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3: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1.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발견
[고후]13: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약하지 않고 라는 말은 약하다 것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아무 저항도 없이 죽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금시초문今始初聞이었다.
이 이야기는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금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신은 강했다. 신들의 전쟁이라는 말을 들으면 힘센 존재들이 힘을 겨루며 싸우는 장면이 상상이 된다. 불교를 일으킨 석가모니도 거대한 부처상으로 만들어지고,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하나님의 모습을 아예 만들지도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하는 신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던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능력을 보이라."라고 조롱했다.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마땅히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능력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마]27: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27: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마]27: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마]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당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진짜 평화로운 가정에서 가장의 모습은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이었는가? 오히려 가장 강한 자인 가장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가정을 지도한다. 아버지는 한없이 약한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는 맹수들의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칼싸움하듯 먹이를 모으지만, 그 먹이를 가지고 집에 들어오면 서열 꼴찌이다.
가족 내에서는 가장 약한 자가 서열 1위이다. 아버지는 힘들게 돈을 벌어와서는 용돈을 타 쓴다. 그런 아버지가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가족 내에서 서열 1 순위는 역시 갓 태어난 아기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가족들은 아기의 눈치를 살살 본다.
바울의 시대에도 거짓 목사들은 마치 교회가 세상이나 되는 것처럼 교회에서 권력을 얻고 권세를 부리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자신의 혈통, 자신의 국적, 자신의 가문, 자신의 재력, 자신의 학벌, 자신의 경력, 자신의 언변, 자신의 건강, 자신의 외모, 자신의 인맥, 자신의 행운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같이 폭력적인 사회에서는 권력을 얻는 도구가 되겠지만,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진정한 권위는 남을 위해 희생함으로 얻어진다. 가정 내에서도 어버이의 권위는 희생함으로 얻는다.
사람들에게 는 자기의 편이 필요하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나를 감동시키고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열광하는가? 나를 위해서 죽어주셨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우리의 존경과 사랑으로 강한 권위가 생기셨다. 누군가의 고마움으로 부터 얻은 권위가 진정한 권위고 아름다운 권위이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후]12:14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고후]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사람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아버지 같이 그들을 대한다고 말한다. 돈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려고 준비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바울은 월급을 받지 않고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가르쳤고, 그들을 떠나 있을 때도 후원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뒤에 온 후임 목사들은 그런 바울이 싫었다. 자신들은 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돈을 받지 않고 일한 것은 돈을 받을 만큼 일할 능력이 없거나 몰래 뒷돈을 받아 챙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자식의 것을 속여 배앗는 어버이가 어디 있으며, 자식에게 키워준 값을 내라는 어버이가 어디 있겠는가?
2. 어버이는 약한 자식에게 더 관심을 가진다.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바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병에 걸렸다. 그러나 그 병에 대하여 오히려 자랑했다.
사람들이 보통 두 가지 방법으로 자기를 자랑한다.
1) 지금보다 화려했던 과거(왕년)를 자랑한다. 그런 자랑은 부풀려 진 것이 많다.
2) 어려웠던 과거, 어두웠던 과거와 비교하여 훌륭해진 지금의 모습을 자랑한다. 이것 역시 더러웠던 과거를 미화하는 경향이 많다. 그렇게 어두웠던 과거를 딛고 자수성가하여 이만큼 일어섰다는 것을 자랑한다. 이런 자랑도 역시 부풀려 진 것이 많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높이는 자랑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약한 점, 자타가 공인하는 어떤 부끄러운 병에 걸린 점을 자랑거리고 삼아 자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약할 수록 하나님이 더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어버이는 여러 자녀가 있어도 약한 자녀, 우는 자녀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도 어버이이시기 때문에 약한 자녀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신다.
[막]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건강한 사람보다 병든 사람에게, 돈이 많은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인기 많은 사람보다 따돌림 당하고 핍박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신다.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이 더 많은 돈, 더 많은 건강, 더 많은 형통,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쾌락이라면 비록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돈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돈이 많은 사람 위에 돈이 더 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혜 있는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약한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한 부분을 오히려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라.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자녀가 어버이를 믿듯,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어버이는 자기의 자녀를 결코 편애하지 않는다.
물론 사람은 사람들을 대할 때 편애할 수 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있다. 옛날 우리 교회에 딱 붙어 다니는 주일학생 두 명이 있었다. 유리와 영빈이인가 하는 두 여자 아이들이었다. 내가 내 이름도 어떨 때는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이 아이들의 이름은 잊지 않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 둘 중 한 명이 사모님 앞에서 울면서 목사님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목사님이 자기는 안 예뻐하고 친구만 예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목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전혀 새로운 사건을 맞닥뜨린 것이었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내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아는 존재이다. 내가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에게 더 많은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다른 아이가 화가 난 것이다. 사람은 사람들을 편애하기 마련이다. 사장도 아끼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아낌없이 자르는 직원이 있다.
그러나 사람도 남이 아니라 자식들이라면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아픈 손가락 없는 것이다.
어린이 날에 나는 거제도 장모님을 찾아 뵙고 식사를 대접하려고 거제도에 내려 갔었다. 요즘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해서 이런 휴일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차를 타고 산과 들과 바다로 간다. 장모님의 집 옆에도 자동차 캠핑장이 군데 군데 많이 생겼다. 가서 보니 정말 좋은 차들이 자동차 캠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가족들이 캠핑을 하고 있었다. 고기 굽는 냄새, 아이들이 과자를 먹는 모습, 고기 먹고 소화 시키기 위해서 방방이 장에서 뛰는 모습, 산책을 하는 사람들,... 너무나 평화롭게 행복해 보였다. 물론 이것은 돈이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시간이 나도 돈이 없어서 이런 것을 누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자식들인 인간들에게 불공평하신가?
시편 73편은 세상에서 약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교만하게 잘 살아 가는 것을 보고 낙심했다고 말한다.
[시]73: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시]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73: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시]73: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시]73: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시]73: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시]73: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시]73: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73: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시]73: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시]73: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런 의심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어버이시라면 불공평하지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