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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헨더슨 (1897 ~ 1967)
호텔설계나 호텔건설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호텔경영도 전혀 해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호텔 경영자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은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큰 체인 호텔(chain hotel)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헨더슨 (Ernest Hen-derson) 이었다. 그의 아들인 헨더슨 3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말한 일이 있다. “제 아버지는 이 산업 저 산업에 관여하셨습니다. 그는 보통주를 사는 데 흥미가 있었으며, 그러다가 4개의 호텔(Lee 호텔, Wayland Manor 호텔, Stonehaven 호텔, Sheraton 호텔) 등을 1941년에 완전히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스타틀러 호텔이 가장 큰 호텔 회사였지요. 스타틀러는 자기의 호텔에 스타틀러라는 이름을 모두 붙인 것을 보고 저의 아버님께서도 그가 소유하게 된 모든 호텔에다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아버님께서는 보스톤에 있는 지금의 쉐라톤 호텔 지붕 위에 ‘Sheraton' 이라는 큰 간판을 내걸고서 이것을 호텔 체인의 이름으로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리츠는 웨이터와 지배인으로서 식당경영의 경험을 쌓아 호텔산업에 투신하여 성공하게 되었고, 스타틀러는 벨보이와 식당주인을 거쳐서 젊은 나이에 호텔산업에서 그 위치를 굳혔으며, 히츠(Hitz)는 웨이터로서 출발했다. 힐튼(Hilton)은 하숙을 치는 그의 어머니를 도왔고, 젊은 시절에는 여인숙을 경영하여 첫 경험을 쌓았었다. 그러나 헨더슨이 진지하게 호텔산업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44세였었다. 26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는 154개의 호텔이 쉐라톤이라는 이름으로 경영되고 이었으며, 쉐라톤 회사는 매년 약 3억달러의 총수익을 얻는 대회사가 되었다. 이 회사의 경쟁대상은 전국에 당시 약 900개의 모텔을 갖고 있던 홀리데이 인(Holiday Inn)으로 바뀌었으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 하려던 힐튼(Hilton) 회사는 저력을 상실하여 사실상 운영권을 트랜스 월드(Trans World) 항공사에 넘기었기 때문에 경쟁대상에서 이미 제외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보스톤출신 투자가가 26년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최대의 호텔회사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그가 호텔경영에 있어서 다른 전문가가 소유하지 않는 독특한 판단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을까? 고인이 된 리츠가 모든 고객의 욕구를 예측했었는데, 헨더슨은 이런 점에서 리츠를 앞설 수가 있었던 것일까? 스타틀러가 중산층을 대상으로 호화호텔을 건립하여 성공하였는데,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스타틀러를 능가할 수 있었는가? 혹은 호텔을 판촉하고 미화하는 능력이 스타틀러의 기술을 앞설 수가 있었을까? 체인 호텔을 건설하고 운영함에 있어서 헨더슨 자신이 지칠 줄 모르고 호텔 판매촉진에 온힘을 쏟았던 히츠와 같이 모든 정성을 기울였을까? 그러나 헨더슨은 이러한 기량과 재질에 관계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투자와 운영 그리고 이윤에 대해서는 상당히 억센 뉴잉글랜드 지방의 기질을 가지고 조직의 활용과 재정적인 기능의 활용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였다.
헨더슨의 특징은 평범한 인간으로서 의무수행과 자기 수양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부를 과시하거나 부로 인한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잘 활용해서 기업을 경영해 가는 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는 새로운 부를 소유하고 창조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없다고 믿는 철저한 자본주의자였으며, 합당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서슴치 않고 호텔을 사고 파는 판단력이 좋은 기회주의자였다.
힐튼은 비버리 힐에 있는 호화로운 귀족의 저택같은 호텔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힐튼 호텔들을 관리하도록 했지만, 헨더슨은 보스톤에 잇는 쉐라톤 호텔 안에 소박한 사무실을 가지고 전 쉐라톤 호텔경영을 감시하며, 동시에 호텔의 거래를 손수 지휘했었다. 힐튼이 최신의 유행하는 옷을 입은 수행원과 함께 참석하기를 즐긴데 비하여, 헨더슨은 혼자서 수수한 옷을 입었고, 손수 작성한 연설문을 사용하였었다.
힐튼은 마드리드에 있는 그의 호텔을 개관하기 위해서 영화배우들과 세계적인 유명한 연예인들을 초대하려고 비행을 전세내기도 했지만, 헨더슨은 대게 그 호텔과 거래할만한 사람들과 지방사업가들로 구성된 손님들과 함께 달라스와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의 호텔들을 개관하였으며, 힐틀은 호텔의 신장개업에서 봇사 노바(bossa nova)를 추었지만, 헨더슨은 그의 습작 중의 하나인 “Come With Me"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호텔사업에 성공한 이들은 모두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정렬적으로 그들의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생을 살았는데, 힐튼은 90평생동안 놀랄 만큼 건강하였으며, 스타틀러는 몇 시간 밖에 자지 않으면서 계속 일에 몰두했고, 히츠도 아주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리츠도 또한 전심전력을 다하여 업무를 추진하였으며, 헨더슨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쉐라톤(Sheraton)의 세계』(The World of Mr. Sheraton)라는 그의 책 속에서 그는 보스톤의 체스트널 힐에 있는 집에서 햄프셔주의 더블린에 있는 별장까지 걸어한 일이 있는데, 발에 물집이 생기고 추운 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걸어간 거리는 무려 73마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호텔을 경영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들의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가 힘드는 데도 불구하고 헨더슨은 동전을 수집하는 등 그의 취미생활을 즐겼으며, 또한 열렬한 아마튜어 무선사이고 작곡가이기도 하였으며 시인·이야기꾼이기도 하였다. 또한 노스이스턴(Northeastern) 대학교, 보스톤(Boston) 대학교의 창립이사였으며, 월드 어페어 카운실(World Affairs Council)의 이사로서, 그리고 뉴잉글랜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의 회장으로 봉직했었다.
헨더슨은 지방자치단체 등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지역사회에 많은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의 그러한 광범위한 활동을 보면서 그가 사회적으로 혹은 재정적으로 결함을 극복하려고 상당히 노력했고, 이를 성취시킨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가 있다. 그의 집은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베를린(Berlin)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한 그의 부친 덕택에 캠브리지(Cambridge)에 있는 집과 뉴햄프셔에 있는 별장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헨더슨은 그의 전기에서 그의 조상을 상당히 자랑하였으며, 래노버(Lord Llanover)의 부인이었던 친척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페니(Penny)라고 짓기도 하였다. 조부 헨더슨은 뉴욕에 증권회사인 헨더슨 회사를 설립하여 후손들이 살아 갈 수 잇도록 재산을 남겼었으며,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아 헨더슨(Ernest Henderson)은 부동산투자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성공하게 되었다. Ernest (정직) 라는 그 이름 자체가 노동과 부의 윤리에 대한 그 가문의 마음가짐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그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덕성과 정직을 가르쳤으며, 정당한 일을 근면하게 하고, 자기 극복을 통해서 자신의 신념을 형성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담배를 피지 않고 대신 그 돈을 모아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려는 생각을 했으며, 또 12살 때는 닭을 몇 마리 길러서 그것을 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그는 높은 차원의 기업윤리와 함께 최대의 노력을 소득을 얻기 위하여 쉐라톤 호텔을 가장 효율적으로 경영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는 그들의 권리를 노동자들에게 인식시켜 줌으로써 효율적인 경영을 시도하였다. 헨더슨처럼 빈틈없는 계산으로 호텔매매를 했던 사람을 없었을 것이다. 그가 쉐라톤 회사를 위해서 만든 10가지 사훈은 헨더슨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어 주는데, 쉐라톤의 10계명은 다음과 같다.
① 어떤 경유에도 자기의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된다.
② 뇌물을 받지 말며, 할 수 없이 받았다면 그것을 책임자에게 보고하고, 이를 처분하여 그 돈은 종사원기금에 활용하도록 해야한다.
③ 부인으로 하여금 쉐라톤 호텔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려는 욕망을 갖지 않게 하라.
④ 확정통보를 낸 예약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⑤ 목적을 정확하게 하지 않고서 부하에게 명령하지 말라.
⑥ 작은 호텔을 경영하는 사람들의 장점이 대규모 호텔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결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예를 들면, 책임과 권한에 대한 위임에 있어서).
⑦ 상거래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상대방을 너무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만들지 마라.
⑧ 식은 음식을 고객에게 제공해서는 안된다.
⑨ 모호한 짐작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실과 정확한 계산과 정확한 지식에 근거해석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⑩ 부하가 실수를 했을 때 즉각적으로 화를 내지 말라(그것이 바로 자신의 실수일지도 모른다.)
호텔산업에 기여한 헨더슨의 불후의 공격은 무엇인가? 헨더슨 쉐라톤 호텔은 호텔의 경영기술이나 기술혁신을 발전시키였다는 점에서나 규모확장의 속도면에서 힐튼 호텔 혹은 인터내셔날(International), 인터컨티넨탈(Intercontinental) 보다 더 빠른 발전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헨더슨의 강점은 최대·최소 비용의 이론과 투자에 대한 최대수익의 이론을 실행에 옮긴 점에서 그 성공의 비결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쉐라톤 회사를 위해서 일당 1만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동산 투자에 있어서 전문가인 그는 적시에 호텔을 팔고 사고 했던 것이다. 그는 항상 “우리가 후회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이다”라는 멘켄(H.L. Mencken) 의 격언을 인용했다. 그는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나 최소한의 여유자본을 활용하고 투자하여 호텔산업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성공적으로 호텔확장과 수익증대를 성취하였다. 헨더슨의 방법은 최소한의 현금을 사용해서 자산을 획득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투자 결정에는 용기와 신념, 그리고 판단력이 필요했으며, 그는 지혜롭게 이를 실시하였었다.
헨더슨의 고객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 “고객은 항상 옳다”라는 모토를 사용했던 리츠(Cesar Ritz)와 스타틀러(Ellsworth Statler)의 전통을 지켰는가? 아니면 “ 인생은 서비스다”라는 말을 사용했던 스타틀러와 같았는가? 뉴잉글랜드인은 전통적으로 고객이 지불한 가격에 마는 서비스나 상품이 반드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그는 정직한 상인은 고객이 지불한 가격에 맞는 서비스와 제품이 반드시 제공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만일 호텔이 고객과의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였을 때는 어떻게 하던지 그것을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의 쉐라톤 호텔에서는 예약을 한 고객이 쉐라톤 호텔에서 예약된 객실을 제공받지 못하게 될 경우 20달러짜리 쉐라톤 호텔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제공하게 하며, 같은 수준의 다른 호텔에 객실을 확보하여 승용차로서 반드시 모셔가도록 조치를 취하여 주도록 했다. 그는 종사원에게 교육하지는 않았다.
헨더슨은 가장 효과적인 경영수단 중의 하나가 고객은 고객과의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쉐라톤 호텔 본부로 보내 온 편지들은 즉시 회답해 주었고, 감사와 불평에 관한 편지들을 관계지배인에게 넘겼다. 그는 고객들이 호텔경영에 참고가 될 수 있는 관찰력과 지혜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고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질문서를 호텔객실에 반드시 비치하도록 하였다. 그의 질문서 중 고개들의 불평은 확정된 예약은 지키지 못한 것, 아침식사 제공이 늦은 것, 모닝 콜(Morning call)을 다른 방에 울리는 것 등에 대한 것이었다. 헨더슨은 불평이 고객수의 5% 이상이 되었을 때는 ‘관리층이 뭔가 잘못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으며, 6% 이상으로 올라가면 비상조치를 강구했고, 반면에 어떤 특정한 지배인에 대한 칭찬이 너무 많으면 그 지배인이 호텔의 이익을 돌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헨더슨은 호텔경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쉐라톤 빌딩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쉐라톤 회사의 중추신경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호텔경영의 세부업무까지도 보살폈다. 그는 특히 경영합리화에 큰 관심이 있었으며, 경영조직의 단순화를 시도하였으며, 필요이상의 참모조직에 반대하였고, 인사담당 혹은 훈련담당부서 같은 곳에는 적은 수의 직원으로 그 업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헨더슨은 쉐라톤 호텔 광고부에서 고안한 판매방법인 “Sales Blitz"을 대단히 좋게 생각하여 이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이 방법의 내용은 세일즈맨들이 팀을 만들어서 집중적인 홍보에 나서 수백명의 잠재적인 고객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신용카드를 나누어 주고 고객유치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헨더슨은 1947년 약 50만달려였던 쉐라톤 회사의 자산평가액을 1967년에 4억달러로 상승시켰으며, 이러한 그의 능력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몇몇 회사들과는 달리 쉐라톤 회사는 재정난을 겪지 않았다.
그는 당시 일반적인 회사채이자율이 6%였을 때 7.5%의 이자로 회사재를 판매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쉐라톤 회사채를 구입하였던 것이다.
쉐라톤 회사는 최대의 감가상각을 했기 때문에 이익은 비교적 적게 나타났지만, 그 회사의 보통주의 가치는 계속 상승하였다. ITT(International Telephone & Telegraph Company)는 쉐라톤 호텔회사의 주식을 주당 35달러에사겠다고 제안했으며, 1967년 9월 6일 ITT의 이러한 제안을 받고 얼마 안되어서 헨더슨은 서거했다. ITT로 쉐라톤을 넘기겠다고 결정한 것은 1963년부터 사장을 맡고 있던 그의 아들인 헨더슨(Ernest Henderson) 3세에 의해서였다. 그는 잠시동안 사장직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의 예전의 지배인들은 1969년 후반까지 모두 그 회사를 떠났다.
헨더슨의 경력을 요약한다면 그는 전문가로서 호텔운영에 혁신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매매·건설·운영에는 아주 능숙했으며, 이전의 어떤 호텔경영자들보다 더 공덕심이 있었다. 그의 목표는 100억 달러의 조직을 만드는데 있었고, 그 목표를 향해서 부지런히 말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호텔 체인을 건설했다” 라고 해도 과장된 평은 아닐 것이다.
1978년 ITT는 400개의 호텔에 99,285개의 객실, 그리고 향후 5년 내에 182개의 호텔을 추가할 계획인 거대한 호텔제국 쉐라톤 회사를 소유하게 되었다. 총판매액은 12억 5천만달러였으며, 그 중에서 식음료판매액은 4억 5천만달러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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