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진 시조집 <꽃에 대한 명상> 발간***
-시와소금 시인선 161-
❙이금진 약력
부산 가덕도 출생으로 2015년 《경남문학》 신인상 공모에 시조로 등단했다. 2019년 《서정과현실》 신인상 공모에 당선했으며 시조집으로 『꿈꾸는 봄날』이 있다.
❙출판사 서평
이금진 시인의 시편들은 대체로 아무 거리낌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주저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때로는 한 발 뒤에서 삶을 마주한다. 시인 특유의 온기와 연민이 삶의 연륜에 스며들어 시인이 보아낸 세계를 통해 다양한 삶의 직관을 만나게 한다. 그 대상들은 대체로 멀리 있지 않다. 일상과 밀착되어 있거나 그 주변적 자연환경과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삶을 둘러싼 자연환경이야 너무나 익숙해서 새롭지 않을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보는 이에 따라 그 대상을 어떻게 만나고 보아내느냐 하는 문제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나만의 것이어야 하기에 늘 쉽지 않은 어려움을 야기할 수 있다.
한편 자연 서정의 결을 놓치지 않으면서 미학적 접근에 가닿는 시인의 섬세하면서도 익숙한 일상의 행보는 오직 시인만의 것임을 알게 한다. 이는 아마도 적극적이면서도 쉬지 않고 자아의 성찰을 한 결과로 자아와 마주한 시간을 게을리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장복산 골짝에서 뻐꾸기 한 마리/ 유리창을 내려다보고 슬피 울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우냐 나더라 어쩌라고/ 나도 펑펑 울고 싶은데 너랑나랑/ 이참에 밤새도록 한 번 울어볼까// 네 녀석 뻐꾹뻐꾹 울고 나는 가만히 울고’(「달밤의 연가」 전문)의 자아 확인과 성찰의 시가 그러하다. 마지막 연 ‘네 녀석 뻐꾹뻐꾹 울고 나는 가만히 울고’에서 시인이 마주한 세상은 다음의 꽃으로 이어진 세계와 만나게 한다. 시인의 세상은 온통 꽃 천지여서 소박한 그만의 향기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목차
제1부 달밤의 연가
달밤의 연가 13/ 행암포구 14/ 영화, 한산 15/ 백담사 계곡 16/ 라오스, 붓다 17/ 그 가을, 순천만 18/ 팔순, 원앙부부 19/ 거리 가게 20/ 단풍잎 21/ 상군해녀와 애기해녀 22/ 그리고 우포 23/ 부추꽃 24/ 큰오빠 25/ 부엉이 칼국수 26/ 갯메꽃 27/ 천년지기 28/ 감기 29/
제2부 나도바람꽃
간월암 33/ 폐차장에서 34/ 간절곶 35/ 꽃에 대한 명상 36/ 가을 주산지 37/ 나는 신여성이다 38/ 해국海菊 39/ 난계* 데드마스크 40/ 해바라기꽃 41/ 갓바위 가는 길 42/ 빅토리아 수련 43/ 겨울비 44/ 보도블록 위의 봄 45/ 공손한 절 46/ 출가 47/ 해금강 48/ 할매보살 49/
제3부 폐타이어
폐타이어 53/ 용원어시장 54/ 울릉도 56/ 재건축 57/ 접시꽃 58/ 차마고도 59/ 여수 오동도 60/ 안골포 61/ 아지랑이 62/ 뒷간 63/ 경칩 즈음에 64/ 오막살이 단상 65/ 죽도시장 66/ 참외 67/ 군항제 68/ 호박문학회 69/ 독도 70/ 동행 71/
제4부 금둔사 홍매
소나기 75/ 금둔사 홍매 76/ 팔용산 돌탑 77/ 사월 78/ 볕 바라기 79/ 뚱한 의류수거함 80/ 도서관에서 81/ 92병동 4호실 82/ 빈집 일지 83/ 외딴집·1 84/ 외딴집·2 85/ 외딴집·3 86/ 선상, 24시 87/ 카페, 낭만 88/ 무당개구리 89/
작품해설 | 박지현
그리움과 오랜 염원 그리고 꽃들의 향연 93/
❙작품해설
그리움과 오랜 염원 그리고 꽃들의 향연
박 지 현(시인․ 문학평론가)
이금진 시편은 대체로 아무 거리낌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주저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때로는 한 발 뒤에서 삶을 마주한다. 시인 특유의 온기와 연민이 삶의 연륜에 스며들어 시인이 보아낸 세계를 통해 다양한 삶의 직관을 만나게 한다. 그 대상들은 대체로 멀리 있지 않다. 일상과 밀착되어 있거나 그 주변적 자연환경과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삶을 둘러싼 자연환경이야 너무나 익숙해서 새롭지 않을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보는 이에 따라 그 대상을 어떻게 만나고 보아내느냐 하는 문제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나만의 것이어야 하기에 늘 쉽지 않은 어려움을 야기할 수 있다.
한편 자연 서정의 결을 놓치지 않으면서 미학적 접근에 가닿는 시인의 섬세하면서도 익숙한 일상의 행보는 오직 시인만의 것임을 알게 한다. 이는 아마도 적극적이면서도 쉬지 않고 자아의 성찰을 한 결과로 자아와 마주한 시간을 게을리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장복산 골짝에서 뻐꾸기 한 마리/ 유리창을 내려다보고 슬피 울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우냐 나더라 어쩌라고/ 나도 펑펑 울고 싶은데 너랑나랑/ 이참에 밤새도록 한 번 울어볼까// 네 녀석 뻐꾹뻐꾹 울고 나는 가만히 울고’(「달밤의 연가」 전문)의 자아 확인과 성찰의 시가 그러하다. 마지막 연 ‘네 녀석 뻐꾹뻐꾹 울고 나는 가만히 울고’에서 시인의 마주한 세상은 다음의 꽃으로 이어진 세계와 만나게 한다. 시인의 세상은 온통 꽃 천지여서 소박한 그만의 향기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한여름 여리디여린
세 자매를 등에 업고
조심조심 모래언덕
오르는 덩굴손이
예전에 울 엄마처럼
손톱이 다 닮았네
―「갯메꽃」 전문
우리 주변에 널리 만날 수 있는 풀은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으되 익숙한 이름 외 이름보다 그냥 ‘풀’이라는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에 익숙하다. 이름이 있으나 오래 풀이라고 인식해서일 것이고, 풀이라고 여겼는데 이름을 부르게 되면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갯메꽃’은 바닷가 모래가 있는 부근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익숙한 풀이다. 내륙 쪽에서는 주로 ‘메꽃’으로 불리는 것인데 약간 그 외양이 다를 뿐 거의 같은 품종이다. 시인은 ‘모래언덕’의 메꽃에 주목했다. 거기서 ‘한여름 여리디여린// 세 자매를 등에 업고// 조심조심 모래언덕/오르는 덩굴손이// 예전에 울 엄마처럼/ 손톱이 다 닳았네’의 부분에 시선이 멈췄다. 뜨거운 햇볕에 옹기종기 몸이 겹친 ‘갯메꽃’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익숙한 기억 저 너머의 시간이 문득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 익숙해서‘예전에 울 엄마처럼’ 손을 잡고 등에 업고 토닥이던 엄마를 만나게 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꽃에서 ‘손톱이 다 닮아버린 엄마’의 모습을 보아낸다는 것은 이금진 시인만의 예리한 통찰이라고 여겨진다. 단수의 묘미는 이런 것일 것이다.
아래의 또 다른 꽃의 시간을 만나본다.
부침개 잔치국수 재첩국 계란말이
고명으로 쓰임새가 다양한 정구지
작물을 주인 발자국 따라
키가 큰다는데
텃밭 반 평 남짓 고봉이던 초록빛
구월 햇볕 아래서 보이소 보이소
오종종 별꽃은 피어
이랑은 꽃밭입니다
―「부추꽃」 전문
부추꽃은 아주 소박하다. 꽃대가 위로 쭉 뻗어 올라 하얀 작은 꽃을 무더기로 피운다. 잎이 식용인 탓에 어디서나 자주 볼 수 있는 작물이다. 마트에서 채소로도 만날 수 있고,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주택가 주변 빈 땅이 있을 땐 놀리지 않은 작물로 부추를 볼 수 있다. 식탁에서의 쓰임새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디든 가리지 않고 잘 자라 줄 뿐만 아니라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아름답기까지 하다. 꽃꽂이 줄기를 세워 당당하게 하늘을 향해 피어 있는 소박한 하얀꽃 무리를 한 발 떨어져서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진한 색상의 튤립 무리에서 볼 수 없는 수수하면서도 인상적인 하얀 꽃 무리가 우리에게 친숙하고 늘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이웃이거나 친구인 것만 같은 것이 그 아름다움의 격을 달리 만든다. 그런데 부추는 꽃을 먹기 보다 잎은 매우 다양한 쓰임을 갖는다. 작품에서 나타나 있듯 ‘부침개’에도 들어가고, ‘잔치국수’에도 들어가고 재첩국에 작게 썰어서 고명으로도 얹어 먹고 심지어 계란말이에 다른 채소와 함께 고명으로 들어간다.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나의 삶’에 매우 익숙한 증인으로 삼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나를 다르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마 시인은 자아의 이면을 구성하고 있는 자연친화적인 세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텃밭 반 평 남짓 고봉이던 초록빛’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구월 햇볕 아래서 보이소 보이소’조용히 외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부추꽃이 가진 강인한 생명성과 ‘오종종 별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식용과 관상용 꽃으로서의 효용성을 동시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시인이 가진 미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매우 질박한 것임을 확인하게 한다.
마당가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돌절구
돌에는 백 년쯤에야 꽃이 핀다는데
얼굴에 저승꽃 핀 듯
다문다문 돌꽃 피었네
어머니, 그 어머니가 다듬어 논 돌절구
곱디고운 연꽃 한 송이 이슬 달고 피었네
밤사이 뉘가 다녀갔을까
두 여인의 등이 떴네
―「꽃에 대한 명상」 전문
위의 시 「꽃에 대한 명상」은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시선을 끄는 주된 내용에 ‘돌절구’가 있다. 아니, 돌절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다. 돌절구는 아직은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나 전국의 도시 전체가 아파트 촌으로 뒤덮인 지금은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에서나 가끔 만나볼 수 있다. 아니, ‘돌절구’는 진작 박물관에 들어가 있거나 외곽지역의 고깃집의 심심찮은 볼거리로 한군데 있는 듯 없는 듯 밀쳐져 있는 경우도 본다. 유명 소설에서 등장한 돌절구는 그 작가의 집필실이나 생가의 마당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 부분을 아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른다.
이금진 시인이 돌절구에서 펼쳐 보인 것은 사실 매우 소박하다. 오래된 돌에서나 볼 수 있는 ‘돌꽃’은 깊은 산에 가서 만날 수 있는 큰 바위에 핀 ‘바위꽃’과 같다. 오래된 돌에서 만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돌절구의 경우 생활에 밀착된 도구의 기능을 한 것이기에 친숙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도구에 ‘꽃’이 피었음을 시인은 눈여겨보았다. 예사로 지나칠 수 있을 법한 데도 시인의 눈은 ‘돌절구’에 핀 시커먼 ‘저승꽃’을 보았다. 오래 산 노인의 얼굴에 핀 검버섯도 ‘저승꽃’이라는 표현을 과거에는 자주 썼다. 그러나 오래된 물건과 사람에게 경과한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래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시간 이전의 시간, 그 시간이 갖는 그 나름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싶어서일 것이고, 그 의미가 함의하는 깊이와 무게를 만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마당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돌절구’는 ‘앉아있는’의 의인화를 가져온 것인데 사실 돌절구는 시인의 눈에만 앉아있을 뿐이다. 그저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입부에서 드러난 시인의 감성은 돌절구를 보는 즉시 삶의 시간의 역사성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먼 시간 속 지난한 자신의 삶을 살아낸‘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또한 보아냄으로써 아득한 시간 저쪽의 돌절구에 밀착했던 삶을 살았던 어머니를 소환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시간을 꼭 껴안고 한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돌절구’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어머니, 그 어머니가 다듬어 논 돌절구/ 곱디고운 연꽃 한 송이 이슬 달고 피었네’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곱디고운 연꽃 한 송이 이슬 달고 피었네’로 마주하면서 시인은 ‘꽃’에 대한 의미를 각별히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승꽃과 같은 ‘돌꽃’을 보며 ‘밤사이 뉘가 다녀갔을까/ 두 여인의 등이 떴네’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의 시선은 곧 이동한다. 물론 꽃을 따라서이다. 작품 「외딴집 ‧1」의 ‘정원에는 수선화 우단동자 수수꽃다리/ 맨 앞쪽 옹기종기 앉아있는 채송화/ 그리고 실바람이 품어 논 민들레 아가들’을 마주하고 있는 시인은 동시에 관조자처럼 보이는 ‘저 건너 까치아파트 D동 805호/ 수다쟁이 여자’를 통해 ‘지붕 낮은 외딴집’을 확장하고 있다. 그곳은 ‘반가운 택배기사가 가끔씩 다녀가는’ 곳이다. 외딴집이어서 사람들 발길이 드문 곳이기에 계절마다 수많은 꽃이 서로 어우러져 ‘꽃동산’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서 더욱 꽃들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니니 저 스스로 삶을 확장하고 있는 건강한 생명을 발견한 시인의 눈에는 ‘수선화니 우단동자니 수수꽃다리나 채송화’가 그저 소박한 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외진 곳에 핀 꽃이라서 ‘외딴집’ 부근에 핀 꽃이어서 꽃들이 외로워하거나 그곳 사람들이 외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일 게다. 누군가의 정성이 작은 꽃, 즉 생명을 확장하고 피워올리는 것은 ‘나’와 ‘너’의 연대와 확장을 보여주고 있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오종종 풀숲에 피어 있는 양지꽃처럼
유모차가 만차인 골목길에 나앉아서
꼬부랑 할머니 네댓
오물오물, 오물오물…
틀니는 어디 두고 암호 같은 대화를
알 수 없는 말들을 주거니 받거니한다
하회탈 할머니들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볕 바라기」 전문
위의 작품 「볕 바라기」 역시 그러하다. 오래 살아서 더 강인한, 강인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유연함이 작품 전체에 퍼져 있다. 꽃들이 해를 따라 빙빙 돌 듯 오랜 시간 해를 받으며 살아온 ‘꼬부랑 할머니’들 역시 그렇다. ‘해-볕’이라는 공식에서 여전히 그 존재의 확장을 이루고 있다. ‘해’보다‘볕’이라는 표현을 통해 할머니들을 더 따뜻하게, 실제 꽃보다 더 꽃처럼 보이는 것이 이채롭다. ‘오종종 풀숲에 피어 있는 양지꽃’에 비유한 시인의 재치가 돋보이는 것이다. 봄 햇살에 당당하게 피어 있는 양지꽃은 매우 여린 듯 당차다. 작아서 여릴 것이라는 통념을 간단하게 잊게 하는 ‘양지꽃’은 노란 그 색깔도 색깔이려니와 거의 땅에 붙어 있는 듯 앙징스러운 모습은 보면 볼수록 귀엽다. 바짝 붙어 피어 서로 등 기대고 받쳐주고 밀어주고 안아주듯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보는 이의 입가를 절로 올리게 하는 것이다. ‘할머니’를 ‘양지꽃’에 비유하고 있는 시인은 좋은 눈썰미를 가졌다. ‘꼬부랑 할머니’들을 이른 봄날 이토록 환하게 적절한 대상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가 다 빠져 말을 할 때‘오물오물’거리는 작고 볼품없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행색의 할머니들이다. 그러한 할머니들을 시인은 이들을 이른 봄에 피어난 ‘양지꽃’에 비유했다. 눈부신 봄 햇살 아래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꽃 ‘양지꽃’의 존재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유모차가 만차인 골목길에’나 앉은‘고부랑 할머니 네댓’과 겹쳐 보였음은 시인만이 가진 안목이리라. 특히 할머니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저 입을 ‘오물오물, 오물오물’거릴 뿐임에도, 아니 그런 것이 봄 햇살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앙징맞은 ‘양지꽃’과 겹쳐 보였는지 모른다. ‘틀니는 어디 두고 암호 같은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더라도 말이다. 시인이 보아낸 생명은 겨우내 언 땅을 뚫고 나온 억척스러운 작은 생명인 양지꽃과 강퍅한 오랜 세월을 이겨내고 여전히 따스하고 보드라운 새봄, ‘햇살=볕 바라기’를 맞이하고 있는 할머니들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각이 진 벽돌과 다 닳은 타이어가
바닷가 스레이트 지붕 위에 앉아서
바람이
볼어오면 서로
꼬옥 앉아준다
갯마을 한 가족 보금자리를 책임지는
저 모난 외모와 동글동글한 외모는
특별한
특별한 만남이다
손님같이 연인같이
―「폐타이어」 전문
시인의 시선은 작은 생명체이건 그 외양이 탐탁지 않은 생명체이건 그다지 가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깃든 ‘생명성’이다. 또한 생명성과 함께 ‘온기’에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안에 깃든 남다른‘온기’를 찾아냄으로써 주어진 생명성에 더욱 강한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시선이 ‘각이 진 벽돌과 ’‘다 닳은 타이어’를 만날 때 그들의 실존이 묘하게도 비슷하게 겹쳐져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은 곧 작품은 반전을 가져오게 한다. ‘각이 진 벽돌과 다 닳은 타이어’가 ‘바닷가 스레이트 지붕 위에 앉아서// 바람이/ 불어오면 서로/꼬옥 안아준다’에서 서로 결이 맞지 않는 개체가 비슷한 상황을 만났으나 서로 내치기는커녕 오히려 ‘꼬옥 껴안아’주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들의 존재는 이미 쓸모가 다해 버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버려지기 전에 자신의 역할을 다시 한번 더 해내는 존재로 재탄생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곧 발견한다. 이들 폐품의 재구성으로 ‘갯마을 한 가족 보금자리’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들 개체의 의인화가 얼마든지 온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시인은 능청스럽게 마무리한다. ‘특별한/ 특별한 만남이다/ 손님같이 연인같이’라는 표현을 입힘으로써 이들의 연대가 서로 낯선, 볼일 없는 폐품의 신세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재탄생의 기회로 생명성을 가진 존재가 되고 있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읽어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천동 주민센터 앞마당에는 접시꽃
다층으로 피어서 생글생글 방긋방긋
환하게 안녕하세요
웃으며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뭘 도와 드릴까요
친절한 공무원이 반갑게 인사하듯
뙤약볕 더운 줄도 모르고
여름꽃 한창이다
―「접시꽃」 전문
아주 친절하고 평범한 인상을 가진 ‘접시꽃’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 역시 시인만이 가진 주어진‘생명성’과 그들만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 주변에 흔한 ‘접시꽃’의 존재이기에 더욱 친근한 꽃이다. 그러므로 ‘마천동 주민센터’의 ‘친절한 공무원’으로 변환할 수 있는 것이다. 혹한이든 뙤약볕의 불볕더위이든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해내는 평범한 공무원을 떠올린 시인의 평범하지 않은 따스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뭘 도와 드릴까요’로 겹친 ‘접시꽃’의 존재는 아마도 시인만의 안목에서 꽃핀 것일 테지만 공감을 얻어 내기에 충분한 개연성 또한 읽히는 것이다. 꽃을 연민하고 사랑하며 곁을 주는 시인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겨울도 봄도 아닌 어중간한 그사이
아득한 순천만 갈대밭을 지나서
선암사 무전 담장에 핀
고매화 보러 오셔요
조계산 산그늘이 드리울 즈음이나
꽃비가 난분분 난분분 내리기 전
꽃 한 번 놀러오셔요
그대를 기다릴래요
그대의 삶에 근심 걱정이 있다면
아무런 생각 없이 천년 절집 오셔서
대문 옆 뒷간 들렸다가
싹 비우고 오셔요
―「접시꽃」 전문
위의 작품 「뒷간」에서도 꽃은 등장한다. 시인이 즐겨 차용한 꽃의 의미는 다양할 것이나 이 작품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고매화’를 보러올 때는 조건이 붙는다. ‘겨울도 봄도 아닌 어중간한 그사이’라는 기간의 조건이 붙는다. 물론 꽃이 피는 시기에 맞게 와야 할 것이지만 계절의 ‘어중간한 그사이’를 설정한 것이다. 거기에다 ‘조계산 산그늘이 드리울 즈음’과 ‘꽃비가 난분분 난분분 내리기 전’이라는 단서 조항도 붙는다. ‘드리울 즈음’이거나 ‘난분분 내리기 전’이라는 때를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대문 옆 뒷간 들렸다가’라는 마지막 단서에 주목하게 한다. ‘그대의 삶에 근심 걱정’이 있다면 말이다. ‘고매화’를 보러 갈 때 고매화의 기운을 받으려면 내 삶에 근심 걱정거리를 다 내버리고 와야만 제대로 만날 수 있다는 전제가 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년 절집’에 핀 오래된 매화는 그 살아온 기간만큼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제대로 속을 비워야만 제대로 된 기운을 받아 안을 수 있다는 시인의 일침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고매화’의 아름다움은 제목 ‘뒷간’에서 읽히듯 묵힌 것을 버려야만 새것을 얻을 수 있으며 그 향기가 주는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일게다.
해우소를 기대고 낙안읍성 바라보며
저 혼자 가만히 피고 지는 납월매
설한품 꽃 진자리에는
열매도 맺지 못하고
황진이 저리고울까 홍랑이 저리고울까
일평생 지고지순한 한 여인의 연정처럼
절간의 수줍은 납월매
꽃샘추위 더 붉다
―「금둔사 홍매」 전문
재미있게도 위의 작품 역시 아름다운 ‘홍매’ 역시 ‘해우소’를 기대고 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이거나 그 비슷한 것일 수 있다. 시인의 시선이 꽃에서 꽃으로 옮겨가면서 그 시간을 함께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꽃을 바라보는 시인은 시선은 정작 꽃을 통해 자아동일성의 모습을 유추하게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이다. 대체로 많은 이들이 꽃을 통해 어떤 인물을 그려내거나 그와 연관성이 있는 일을 작품에 활용하는 일이 흔한 일이긴 하나 시인의 지닌 감성은 작품에서 작품으로 자연스러운 정서와 함께 유관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설한풍 꽃 진자리에는/ 열매도 맺지 못하고’라는 애처러운 연민을 주었다가 ‘황진이 저리고울까 홍랑이 저리고울까’라는 옛 여인의 모습을 통해 반추된 꽃의 정서가 비록 고답적인 표현을 차용했음에도 시인의 정서와 합일되고 있는 부분에 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있다. ‘정말로 아름다우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재주가 없다’라는 등등의 말을 하곤 한다. 우리의 공통된 기억의 하나로 유명한 옛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학교 수업이나 책을 통해 전달받았으므로 쉽게 불려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오래된 것’의 공통점을 가졌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이렇듯 현재와 과거라는 종횡의 정서를 휘젓고 있다는 것을 시인의 작품을 통해 더듬어 보는 것이다.
이금진 시인의 작품들은 대체로 섬세하면서도 대상에 대한 시선의 깊이를 엿보게 한다. 그 넓이와 깊이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작품 편편이 가진 호흡과는 달리 짧은 내용일지라도 내용이 유장할 때 호흡을 길게 잇기도 한다. 순간순간의 감정에 호소하며 대상에 천착하나 그 대상이 가진 이면을 간과하거나 쉽게 놓치지 않는 여유와 유연함도 보여주고 있다. ‘해종일 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리네/ 목포벌에 기대 사는 하얀 집 한 채// 들머리 개성이 다른 시화들은 손을 잡고// 발코니에서 서성이던 중절모 노시인/ 저만치 사지포 어깨 위에 내려앉은// 꽃노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 하실까// 쪽지벌 세트장에 다 낡은 조각배 하나/ 구월 근처 서걱거리는 갈댓잎 꺾어서// 초록빛 칠십만 평의 긴 긴 일기를 쓴다’(「그리고 우포-우포시조문학관」 전문)을 읽으면서 시인이 가진 큰 잠재력에 힘을 실어본다. 시집 전편에서 고루 보여준 삶과 시선의 깊이와 치유의 시간까지 읽어내리는 것이 오직 내 것만이 아니라 이웃의 작은 대상을 확대하여 삶의 무게에 적용하는 에너지가 웅숭깊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