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드니 대성당
Basilique Cathédrale de Saint-Denis
Cathedral Basilica of Saint De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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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aint-denis-basilique.fr/en/ 홈페이지
고딕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알 수도 있는, 최초의 고딕 성당은 파리의 북쪽에 접해있는 위성도시인 생드니에 있는 생드니 대성당입니다.
생드니 대성당은 파리 시내를 남북으로 잇는 지하철 13호선으로 쉽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생드니(Saint Denis)는 프랑스 및 파리의 수호성인인 성 디오니시오의 프랑스 이름인데,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생드니는 250년경 지금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참수당하였으나, 잘린 자기 머리를 양손에 든 채 북쪽으로 한참을 걸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죽었다고 합니다.
475년경 역시 파리의 수호성인인 성 쥬느비에브(Sainte Genevieve, 420~502?)가 생드니의 무덤 자리에 생드니를 기리는 예배당을 세웠고, 632년경에는 클로비스 1세의 증손자인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 재위629~639)가 여기에다 베네딕트회 수도원을 건설해서 규모를 키우고 나중에 그 자신도 여기에 묻힙니다.
생드니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aint Denis)은 성인이 사망한 장소에 세워진 교회라서 교회 이름에 ‘바실리카(Basilica)’가 들어있고, 대성당으로 번역되는 카테드랄(Cathedral)은 ‘주교좌성당’ 즉 주교가 상주하는 성당이란 뜻입니다.
주교(bishop)는 시장 급 신부 정도로 생각하면 되니까, 주교좌성당(대성당)은 시청 급의 성당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드니 대성당은 성 디오니시오의 위상에 걸맞게 무려 프랑크왕국의 창시자인 클로비스 1세와 증손자인 다고베르트 1세를 비롯해서 10세기 이후로는 루이 18세에 이르기까지 왕실 묘지로 사용되었고, 앙리 2세의 부인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앙리 4세의 부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 등 역대 프랑스 왕비의 대관식을 치를 만큼 예로부터 그 지위가 빵빵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루이 6세(재위 1108~1137)의 고문이자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수도원장 쉬제르(Suger, 1080~1151)가 유물을 관람하기 위해 모여드는 많은 순례객을 감당하기 위해 교황과 국왕을 설득해서, 로마네스크의 선두집단인 노르망디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서 당시의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하여 기존의 어둡고 육중한 로마네스크 성당을 완전히 새롭게 리모델링하게 됩니다.
쉬제르는 먼저 서쪽 입구(전실)를 시험 삼아 고친 다음(1130~40),
동쪽 성직자 영역을 본격적으로 고치고(1140~44),
마지막으로 본당까지 손대려고 했다가 노환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나중에 한참 뒤인 고딕 후기에 성가대석 일부와 트랜셉트(십자가의 팔 부위)와 본당도 증축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고딕 직전인 서쪽 현관과 최초의 고딕인 성가대석 끝부분과 후기 고딕인 나머지 부분의 모습까지 골고루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드니 대성당도 백년전쟁과 종교 전쟁과 대혁명 및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많은 손상을 입었으며, 지금까지도 계속 복구가 이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생드니 대성당의 평면도
위 도면의 왼쪽 붉은색 동그라미 친 검은색 부분이 고딕 직전인 전실입니다.
오른쪽 파란색 선 안에 있는 회색 부분이 성가대석 중 지금도 남아 있는 최초의 고딕 부분입니다.
오렌지색 영역은 후기 고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서쪽 정면 (파사드 Façade : 1130~40)
생드니 대성당의 정면
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User:Chabe01
쉬제르가 가장 먼저 손을 댄 서쪽 입구 부분은 세 개의 출입구와 중앙에 장미창, 좌우로 한 쌍의 종탑으로 구성되어, 이 형태가 곧 이은 고딕 성당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하지만 종탑이 오른쪽에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1846년에 번개에 파괴된 왼쪽 탑을 어설프게 재건했다가 다시 무너지는 바람에 아직도 저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출입문 위의 반원형 부분을 팀파눔(tympanum)이라고 부르는데, 중앙 출입문 위의 팀파눔에는 19세기에 복원된 <최후의 심판>을 다룬 조각이 있고, <최후의 심판>은 고딕 성당의 정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생드니 대성당의 중앙 출입문
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User:Chabe01
참고로 생드니 대성당에 등장한 고딕 최초의 장미창은 이미 12세기의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의 교회들에 나타나는데, 베로나에 있는 산 제노 성당(Basilica of San Zeno)이 장미창의 원조라고 합니다.
산 제노 성당, 베로나
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User:Lo_Scaligero
전실(배랑, 나르텍스, Narthex : 1130~40) - 고딕의 실험
전실 – 신도석 쪽에서 출입문을 바라본 모습
전실의 엄청나게 굵은 다발 기둥
외부에서 본당으로 들어가기 전의 현관 역할을 하는 전실은 3개의 정문 뒤로 네이브와 아일 복도가 이어지는 3랑식에 길이가 2칸인 2베이의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전실에는 고딕의 특징이 되는 4분 리브 교차볼트와 다발 기둥을 한 번 시도해봤으나, 아직은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기둥이 민망할 정도로 과도하게 굵어서 고딕으로 부르기에는 곤란한 상태입니다.
성가대석 – 최초의 고딕(1140~44)
‘빛이 곧 신의 상징’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쉬제르 수도원장은 빛으로 충만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곧이어 착공한 동쪽 성가대석 부분에서는 리브볼트와 첨두아치 기술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무엇보다 기둥과 벽을 얇고 튼튼하게 올리는 새로운 공법을 적용합니다.
참고로 동쪽의 성직자 영역 전체를 그냥 성가대석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로 예전의 육중한 사각기둥이 아닌 한결 가늘어진 그리스식 원기둥을 예전보다 뚝뚝 띄운 간격으로 설치해서 탁 트인 실내를 만들고, 이제는 얇아진 외벽에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커다란 창을 만들어 넣어서, 개방된 공간에 신비로운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공간을 최초로 선보이면서 드디어 고딕의 출발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성대한 축성식에 참석한 많은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생드니 대성당의 새로운 모습에 충격을 받으면서 고딕 성당은 주변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당시의 최초 고딕 부분은 앰불러토리 복도와 복도 밖의 외벽에 자리 잡은 7개의 예배당입니다.
아직은 이후의 성당에 비해 높이는 부족하지만, 확연히 가늘어진 기둥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커다란 창으로 자신이 고딕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가대석이 완공된 1144년을 고딕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당을 방문한 날 하필 딱 이 부분만 공사 중이라서 매우 안타깝게도 실물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
최초의 고딕인 앰불러토리 복도와 예배당
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User:P.poschadel
개축 – 후기 고딕
성가대석(1231~41)
트랜셉트(~1241)
신도석(1240~81)
고딕의 시작을 알렸던 생드니 대성당은 그로부터 약 100여 년이 지난 후에 루이 9세의 명을 받은 건축가 피에르 드 몽트레유가 성가대석, 트랜셉트, 신도석의 새로운 증축을 시도하면서 본격적인 후기 고딕 양식을 전개합니다.
성가대석
성가대석
1층 : 최초의 고딕인 앰불러토리 복도와 예배당
2층 : 후기 고딕인 창이 있는 트리포리엄
3층 : 후기 고딕인 천측창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User:P.poschadel
성가대석 벽의 형태는 전성기 고딕에서 완성된 <아케이드-트리포리엄-천측창>의 3층 구조이지만, 트리포리엄과 천측창의 창의 모양으로 후기 고딕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층인 아케이드 부분은 최초의 고딕인 앰불러토리 복도와 예배당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지만, 2층인 트리포리엄에 창이 들어가 있고, 천측창의 직선부에는 오쿨루스 셋에 랜싯 넷의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신도석
동쪽 성가대석을 바라본 생드니 대성당의 내부
생드니 대성당의 신도석(네이브) 벽
신도석(네이브) 벽의 형태도 성가대석 벽과 마찬가지로 <아케이드-트리포리엄-천측창>의 3층 구조에, 천측창과 트리포리엄의 창이 후기 고딕의 형태입니다.
1층인 아케이드 외벽의 창은 둥근 오쿨루스 하나에 기다란 랜싯 두 개라서 전성기 고딕의 형태이지만, 트리포리엄에 창이 들어가 있고, 천측창은 오쿨루스 셋에 랜싯 넷의 구조입니다.
여기에다 당연히 후기 고딕답게 창의 면적은 최대한 넓어져 있고,
수직적인 느낌이 더 강화되어서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지는 기둥의 수직선이 옆으로 이어지는 수평선을 덮으면서 지나가고,
천측창과 트리포리엄이 수직선으로 서로 연결되어서 마치 하나의 층인 것처럼 보이게 해서 <아케이드-천측창>의 2층 구조 같은 느낌을 선사합니다.
트랜셉트와 교차랑
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성당이라서 트랜셉트에 출입문이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 트랜셉트의 장미창은 랭스 대성당의 장미창을 참고하여 후기 고딕인 레요낭 양식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매우 화려합니다.
왼쪽은 남쪽 트랜셉트
오른쪽은 북쪽 트랜셉트
남쪽 트랜셉트의 장미창
북쪽 트랜셉트의 장미창
밖에서 바라본 북쪽 트랜셉트
밑에서 올려다본 성당의 천장
플라잉버트레스
신도석의 플라잉버트레스
성가대석의 북쪽 뒷모습
왕실 묘지
1층에 전시된 무덤
왼쪽 위는 프랑크왕국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466~511)의 관
중간 왼쪽은 마리 앙투와네트, 오른쪽은 루이 16세
지하의 무덤들
클로비스 1세의 며느리인 아레공드(Arégonde, 520~580)가 생드니 대성당에 묻힌 최초의 왕족이며, 이 자리에 수도원을 건설한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 재629~639)가 여기에 묻힌 최초의 왕입니다.
프랑크왕국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466~511)는 원래 파리에 있는 지금의 팡테옹에 묻혔으나, 나중에 생드니 대성당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파리의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재위 987~996)에 의해 987년에 프랑스 왕국이 시작된 이후로는 1824년의 루이 18세까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한 대부분의 왕과 왕비가 이곳 생드니 대성당에 묻혀있다고 합니다.
유럽의 교회를 방문하면 유독 이렇게 왕족과 성직자와 유명인 및 후원자들의 무덤이 많은 이유는 하나님의 눈에 잘 띄어서 천국으로 가기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
첫댓글 일단 한번 봤습니다 형님~^^
내용이 와닿아야 되는데... ^^
다 잊어 먹고~ 다시 읽으니 부분적으로 앞에 글들도 생각나기도... 바실리카가 성자가 죽은 곳에 세워진 교회를 뜻한다는 것을 알았네요^^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도 베드로가 죽은 자리에 지어서 이름에 바실리카가 들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