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걸까요? 슬픈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일본은 우리나라 도공들을 끌고(?) 모시고 갑니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도공은 대단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 대단한 도공님들이 오늘의 일본의 도자기를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도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더하자면 항해의 역사까지 곁들여야 되는데 고대에는 항해술이 발달했습니다(?) 금시초문이라구요...ㅋ 아마도...항해술이 발달한 이유야 많겠지만 그 결정적인 이유는 토기의 발달입니다. 이웃 섬에 물건을 팔러 가야 되는데 물건이 물에 다 젖는다면? 토기에 실어서 가면 안 젖겠지요. 그리고 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배의 구조상 배밑이 무거워야 풍랑에 덜 시달립니다. 균형을 잡기가 아주 좋지요. 그래서 토기가 발달하고 다시 네덜란드는 오스만 제국 땜에(육로의 실크로드가 막혀서) 바다 실크로드를 개척하죠...물론 다른 나라들도 많이 스페인이라든가... 모... 아시는 이야기라 생략하고.....
토기(테라코타)는 800도,도기(세면대)는 1200, 자기는 1200~1600도입니다.
도자기는 표면이 얼마나 앏으냐가 관건인데...높은 온도에 구울수록 점점 얇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얼마 없었습니다. 청자의 재료인 고령토는라고 불리는 흙의 재료도 나는 곳만 났구요. 그래서 부연설명을 하자면 중국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이 됐는데 유럽왕실에서 청자는 얼마나 귀한지 깨지면 금실로 이어서 썼습니다. 그 정도로 희귀가치가 많은 게 자기인데 원나라가 들어오면서 고려자기는 관요(정부에서 운영하는 도자기공장)에서 민요로 넘어가게 됩니다. 관요는 대개 분업화가 되어있어서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만 그리고 성형하는 사람은 성형만 하고 흙 반죽하는 사람은 흙만 성형하는데 이들이 제각각 나오게 된겁니다. 조선은 백자가 유명했지요... 분청사기라고 흙에 분칠하듯 칠했다고 분청사기입니다. 청화백자가 유명합니다. 청화백자는 청색으로 칠한 백자라는 뜻입니다. 이 청색이 문제가 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청금석이라는 보석을 캐는 데 이것이 울트라마린이라는 군청색이 나옵니다. 아프간 전쟁을 이 청금석이라는 보석을 캐서 무기를 사들입니다. 슬픈 보석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옷에 이쁜 파랑색을 볼 수 있는 이유가 이겁니다. 청금석이라는 보석을 수입을 잘 못하니까요. 이 보석은 제가 티브이에서 보니 그냥 길가에 파란 바위들이 널브러져 있드만요... 허걱~ 청금석은 부자가 되는 보석이라 아주 유명합니다. 청화백자도 18~19세기의 청금석을 수입을 잘 못해서 3시기로 나눠서 구별합니다. 수입이 잘된 시기는 아주 이쁜 파랑색 수입을 못한 시기는 회색에 가까운 파랑색입니다... 보석으로 세공된 청금석은 햇빛에서 보면 밤하늘에 별이 뜬 것처럼 보입니다... ~아,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갔습니다. 재밌는 건 이제부터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를 만들고 우리나라에 들어 와서 한 일은 우리문화에 놀란 거겠지요. 서민들이 밥사발로 쓰는 막사발, 개밥그릇으로나 쓰이던 막사발이 일본인들에겐 대단한 보물로 보인 겁니다. 이조다완이라고 정말 국보로 지정됩니다... 허걱~ 저도 이 막사발을 구한 적이 있는데 자그만치 두 상자나..... 문경에 장인이 만든 거라고 하더군요. 그 색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분홍색인가 싶으면 흰색이 간간히 박히고 재색인가 싶으면 파란색이 박히고 ...어떻게 그런 색이 나오나 싶은 게 정말 아름다운데 이사 가다가 넘 힘들어서 다 버렸습니다.. 이조다완 이라는 사진을 보기 전에...... 정말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인 거죠..ㅋ~ 그래서 미친 듯이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물건들을 헐값으로 강제로 뺏어서 가져갑니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이 탄생한 배경이 되는 겁니다. 이들에게 뺏기기 전에 우리가 사들이는 거죠... 저도 오다가다 인쇄된 걸 대충 봐서 더 길게 언급은 못합니다. 하옇튼, 이 골동품 취미는 선비들의 오락이었는데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수집이 되게 된 거지요. 그래서 달항아리 라는 백자는 대칭이 좀 이상합니다.. 한국인의 조금 모자란 듯한 멋이라고도 하지요. 다시 고려자기로 넘어갑니다. 고려의 관요에서 분업화된 자기 장인들이 각각 나오자 조선자기는 성형이 잘되면 그림이 모자르고 그림이 잘되면 성형이 안 되어서 지 멋대로가 된 겁니다. 근데 그게 최고의 도로 꼽히게 된 겁니다. 일본인들이 보니 이건 정말 말도 할 수 없는 경지인거죠. 그래서 우리나라 미술이 우리가 보기엔 그저(?) 소박하기만 한데 일본인처럼 다채로운 색을 쓰는 나라가 보면 그 단조로운 색이 대단한 경지에 오른 걸로 보이게 되는데 그게 이유가 뭐냐면 인간의 심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서예로 넘어 갑니다. 필기구가 붓인 전부이던 시대에 붓으로 쓴 서예는 모든 선비들의 로망이 됩니다. 그래서 한 시대에 한명의 서예대가가 나오기도 합니다. 얼마나 많이 써야 서예가가 될까요...? 동양화나 서예는 수 만장의 습작이 있고서야 겨우 자신의 필체가, 화법이 완성이 됩니다. 그러니 서양화의 창의성이 그 습작 뒤에 나오는 거니 아, 다시 설명할게요. 동양의 도와 서양의 창의성이 조금 다릅니다. 동양은 수만 장의 습작 뒤에 겨우 수련을 마치고 도를 얻은 거구요. 서양은 분업화된 그림쟁이들이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는 거구요. 그들은 도를 창의성이라고 부르죠.
서양의 창의성은 철학까지도 좌지우지 합니다. 그래서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화가는 시대를 100년을 앞서 간다. 사회학자는 50년 뒤지고... ‘모 이런 말을 해서 화가들을 예찬했는데요. 요즘 어떤 미대 교수님이 미대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한다고 개탄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화가들은 손으로, 본능적으로 그리는 거라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이론을 말하고 그 말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아이콘이 되는 겁니다. 이 창의성은 아이들에게도 3~7살까지 나온다고 보는데요... 동양화는 노대가에게 이 창의성을 천진함이라고 바꿔 말하기도 합니다. 김기창 화백은 바보산수로 유명 합니다 . 그게 천진함과 일맥상통합니다. 아마 오원 장승업도 나중엔 이런 천진함으로 찬양을 받았습니다. 이런 천진함이 우리나라 도공에게 보인다는 게 경이적인 일인 거죠. 일본인들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생각~ㅋ 도자기에서 이런 천진함이 나오기가 정말 쉽지 않은 일 인 거죠. 무지몽매한 일개 조선의 장인이......
그러니 우리나라가 지들의 정확한 스승이란 걸 인정하고 쉽지 않지만 은연중 할 수 밖에 없었고..닥치는 대로 가져가는 걸 우리나라 문인들이 전통성을 주장하면서 같이 수집에 들어가고 그 이론을 펄치고 이게 또 애매하게 된 거죠. 숨은 이유는(이면적인) 이렇다지만 표면적으로는 일본은 ‘가장 일본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라는 자각을 애저녁에 한거고 조선의 것을 가져가 일본 것이라고 우기게 된 거죠. 그러니 표면적으로는 우리나라 문인들도 이들과 동조를 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카프에게 걸려 된통 당하게 되는 거죠. 우리 것을 지키느냐(가난한 조선의 학자로서), 학자로서 양심을 지키느냐가 시대에서 준 과제였다고만 말하기엔 좀 잔인한 구석이 없진 않습니다만 후대의 저로서는 노코멘트~흑흑
동양문화 수호를 표방한 식민정책이기도 했던 조선고전 애호 및 보존 조류와 맞아 떨어 질 수밖에 없던 슬픈 현실이네요.. 그들에게 안 뺏기려면.....허걱~
교수님도 굳이 구별하라고는 안 했구요.
암튼 일본은 이래서 돈을 많이 벌어들이게 됩니다. 판화는 왜 유명하냐구요? 고호가 일본 광입니다. 모네는 일본의 정원을 흉내 내어 정원을 만들어 놓고 그림을 그려댔습니다. 이 시기에 일본의 판화를 보고 원근감에 빠져있던 화가들을 패닉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고갱은 원근감을 무시하고 그림을 그려댔고 일본의 색은 이 화가들을 색의 대한 탐구로 이끌었습니다. 네덜란드에, 일본에 어지러우실 겁니다. 그 시기에 우리나라는 사생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미어터질 지경이 된 겁니다. 관념산수화(도교에서 말하는 신선그림이나 마음을 나타낸 그림)나 진경산수화(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그림(실경산수화) 로 화론을 펼치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판화에 대한 이야기로 불가불 다시 넘어 가야 되네요. 용어 설명을 해야 되니까요? 판화는 크게 단색 판화 다색 판화로 나뉘어 집니다 단색(홑단)은 한가지색 다색은 많을 다를 써서 색을 많이 씁니다. 우리나라는 단색 판화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일본 판화는 아주 정교한 다색판화를 만듭니다. 중국 판화는 선이 좀 날카롭습니다. 우리나라는 대개 불교 미술에 판화가 있습니다 ...사실 오류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본게 몇 백개 밖에 안되서.. 아이들 가르치는 도상으로 좀 있기도 한 거 같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그렇게 정교한 색판화를 본 유럽인들은 그 색에 엄청 놀랐지요. 물론 서양도 에칭(동판화)라는 정교한 판화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명암도 표현했거든요. 그런데 일본은 명암을 색으로 처리했던 거죠.. 아주 단순한 명암정도.... 그래서 서양의 예술가들은 일본에 미칩니다.
진경(眞境)이라고도 한다. 이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새로운 화풍을 창출한 가운데 발달하였다. 종래의 형식화된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을 통해 고의(古意)와 이상을 찾고자 한 당시의 사상적 동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한국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과 접목시키고자 한 문인 사대부들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림의 소재는 전대와 마찬가지로 명승명소(名勝名所)와 별서유거(別墅幽居)·야외아집류(野外雅集類)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금강산과 관동지방, 한양 근교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화풍은 실경산수화의 전통에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곁들인 것으로, 이는 정선(鄭敾)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그는 실제로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그려 진경산수화풍의 정형(定型)을 수립한 것이다. 정선의 화풍은 강희언(姜熙彦)·김유성(金有聲)·최북(崔北) 등으로 계승되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새로 등장한 강세황(姜世晃) 등의 화가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형식화된 당시의 진경산수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제 경관과 부합한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하였는데, 그들의 이러한 화풍은 김홍도(金弘道)에 의하여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하였으며 그것은 다시 이인문(李寅文)·이재관(李在寬) 등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정선과 김홍도파 이외에 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 등의 문인화가들도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남종화법과 함께 문인풍의 격조 높은 화풍을 바탕으로 색다른 개성미를 보여주면서 이 시대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흐름에 이바지하였다. 이처럼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려 하였던 근대지향적인 의의를 지니면서 조선 후기의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는 다시 근대 및 현대에 생긴 어떠한 특정 경관이 아닌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남화(南畵)라고도 하며 북종화(北宗畵)에 대응되는 말이다. 북종화가 화원(畵員)이나 직업적인 전문화가들을 중심으로 경직(硬直)된 선묘를 사용하여 그린 장식적이면서도 공필(工筆)의 그림을 의미하는 데 반하여, 남종화는 대체로 인격이 고매하고 학문이 깊은 사대부(士大夫)가 여기(餘技)로 수묵과 담채(淡彩)를 사용하여 그린 간일(簡逸)하고 온화한 그림이다. 당나라 초기 남북2종설(南北二宗說)은 명나라 때 동기창이 《화지(畵旨)》 《화안(畵眼)》 등 그의 문집 속에서 당대(唐代) 선종(禪宗)에 남 ·북종이 있음을 주목하고, 회화에서도 남 ·북종의 구분을 한 데서 비롯된다.
근원 김용준 전집3. 조선화 표현 형식의 성립에서부터 조선화의 화론적 배경, 조선화의 내용과 남북화의 관계, 채색기법에 이르기까지 화가로서 쌓았던 경험들을 토대로 알기 쉽게 기술했다. 또한 단원 김홍도를 비롯해 조선시대 화가들의 화풍과 연결시킴으로써 역사전통의 흐름 속에서 조선화 문제를 파악했다.(양장본)
호는 근원(近園)·선부(善夫)·검려(黔驢)·우산(牛山)·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이 가운데 근원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04년(고종 41)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나, 1925년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1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할 정도로 일찍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으나, 대학 졸업 후에는 서화협회 회원전에만 몇 번 참가했을 뿐 서양화가로서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38년 이후에는 전통 수묵화에도 손을 대기는 하였으나 활발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신문이나 잡지에 미술평론과 미술 관계 시론(時論) 등을 기고하면서 간결하고 호방한 필치로 문명(文名)을 얻었다.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창설에 참여해 동양화과 교수를 역임한 뒤, 1948년 동국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 30편의 수필을 묶어 《근원수필》을 출간하였는데, 예스럽고 담박하면서도 격조 높은 언어 구사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도 이 수필집은 '문학과 비(非)문학의 장르 구분을 넘어 광복 전후 남겨진 문장 가운데 가장 순도 높은 글', '한국 수필문학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같은 해 9월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교수가 된 이후,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활동하다 1967년 사망하였다.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화가·미술평론가·미술사학자·수필가로서 광복 전후 한국의 신세대 화단을 주도하면서 날카로운 비평으로 한국 미술사에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 수필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는 《근원수필》 외에 월북 직전 출간한 《조선미술대요》(1949)와 북한에서 출간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1958)가 있고, 미술작품에는 《춤》(1957)이 남아 있다. 2002년에는 열화당에서 《새 근원수필》《조선미술대요》《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민족미술론》 등 5권으로 나누어 근원 김용준 전집이 출간
한국미술사는 개화기부터 식민주의사관을 조성하려는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근대학문으로 개발되었다. 1920년대에 한국인들도 자국 미술을 근대적 지식체계에 의해 역사상으로 인식하고 기술하기 시작했으나 전문화된 학술적 연구는 경성제국대학에서 미학 미술사를 전공하고 1930년 졸업한 고유섭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유섭의 연구가 동양과 한국의 고전과 전통에 대한 진흥 및 재인식과 더불어 일어난 1930년대의 조선학 수립운동을 배경으로 천착되었다면 전형필의 수집은 이 시기의 고전열 골동품 붐과 함께 동양문화 수호를 표방한 식민정책이기도 했던 조선고전 애호 및 보존 조류와 결부되어 본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양문화 수호를 표방한 식민정책이기도 했던 조선고전 애호 및 보존 조류와 결부되어 본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정희
4. 서예
또한, 그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바탕으로독자적인 발전을보여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올라 조맹부(趙孟頫)·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히고,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는데,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5. 시와 회화
한편,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취미를 계승하는 것으로서,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畵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를 노출하는 문기(文氣)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는데,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고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 歲寒圖〉와 〈모질도 耄耋圖〉·〈부작란 不作蘭〉 등이 특히 유명하다.
6. 전각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으며,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는데, 그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또, 고인(古印)의 인보(印譜)를 구득하여 직접 진한(秦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는데, 추사체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7. 산문
그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같은 편지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고, 그를 통해서 내면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도 한글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이 30여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 많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며, 또 한글 서예면에서 민족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8. 평가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구문화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완당척독 阮堂尺牘》(2권 2책, 1867)·《담연재시고 覃揅齋詩藁》(7권 2책, 1867)·《완당선생》(5권 5책, 1868)이 있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은 종현손 익환(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청대에는 금석학의 발전과 함께 금석문자의 서예적 가치를 다시 평가하면서 비학(碑學)이 발전하였다. 그래서 청의 서예는 비학에 입각한 서법을 창안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도 청대 금석학의 연구성과를 수용하면서 금석학 연구가 활발했다.
추사 김정희는 소년시절부터 북학파의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우며 성장했고, 24살 때에는 아버지의 청국사행에 자제군관으로 동행하여 청의 문물을 접하였다. 김정희는 연경(燕京)에 머물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등과 사제의 연을 맺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왕희지, 구양순으로 대표되는 정법(正法) 서체 외에 옛 한나라 비석에 새겨진 예서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한례(漢隷)의 필법을 연구, 해서에 응용하여 소위 추사체를 창출했다.
추사체는 당시의 서체와 구별되는 개성이 강한 서체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였다.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바다에서 산으로 소재가 이동되면서 산수시 계열의 시들이 씌어지는데, 이는 감각에서 정신에로의 변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의 시편들과 ‘산’의 시편이라는 양자는 겉으로 지향하는 바가 다를지라도 근본적으로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정지용 시의 본질이 감각과 정신을 선명하게 돌출시켜 주는 소묘적 언어의 정교한 회화성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감각적 심상을 빌려 정신적 고요의 공간을 빚어내는 시적 표현과 구성의 긴밀성을 보여준 「장수산」과, 영혼을 비추는 물의 명징성을 인식하여 주체를 해체하는 시적 인식의 객관화에 도달한 「백록담」은 그의 정신주의가 도달한 최상의 수준이었다. 정지용이 산수시로 나아간 것은 식민지 말기의 고통스러움을 정신적 극기로 감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정지용이 산수시로 나아간 것은 식민지 말기의 고통스러움을 정신적 극기로 감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변절과 친일을 강요당하던 1930년대 말의 식민지적 압력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은 산수에 자신을 숨기는 일이었을 것이며, 동양의 고전적인 전통 속에서 자신의 시적 방법론과 은일의 정신을 체득하려 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의 언어적 인식은 자신의 시를 단순히 복고적인 취향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의를 지닌다. 자신의 시적 천분을 조탁하여 이룩한 산수시는 당대 최상의 수준이며 한국어가 지닌 언어적 가치를 극대화시킨 예이다. 정지용은 서구 추수적인 이미지즘이나 모더니즘을 넘어서서 우리의 오랜 시적 전통에 근거한 산수시의 세계를 독자적인 현대어로 개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이 원하는 답은 대략 전통과 고전이 우리나라 식민지 시대에 어떤 배경으로 형성이 됐는지 를 묻는 문제인 거 같습니다. 한 문제는 시대적인 배경이 답인 거 같고 한 문제는 아마 엘리엇이라든가 가다머의 전통이 될 거 같고. 또 한 문제는 고전에 관한 정의 정도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학보에 다 답이 있는 건 맞을 거 같습니다.
첫댓글 너무 어렵습니다...ㅜ 그래도 이건 읽어지네요... 감사합니다ㅜㅜ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아직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요 ㅠ.ㅠ 어렵습니다 ,,,
교수님이 원하는 답은 대략 전통과 고전이 우리나라 식민지 시대에 어떤 배경으로 형성이 됐는지 를 묻는 문제인 거 같습니다. 한 문제는 시대적인 배경이 답인 거 같고 한 문제는 아마 엘리엇이라든가 가다머의 전통이 될 거 같고. 또 한 문제는 고전에 관한 정의 정도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학보에 다 답이 있는 건 맞을 거 같습니다.
감사드려요 ㅠ_ㅠ 첫시험이라 어떻게 해야될지 정말 막막했는데 길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머리에 저장하려니 용량이 ㅋㅋㅋ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