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형수로부터 온 편지 --
며칠 전 대전교도소에 있는 어느 사형수로부터 나한테 편지 한 통 왔습니다. 사형수라는 말에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진다구요? 내가 대전교도소에서 일할 때 연을 맺은 사형수인데, 5년 전 내가 이 곳 논산지소로 전출 온 뒤로 해마다 연말이면 나한테 편지를 보내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 대기 중인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아마 현재 전국의 70여 명쯤 되는 사형수 중에서 최고참 반열에 올라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나한테 1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재작년에 이 사람 편지를 받고 바쁘고 어찌어찌하다가 답장을 못 했더니 작년에는 삐졌나 편지가 안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 삐졌느냐. 올해는 왜 편지 안 하느냐”라고 편지를 보내 따졌더니 쏜살같이 답장이 온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사형수들은 ‘최고수’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최고 중한 형벌을 받은 수용자라는 뜻이겠지요. 사형수들은 일반 동료 수용자들이나 교도소 측에 골치 아프고 부담스런 존재임에 틀림 없어요. 사형수와 한 방을 쓰는 동료 수용자들은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지요. 하루 종일 사형수의 눈치를 보느라 말도 조심해야 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합니다.
방에서 모든 것이 그 사형수 위주로 흘러가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방사람 모두가 같은 방 사형수를 신주 모시듯 떠받들어 주어야 하니까요. 만약 조금이라도 사형수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그래서 사형수와 한 방을 쓰는 심약한 수용자는 담당 직원에게 “제발 저를 다른 방으로 옮겨 달라”라고 애걸복걸하기도 하지요. 정말로 영화 속이나 소설 속에 나올 수 있는 광경이 아닐 수가 없지요. 사형수들을 이길 수용자는 아무도 없어요. 제 아무리 덩치 크고 기세등등한 깡패라도 사형수들한테는 꼬리를 내리게 돼 있어요. 그 사람들(사형수)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것도 없고 더 이상 잘못될 것도 없으니까요.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직원들에게는 고분고분해요. 직원들이 알아서 자기들 편리 좀 봐달라는 의미죠. 그래서 직원들도 웬만하면 사형수들에게는 특별히 신경 써서 잘 대해주려고 하지요.
위에 언급한, 저한테 편지 보내던 그 사람은 몇 명의 사형수 중에서 좀 더 유별났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형수는 해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11월 또는 12월이 되면 느닷없이 방에서, 특히 한밤중에, 경련을 일으키며 떼굴떼굴 구르는 등의 발작증세를 일으켜 방 사람들과 교도관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곤 했지요. 곧 형장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공포심 때문에.....
사형집행은 대부분 연말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포에 떨다가 새해가 시작되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최소한 그해 1년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다시 연말까지 극도의 공포감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 최고의 희망은, 언젠가는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살아서 나가는 것입니다.
요즘 국회에서 일부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사형제 폐지가 논의되고 있고, 일부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사형제 폐지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으니 당사자인 사형수들은 지금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찬바람 불어도 이제는 예전처럼 바들바들 떨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한테 편지하는 그 사형수가 일자무식이어서 전에는 편지 쓸 때도 동료 수용자들을 시켜서 썼는데, 요즘은 자기가 한글을 깨우쳐서 직접 쓰는 것이라고 자랑을 하더군요. 정치적 분위기(사형제 폐지 논의)에 힘입어 이 사람이 큰 희망을 가지고 뭐라도 배우면서 살아가려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몇 개월째 뛰지 못하고 담배 끊고 왕창 술만 마셔댔더니 체중이 다시 엄청 불어서 이젠 뛰려고 해도 못 뛰겠어요. 부상도 다 나아가는 중인데 어찌해야 하나요? 이젠 부상이 아닌 불어난 체중 때문에 못 뛰겠어요. 어찌해야 하나요?
누가 속시원히 말 좀 해주세요 제발!
(위의 글은 2006년 1월에 끄적거린 것입니다)
위에 내가 언급한 사형수가 암으로 투병하다 2021년에 대전교도소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 사람 어떻게하든 감형받아 언젠가는 담장 밖으로 나가길 꿈꿨는데, 결국 죽어서야 그 꿈을 이룬 것이다. 그 사람은 가족도 없는 상태였다. 사형수는, 가족이 없는 경우가 많고, 있다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들하고도 멀어지게 된다. 사형수가 사망하면 가족이 시신을 인도해가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공동묘지에 묻히게 된다고 한다. 교도소에는 이런 인생 저런 인생이 있기 마련이다.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권력에 취해 권력을 맘껏 휘두르고 권력을 남용한 사람들도 교도소 신세를 면치 못한다.
평생 사형수들 교정교화에 헌신하여 ‘사형수의 대부’라 불리는 박삼중 스님은 오래전에 사형수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여러 권의 책으로 펴냈다. 그중 몇 권을 소개한다면, ‘사형수 어머니들이 부르는 통곡의 노래(1)’이란 부제가 붙은『내 죽거든 뼈에 꿀을 발라 까막까치 밥으로 뿌려주오』. ‘사형수 어머니들이 부르는 통곡의 노래(2)’ 부제의『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아들아, 이 에미 젖 한 번 먹고 가려므나』. 그리고 ‘사형수 어머니들이 부르는 통곡의 노래(3)’ 부제의『가난이 죽인 불쌍한 내 자식이 마지막 사형수이길 빕니다』등이 있다. 이 책들은 수십 년 전에 출간되어 지금은 구하기 힘들 것인데, 나는 신임 교도관 시절 삼중 스님이 쓴 사형수 책에 코를 박고 읽었다. 30여 년 전, 삼중 스님이 대전교도소에서 수많은 수용자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법문을 설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시 법문 서두에서 삼중 스님은 “제가 여러분과 같은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여러분처럼 제복을 입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제가 여러분처럼 머리를 빡빡 밀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청중(수용자)들의 호기심을 잔뜩 키웠다(요즘은 수용자들도 자유롭게 머리를 기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재판 끝나고 형이 확정되어 기결수가 되면 누구든 예외없이 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밀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삼중 스님은 법문에서 업보를 강조한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즉 여러분(수용자들)이 여기 교도소에 들어오게 된 것은 전생에 죄를 지어 업보가 되어 교도소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생의 업 때문에 교도소에 들어왔다는 말이었다. 사람이 낫을 들고 풀을 베다가 실수로 뱀을 건드려 뱀이 죽었다면 그것도 업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날 청중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삼중 스님의 사자후를 토하는 듯한 법문에 풍덩 빠졌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아들아, 이 에미 젖 한 번 먹고 가려므나』에 나오는 고금석이라는 사형수와 삼중 스님의 인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예전에 여러 언론 매체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고금석은 8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아 사형수가 되었다. 나도 당시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보도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고금석이 교도소에서 처음에는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견진성사까지 받았으나 이후 불교에 귀의하여 삼중 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 고금석은 89년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3년간 삼중 스님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 사형수 고금석에게는 Y라는 연인이 있었다. 고금석이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으로 사형수가 되어 삼중 스님의 지도로 신실한 불자의 길을 걷자 Y는 고금석에게 더욱 빠져들게 되었고 Y는 고금석과 옥중 결혼식을 시켜달라고 당국에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형수와의 옥중 결혼식은 애당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Y는 연인 고금석이 사형을 당하면 Y 자신은 산사의 여승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고금석이 사형 집행을 당하고 나서 Y는 실제로 여승이 되었다.
고금석이 사형 집행을 당하던 날의 사형장 풍경도 책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삼중 스님이 사형장에 들어서자 고금석은 부드러운 미소로 삼중 스님을 맞았고, 삼증 스님은 고금석을 보자마자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이 승려라는 신분도 잊은 채 눈물로 자신의 가사를 흠뻑 적실 만큼 펑펑 울었다. 몇 분 있으면 세상을 하직할 사형수가 웃으면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위로를 해주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기막힌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마치 사형수 김용제가 사형 집행 직전 웃음 띤 얼굴로, 울고 있는 수녀님들을 위로하던 상황과 똑같다고 할 수 있겠다. 고금석이 교수대로 가기 전, 삼중 스님은 고금석에게 마지막 법문을 베풀었는데, 그 일부를 인용한다.
“죽음이란 없는 것이네”
“예, 압니다, 스님. 그러니 이렇게 웃고 있잖습니까?”
“죽음이란 육체의 감옥을 깨고 대석방을 시도하는 것이네. 자네도 감옥인 육체를 벗어던지고 웃으면서 가게.”
“예, 스님. 그런데 마지막으로 스님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게 무언가?”
“오늘까지 저는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천일기도를 드려왔습니다. 이제 열하루만 지나면 회향하는 날인데 그 기도는 마치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기도는 스님이 대신 좀 해주십시오”
고금석은 죽음 직전에 이미 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이렇듯 종교는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힘이 있다고 거듭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금석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아무도 모르게 강원도 정선군 동면 백전리 백전국민학교 용소분교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성금을 보내 후원했다. 게다가 고금석은 용소분교 전교생 아이들에게 ‘바다잔치’도 열어주었다. 강원도 깊은 산골 아이들이다 보니 바다 구경을 못해 아이들이 바다 구경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고금석은 부지런히 후원금을 용소분교에 보냈는데, 결국 용소분교 아이들 바다잔치를 열어주기 전에 고금석은 죽음을 맞았고, 고금석의 죽음 얼마 뒤에 삼중 스님과 고금석의 연인 Y 그리고 몇몇 수용자 가족들의 도움으로 용소분교 아이들을 부산 해운대로 초청하여 바다잔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 용소분교는 2008년 학생 수 부족으로 폐교되었다고 한다. 고금석은 젊은 나이에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끔찍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수가 되어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교도소에서 부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참회와 수행에 정진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전국의 모든 사형수가 고금석처럼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삼중 스님이 쓴 사형수 관련 책들이 재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죄와 벌 그리고 죽음에 대해 한번쯤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내가 그랬듯이, 여러분은 책 속에 코를 박을 것이다. 삼중 스님이 자신의 모친도 서울구치소 교도관이었고 여동생도 교도관이었다고 언젠가 밝힌 적이 있는데 자신이 평생 재소자 교화를 다닌 것도 어쩌면 그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최근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사형집행 시설을 갖춘 전국 4개 교정기관에 사형 집행 시설을 점검하라는 지시를 내린 데 이어 대구교도소에 수용 중이던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또다른 사형수 정형구와 함께 사형장 시설이 갖춰진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다고 한다. 예감이 좋지 않다. 전국의 사형수들, 이제는 바싹 긴장해야 할 것 같다. 교도소에서 탈주 소동을 벌여 나의 진주 유배 길을 활짝 열어준 사형수 정두영도 서울구치소에서 잘 있는지 모르겠다.
2023년 10월, 남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