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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11권
21. 각분품 ②[1]
[지(止)와 관(觀)을 닦아 익힘]
[釋] 이미 보살이 도분(道分)을 닦아 익힘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이 지(止)와 관(觀)을 닦아 익힘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바른 정(定)에 안심하면
이가 곧 지(止)가 된다고 이르며
바른 법의 분별에 머물면
이를 관(觀)의 모양이라고 이른다.
[釋] 바른 정에 안심하면 이가 곧 지가 된다고 이른다’고 함은 이른바 마음이 바른 정에 의지하면 마음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른 정이 없이 지를 세울 수가 없다. 그러기에 지의 모양이라고 이른다.
‘바른 법의 분별에 머물면 이를 관(觀)의 모양이라 이른다’고 함은 이른바 바른 머묾에 의지하여 체를 분별하는 것이니, 이를 관의 모양이라고 이른다.
[문] 이 두 행은 무엇을 닦는다고 이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널리 여러 공덕을 구하고자 하면
이 두 가지를 다 마땅히 닦아야 한다.
1분은 그러하며 1분은 그러하지 않으니
닦음에는 단(單)과 쌍(雙)이 있다.
[釋] ‘널리 여러 공덕을 구하고자 하면 이 두 가지를 다 마땅히 닦아야 한다’고 함은
만일 사람이 모든 공덕을 두루 구하고자 하면 이 사람은 지와 관, 두 가지의 행을 다 마땅히 닦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에게 이르시기를,
‘여러 비구들아, 만일 구하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 얻게 하겠는가?
여러 비구들아, 욕심을 여의고 악하여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여러 비구들아, 두 가지의 법을 마땅히 닦아 익혀야 하니 이른바 지와 관이니라’”고 하였다.
‘1분은 그러하며 1분은 그러하지 않다’고 함에서
1분은 이른바 혹은 지(止)를 하고 혹은 관(觀)을 하는 것이다.
1분은 그러하지 않다고 함은 이른바 지와 관을 합하는 것이다.
[문]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답] 닦음에는 단과 쌍이 있기 때문이다.
‘단으로 닦는다’고 함은 1분이니 혹은 지를 닦든지 혹은 관을 닦는 것이다.
‘쌍으로 닦는다’고 함은 1분만이 아니다. 이른바 지와 관을 합하여 닦는 것이다.
[문] 이 두 행은 어떻게 종류의 차별을 하며, 어떠한 업을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능히 통(通)으로 닦고 능히 나아가며
모양이 없고 또한 무위(無爲)이며
청정한 국토와 청정한 과(果),
이 둘이 곧 업이 된다.
[釋] 이 게송 중에서 위의 두 구절은 종류의 차별을 밝힌 것이고, 아래의 두 구절은 업을 밝힌 것이다. 이 두 법은 신행지(信行地)에 있으니, 의지수(依止修)라고 이른다.
만일 대승 10지(地)의 지위에 들어가면 다시 네 가지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능통의 닦음[能通修]이니 이른바 초지에 들어감이요,
둘째는 능출의 닦음[能出修]이니 이른바 초지에서 6지에 이른다. 이 6지에서는 상이 있는 방편을 내기 때문이다.
셋째는 무상의 닦음[無相修]이니 이른바 제7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넷째는 무위의 닦음[無爲修]이니 이른바 뒤의 3지에 들어간다. 공용(功用)을 짓는 닦음은 유위(有爲)라고 이르는데 뒤의 3지에서는 공용을 짓지 않기 때문에 무위(無爲)라고 이른다.
이것이 다섯 가지 종류의 차별이다.
‘청정한 국토’라고 함은 뒤의 3지를 의지하여 정토의 행을 닦는 것이다.
‘청정한 과(果)’라고 함은 전의(轉依)의 행을 닦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청정함이 곧 그 업인 것이다.
[다섯 가지의 방편을 닦아 익힘]
이미 보살의 지와 관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이 다섯 가지의 방편을 닦아 익힘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가 성숙되고 더불어 중생을 성숙하게 하며
속히 과를 얻고 아울러 업을 지으며
생사의 길이 끊어지지 않음,
이를 다섯 가지의 교묘한 방편[巧]이라 말한다.
[釋] ‘다섯 가지의 교묘한 방편’이라 함은,
첫째는 자기가 부처님의 법을 성숙하게 함이니 분별이 없는 지혜로써 교묘한 방편을 삼기 때문이요,
둘째는 중생을 성숙하게 함이니 네 가지 섭법으로써 교묘한 방편을 삼기 때문이요,
셋째는 속히 보리를 얻는 것이니 참회와 수희(隨喜)로써 법륜 굴리기를 청하여 뛰어난 원을 생기(生起)시킴으로써 교묘한 방편을 삼기 때문이요,
넷째는 짓는 업이 성취됨이니 두 문(門)으로써 교묘한 방편을 삼는다. 두 문이라고 함은 이른바 다라니문과 삼매문이니, 이 두 문으로써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업을 능히 성취시키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생사의 길이 끊어지지 아니함이니, 그러기에 머무는 곳이 없는 열반으로써 교묘한 방편을 삼는다.
[문] 무엇을 일러 교묘한 차별이라고 하며, 무엇을 일러 교묘한 업이라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보살에게는 교묘한 것이 비할 데가 없어
차별이 여러 지(地)를 의지한다.
능히 자기와 남의 이익을 이루는 것,
이를 업이라고 말한다.
[釋] 이 게송 중 위의 두 구절은 교묘한 차별을 밝힌 것이고, 아래의 두 구절은 교묘한 업을 밝힌 것이다.
‘차별’이라 함은 이 다섯 가지의 방편이 모든 보살에게 있어서 가장 위이고 비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지(地) 가운데서 2승(乘)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그러기에 차별이라 한다.
‘업’이라 함은 능히 자기의 몸과 남의 몸의 일체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를 업이라고 이른다.
[다라니]
이미 보살의 교묘한 방편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다라니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업보와 들어서 익힘과
또한 선정으로써 인을 삼는 것
이 세 가지의 행을 의지하여
가지는 종류에 세 가지가 있다.
[釋] 다라니의 품류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과보[報]로 얻는 것으로서 앞의 세상의 업의 힘으로 말미암아 얻기 때문이다.
둘째는 익혀 얻는 것이니, 현재의 들어 가지는 힘으로 말미암아 얻기 때문이다.
셋째는 닦아 얻는 것이니 선정의 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얻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러 종류의 차별이라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두 가지는 작고 한 가지는 크며
한 가지의 큰 데서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지(地)의 앞과 더불어 지의 위는
청정하지 못함과 청정함 때문이다.
[釋] ‘두 가지는 작고 한 가지는 크다’고 함은
그 세 가지 가운데에서 보(報)로 얻음과 익혀서 얻음, 이 두 가지는 작은 것이 되고,
닦아 얻는 이 한 가지는 큼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의 큰 데서 다시 세 가지가 있다’고 함은
그 큰 종류 가운데 다시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니, 이른바 연(軟)품과 중(中)품과 상(上)품이다.
아직 지(地)에 들어가지 못한 보살이 소유한 것은 하품이 되고,
이미 부정지(不淨地)에 들어간 보살이 소유한 것은 중품이 되니, 이른바 처음의 일곱 지위이다.
청정지(淸淨地)에 들어간 보살이 소유한 것은 상품이 되니, 이른바 뒤의 3지위이다.
[문] 무엇을 일러 업이라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보살이
항상 다라니를 의지하여
법을 열고 법을 가지니
짓는 업이 다 이와 같음을.
[釋] 이 가운데서 모든 보살이 다라니를 의지하여 항상 묘한 법을 열어 보이고 항상 받아 가져서 이로써 업을 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러 원]
이미 보살의 다라니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이 여러 원을 일으킴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사(思)와 욕이 함께 체가 되고
지혜가 홀로 그의 인이 되어
여러 지(地)가 곧 지가 되고
두 가지의 과가 또한 과가 되네.
마땅히 알아라. 차별이 세 가지이니
종종(種種)과 대(大)와 청정이다.
이 업에 두 가지가 있으니
자기를 이롭게 하고 더불어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釋] 이 두 게송은 여섯 가지의 뜻으로 여러 원을 분별한 것이니,
첫째는 자기의 성품이요, 둘째는 인이요, 셋째는 지(地)요, 넷째는 과요, 다섯째는 차별이요, 여섯째는 업이다.
‘사(思)와 욕(欲)의 상응을 함께 자기의 성품으로 삼고 지혜로써 인을 삼아서 여러 지(地)가 지가 되고 두 과가 과가 된다’고 함에서
두 과라 함은 이른바 현재의 과와 미래의 과이다.
여러 원(願)으로써 인으로 삼아 마음으로 얻었기 때문이니,
마음으로 얻은 자는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다 성취되기 때문이다.
또한 원의 힘으로써 모든 원의 과에 노니는 것이니,
이른바 몸으로 광명을 놓고 입으로 음성을 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종종(種種)이니 이른바 신행지(信行地)의 원이 이와 같다. 이와 같은 것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넓고 큰 것이니 이른바 지(地)에 들어간 보살의 열 가지 큰 원인 것이다.
셋째는 청정함이니, 이른바 뒤로 가면서 뒤의 여러 지(地)가 옮겨가면 갈수록 청정한 데로 옮겨가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부처님의 지위는 극히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차별이라고 이른다.
업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기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남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를 업이라고 이른다.
[세 삼매]
이미 보살의 여러 원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이 세 가지의 삼매를 닦아 익힘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두 가지 무아와
두 가지 나의 의지함이니
두 가지 의지함이 항상 적멸하여서
세 가지 정을 행하는 경계이다.
[釋] 세 가지 삼매에서 세 가지의 행하는 것이 있다.
첫째는 인(人)과 법의 두 가지가 무아인 것이니, 이것은 공(空) 삼매에서 행하는 것이다.
둘째는 두 가지 집착이 의지하는 것이 다섯 가지 취음(取陰)이니, 이것은 무원(無願) 삼매에서 행하는 것이다.
셋째는 의지가 필경에 적멸한 것이니, 이는 무상(無相) 삼매에서 행하는 것이다.
세 가지 취하는 것의 체가 세 가지 경계가 되고 세 가지 능취의 체가 세 가지 삼매가 되니, 이를 세 가지 삼매라고 이른다.
[문] 세 가지 삼매의 이름과 뜻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공한 정은 분별이 없고
무원(無願)은 싫어하여 등짐이 생기며
무상(無相)은 항상 즐거움을 얻으니
그 의지함이 항상 적멸하다.
[釋] ‘공한 정은 분별이 없다’고 함은 분별이 없다는 뜻이니, 곧 공 삼매의 뜻이다. 인(人)과 법의 두 나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원은 싫어하여 등짐이 생긴다’고 함에서 싫어하여 등진다는 뜻이 곧 무원 삼매의 뜻이다. 나의 집착의 의지함을 싫어하여 등지기 때문이다.
‘무상은 항상 즐거움을 얻으니 그 의지함이 항상 적멸하다’고 함은 즐거움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무상 삼매의 뜻이니 즐거움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그 의지하는 것이 필경에 적멸하기 때문이다.
[문] 세 가지 삼매는 어떻게 일어난다고 이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끊어야 하고
마땅히 작증(作證)해야 한다.
순서대로 공들의 정을
닦아 익히는 데 세 가지가 있다.
[釋]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끊어야 하고 마땅히 작증해야 한다’고 함에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함은 이른바 인(人)과 법의 두 가지 무아이고,
마땅히 끊어야 함은 이른바 두 가지 아집의 의지함이요,
마땅히 작증해야 한다고 함은 이른바 그 의지가 필경에는 적멸하다는 것이다.
‘순서대로 공들의 정을 닦아 익히는 데 세 가지가 있다’고 함은
이 가운데서 인과 법의 두 가지 무아를 알기 위하여 공의 삼매를 닦으며,
그 두 가지 집착의 의지하는 것을 끊기 위하여 무원 삼매를 닦으며,
그 의지한 데가 필경에 적멸함을 증하기 위하여 무상 삼매를 닦는다는 것이다.
[네 가지 법의 우다나]
이미 보살이 세 가지 삼매를 닦아 익힘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네 가지 법의 우다나(憂陀那)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전에 말한 세 가지 삼매는
네 가지의 인(印)으로써 의지를 삼는다.
보살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여러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釋] ‘네 가지의 법인(法印)’이라 함은,
첫째는 일체의 행이 무상(無常)한 인이요,
둘째는 일체의 행이 괴로운 인이요,
셋째는 일체의 법이 무아의 인이요,
넷째는 열반 적멸하다는 인이다.
이 가운데서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무상의 인과 괴로움의 인은 무원 삼매의 의지를 이루는 것이다.
무아의 인은 공의 삼매의 의지를 이루고,
적멸의 인은 무상 삼매의 의지를 이룬다는 것이다.
보살이 이 네 가지의 인을 설하고 세 가지 삼매의 의지로 삼는 것은 다 여러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문] 어떤 것들이 무상의 뜻이며, 또한 어떤 것들이 적멸의 뜻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무(無)의 뜻과 분별의 뜻과
진실이 아닌 참분별이 아닌 뜻과
여러 분별을 쉬는 뜻,
이것이 네 가지 인의 뜻이다.
[釋] 이 가운데서 여러 보살은 이 무의 뜻으로써 무상의 뜻이라고 여긴다. 그것은 분별의 모양이 필경에는 항상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별의 뜻, 이것이 무아의 뜻인데 분별의 모양으로 말미암아 오직 이 둘을 분별함이 있다. 이 분별의 모양은 체가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참분별이 아닌 뜻’이라 함은 괴로움의 뜻이니, 삼계의 마음과 마음의 법이 괴로움의 체가 된다. 이는 의타상(依他相)의 뜻이다.
그리고 ‘여러 분별을 쉰다’고 함은 적멸의 뜻이니, 이는 진실한 모양이다.
또는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의타의 모양은 다시 찰나찰나에 무너진다는 것이니, 이는 무상의 뜻이 된다.
[문] 무엇을 일러 찰나에 무너지는 뜻이 성립된다고 하겠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말미암아 일어남과 인을 좇음과
서로 어긋남과 또한 머물지 아니함과
체가 없음과 더불어 서로 정함과
따라 전함과 아울러 멸하여 다함이요,
변하여 달라짐과 인과 또한 과와
집착하여 지님과 더불어 증상(增上)과
따라 청정함과 따라 남이니
뜻을 이룸에는 열다섯 가지가 있다.
[釋] 이 두 게송은 열다섯 가지의 뜻으로써 찰나찰나에 멸하는 뜻을 성립시켰으니,
첫째는 말미암아 일어남이요, 둘째는 인을 좇음이요, 셋째는 서로 어긋남이요, 넷째는 머물지 아니함이요, 다섯째는 체가 없음이요, 여섯째는 서로 정함이요, 일곱째는 따라 전함이요, 여덟째는 멸하여 다함이요, 아홉째는 변하여 달라짐이요, 열째는 인(因)이요, 열한째는 과(果)요, 열두째는 집착하여 지님이요, 열셋째는 증상이요, 열넷째는 따라 청정함이요, 열다섯째는 따라 남이다.
이 열다섯 가지의 뜻으로 말미암아 찰나에 무너지는 뜻이 성립되게 된다.
첫째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함은,
여러 행이 서로 이어서 흐르는 것을 일어난다고 한 것이니,
만일 찰나찰나에 멸하는 뜻이 없으면서 여러 행이 서로 계속되어 흐르는 것을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만일 네가 말하기를
“물질이 있어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에 먼저 있던 것은 멸하고 뒤의 것이 일어나는 것을 서로 계속한다”고 이르면 곧 서로 계속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잠시 머무를 때에는 뒤에 일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인을 좇는다’는 것은,
무릇 물질이 앞의 것이 멸하고 뒤의 것이 일어나는 데는 반드시 인연을 빌린다는 것이다. 만일 인연을 떠나면 곧 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말하기를
“물질의 처음의 인이 능히 뒤의 많은 과를 내게 한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처음 인을 짓는 업은 곧 문득 멸하여 없어지는데 어찌하여 뒤의 여러 과와 더불어 인을 짓겠는가?
만일 네가 말하기를
“처음의 인이 일어났다가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이 인을 건립하는 데는 무엇을 쓰겠는가?” 하고,
다시 네가 말하기를
“처음의 인이 일어났다가 아직 멸하지 아니하고 뒤의 때에 바야흐로 멸한다면 자신이 뒤의 때에 이르러서 누가 멸하는 인이 되겠는가?”라고 한다.
셋째 ‘서로 어긋난다’고 함은,
만일 네가 다시 집착하여 말하기를
“이 능히 일어나는 인이 다시 멸의 인이 된다”고 하면 그 말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일어나고 멸함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한 가지로 하나의 인이라 하면 이러한 이치가 없다.
비유하면 광명과 어둠은 나란히 있을 수 없고, 차고 뜨거운 것은 함께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기에 일어나는 인이 곧 멸해 없어지는 인이 아니다.
만일 네가 고집함과 같이 모든 행이 일어나고서 곧 멸함이 아니라면 이는 곧 경[阿含]과 이치에 어긋난다.
경[阿含]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 비구들아, 모든 행은 환(幻)과 같으니, 이는 무너져 멸하는 법이어서 이것은 잠깐 때의 법이다. 찰나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치라 함은, 모든 수행하는 사람이 모든 행의 생겨나고 멸하는 가운데서 찰나찰나에 멸하여 없어짐을 사유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않으면 목숨을 마칠 때에 임하여서 저 멸하는 모양을 보고 싫어하고 악함이 없어지고 욕심을 떠나서 해탈을 하게 되리니, 이는 곧 다른 범부들과 같을 것이다.
넷째 ‘머물지 않는다’고 함은,
만일 네가 말하기를
“모든 행이 일어나서 머무름이 있다”고 하면 행이 스스로 머묾인가, 일어남으로 인하여 머무름인가?
만일 스스로 머무름을 행한다면 어찌하여 능히 항상 머무르지 못하는가?
만일 일어남으로 인하여 머물면 머무름은 체가 없으니, 가히 무엇으로 인할 것인가?
둘 다 그러하지 않다. 그러기에 찰나찰나에 멸하는 뜻이 이루어진다.
다섯째 ‘체가 없다’고 함은,
만일 네가 머무는 인을 고집해서 비록 인이 무너짐이 없어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나 그러기에 머묾을 얻는가 하면,
무너지는 인이 만일 이르러서 뒤에 멸할 때에 마치 불이 검은 쇠로 변하는 것과 같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무너지는 인이 필경에는 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이 쇠로 변하는 비유에 대해 나는 이러한 이치가 없다고 여긴다.
검은 쇠와 불이 모두 검은 것은 서로 같고, 멸함과 붉음이 서로 같으며, 일어날 때에 붉어짐을 끌어들이는 것도 서로 같다.
그러나 일어나는 것은 불의 공능(功能)이어서 실로 불이 검은 쇠로 변한 것은 아니다.
또는 물을 끓이는 것과 같아서 극히 적은 위치에 이르면 물이 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과 합한 것은 아니니 물이 바야흐로 체가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 ‘서로 정한다’고 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유위(有爲)의 법과 유위의 모양은 한결같이 결정하겠으니 이른바 무상이다”라고 하셨다.
네가 모든 행이 일어나서는 곧 멸함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것은 이는 유위의 법이 잠깐 동안에 있는 듯함으로써 항상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문득 한결같은 모양이 아닌 데 떨어진다.
일곱째 ‘따라서 전한다’고 함은,
만일 네가 말하기를
“만일 물건이 찰나찰나에 새로 생겨나면 어찌해서 그 가운데 오래된 물건이라는 해석을 짓겠는가?”라고 하면
마땅히 말하기를
“서로 같음으로 말미암아 따라 전하는 대로 얻어진다”고 이렇게 알아야 한다.
비유한 등잔의 심지가 서로 같게 일어나기에 오래된 등불이라는 앎을 일으키며 차별할 만한 체가 없는 것이다.
여덟째 ‘멸하여 다하였다’고 함은,
만일 네가 말하기를
“어떻게 해서 뒤의 물건은 앞의 물건이 아니라고 아느냐?” 하면, 마땅히
“멸하여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하겠다.
만일 머물러서 멸하여 없어지지 않으면 뒤의 찰나와 처음의 찰나가 함께 머물러서 차별이 없을 것인데 차별이 있음으로 말미암기에 뒤의 물건이 전의 물건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아홉째 ‘변하여 다르다’고 함은,
만일 네가 말하기를
“물건이 처음 일어남이요, 곧 변하여 다름이 아니다”라고 함은 그렇지 않다.
안의 법과 밖의 법의 체를 뒤의 편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일어난 물건이 곧 변하여 점차 명료(明了)함에 이르는 것이 비유하면 우유에서 유락(乳酪)이 되어 유락의 모양이 바야흐로 나타나면 변한 체가 미세하여 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서로 같음으로 말미암아 따라 전하는 것이기에 이를 일러 전의 물건이라고 이른다. 이 때문에 찰나찰나에 멸하는 뜻이 이룸을 얻게 된다.
열째 ‘인(因)’이라고 함은,
만일 네가 허락하기를 마음은 찰나에 멸한다. 저 마음에서 일어난 인은 이른바 눈과 물질[色] 등인데 모든 행의 저 과는 찰나에 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도 또한 찰나에 멸한다. 그것은 항상한 인으로써 무상한 과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한째 ‘과(果)’라 함은,
눈 등의 여러 행은 이것이 또한 마음의 과이다. 그러기에 찰나에 멸하는 뜻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은 무상의 인으로써 항상한 과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두째 ‘집착하여 지닌다’고 함은,
만일 네가 말하기를
“어찌해서 눈들의 여러 행이 또한 과인 줄 아느냐?”고 하면
마땅히 말하기를
“마음의 집지로 말미암아 증장함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겠다.
열셋째 ‘증상’이라 함은,
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세간을 가지고 가며 마음은 세간을 끌고 온다. 마음이 자재함으로 말미암아 세간이 따라 전하여서 식(識)이 명색(名色)을 반연한다”고 하셨다.
이 말도 또한 그러하여서 모든 행이 마음의 과가 된다.
열넷째 ‘따라서 깨끗하다’고 함은, 깨끗한 것은 선정을 닦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모든 행은 깨끗한 마음을 따라 전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선정을 닦는 비구는 신통을 구족하여서 마음이 자재함을 얻어서 만일 나무를 금이 되게 하면 곧 뜻을 따라 된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모든 행이 다 마음의 과임을 안다.
열다섯째 ‘따라서 난다’고 함은,
죄를 지은 중생들이 얻는 물건들은 모두 하열(下劣)하지만, 복을 지은 중생들이 얻는 물건들은 모두 묘하고 좋다. 그러기에 모든 행이 다 마음의 과임을 안다.
인은 찰나의 과이므로 찰나에 없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도리는 인이 자재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와 같이 총체적으로 일체 안과 밖의 모든 행이 찰나임을 성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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