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애지문학 문학비평 후보작품
김수이, 황치복, 임지훈
고요히 폭발하는 명상, 현대세계의 숨통 뚫기
- 김기택의 시세계
김수이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애지 여름호에서
애지 봄호
끌어당김(Attractive)과 접문(接吻)의 시학
―이영식, 꽃을 줄까 시를 줄까의 시적 미학
황치복
애지 가을호
가상(들), 그리고 현실이라는 가상
- 서호준의 시세계
임지훈
<애지>, 2023. 여름호
고요히 폭발하는 명상, 현대세계의 숨통 뚫기
- 김기택의 시세계
김수이
알아차림,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 사물을 꿰뚫는 통찰. 명상 수행의 대표적인 방법이자 덕목이다. 명상하는 자는 천천히 숨을 쉬면서 자신의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윽고 아무런 의지와 노력 없이도 자기 몸이 저절로 숨 쉬고 있음을 알아차리며, 들숨과 날숨을 통해 세계를 호흡하면서 자신이 ‘지금 여기-살아 있음’을 알아차린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온갖 잡념에 휩쓸리지 않고 ‘텅 빈 채’로 주위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충족감을 체험하며, 이번 숨과 다음 숨 사이의 ‘순식간(瞬息間)’에 삶과 죽음의 문턱이 있음을 통찰한다. 명상하는 자는 자신과 미묘한 거리를 두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자, 현재의 모든 순간과 만물에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생생히 살아 현존(現存)하려는 자다. 숨을 쉴 때마다, 그리고 숨과 숨 사이에서 명상하는 자는 ‘애쓰지 않는 애씀effortless efforts’을 실천한다.
갑자기 몸은 다 없어지고 허공에 멀뚱멀뚱 눈알만 남는 어둠이 되어
나를 둘러싼 거대한 눈알이 한 점 허공인 나를 쳐다보고 있는 어둠이 되어
긴 대롱을 지나야 그 끝에 간신히 숨구멍 뚫린 허파가 있을 것 같은 어둠이 되어
「긴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갈라진다 갈라진다』, 문지, 2012) 부분
얼마 전까지 고양이였다가 이제 막 고양이를 벗어던진 것이
처음 입은 이상한 몸을 못 참겠다는 듯
반쯤 기화된 발로 허공에 발길질한다.
제 가벼움 몸 없음 투명함이 근질근질하다는 듯
추위 돋친 발톱으로 허공을 할퀸다.
고양이에서 다 벗어났는데도
아직 고양이를 버리지 못해 제 꼬리를 쫓아 빙글빙글 돈다.
「눈」(『낫이라는 칼』, 문지, 2022) 부분
김기택의 시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명상하는 자’다. 김기택의 시는 ‘문명의 야만’이 숨통을 조이고 “대가리 없는 명상 냄새”(「치킨고로케」, 『낫』)가 자욱한 죽음의 도시에서 “답답한 숨통과 내장을 시원하게 긁”(「너무」, 『낫』)을 수 있기를 염원하며 명상을 수행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나’의 경험을 바라보는 알아차림, 특정한 지각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며 고요와 평온에 이르는 집중, 지금 여기서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폭넓게 주의를 열어놓는 통찰 등 명상의 기술도 풍부하게 활용한다. 가령, ‘숨 쉬는 일’을 위시해 다양한 몸의 다양한 활동을 계속 응시하고 묘사하는 것, “~(하)고 있다”라는 현재 상황 진술의 서술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 드물지만 “기우뚱거리는 몸 안으로 환한 빛과 음악이 기적같이 흘러들어오”(김진석)는 지복(至福)의 순간을 만나는 것 등은 명상하기로서 김기택 시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기택의 시는 특히 현대세계와 그 파편적 존재들에 관해 고요하고 느린 명상을 수행해 왔다. 한 생명체나 사물, 어떤 사건이나 현장 등에 대해 고통스러울 만큼 집요한 몰입과 의도적인 더딘 필치로 언어화를 수행하는 과정은 곧 명상 수행의 과정이 되었다. 김기택의 시가 “해부학적 관찰과 투시적 상상력”(이광호)을 통해 발휘하는 언어적 수행(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실상을 알아차리고 통찰하는 명상 수행으로 수렴되면서 궁극의 목적을 드러낸다. 내면의 변화를 통한 존재의 변화 및 삶의 변화, 세계의 변화가 그것이다. 이 변화들은 서로 연결된 까닭에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촉발하는 동시성의 관계에 있다. 김기택이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집요하게 묘사할 때, 그 극사실적 언어화의 과정에서 각 시편은 마치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다. 소, 개, 낙지, 풀, 나무, 아기, 노인, 실직자, 사무원, 걸레질하는 여자, 눈먼 사람, 침, 가래, 무좀, 주름살, 삼겹살, 껌, 벽, 틈, 타이어, 무단 횡단, 중얼중얼중얼, 바늘구멍 속의 폭풍, 울음, 소음, 졸음, 속도, 겨울 아침, 봄날 등 ‘김기택 표 만물들’은 김기택 스타일로 연출된 느리고도 역동적이며 무정하고도 유정한 퍼포먼스를 통해 독자를 집중하게 하고 동요하게 하며, 놀라게(경탄/경악) 하고 통찰하게 한다.
조심조심 노인이 걷고 있다.
눈앞에서 널찍하고 평평하던 길이
발밑에서 외줄처럼 흔들리며 좁아지는 걸음을 걷고 있다.
구겨질까봐 슬금슬금 양복의 눈치를 보며
움직임을 최대한 작고 곱게 만든 걸음을 걷고 있다.
중간에 있는 관절 하나만 툭 건드려도
뼈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은 몸을
살살 달래가며 걷고 있다.
고개 들어 두리번거리면 길이 흔들리고 중심이 무너질까봐
갈비뼈 위에 단단하게 고정시킨 목 대신
눈알만 가만가만 돌아가는 걸음을 걷고 있다.
발걸음 소리가 일으키는 모든 진동을
숨막히도록 가는 숨소리로 흡수하며 걷고 있다.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빠른 시간이
무례하고 거친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걸음은 파닥거리는 몸을 붙잡고 잠시 기우뚱거리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다
걸음에 연결된 모든 관절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죽음
동작 속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자라온 죽음이
있는 힘을 다해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사뿐사뿐 걷고 있다.
- 「한가한 숨막힘」(『껌』, 창비, 2009) 전문
김기택의 시-퍼포먼스는 몸의 각 부위에 의식을 집중하는 바디 스캔Body scan 명상과 유사한 면이 있다. 김기택 특유의 바디 스캔 기법을 잘 보여주는 위의 시는 ‘노인’의 쇠약한 몸과 위태로운 걸음을 묘사하기 위해 관절, 뼈 전체, 갈비뼈, 목, 눈알, 숨소리, 파닥거리는 몸, 가까스로 잡는 균형 등을 하나하나 주시한다. 노인이 아슬아슬한 걸음과 그 걸음 속에 스며 있는 죽음을 “있는 힘을 다해” 상연하는 시-퍼포먼스는 독자-관객인 ‘나’를 어느새 노인의 필사적인 걸음을 함께 걷고 있는 공동(육)체로 바꾸어 놓는다. “관절 하나만 툭 건드려도/ 뼈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은 몸을/ 살살 달래가며” “발걸음 소리가 일으키는 모든 진동을/ 숨막히도록 가는 숨소리로 흡수하며 걷고 있”는 ‘노인’은 ‘나’의 다른(혹은 같은) 시간의 육체이거나 내 안의 잠재태/가능성이다. 김기택의 시는 육체성, 공간성, 소리성, 시간성 등의 물질성을 생생히 구축하고 체험하게 하며, 이러한 ‘물질성의 수행적 창출’을 통해 독자에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수행성’의 미학을 빚어낸다. 수행성의 미학은 독자가 자신의 지각에 집중하면서도 지각 대상과 몸을 바꾸는 역치적 경험을 통해 존재와 삶의 변환에 이르게 하는 점에서 명상의 기술과 통한다. 이는 김기택이 현대의 실상을 치열하게 지켜보는 데 몰입해 왔으며, 그의 지켜봄-명상을 통과한 시적 광경들이 자주 고통스럽고 불편한 형상으로 심리적 저항감과 연민, 수용의 마음과 탈주의 열망 등을 복합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김기택은 뭇 존재와 현상들에 새겨진 현대세계의 실상을 보고 듣고 아는 일이 시인의 소명이라고 생각해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들과 허상의 관념조차도 육체를 가졌음을 특유의 관찰안(觀察眼)을 통해 설파해 왔다. 일찌감치 그는 ‘마음도 하나의 육체’라고 선언한 바 있다.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육체이다. 살처럼 꼬집거나 때리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 닭살도 돋고 주름살도 생기고 때도 낀다.” 마음의 육체를 보는 눈은 육안을 넘어선 심안이나 혜안일 터인바, 이는 마음의 육체가 겪는 갖가지 일들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요청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현대세계도 하나의 육체이며, 그에 속한 모든 사물과 현상과 관념 또한 제각기 하나의 육체다. 김기택은 현대세계를 ‘대상’으로 삼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신이 현대세계라는 ‘공동(육)체’의 일부로서 관찰하고 통찰한다. 김기택의 시 쓰기-명상은 현대세계라는 공동(육)체에 알아차림의 시선을 부여하고 생성하는 일이며, 현대세계 전체가 이행해야 할 알아차림과 변환을 홀로, 조금 먼저 감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김기택은 숨 쉬고 있음, 앉아 있음, 걷고 있음, 먹고 있음, 자고 있음 등의 물리적 동작과 환희, 슬픔, 고통, 고독, 불안, 두려움 등의 마음 상태,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등 생로병사의 상황들이 어떤 육체의 것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것임을 보여준다. 아기, 노인, 병자, 노동자, 다리를 저는 사람, 뚱뚱한 여자, 우주인, 죽은 사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육체들은 개체인 동시에 공동(육)체이며, 지금 여기에 각자 있는 동시에 함께 있는 존재들이다. 이 공동(육)체는 에리카 피셔-리히테를 따라 “신체적 공동 현존”이나,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로 휘말려드는 사건을 창출”한 예술작품을 통해 “지금 여기hic et nunc, 즉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같이 존재하는 공동 주체Ko-Subjekte”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현대세계는 공동체의 연대를 파괴한 자리에서, 각 개체의 생명과 생존이 파괴적으로 연결되고 연루된 공동(육)체를 배제의 시스템을 통해 부정적으로 활성화한다. 최근 시집 『낫이라는 칼』에 실린 시 「사무원 기택 씨의 하루」는 현대세계와 현대인들의 공동(육)체가 시인이자 사무 노동자이며 자연인인 김기택 자신의 몸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적나라하게 현시한다. ‘사무원 기택 씨’의 몸에는 그동안 김기택이 알아차리고 통찰해 온 모든 몸이 고스란히 통과하거나 공존하고 있다. 이는 김기택의 시가 들숨과 날숨, 먹고 먹힘, 죽고 죽임을 통해 연결된 현대사회라는 공동 육체의 명상을, 그 역시 공동 육체(의 일부)로서 대행해 왔음을 알게 한다. ‘사무원 기택 씨’의 몸에 앞에서 본 시 「한가한 숨막힘」의 ‘노인’을 비롯해 ‘사무원’(「사무원」, 『사무원』, 창비, 1999), 걷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걸레질하는 여자, 눈먼 사람 등의 몸이 관통하고 병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김기택에 의하면, 이 수많은 취약하고 필사적이며 부자유하고 기형적인 몸들은 모두 ‘나’였다.
다리에서 걸음을 받아 열심히 걷고 있다.
그 걸음걸이에 맞춰 셔츠가 소매를 휘젓고 있다.
팔꿈치와 무릎이 구부러질 때마다
피부에 촘촘하게 새겨지고 있는 주름들이
소매와 바지 뒤판에 자리를 잡고 펴지지 않는다.
재킷이 그의 거북 목에 맞게 굽어져 있다.
그의 기형적인 걸음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구두 뒷굽은 끈질기게 바깥쪽만 닳고 있다.
편마모된 뒷굽을 합리화시키느라
바짓가랑이는 대칭을 그리며 활처럼 안쪽으로 휘고 있다.
- 「사무원 기택 씨의 하루」(『낫이라는 칼』) 1연
현대세계의 공동(육)체로서 김기택은 자신의 몸 안에 타자의 몸이 있음을 발견하거나, 타자의 몸에 자신의 몸을 흔적 없이 이입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오줌이 마려워 방광이 터질 듯한데 “손가락이 눈이 되고 다리가 되도록 헤매도/ 작은 가방 안은 넓고 넓어/ 열쇠는 보이지 않”을 때 “온몸에 가득 찬 시각장애인이/ 컴컴한 시력을 긁고 또 긁어대”(「방광은 터질 것 같은데」)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 전자의 예라면, 극한의 슬픔 속에서 “숨막힘을 숨 쉬”는 ‘유족’의 숨을 알아차리며 함께 숨 쉬는 것은 후자의 결정적인 예다. 한편, 시 「죽은 눈으로 책 읽기」에는 양방향의 운동성을 지닌 몸이 출현한다. 책을 읽으며 글자들 속에서 이 글자들을 읽은 모든 눈과 “나의 첫 눈”이 합체하는 장면은 김기택의 공동(육)체가 공간의 확장성만이 아니라 시간의 확장성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오래전에 죽었는데도/ 그 눈들은 아직 이 문장을 읽고 있다./ 죽은 눈 위에 다른 눈이 겹치고/ 또 다른 눈들이 읽으며 쌓인 문장의 지층 위로/ 나의 첫 눈이 얹힌다./ 죽은 눈알들이 터질까 봐/ 글자들 사이를 발끝으로 조심조심 디디며/ 문장들 속으로 들어간다.”(「죽은 눈으로 책 읽기」)
숨 막힘을 숨 쉰다
안 삼켜지는 덩어리를 삼키다가
안 뚫리는 콧구멍을 뚫다가
튀어나오려는 붉은 눈알로 숨 쉰다
들뜨는 피부로 숨 쉰다
곤두서는 머리카락으로 숨 쉰다
식도가 딸려 나올 것 같은 목구멍으로 숨 쉰다
내장과 핏줄을 뽑아 올려서 숨 쉰다
근육과 골수를 짜내서 숨 쉰다
남은 수명을 단축시켜 숨 쉰다
- 「유족」 전문
김기택은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물의 몸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특히 김기택이 포착하는 동물들은 현대문명이 초래한 동물의 수난을 피력하는 한편으로, 파괴적인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는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에 대한 알레고리 역할을 한다. “꿈틀거림과 짓이겨짐 사이에 살아 있는 죽음과 죽어 있는 삶이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층층 이루고 있는 탄력”을 자랑하는 토막 난 ‘산낙지’(「산낙지 먹기」, 『껌』)는 현대문명이 생명에 가하는 폭력과 그 폭력에 유린당하며 살아-죽어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최후의 알레고리로 부족함이 없다.
화분이 갑자기 꿈틀거린다 싶더니
막 사라지는 네발이다
보도블록이 물결친다 싶더니
어슬렁거리는 줄무늬다
쓰레기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싶더니
찢어진 쓰레기봉투에서
돋아나는 발톱이다
어둠에 빛이 새어 나온다 싶더니
빛 구멍 뚫린 눈알이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혼자 걸어갈 때면
가끔 뒤통수가 운다
발밑이 운다
「야생 2」 부분
풀이 땅에 구멍을 뚫고 있다/ 땅속에 숨통을 심고 있다// (…) // 풀이 썩은 어둠에 푸른 파이프를 박고/ 여린 숨을 퍼 올리고 있다
「매몰지」 부분
구멍 뚫린 의자가
제 구멍으로 내 구멍을 보고 있다
내 구멍과 변기의 구멍이 하나가 된다
내 어둠과 변기의 어둠이 이어진다
내 깊이가 변기의 깊이 속으로 들어간다
- 「변기」 3연
한편, 김기택의 시에 그려진 몸들이 그 종(種)에 상관없이 인간, 동물, 식물, 사물, 광물, 에너지 등의 운동성을 자유롭게 발산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시 「야생 2」에서 길고양이는 화분으로 붙박여 있다가(식물성), 보도블록으로 물결치고(광물성의 에너지화), 다시 쓰레기봉투에서 돋아나는 발톱이 되었다가(사물성과 동물성화), 어둠 속 “빛 구멍 뚫린 눈알”이 되고(에너지), (인간의) 뒤통수와 발밑이 되어 운다. 시 「매몰지」에서 ‘풀’은 식물의 강한 생명력을 동물성과 인간의 행동으로 표출하며, 시 「변기」에서 ‘변기’는 시적 주체인 ‘나’와 동일한 위상을 지닌 “보고 있”는 주체로 그려진다. ‘변기’는 ‘나’의 밖에서 ‘나’를 통찰하고 있는 명상의 주체이자 ‘나’의 다른 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명상하는 자로서 김기택의 공동(육)체는 인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김기택은 현대문명이 설정한 만물(萬物)의 위계를 뒤집고 해체한다. “모든 이의 발 앞에 구르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이 되”(「부음」)었거나 구석에 방치된 존재들을 불러 모아 평등하게 하고, “숨넘어갈 것 같고 숨 끊어질 것 같은 이 숨말을 붙여주어야”(「너무」) 회생할 것 같은 현대세계의 숨을 고르고 그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자 한다. 이번 시집의 제목으로도 쓰인, 칼날이 밖이 아닌 안을 향하고 남이 아닌 나를 향하는 ‘낫’은 김기택이 추구하는 명상의 자세를 함축한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다.
김기택 시의 공동(육)체에는 언어도 포함되어 있다. 김기택의 시는 언어들의 위계도 재구성하고자 하는바, 주어 중심에서 술어 중심으로, 명사 중심에서 동사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실체 중심에서 행위와 운동 중심으로 나아간다. 이는 언어 자체를 넘어 언어로 표상된 존재와 사고방식과 미학, 현대세계의 인간중심주의와 권위주의 등을 전복하는 일과도 연결된다. 즉 김기택의 시에서는 사람, 개, 꽃 등 하나의 명사가 특정 동사나 명사를 점유하거나, 명사에 따라 동사의 쓰임과 위상이 제한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의 동사가 서로 다른 층위와 계열의 명사들을 포용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구체적인 예로, ‘숨통’이라는 명사는 인간, 동물, 식물, 사물, 추상적인 개념 등에 의해 차별 없이 공유되며, ‘갈라지다’라는 동사는 틈, 벽, 건물, 콘크리트, 땅, 식물의 가지, 뿌리, 사람의 피부, 손금, 가죽장갑, 소리 등을 대등하게 아우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명상하기로서 김기택의 시에서 가장 부정적인 형태의 몸이나 존재를 지칭하는 말은 다름 아닌 ‘명상’이다. “‘30년간의 장좌 불립(長座不立)’” 고행에 정진하고 있는 사무원(「사무원」), “머리가 없어서 명상에 잠겨 있”는, “엉덩이가 머리가 되도록/ 깊이 명상에 잠겨 있”는 ‘공원의 의자’(「공원의 의자」),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부리에 몸통이 단단히 박혀 있”는 “물아일체와 무아지경”의 비둘기(「비둘기에 대한 예의」) 등은 자아를 망실한 존재의 생존, 사물로 비유된 생명의 결여, 맹목적인 생명의 “막무가내 활기”(「참새구이」)를 우리로 하여금 힘겹게 직시하게 한다. 김기택은 이 마비된 존재와 생명의 ‘죽은 명상’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우리가 문득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 ‘겨를’은 거리에서, 아기 앞에서 등 일상의 곳곳에서 우리가 ‘나’의 존재를 활짝 열어놓을 때 온다. “몸 없는 숨이 혼자 걷는 순간에 온다. 저녁 7시 거리의 혼잡과 소란에 팔다리가 달려서 걸어가는 순간에 온다.”(「겨를」) “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 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 내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것이 있다”(「아기 앞에서」).
‘나’의 몸이 없어지는 ‘겨를’과 ‘내 안’에서 무언가 조용히 무너지는 무장해제의 순간에 ‘내’가 경험하는 일이 ‘명상’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바늘구멍 속의 폭풍’처럼 숨막힘을 숨 쉬고 있는 현대세계와 우리 자신의 숨통을 뚫어주는 일이 지극한 평온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눈이 두드린 길이 몸속으로 들어”와 “온몸이 눈이 되고 길이 되”어 “한평생의 체중이 실린 또 한 걸음이 나아가”(「눈먼 사람」)는 ‘눈먼 사람’이야말로 ‘명상하는 자’의 실제적이고도 역설적인 이름일 것이다. 김기택의 안내를 받아, ‘온몸의 길’과 ‘한평생의 체중’을 실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야 하는 ‘눈먼 사람’은 이제, 이미 우리 각자이며 우리 모두다. 명상이 “‘나 자신을 바라보는self-observation’ 능력을 키우”고, 이를 통해 타자와 더불어 세계 속에서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는 능력을 키우는 일임을 생각하면서.
----애지 여름호에서
애지 봄호에서
끌어당김(Attractive)과 접문(接吻)의 시학
―이영식, 꽃을 줄까 시를 줄까의 시적 미학
황치복(문학평론가)
끌어당김, 혹은 온기(溫氣)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사에는 심오한 사유를 펼친 철학자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유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에게서 발견할 수 있단. 그의 기본적인 개념들 중에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라는 기본적인 4원소의 아르케(arche, 原質)를 비롯하여, 인식론상의 감각 지각의 통로라든가, 전생 윤회와 영혼 정화 등 독특한 것들이 많지만, 가장 주목되는 점은 “사랑(Philotes)과 미움(Neikos)”이라는 개념이다. 아무리 초기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독특한 개념의 정의와 그것의 운동과 원리 등에 대한 복잡한 절차가 있어서 쉽게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는 흙과 물, 불과 공기와 같은 원질(原質)이 존재의 궁극적 실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네 요소들의 혼합과 분리에 의해서 현상세계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즉 한번 존재했던 것은 파괴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으며 다만 아르케의 혼합에 의해서 존재가 생성되고, 분리에 의해서 존재가 해체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르케의 혼합과 분리를 야기하는 근본적 동인이 바로 ‘사랑과 미움’이라는 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엠페도클레스의 독특함이 있다. 그러니까 현상 세계의 운동과 변화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인력(引力)을 의미하는 사랑과 척력(斥力)을 대변하는 미움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중에는 엠페도클레스처럼 사랑(philote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사물들이 끌어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는 현상의 발견은 범신론(汎神論)과 물활론(物活論)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예컨대 밀레토스 학파의 개척자인 탈레스는 호박(琥珀)과 자석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을 보고 그 속에는 프쉬케(Psyche, 靈魂)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돌과 같이 생명이 없는 사물들에조차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탈레스의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피타고라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그는 전 우주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 끌어당기는 성질은 영혼과 생명의 징표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인데, 엠페도클레스는 이러한 끌어당기는 힘인 사랑에 의해서 존재가 생성되고 미움에 의해서 해체된다고 설파한 것이다. 그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 사랑만을 우주의 운동과 변화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에 의해서 네 요소들이 하나로 뭉쳐서 촘촘한 덩어리이자 완전체인 구체(球體)의 일자(一者)를 형성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그가 주목하는 원리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생명의 발생과 존재의 생성의 원리로서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 사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식 시인의 꽃을 줄까 시를 줄까라는 시화집을 읽고 나서 엠페도클레스가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시인의 시적 세계가 끌어당김의 미학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시집의 특장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다양하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전 시집인 꽃과 정치의 해설에서 필자가 명명한 것처럼 ‘숭고의 미학이라든가 성스러움의 아우라’라는 명칭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진정성의 시학, 혹은 공자가 시경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한 ‘사무사(思無邪)’의 시학으로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영식 시인의 이번 시집은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도 어떤 성스러움의 기품을 가지고 있고, 속살이 다 비치는 듯한 투명한 진정성이 돋보이고 있으며,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은 맑고 깨끗한 시심으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시집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시인과 시적 대상, 혹은 시적 대상들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리하여 서로 끌어당겨 접촉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의미들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영식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심미적 효과가 발휘되고, 정동의 울림이 퍼져나가는 지점은 거의 대부분 이처럼 서로 끌어당기고 접촉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구체적 양상을 작품을 읽어보면서 확인해 보자.
어린왕자가 물었다
아저씨 직업이 뭐예요?
나는 시인이란다
이 별에서는 시가 밥이 되나봐
그보다는
시에게 나를 떠먹이는 거지
―「시인」, 전문
사실 이 시는 끌어당김의 미학을 실천하는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인(詩人)이란 시의 사원을 지키는 사제와 같은 사람이어서 시가 시인을 위해서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역설적 구조를 통해서 강렬하게 전달되고 있다. 그러니까 시가 시인의 생명을 위해서 밥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을 밥으로 받쳐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도된 위상의 변화와 헌신의 시정신은 독자들에게 성자와 같은 기품을 느끼게 하여 깊은 울림을 주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왜 “시에게 나를 떠먹이”려고 하는 것일까?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시인은 자신의 직업이 시인이라고 단언하며 시를 위해서 자신을 떠먹이겠다는 희생의 결단을 자초한다. 엠페도클레스가 설파한 것처럼 사랑의 소용돌이가 중앙에 모이게 되면 원소들이 서로 끌어당겨 하나의 존재를 생성하는 것처럼 시인 또한 내면에서 시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서 자발적으로 시를 향해 끌려 들어가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시가 끌어당기는 자력에 의해서 그 자장 안으로 들어가 시와 한 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끌어당김의 아름다움은 다음 시에서 더욱 빛난다.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 과학시험 문제다
“m으로 시작하는 단어 중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성질과 힘을 가진 단어를 쓰시오”
정답은 magnet(자석)이었다
그런데 85% 이상의 학생들이 답을 mother라고 썼다
고민하던 선생님은 마침내 mother도 정답으로 처리했다니
참 따뜻하고 지극한 이야기다
아이들의 마음을 자석보다 먼저 끌어당겼던 mother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름, 우리엄마
―「mother」, 전문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성질과 힘”은 저 그리스의 탈레스나 피타고라스, 그리고 엠페도클레스가 생각한 것처럼 신비한 힘을 지닌 영혼만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인 자연 현상에서는 자석(magnet)이 그러한 힘을 지니고 있겠지만, 존재의 진실이 드러나는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의 삶에서는 엄마(moth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끌어당기는(attractive) 신비한 매력, 혹은 마력을 지닌 힘은 어머니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그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중요한 것은 가치와 의미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름”이라는 형용이 끌어당기는 힘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대변해주고 있으며, 가장 따뜻하다는 표현은 곧 포용과 배려, 위로와 환대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라는 자석은 자식들을 끌어당겨 감싸고 위로하는 소용돌이의 힘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고민하던 선생님은 마침내 mother도 정답으로 처리했다니”라는 구절을 보면, ‘mother’라는 기표는 이 세상의 이치와 관습을 뛰어넘어 존립하는 어떤 절대적인 대문자 기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선생님도 또한 그러한 끌어당김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당연하다. ‘mother’는 끌어당기는 초월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그와 같은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시적 논리에 의하면 ‘따뜻함’ 때문이다. 이영식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끌어당기는 힘은 대부분 온기와 결합되어 있으며, 그러한 온기에서 정서적 파동이 형성되어 나온다. 다음 시도 그렇다.
나무 그늘 아래
노숙자의 굽은 등에 떨어진
햇볕 한 조각
유난히 고맙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저 볕뉘만큼
나눔과 결이 통하는 말이 있을까요
지상의 낮고 그늘진 곳
작은 틈으로
살며시 부어주는 사랑
쥐구멍까지
두 손을 쬐게 하는
햇살 한 줌
그 지극한 온도
―「‘볕뉘’라는 말」, 전문
햇빛 한 조각, 혹은 햇살 한 줌을 뜻하는 ‘볕뉘’라는 말이 지닌 온기와 그 파동을 시화하고 있다. “나무그늘 아래/ 노숙자의 굽은 등에 떨어진/ 햇볕 몇 조각”이라는 온기는 ‘그늘’과 ‘노숙자의 굽은 등’에 떨어졌기에 더욱 그 따스함이 증폭된다. “지상의 낮고 그늘진 곳/ 작은 틈”으로 찾아들기에 그것은 더욱 소중하고 값진 것일 수밖에 없다. 여러 시편에서 시인은 ‘작고’ ‘낮은’ 곳에 거처하는 존재들의 곤경과 신산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노숙자의 굽은 등’ 또한 그러한 이미지를 대변한다. 거기에 비추는 “햇볕 한 조각”, 혹은 “햇살 한 줌”은 ‘mother’가 함축하고 있는 따스함으로서의 위로와 환대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왜 볕뉘는 ‘노숙자의 굽은 등’과 ‘지상의 낮고 그늘진 곳’, 혹은 ‘작은 틈’을 찾아가는 것일까? 그것들은 앞서 인용한 시의 ‘mother’처럼 따뜻한 온기를 통해서 끌어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들이 볕뉘를 끌어들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했는가? 시인의 여리고 따뜻한 온기를 지닌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여린 마음은 노숙자의 굽은 등과 낮고 그늘진 곳, 작은 틈에 대해 애써 외면하지 못하고 연연해하고 있었기에 작은 볕뉘를 끌어당겨 거기에 “살며시 부어준” 것이다. 이 시의 감동은 노숙자의 굽은 등에 내리쬐는 볕뉘의 온기가 아니라 볕뉘를 끌어당기는 시인의 마음의 온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마음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살구꽃 그늘 아래
노인과
개 한 마리
앙상한 뼈와 뼈가
곁을 주고
앉아서
이름만 봄나들이지
서로를
쬐고 있네
―「무심無心」, 전문
한 편의 아름다운 단시조이다. 이 짧은 시 한 편에는 얼마나 많은 정서적 파동이 울렁이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서사와 담론이 들끓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세계 이해와 생명에 대한 연민의 해석이 우글거리고 있는가? “앙상한 뼈와 뼈”만 남은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노인과 개 한 마리”가 그동안 오랜 시간의 삶을 통해서 겪어내야 했던 삶의 곤경과 육신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살구꽃 그늘 아래”에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봄을 맞이하고 있는 이들이 느낄 죽음의 도래에 대한 두려움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간의 자각이 가져올 회한 또한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
상황이 이렇기에 앙상한 뼈의 노인과 개 한 마리는 위로와 위안이 필요하고 절실한 처지에 있다. 곧 따뜻함의 온기가 필요한 셈인데, 이러한 필요성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 것은 각자가 온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인데, 이들이 지닌 온기란 바로 상대방의 처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능력일 것이다. 그러니까 앙상한 뼈의 노인과 개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면서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며, 이러한 이해와 공감이 상대방에게 따스한 온기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곁을 주고/ 앉아서” “서로를 쬐고 있”는 것은 그러니까 상대방의 동정과 연민의 따뜻한 마음의 온기를 서로 쬐고 있는 셈이다. 다음 시도 따뜻한 온기가 끌어당긴다.
천변
오방오리 가족
빗속에 오종종 모여 젖고 있다
어미가 날개 펼쳐서
빗물 젖은 새끼들 모아들인다
몸 하나로 세운
집
한
채
보일러도
이부자리도 없다
몸과 몸으로 서로를 녹이는
지상에서 가장 작고
따뜻한
방
그래,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때를 아시나요」, 전문
“천변”에 내리는 비는 맞으며 “오종종 모여 젖고 있”는 “오방오리 가족”은 「‘볕뉘’라는 말」에 나오는 “노숙자의 굽은 등”처럼 벌거벗은 삶을 대변한다. 어떠한 권리도 보호도 누릴 수 없이 추방된 삶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따뜻한 온기가 필요할 것이며, 그래서 이들이 그것을 찾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어미의 날개 속이 그러한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또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미의 품은 따듯한 온기를 가지고 새끼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셈이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어미의 품을 “몸 하나로 세운/ 집/ 한/ 채”라고 비유하기도 하고, “지상에서 가장 작고/ 따뜻한/ 방”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품 하나로 새끼들에게 온기를 제공하는 어미의 몸이 하나의 집이 되고 방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상황이 감동적인 것은 오방오리 어미처럼 몸 하나로 서로에게 체온을 나누어 주던 헐벗은 시간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맨몸의 시간을 버티게 해주었던 끌어당기는 힘으로서의 온기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영식 시인의 시적 매력이 바로 이 끌어당기는 힘으로써의 온기에서 나온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2. 접문(接吻), 혹은 사랑
지금까지 이영식 시인의 이번 시집이 가지고 있는 매력으로서 끌어당기는 힘이 지닌 울림과 파동을 살펴보았는데, 끌어당기는 힘은 접촉과 결합을 가져오게 된다. 사실 온기를 나눈다는 것도 접촉을 통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따뜻한 기운이 퍼져가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그것은 접촉을 전제한다. 서로 몸을 맞대고 비비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의 다른 이름일 터인데, 그것은 엠페도클레스의 사랑이 아르케들을 끌어당겨 존재의 생성을 야기는 것처럼 가치와 의미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봄비 오는 날」이라는 시에서 “맨살 위에/ 뛰어내리는 간지러움 견디다 못해/ 꽃망울이 터지는 거라네요”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나도 봄비처럼 가고 싶다/ 너의 어깨 위에 맨발로 뛰어내리고 싶다”라고 고백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시적 논리에서는 꽃망울이 터지고 꽃이 피는 하나의 사건이 나무와 봄비의 접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키스」라는 시에서는 “앵두 빛 네 입술 위에/ 봄 같은 내 입김이 닿으며/ 세상 모든 꽃이 활짝 필 것 같아서/ 그래서……”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문이 세상의 모든 꽃을 피우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존재들의 접촉은 접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명의 생성이나 개화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가 이를 선명히 보여준다.
잡초 같지?
예야, 아무리 그래도
뿌리까지 뽑지는 말거라
눈 맞추고
이름 불러주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예쁜 꽃 피워낼테니
―「풀꽃」, 전문
“눈 맞추고/ 이름 불러주”는 행위는 곧 끌어당겨서 온기를 나주어 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봄비가 꽃망울에 부딪혀 개화를 촉발하는 것과 같은 스킨쉽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작고/ 예쁜 꽃”을 피워내는 효과를 초래한다. 시인의 시선은 역시 세상의 가장 따뜻한 온기를 필요로 하는 “잡초 같”은 작은 “풀꽃”으로 향하고 있는데, 시인의 이러한 따스한 온기가 아름다운 시 한 편을 피어나게 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사랑의 접문 행위는 꽃의 개화와 같은 물리적인 결과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시편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것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과 같은 내적인 충일을 야기하기도 한다.
파릇파릇
솟아나는 새싹 머리에
봄비가 입맞춤하듯
햇살 같은 시가
맨발로 나를 꼭꼭 밟고 가는 날
나 혼자의 커피
각설탕 같은 외로움이
혀끝에 달다.
―「작은 행복」, 전문
소꿉놀이하듯 풀꽃 앞에 앉으면
꽃처럼 낮아지고
꽃처럼 작아지고
고놈과 눈이 맞아서 근심 걱정 하나 없네
―「순수시대」, 전문
「작은 행복」에서는 두 가지 접촉 사건이 발생하는데, “솟아나는 새싹 머리에/ 봄비가 입맞춤하”는 사건이 그 하나라면. “햇살 같은 시가/ 맨발로 나를 꼭꼭 밟고 가는” 사건이 또 다른 하나이다. 솟아나는 새싹 머리에 봄비가 입맞춤하는 행위는 온기로 새싹의 꽃몽오리를 벌어지게 할 것이지만, 햇살 가는 시가 맨발로 나를 밟고 가는 접촉은 외로움을 달콤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시인은 이를 “작은 행복”이라고 명명하면서 마음의 평온과 충만의 내적 효과를 암시하고 있다. 끌어당기고 접촉하는 온기가 내적인 평정으로 초래한 것이다.
「순수시대」 또한 “근심 걱정 하나 없네”라고 하면서 마음의 평정과 고요를 강조하고 있는데, 시적 화자가 이처럼 영혼의 정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소꿉놀이하듯 풀꽃 앞에 앉”아서 “고놈과 눈”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고 가녀린 풀꽃에 바싹 다가앉아서 눈을 마춘 것인데, 이러한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문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풀꽃과의 눈맞춤을 통해서 어떻게 마음의 평정과 영혼의 정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꽃처럼 낮아지고/ 꽃처럼 작아지고”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풀꽃과의 접문을 통해서 그것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사랑이 원질들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의 생성을 가능케 한 것처럼 시적 화자 또한 풀꽃과의 접촉을 통해서 낮고 작은 존재로 거듭남으로써 마음의 평정과 정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시는 접문이 구원과 연결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꿍 꼬르륵 깔딱
투루루
엄마와 아기,
서로 눈 맞춰 찧고 까부는 사이
예수님 부처님
세상 모든 신들도 허리띠 풀고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꿍 꼬르륵 깔딱
투루루
사랑 만발합니다
―「모유수유」, 전문
엄마와 아기 사이에 두 가지 접문이 있다. “엄마와 아기,/ 서로 눈맞춰 찧고 까부는 사이”
라는 구절에 암시되어 있는 눈맞춤과 “모유수유”라는 제목에 암시된 엄마 젖꼭지와 아기 입술의 접촉이다. 이러한 접촉의 결과는 무엇인가?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궁 꼬르르 깔딱/ 투루루”라는 음성상징에 암시되어 있는 세상의 평온, 그리고 세속적 가치의 무화이다. 음성상징이 의미하는 것은 기표에 아무런 기의도 결부될 수 없으며 언어적 기표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메시지이다. 그러니까 두 번 반복되는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궁 꼬르르 깔딱/ 투루루”라는 음성상징에는 어떠한 언어적 기의도 담겨 있지 않으며, 단순히 엄마와 아이의 접촉 그 자체, 그리고 소통과 교감에서 우러나는 정서적 충일감만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 부처님/ 세상 모든 신들도 허리띠 풀고”라는 구절인데, 이러한 표현 속에는 세상에 어떠한 불화와 갈등, 고뇌와 고통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평화와 구원을 간구할 신들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모유수유를 하는 엄마와 아기는 원만구족한 유토피아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맥락은 곧 사랑과 접문이야말로 끌어당기는 힘으로서의 온기의 충만을 생성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구원을 가능케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3. 사랑, 혹은 죽음을 이기는 힘
시인은 한 산문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인용하면서 나를 깜박 잊으니 한 다발의 시가 기적처럼 가슴에 안겨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가 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를 위해 존재한다는 「시인」의 논리와 함께 이러한 대목을 되새겨보면, 시인은 시 한편을 위해서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시가 시인의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이치를 추론할 수 있다. 이영식 시인이게 시란 곧 끌어당기는 힘으로서의 온기이자 접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곧 사랑이야말로 구원이자 해방이며,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에서도 그러한 논리가 발현되고 있는데, 앞서 분석한 「모유수유」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 대표적인 예에 해당될 것이다. 다음 시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새를 품고 싶어한다
새는
나무에 깃들이고 싶어한다
바람 속
나무와 새는
서로 그리워하는 힘으로
허공을 살아냅니다
―「나무와 새」, 전문
“나무는/ 새를 품고 싶어 하”고, “새는/ 나무에 깃들이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이들을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이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은 각각 상대방이 바라는 것, 즉 온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바람 속/ 나무와 새”라는 구절에 주목해 보면 시련과 역경에 처해 있기에 둘은 어떤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혼자서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기에 도움이 필요하고, 그래서 나무와 새는 서로에게 온기를 제공하면서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시인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서로 그리워하는 힘으로/ 허공을 살아냅니다”라고 말하며, 서로 끌어당기고 결합하는 힘으로 “허공”을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허공’은 빈 공간이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생각을 밀고 나가보면 무(無. nihilo), 무의미, 허무, 허무주의(nihilism)과 같은 부정적인 가치를 연상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으로써의 사랑과 결합이 이러한 허무의 심연을 건너는 다리가 되어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없는 상태, 곧 허공과 같은 상태란 곧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과도 같을 것이다. 다음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홀쭉한 배낭 한 개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다
주워 담거나
더 내놓을 무엇도 없다는 듯
옭매던 줄 풀어
안과 밖, 경계를 지웠다
저 작은 주머니
주름투성이 몸피 속에서
내가 꺼내졌다니
나들이 접은 배낭은 일없다는 듯
코만 콜콜 골고 계시다
어머니, 살구꽃 다 지겠어요
―「어머니, 소풍가요」, 전문
앞서 인용한 「모유수유」에서의 아기 엄마와 달리 이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끌어당기는 힘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끌어당기는 대상을 간직하고 있지도 않다. 어머니는 상대방에게 온기를 제공할 수도 없고, 또한 어떤 온기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어머니를 “홀쭉한 배낭 한 개”라든가 “저 작은 주머니”, 혹은 “주름투성이 몸피”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는 어머니는 어떠한 온기도 지니지 않는 하나의 사물처럼 취급되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주워 담거나/ 더 내놓을 무엇도 없다는 듯” “코만 쿨쿨 골고 계시다.” 그러니까 「모유수유」의 아기 엄마와 아기가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궁 꼬르르 깔딱/ 투루루”라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언어를 가지고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고 있던 것과 달리 노모는 혼자서 잠만 자고 있다. “옭매던 줄 풀어/ 안과 밖, 경계를 지웠다”는 표현을 보면 주체와 대상이라는 구별도 무화되고, 그래서 교감과 소통의 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어머니는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시적 화자가 “어머니, 살구꽃 다 지겠어요”라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토하는 대목은 어머니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모유수유」가 엄마와 아기의 끌어당김과 결합으로 인해 생의 역동성으로 넘쳐났다면, 아무런 끌어당김도 결합도 없는 이 시의 어머니는 혼자서 죽음의 과정을 감당하는 쓸쓸함으로 물들어 있다. 아무런 생기도 환희도 찾을 수 없는 이 시를 보면 이영식 시인의 시적 활력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마지막으로 한 편을 더 읽어보겠는데, 다음 시는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끌어당김이 있기에 생의 역동성이 살아나는 현장을 보여준다.
오십천五十川
죽기에 실패하는 연어는 없다
수 천만리 바닷길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모천의 물 냄새 거슬러온다
서늘하고 맑게 휘어 꺽이는 곡류
궁벽한 곳에 핏줄 댄 채
알을 슬어놓는다
회귀와 죽음
그 너머는 생각지 않고
필생의 약속을 지키는 거다
―「무제無題」, 전문
“죽기에 실패하는 연어는 없다”는 역설은 죽음이 많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삶의 목표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이 시는 연어의 죽음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연어가 “수 천만리 바닷길”을 따라 “모천의 물 냄새 거슬러” 올라오는 과정은 곧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앞서 분석한 「어머니, 소풍가요」라는 시의 죽어가는 어머니와 달리 이 시의 연어는 생의 환희와 역동성으로 충만해 있다.
물론 죽어가는 연어가 이처럼 생의 역동성으로 넘쳐나는 것은 끌어당기는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연어에게 그것은 미래의 자식들이다. “궁벽한 곳에 핏줄 댄 채/ 알을 슬어놓는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궁벽한 곳’은 자신의 어미가 핏줄 댄 채 자신을 잉태한 곳이기에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자신이 슬어놓은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의 한 생이 비롯하는 곳이기에 따뜻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어는 그 궁벽한 곳에 핏줄을 댄 채 알을 슬어 놓는 것이다. “오십천五十川”이라는 “모천(母川)”은 그래서 연어에게는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곳이며, 그렇기에 연어는 기를 쓰고 거친 물길을 거슬러 올라 거기에 핏줄을 대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온기와 끌어당김으로 인해서 연어의 무리는 계속해서 생을 이어나갈 것이다. 끌어당김과 온기가 우주 순환의 원리일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영식 시인의 시화집 꽃을 줄까 시를 줄까의 시적 특징으로 끌어당김과 온기의 미학을 살펴보았다. 이영식 시인의 시가 대부분 그렇지만, 이번 시집의 시편들도 시가 굳이 난해하지 않더라고 감동적인 시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진정성이라는 시심의 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끌어당김과 온기의 키워드로 분석해 본 이번 시집은 시가 굳이 복잡하지 않더라도 깊은 감동과 함께 심오한 사유의 깊이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이 다음 시집에서는 절제와 온기를 바탕으로 더욱 그윽하고 아득해지기를 바라본다.
----애지 봄호에서
애지 가을호
가상(들), 그리고 현실이라는 가상
- 서호준의 시세계
임지훈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박태원이 21세기에 살았더라면, 그래도 천변을 걸었을까? 아니면 인터페이스를 통해 게임 속의 세계를 걸었을까?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탐문하기 위해 걸었던 구보의 걸음은, 몇 번의 클릭과 자동이동으로 대체되진 않았을까?
서호준의 엔터 더 드래곤(파란, 2023)은 게임 속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화를 다루는 시집이다. 그 무대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임을 알 수 있는 건 판타지 세계관에 등장하는 아이템이나 종족, 습속 따위가 시어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어떤 부상도 순식간에 치유해주는 물약인 ‘포션’에서부터 세계를 떠받치고 지탱하는 ‘세계수’, 숲속에서 자연 친화적으로 살아가는 뾰족귀 ‘엘프’족, 유동성이 있는 끈적거리는 부정형의 부식석 몸체를 가진 몬스터 ‘슬라임’, 몬스터들이 인간에게 빼앗은 보물을 축적해둔 서식처 ‘던전’, 만물의 근원이자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할 때 운용하는 ‘마나’와 같은 개념들에 이르기까지. 서호준은 현실과 분리된 환상의 공간으로서의 게임 속 세계관의 단어들을 시어로 운용하여 독특한 시적 공간을 창출한다.
하지만 이 말은 엔터 더 드래곤이 문보영의 배틀그라운드(현대문학, 2019)과 같이 특정한 게임 속 세계를 시집 전체의 배경으로 하는 것과는 다소 의미가 다르다. 문보영의 시집은 동명의 게임을 한 시집의 공간적 배경으로 사용함으로써 세계 전체를 하나의 알레고리이자 특수한 시적 인과가 작동하기 위한 시적인 근거로 사용한다. 예컨대 배틀그라운드 속 화자들이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정한 구역이 금지된다는 게임의 특수한 룰 때문이고, 이것은 곧 현실의 양태에 대한 특수한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하지만 서호준의 시집은 다르다. 판타지 게임의 세계관을 시적 배경으로 자주 활용하고 있지만, 그러한 세계관은 특정한 게임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게임’의 세계관으로서 차용된다.
인간을 보고 인간을 말하기…… 캠핑카가 마나를 다 먹었다. 디벡 할리스는 시간을 앞질러 달려서 문제야. 사채를 쓰고 또 온갖 울음소리가 들리는 에어팟을 끼고 집단 망명 신청서를 작성함. 어차피 우리는 같은 종족이야 미래야…… 울타리에 자라던 버섯을 뜯어 먹고 트롤의 똥 위에서 방망이를 타고 파워 섹스를 하고. 자유? 이게 자유? 죽어도 되살아나잖아 같은 몰골 같은 이름으로, 모든 기억을 떠안고, 그리하여 우리는 무시무시한 가명을 쓰기로 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훼손하느라 이야기가 바뀐 줄도 몰랐다. 그러나 태초마을에서야 누가 뭘 하든……
- 「그러나 태초마을에서」, 전문.
예를 들어 <포켓몬스터> 게임의 시작점인 ‘태초마을’을 시적 소재로 활용하는 「그러나 태초마을에서」의 경우, ‘태초마을’이라는 시어는 여정의 시작을 가리키는 용어이면서 “죽어도 되살아나”는 재시작의 지점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게임의 용례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활용된다. 특수한 게임의 상황을 시적 무대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한히 보편화함으로서 시적 세계의 한 부분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 시집의 세계관은 특수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 세계관의 특수성은 보다 면밀하게 말해질 필요가 있다. 가령, 그 세계관이 특수한 것은 ‘가상’이기 때문일까? 일차원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이와 같이 게임 속 세계를 시적 무대로 활용할 때, 그 세계는 특유의 가상성으로 말미암아 독특한 시적 인과를 창출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간직한다. 하지만 서호준의 엔터 더 드래곤의 세계관이 갖는 특수성이란 ‘가상’과 ‘현실’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의 산출물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할 듯 보인다. 그건 이 세계가 「처음이니까 봐줘야 한다」나 「하나 남은 포션」, 「이 몸 등장?!」 등의 시편에서와 같이 가상의 세계를 차용할 뿐만 아니라 「팔각정」이나 「목차에 두고 온 것」, 「사운드 맨」에서와 같이 현실 또한 시적 무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집 전체의 비중을 놓고 생각해볼 때, 배경으로서의 ‘가상’은 배경으로서의 ‘현실’과 위상학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지위를 갖고 존재한다.
그간 격조했으니 지구편을 시작하겠다. 지구편에 등장하는 것은 위례 지구와 미니 블랙홀이다. 위례 지구에서 골프를 치고 미니 블랙홀로 들어가 가벼운 점심을 먹는다는 이야기. 이야기가 끝나고 다음은 지구편이다. 기어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관찰 결과 눈물은 마르고야 만다. 관찰도 끝나고야 만다. 자신감이 없었다면 이 일을 그만뒀을 것이다.
나는 세면도구를 챙겨 지구편에 등장한다. 단서는 없다. 지구편에서 나긋나긋 말하는 법을 배우고 미니 블랙홀로 들어가 남은 점심을 해치울 작정이다. 그러다 멈추었는데 점심과 입 사이 거리가 멀었다. 멀어 보였다. 정오에는 엄마 생각이 났는데 엄마가 꾸며 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지구편에서 끝내야 한다는 거다. 무엇이 나오든 이 자리에서 다 끝낼 것이다.
- 「지구편」, 전문.
시적 무대로서의 ‘가상’과 ‘현실’이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말은 사실 보다 세밀하게 세공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철학적 의미에서의 ‘가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이라는 층위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가상’을 현실의 모조품으로 바라보는 시각 속에서이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현실’과 ‘가상’의 표지로 작동해야 하는 시어들은 각각의 특수한 위상으로부터 분리된 채 구분될 수 없이 뒤섞인다. 이것을 ‘블루마블’과 같이 특수한 게임의 상황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면 특수한 현실에 대한 장난스러운 알레고리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둘 중 어느 하나도 정답에는 가닿지 못할 것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중요한 건 지구 편에서 끝내야 한다는 거다. 무엇이 나오든 이 자리에서 다 끝낼 것이다”라는 진술이 아닐까 싶다. 그 말처럼, 서호준의 시적 화자는 ‘가상’과 ‘현실’의 대비 속에서 어느 한쪽에 인간 존재의 실존적 거처로서의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구편」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엔터 더 드래곤에 등장하는 모든 화자가 공유하고 있는 최소한의 지식이란 바로 이 ‘앎’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이란 어디까지나 위상학적인 고려를 통해 성립된 가정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가 ‘현실’로 감각하는 일체 또한 가상의 한 판본에 지나지 않으며, 다만 그러한 가상에 붙인 이름이 ‘현실’이라는 것일 뿐임을 말이다. 우리는 흔히 ‘가상’의 세계 속 ‘나’의 모습이 ‘현실’의 세계 속 ‘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리라 손쉽게 가정한다. 하지만 서호준의 시적 화자에게 있어 그러한 ‘나’의 모습이란 현실의 연장에 불과할 뿐이어서, 마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따위를 지갑에 넣고 관리하듯 각각의 가상 속 ‘나’의 캐릭터는 “엑셀 파일에 관리”(「방치형 마을」)되어 한데 모아져 있다.
1.
자고 또 잤다. 누가 깨웠는데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턱수염들이 날아다녔던 것 같다. 나를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대로 사형장까지 걸어가면 될까? 복도는 밤새 밝았던 양 맥아리가 없다. 두 줄로 조깅하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을 셀 때 쓰는 단위와 시체를 셀 때 쓰는 단위가 다르고 상태가 뒤바뀌는 순간을 포착하기는 너무 사람답지 않은 일이라 할까나. 오카나와 들렘송은 그러나 기침 더미를 뒤지다가 진실에 가까워진다.
2.
오늘은 세탁기가 잘 돌아가지 않았고 그곳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오늘은 자고 또 잤으며 누가 깨울 때마다 신경질을 냈던 것 같다. 꿈에서 그랬듯이. 하품이 존나 나오고 입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간 것 같다. 확실하지 않아도 그래 확실하지 않아도 실수로 잠드는 편이 나으니까 나는 되도록 다양한 음식을 먹고 누웠다. 누워서 하는 생각은 모조리 진실이며 그것은 잊어야만 한다. 그런데 ― 한편으로 나 역시 내가 죽이고픈 사람 목록에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잠이 잘 오고 어쩌면 이런 생각을 잊기 위해 지루한 게임을 참으며 하품을 이어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짧은 하품 마흔두 번, 긴 하품 다섯 번.
- 「하품이 존나 나오고」, 전문.
각각은 각자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나’의 다른 판본조차 되지 못하고, “어쩌면 이런 생각을 잊기 위해 지루한 게임을 참으며 하품을 이어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짧은 하품 마흔두 번, 긴 하품 다섯 번”이라는 진술처럼, 단지 ‘나’가 경험하는 권태를 견디기 위한 시간에 불과하다. 이 속에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모호하다. ‘나’는 ‘현실’의 권태를 견디기 위해 게임을 하지만, 게임 속 권태를 견딜 수 없을 때엔 현실로 돌아온다. 돌아온다? 아니, ‘현실’이라는 ‘가상’으로 들어온다고 표현하는 쪽이 훨씬 더 적절할 것이다. ‘나’가 어떤 견딤을 위해 게임이라는 ‘가상’을 선택한 것이며, ‘현실’ 또한 권태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카나와 들렘송’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기침 더미 속에서 발견한 진실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가상’이 겹쳐지고 겹쳐져, 심지어는 ‘현실’조차 하나의 ‘가상’으로 분류되어 그 위에 겹쳐질 때, 우리는 여기에서 무수히 겹쳐진 종이더미에서 솟아나온 티끌과 같은 것일지라도, 전체를 관통할 하나의 진실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혹은, ‘현실’조차 ‘가상’의 한 종류임을 간파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상’으로부터 우리가 처한 고착상태의 돌파구가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엔터 더 드래곤이라는 시집이 다루는 진실이란 ‘세계는 존재한다’라거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실존의 증거가 아니라 「하품이 존나 나오고」에서와 같이 끝없는 권태의 양상이다. ‘현실’에 올곧은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나 ‘가상’으로부터 어떤 돌파구를 찾는 것 모두 현실에 대한 부정을 통해 산출되는 ‘현실’도피의 한 방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보다 본원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둘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부가 아니길 바라는 심적 경제의 산물에 가깝다.
그러니 ‘공포’는 ‘가상’에 의해 ‘현실’의 지위가 위협받거나, ‘현실’로부터 비현실적인 것으로서의 ‘가상’이 출몰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공포는 ‘현실’ 또한 ‘가상’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자유? 이게 자유? 죽어도 되살아나잖아 같은 몰골 같은 이름으로, 모든 기억을 떠안고”라는 「그러나 태초마을에서」의 시적 진술이 진짜로 공포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진술이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나’가 불현 듯 게임 속의 세계라는 가상에 던져졌기 때문도 아니고, 그로인해 ‘나’의 ‘현실’의 지위가 위협받게 되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현실’이라 믿고 의심치 않는 세계 속에서도, 죽어도 되살아나는 언데드Undead와 같은 몰골로 끊임없이 살아가야 할 때, 사실은 이미 그런 모습으로 충분히 오랜 시간을 살아왔음을 감각할 때, 그리하여 이 모든 가상들이 같은 하나의 룰을 공유하고 있는 계열체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 진짜 공포가 엄습해오는 것이다. 구태여 ‘가상’ 속에서 죽음을 임의적으로 체험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으며 죽음조차 나를 이 세계에서 바깥으로 꺼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충분히 죽은 삶이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죽은 삶에서 달아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집의 화자가 느끼는 권태란, 단지 ‘현실’ 속에서 목적을 잃어버린 인간의 양태에 대한 표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의미의 것으로, ‘가상’이 ‘현실’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현실’이 가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감각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현실’은 더 이상 확고한 정박점으로써 ‘가상’으로의 여행을 거쳐 귀환해야 할 장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집에서 시적 화자가 종종 드러내는 뿌리 뽑힌 인간과도 같은 파토스에는 이와 같은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이 시적 화자는 자신의 뿌리 또한 ‘가상’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이 게임의 세계를 시적 무대로 활용하고 있다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가상성의 지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가상성을 경유하여 펼쳐지는 지독할 만큼의 현실 인식이다. 그건 21세기적인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적인 것도 아니며, 사이버스페이스적인 것도 아니고, 게임적인 것도 아니다. ‘가상’은 없다는 것도, ‘현실’은 없다는 것도 아닌, ‘현실’은 ‘가상’의 또 다른 판본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통찰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내내 그런 의문에 시달렸다. 만약 박태원이 21세기에 태어났더라면, 그래도 여전히 천변을 걸었을까? 이상이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는 구태여 미쯔비시 백화점의 옥상으로 올라 자신의 날개뼈를 쭉 펼쳐내었을까?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아니지 않을까. 그 모든 걸음은 몇 번의 클릭과 자동이동으로 대체되지 않았을까. 견딜 수 없는 권태를 견디기 위해 가상에서 가상으로 무한히 자신을 옮겨가며, 그럼에도 견딜 수 없는 권태에 시달리면서. 서호준의 엔터 더 드래곤이 길어 올리는 리얼리즘적 질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애지 가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