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풍류(風流)의 원형과 그 세계사적 의의
서 정 록
제가 풍류에 대한 공부를 하다... 샤머니즘의 근간을 공부해보니 북아메리카 샤머니즘의 영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쪽 동북아만 해도 사회의 물질적 욕망이 들어가 있으니까 많이 기복신앙화 되어 있고 시베리아 쪽은 순수한 삶의 영성, 러시아 중국의 영향을 받으시면서 국가, 물질의 욕망이 섞여 있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영성을 보니 보다 순수하고 물질로부터 자유롭고 국가나 신분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고구려 벽화, 최치원의 풍류를 알려고 해도 잘 모르겠던데, 인디언 공부를 하다보니, 인디언 감성도 이해하고 원주민도 이해하면서 조금씩 변화... 다시 보니까 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게 되더라. 그러면서 풍류를 이해하게 되었다. 조상들의 정신세계와 지금보다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풍류(風流)라 하면 오해가 좀 있다. 중국에서도 이 말을 사용한다. 중국에서 기원해 우리가 빌어쓰고 있는 것인지, 원리란 게 있는 것인지 의문이 있다. 제3세계의 영적 눈이 떠지면서 동북아와 중국의 영성은 참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디언, 원주민의 영성이 있는가 하면, 반면 중국은 유교, 노자의 영성으로 같은 풍류라 해도 바람과 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문을 읽고, 술과 여자와 노는 그런 분위기가 강하더라.
우리 조상의 풍류는 굉장히 다르더라. 바람 풍도를 보면 정확하게 바람과 물이다. 이것의 영성을 알게 되면 조상의 영성을 알게 된다. 바람이란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우리가 살아간다.
창조신화를 보면 창조주께서 만물을 빚으시고 나중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서 그제서야 생명이 움직이게 되었다. 숨이란 묘한 게, 숨을 쉬어야 비로소 사는 것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에 제 숨은 여러분의 숨과 섞이게 되어 있다. 여러분의 숨결은 또한 제 숨결에 갈마들어서 섞이게 되어 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같은 숨결에 의존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으로 확장하면,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샤머니즘으로 해석하면- 모든 존재는 숨을 쉬고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상호의존하고 있다. 결국은 모든 존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결국은 ‘모두 하나다’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물도 마찬가지다. 몸의 70%가 물이다. 신진대사 과정을 통해 넘나든다. 우리 몸을 나온 물은 개천, 바다로 갔다가 수증기 구름으로 해서 빗물로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고, 우리는 이것을 먹는다. 이 물이 그냥 순환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존재들의 몸을 거치면서 관계 지으면서 우리에게 돌아서 들어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돌고 돌면서 나와 내 주위의 모든 존재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샤머니즘이나 고대 영성이라는 것이 사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데, 우리의 영성을 설명할 때 피(血)라든지, 샤머니즘을 설명할 때 물과 바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영성의 대한 이해가 바로 바람과 물의 비유로서 적합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영성이란 각각의 종교를 갖고 있거나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 안에서 바라보는 영성이 다를 지라도 영성의 체계(조상의)는 북아메리카, 제3세계의 영성체계와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조상들은 신령한 신(神)자를 써서 표현하기도 했고, 영성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서로가 평화롭게 나누고 조화롭게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영성을 얘기하는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관통해서 흐르는 근원적인 힘, 현상세계를 그대로 있게 하면서 유지하고 변화하고 균형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을 ‘영성(靈性)’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존재를 관통하면서 흐르는 생명력, 이것은 예외가 없다. 모두를 하나가 되게, 개별적인 존재는 또 개별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풍류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표현했던 바람과 물, 모든 존재를 하나 되게 해주는 평등하고 의존하게 살게 해주는 힘이라고 생각된다. 최치원 선생이 ‘우리나라에 현묘지도가 있으니, 아름다운 도가 있으니 그걸 풍류라고 한다.’ 이렇게 부르셨는데 유불선(儒佛仙)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조상들이 갖고 있었던 영성, 생명력에 대한 이해, 삶의 지혜가 유불선이 얘기하는 지혜가 거기에 다 들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한다.
'접화군생(接化郡生)'이란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 말은 굉장히 어렵다. 그동안 영성이란 얘기 없이 우리 조상이 생각했던 자연의 세계, 세계관 없이 풍류에 대한 논의들이 되면서, 풍류가 유불선의 통합인가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어 왔는데, 영성적 측면에서 보면 좀 다르다. 샤머니즘의 세계는 영혼을 중심으로 보는 세계이다. 영혼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영(靈)의 작용을 풀어 본 것이 바람과 물이라는 것이다. 순환하면서 개별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 모든 존재하는 영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현상세계, 살아가는 모든 관계이다. 이 과정이 결국 애매하고 어렵기 때문에 샤머니즘의 순수한 영적 측면을 이해하지 않으면 애매하고 그렇다.
‘접(接)’이란 뭘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의 작용이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접이다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생각을 느낄 수 있고,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접이라 할 수 있다.
조상들이 생각했던 샤머니즘은 바로 영이 드러난 것, 움직이고 활동하는 현상적인 행동 모든 사건의 변화가 드러나는 것, 그 순간의 관계성을 영과 현상세계의 접점을 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람 물, 흐름, 떨림. 이것이 풍류라고 나는 정의하고 있다.
이 노래는 영이 울려서 나온다. 춤을 춘다고 했을 때 이것은 영의 울림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과 소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샤머니즘에서는 접신(接神)한다고 표현한다. 흔히 ‘흥(興)’이라고 하면 ‘신이 난다’고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다 접(接)의 현상이다.
‘화(化)’란 변화와 성장을 뜻하는 말이 돼서, 우리 안의 영의 울림이 밖으로 드러나서 주위의 모든 존재와 함께 관계 지으며 소통하며 하나가 되겠다는 것이다. 어제 류승국 선생님께서 이에 대해 얘기하신대로, 중화패권주의와 한민족이 걸었던 생명평화 존중의 길의 차이가 아닐까.
역사적으로도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 이 땅의 역사는 일제 이후의 친일사관에 침범되어 있어 우리 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의 글귀 풍류사상에는 생명이 깃들 수 있는 사상이 있었는데, 공자의 유교가 들어오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불교가 들어올 때나 노장사상도 자연과 더불어 무위의 삶의 양태가 다 우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풍류의 구체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한류 이런 것이 들어가야 하는데. ... 오늘 풍류에 대해서, 의문이 많았던 사항에 대해 이 자리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풍류도란 책을 준비하고 있다. 그걸 기대하면서. 질문을 받겠으니, 의견 주시길 바란다.
-진월스님: 우리는 우리 용어로 어휘를 무(巫), 무당 할 때 샤먼을 무라고 할 수 있는데, 샤머니즘을 우리가 굉장히 미개 원시적이라고 편모(片貌)하는 경향이 있는다. 샤머니즘은 포괄적이고 우리나라만 있는 게 아니라 유럽, 아메리카까지 확산된 인간 역사와 탄생된 종교 신앙의 체계인데, 우리가 말하는 풍류적인 무가 다른 나라의 것과 다른 특성이란 무언가? 단군 같은 경우도 홍익인간이 있지 않은가.
-답 : 제가 인용을 많이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왜 하필이면 인디언이냐, 우리나라에도 할 게 많은데. 인간의 삶의 양식은 그런 쪽으로 보면 다 같다. 우리가 고대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자료가 제약되어 있다. 고구려 벽화나 최치원 선생의 책 같은 경우도 그렇고. 그런데 그런 걸 샤먼의 현상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에 있어서 영성에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면서 공부하다 보니까, 북아메리카의 영성이나 우리 조상의 것이나 다른 게 없이 같더라.
다른 게 있다면 국가의 영역, 물질적 욕망이 다르지만 영성, 샤머니즘의 원리 같은 경우는 같더라. 예로 단군신화에서 홍익인간이란 말이 있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 그 말이 묘하다. 지금 세상에서 보면 생명을 파괴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그 인간이 뭐가 이뻐서.
재미있는 건 아무르강 쪽에 소수민족이 많은데, 거기서는 사람을 나무 사람, 호랑이 사람, 돌멩이 사람, 이런 식으로 부른다. 모든 것을 사람으로 부른다. 북아메리카도 마찬가지로 부른다. 아프리카에 가도 똑같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방식만 달랐지 다 사람이라고 본다.
홍익인간이라고 했을 때의 그 인간은 휴먼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神)이란 보편적인 존재이다. 모든 생명을 뜻하는 것이 홍익인간.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단군, 즉 신(神)을 보냈다는 것이다.
-문 : 홍익인간을 국선도는 풍류도에서 나왔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친기-바람지기-물인기-단전으로 힘을 모아서 건강을 얻는 것이다. 우주를 아우르는 힘도 기(氣)인데, 그렇게 보면 단전호흡과 기와 홍익인간도 같다.
-답: 논쟁거리가 많다. 천지인(天地人)의 사고는 중국적 사고이다. 천지 사상이란 우주가 둥그렇게 있으면 위로 하늘, 아래 땅 인간이 중심이다. 이 세계관은 내세관이 없고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귀신은 다 늑대라고 한다. 그런데 고대 동북아 쪽의 샤먼 세계는 분명하게 내세가 있고 영혼을 중심으로 얘기하는 세계이다. 몸은 죽어서 이 세상에 남기지만 영혼은 다른 세상에 갔다가 몸을 받아 세상에 다시 온다는 것이다. 천지인적 사고방식은 그런 사고방식이 없다.
-문: 기(氣) 자체에는 영적으로 건강한 기와 나쁜 기가 있는데, 그 기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야 한다. 육체는 물로 바람을 무엇으로 다 되어서 그네들의 역할이 다 그런 기로 되기 위해서 우리가 지도하고 있다.
-답: 연관된 질문이 있는가?
-문: 사회자로서 의문이 있는데, 결부지어 듣고 싶다. 최재우의 모심을 풀이로 할 때 내유기화 외유기화라 한다. 기화는 주자학적인 기화이기 때문에 접화로 바꾸는 게 낫다고 해서, 기에 들어있는 물질 방식을 유물론적인 것으로 해서 내쳤는데, 샤먼에서의 오직 물질적인 측면이 정신으로 넘어가서, 통상적으로 과학이 부정하려고 했던 우리의 전통사상에 대하...
-문: 천지인사상은 우리 것과 연관이 없다고 했는데 맞나요? 우리의 강단 쪽에선 인정이 안 되는 것인데 천부경이라고, 검증이 안 된 것이 있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물론 시시비비 해석할 수는 없지만, 각자 해석의 나눔에 따라 달라지는데, 지금 조심스럽게 접근이 안 되고 있다. 일면 맞고 일면 틀리고. 앞으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거기에는 천지인이란 게 핵심 뼈대가 된다.
-답: 저는 천부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적인 세계를 알면 왜 그 책이 미서인가를 알 수 있다. 영적인 세계란 현상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맞물려 간다. 천부경 같은 책은 거기 내용을 분석하다 보면 그 시대사상 논의가 거기 담겨 있다. 불교적인 거라거나. 과연 천부경이 단군시대에 쓰여졌다고 볼 수 없다.
-문: 동의한다. 우리가 문자 기록상의 역사를 돌아볼 것 같으면 문자 이전은 구전이다. 구전이 내려오면서, 그것은 시대의 내용을 담아 변질되고 글자 자체도 변질된다. 기록되면서 그 시대의 것을 담을 수 있다. 영적인 문제로서 인정이 안 된다는 것은 저 입장에서는 인정할 수 있는 것이므로 단정적으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 민간 철학사상, 불교의 것들과 문화적인, 예술적인 것들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심성의 저층에 담겨 있는 중요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권성화; 천지인 개념. 중국에서는 철학원리로 설명했다면 한국에서는 신의 개념을 붙였듯이, 그 안에는 영적인 것으로 보는 영적인 것이 담겨 있다고 본다. 동학, 기화 말씀을 하셨는데 그 기화가 주자학의 내용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그게 주자학이란 설명인지. 그 기화란 오랫동안 우리 안에 있던 개념이라고 생각되는데. 또한 이화란 것이 단군신화에서 보면 홍익인간에서 재세이화가 나온다.
-답: 그런 지엽적인 것을 얘기하다 보면 이 짧은 시간에서 중요한 얘기를 할 수 없다.
-문; 동학을 주자학적인 것으로 설명하면 우리의 이화, 재세이화에서 쓰였듯이 이화 개념 안에 원리를 변화시킨다라고 이해하지만 재세(在世)라는 말이 붙었기 때문에 하늘의 원리가 아닌가.
-답: 질문을 그만 받을게요. 제 생각을 이해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갔으면 한다.
-문; 논점을 정리하고 말씀드린다. 천지인 상제(上帝)의 개념이 중국적인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다. 천지인 일반을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질문이 있었다. 기화 개념을 배척하는 것. 퇴계의 이기호발설. 주자성리학. 노장사상의 기 개념 자체도 주자학으로 편입시켜서 볼 수 없는 건데. 이화라는 표현에서 이(理). 인디언과 연결시켰는데, 인간이 문화인간이기 때문에 이적인 접근을 놓칠 수 없는데.
-답: 제세이화라는 것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나오는 것이다. 용어가 절대 어렵지 않다. 천부경은 해석이 다 다르다. 그게 무슨 경전인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건 경전이라 할 수 없고 착서, 비서라고 하는 것이다.
천지 상제와 관련해서, 천지인 개념을 중국에서 갖다 쓴 지 오래돼서 민속을 얘기하는 분들도 이걸 우리 것처럼 생각하는데 혼란이 있을 거라 생각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영생의 세계는 영혼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모든 존재, 평등한 존재를 보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가 되는, 삶과 죽음을 넘나들면서 생을 이룬다. 중국의 전통에서는 죽음을, 가벼운 것은 하늘로 무거운 것은 땅에 떨어지는 것으로 그친다. 그런 것 보충하는 것이 신선사상이고 도교이다. 물질의 힘. 기라는 것은 혼란스럽다. 최치원 선생이 살아계실 때는 기라는 말을 안 썼다. 중국에서는 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다. 지금의 무속인들은 그걸 쓰고 있지. 샤머니즘에 관한 오해가 있다. 샤먼 현상은 기복적이고 물질이 전제해 있고, 그러면서 영적인 것의 지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오해이다. 그 지적은 그대로 맞는다.
이 땅의 샤머니즘은 왜곡되어 왔기 때문에, 순수한 영적 세계와 차이가 있다. 그리고 기라고 단순하게 유물론적이건, 과학적으로 변색될 우려에 대해서 말하자면, 실제 보면 현대종교사에서 기화라는 표현 때문에 많은 혼란이 있다. 중국에서 주자 전통에서 얘기하는 기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와 대비되어서 원리적으로 현상세계에서 ... 기라고 하는 것은 기화라는 표현 속에서는 영혼에 대한 함축이 없고,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샤머니즘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영혼의 움직임이 밖으로 나오는 것인데, 기에는 그런 것이 없고, 기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다. 동경대전에 보면 혼란이 있어요. 이런 것들이 조상들이 갖고 있던 영성의 세계를 이해하면서 혼란이 해결되어, 영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풍류가 아닌가.
고구려 벽화를 보게 되면, 물론 이건 그 당시 지배층의 중심으로 만들어졌지만 벽화를 보면 샤머니즘의 영적 체계를 그대로, 산이 춤을 추고 달이 춤을 춘다는 게 드러나 있다. 산이 살아있다는 것, 달이 숨 쉬는 모습이 삼국시대만 해도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가 나와 있는데 달의 표면이 지문같이 반복되어 있다. 몸의 결처럼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이해이다. 모든 존재, 모든 생명에는 영혼이 있고, 그것이 평등하고 그 펼침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영적인 사고,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삼국시대 유물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남아있는 게 많다.
고고학에선 그 바탕의 정신세계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다. 그런데 조상들의 영성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면, 바람이 꽃이 되고, 산이 춤추고.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것 없으면 멀그머니 그림만 보게 된다. 우리는 알아요. 그 앞에 서면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뭔가를 알게 된다.
풍류의 우려는, 영성이란 지적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느끼고 접해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이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몸과 마음이 변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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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논리적 정립을 위한 한 시도
김상일(전 한신대 교수, 철학)
중국에선 우리 문헌도 자기 것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천부경까지. 치우도 우리 것이 아니라니까. 경전은 중구난방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그건 경전이지. 생명의 논리에 관하여 말하는 텍스트, 장자. 우주의............
우리 동양에서는 생명이란 것은 혼돈이다. 여러 가지 말을 연장시키면 카오스고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것이다. 그걸 눈에 보이게 하고 벗긴다는 것은 그러니 생명이 죽었다라는 것이지. 철학사적으로 가운데 혼돈을 놓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서양철학으로 넘어가면 바로 그 부분이 서양 철학사에서 우리 눈을 밝혀주고 귀로 듣게 해주는 이런 장치, 기제를 만든 게 아리스토텔레스이고, 신학에서는 아퀴나스이고 어거스틴이다. 철학의 출발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원시로부터 내려오는 카오스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혼돈을 파괴해서 분석적 사고를 갖게 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 글에서 A형 논리라는 것, 이 논리를 사용한 사람 이름의 첫 자가 에이였다. (웃음) 아리가 혼돈을 파괴하여 인류 역사상 최초로 논리학을 썼다. 서양철학자가 왜 동양철학에는 오르가논이란 논리체계가 없냐는 질문을 한다. 그렇지만 아리 책을 쓰게 된 목적이 혼돈파괴, 역설, 우리 인간 사고의 병적인 것으로 보고 치료해야 한다는 것으로 본다. 이것도 생명과 관련. 의학적으로 장부를 오르간이라 하잖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철학과 생명체계가 우연히 같다.
범주론, 모든 사물을 카테고리로 만드는 것, 판단론, 추리론, 모순율은 김상일을 김상일이라고 하는 것과 아니라는 것. 인 것과 인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게 나눠야 한다. 이게 모순율. 추리론. 전체와 부분을 나눠야 추리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간과 집. 유클리드 공리처럼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된다라는 것처럼. 마음은 마음이고 동물은 동물이다. 이렇게 반드시 나눠야 한다는 것이고.
생명논리를 얘기하려는 이유는 학문을 할 때 논리라는 것을 갖추지 않으면 그 학문에 생명력이 없다. 제가 생명학을 전개할 때 논리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A형 논리는 ‘죽음’의 논리이고, 데카르트, 뉴턴에 의해 더 심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A형 논리가 19세기 수학에 와서 문제에 천착하게 된다. 전체의 부분집합을 러셀은 역설은, 여기서 괴델에 와서 불완전성 정리로 끝날 때까지 역설은 수학자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A형 논리를 병적으로 바라보았던 것, 혼란을 병적으로 바라보았던 것, 역설을 어떻게 하든 없애려고 했던 노력, 진리가 부분에 있든 전체에 있든 어디에 있어야 하는데 토대가 없어지고 있다는 위기감. 이것이 역설과 관련되어 있다.
E형 논리는 바로 ‘혼돈’이다.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 섬의 문명의 선구자라고 하기도 하는데,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그 자신이 크레타 사람임에도. 이건 아리와 완전 다르다. 참은 거짓, 거짓은 참이 되는 것이다. 지난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전체가 부분이 되고 부분이 전체가 되는 것에서 역설이 생겨나고, 바로 이 아리의 A논리학에서는 구분해야 한다고 한 것이고 변화하는 타자를 부정하고 원이라고 하는 것만 인정하게 된다.
타자를 인정하려 했던 것이 일자(一者) 중심의 사고방식이 팽팽하게 내려오면서 일자, 전체가 중심이라고 하는 것. 동서양의 철학은 중앙의 혼돈을 보고 어떻게 출발하느냐. 동양에서 혼돈은 생명이고 내추럴한 것, 자연스런 것이다. 역설에 따라 살면 지극히 행복한 것이다. 좋아하는 게 다른 건, 역설을 보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동서양이 다르다. 이러한 역설을 자연스럽게 전개한 것이 ‘역(易)’이란 것이다.
E형 논리란 것이 뭔가? 이회0이 대통령 나와서 ‘법대로 하자’ 해놓고, 바로 자기 자신이 먼저 들어간다. 김영0이 ‘성역 없는 수사’, 자기가 먼저 나가자. 이형 역설이 논리,
우리의 진정한 철학이란 것은 시계를 손에 쥐고 시계를 찾고 있는 꼴이다. 영화 같은 걸 봐도 역설을 사회의 구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지. 주관과 객관을 구분할 수도 없고, 현대과학이 논리학이 달라졌기 때문에, 물리학자나 스님들이 말하는 이런 것들. 포함을 컴퓨터로 쓰면 왼쪽 것은 우체함을 할 때. 전체와 부분이 나눠지는 것이다. 우체함 속에는 편지를 넣을 수는 있어도 편지 안에 우체함을 넣을 순 없다.
오른쪽 것은 부분과 전체를 나눌 수는 없고, 우리의 생명이란 것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E형의 포함관계, 물과 차의 관계이다. 차가 물속에, 물이 차 속에 서로 상호 포함된 상태이다. 포함상조 - 유불선이 들어왔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 돼.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화될 수 있었다. E형 모형으로 설명하면. 생명에 대한 접근방법이 다르지.
카플라가 말했다. 생명은 이형적이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립되고 있느냐. 상생상극이라는 것이다. 육체 속에 생명이 들어와 있는데, 육체와 정신 사이에 서로 분리 싸움이 일어난다. 전선과 전류를 보면, 이 두 가지가 만났을 때 어느 하나가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루소가 이렇게 봤는데. 권리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 목에서 시작해서 토로 오는 것. 상생하다 상극하다 하는 것. 둘이 같이 있다가 어느 하나가 성하면 어느 한쪽이 억제시킨다. 이것이 상생상극. 목에서 금으로 오면 주객전도가 된다. 이 포함의 논리는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는 부단한 싸움을 하고 있다. 힘의 파동에 따라 존재론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 동양의 주역(周易), 한의학은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의 상생상극 주객전도가 밸런스를 이룰 때이다.
-문: 에이형- 역설을 용인하지 않는다. 이형- 역설 용인. 서구와 다르다. 생명존중의 길은 그런 점에서 서구 중심의 에이형보다는 이쪽이 더 용이하지 않은가?
-정은호: E형 논리가 동양의 전통에서 강하게 살아있어 왔고, 역설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럼 동양을 포함한 전통과 한민족의 아이덴티티라 하는 한사상. 화엄사상에도 나왔듯이 생활에서 어느 순간에서 그런 것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이 둘 사이의 변별이 있다면 무엇인가?
-답: 한사상에서 볼 때 일과들을. 달을 여성적인 것, 변화하는 것이다. 서양 주류 철학은 원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렸다는 것이다. 스피노자, 화이트 헤드 같은 철학자들은 인정해주지 않잖아. 인도로 와서 그 가운데를 일을 선택하면 월이 되고 그 중간이 되는 거다. 한철학은 그 가운데도 없다는 것, 원효의 가운데마저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 컵을 보지 못하는 것, 이 자체를 보지 못한다. 주객이 하나가 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처럼 모든 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도 철학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일월론이다. 생명은 하나요, 하나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다는 걸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이다. 사과 자체가 하나 있다고 하면, 이게 전체와 같다고 말하지만, 하나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역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지. 우리의 생명, 온생명이 한생명이 되어야겠다.
-박병구: 수운과 화이트헤드를 읽고 감동했다. 기화라는 문제. 동학에서, 수운은 서학에서는 기가 없다라고 그 당시에 말씀을 하셨는데, 선생님이 지금 기독교의 예배, 가톨릭의 미사, 여기에 그런 기를 담을 수 있다면 예식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답: 서양 전통의 맥락에서의 생명이 무언지 모르고, 인격신과 반대 개념으로 나오는 게 생명이다. 인간에 대한 자연, 초월신에서 반대되어 나온 것이 생명. 비인격적인 신의 개념이 생명이다. 그런데 시천주. 인격신적 개념과 비인격적 신을 합친 것이 동학의 신관이라 볼 수 있다. 기화라고 할 때, 이 기라는 것이 어디에 접해있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나무에 접해있을 땐 기와 나무의 싸움이 일어난다. 동양의 E형에는 주역(周易)처럼, 여기에 철학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다.
-문 :생명의 적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언급이 안 됐지만, 생명의 논리적 측면에서 어떻게 볼 것인지. 에피메이데스, 이스트, 에카르트, E형 논리는 신관에 있어서 모든 존재가 신이 되는 것이다. A형은 신을 초월해 있지만 신과 인간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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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고대 여신(女神)전통
고 혜 경
제주는 역설과 모순이 가장 잘 살아있는 땅이라고 생각된다. 80년대 이후로 서구에서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는 이론 중 하나가 인류 초창기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신들은 여신이었다. 그 이론을 배우면서 제주를 기술할 때, 남녀평등사회이다, 위계가 없던 사회이다. 실제 제주 사람 조사에 90% 이상이 자신들이 남녀평등한 곳에 살고 있고, 평등정신이 제주의 것이다. 여성중심의, 종교가 살아 있는 땅, 여신 중심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제주의 주요 신화를 분석하면서 제주도는 500개 신화가 있는 땅인데.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것. 3가지에 대해서 보자. (슬라이드 자료) 제주의 평등주의를 구성하는 요소
태초의 창세신화를 보면, 굿에서는 이게 다 표현되는데 태초의 신화와 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 행위가 태초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신을 놀린다는 표현. 신과 인간을 굉장히 평등하게 본다.
-답: 남자와 평등의 사회라 했는데, 힘을 남성중심적 사고로 보고 있는데. 수직으로 누르는 힘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수평은 호혜와 가장 남성다운 사람, 가장 여성다운 사람이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이번에 시베리아에 가서 에리피족에 가서 잤는데 그들에게도 방향이 중요하잖아. 북쪽에 제대가 있고 남쪽엔 문, 오른쪽엔 여성들의 공간. 사냥하고 이런 것은 왼쪽에 있더라. 이것은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볍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강한 여성과 살아가는 남성은 어떻게 느끼는가? 제주대학에서 논문 쓰면서 6개월을 살았는데, 그 질문에 여자란 당연히 강해야죠. 그 강함이란 지배와 통제와 남성을 억누르는 강함이 아니라는 것이지, 강한 여자란.
-문: 하루방이 원래는 여신이었다고 하는데. 남쪽으로 내려가면 하루망?
-답: 초창기 여신의 모습에서 남성성이 분화가 안 되고 포함되어 있다. 하루방 중에서 그런 것이 있다. 여신의 풍성한 스커트 위에 머리는 남성의 것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남신의 몸에 여신이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할망이란 것을 더 선호한다. 할머니도 할망, 여신도 할망이라고 한다. 영적 조상과 혈연 조상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 부도지. 한겨레의 창세기와도 같은 문헌인데, 마고 할미라고 나온다. 제주도 설문대 할망 신화와 공통점이 있는가?
-답: 같은 여신일 수 있다. 아직까지는 한꺼번에 같다고 뭉쳐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마고와 할망의 역할이 비슷한 게 많거든요. 우리가 마고를 조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그렇게 굳히지 말았으면 좋겠다. 설문대 할망의 신화를 보면서, 이렇게 강력하고 아름다운 신화가 우리에게 살아 있다는 게 감동이었다. 신화는 신화로 살아있어야 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공간을 얘기하기 때문에 영원하다. 신화를 역사로 고착시키려 할 때, 신화는 죽어간다. ‘민족의 기원’ 하면서 신화를 역사로 고착시키는 데, 우려를 표현한다.
-문: 도처에 제주도 할망 신화와 비슷한 게 많은데, 지명 속에서 노고단도 마고 할미의 집이란 신화로만이 아니라 이전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고의 표현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이다 싶다. 변화의 시간에서 재조명하면서 긍정적으로 발견해내야만, 민족주의적 발상이 큰데, 그것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못 하면 안 된다. 재발견과 재해석 함으로써 인류적 차원으로 초점을 맞추면 되지 않을까.
-답: 100% 동의한다. 그런데. 신화는 설문대 할망이 구전되면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각기 다르게...
-장일식(무용예술학); 할망이 하루방으로 나온다는 예, 돌하루방. 석재조각인데, 볼리비아의 석상. 형태가 너무 이것과 유사하다. 모자를 쓰고 있는 것, 이스트 섬의 모아이 석상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버섯 형태의 것이 하루방이라 하는데, 설문대 할망의 설화와 다른 지역과의 연관성이 어떤 것이 있을까?
-답: 유사적인, 원형적인 해석이다. 하나는 이동경로를 따라서, 하나는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공통점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차옥순: 제주도의 설문대 할망 영등할미뿐 아니라 당신, 여신들은 아주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더라. 영등할미의 딸과 며느리는 추행 당하고, 죽은 이유를 모르니까 굿을 통해 되풀이 되고 그런 아픔들이 이야기되어 지고, 여성들이 공유하고 전승되어 가는 한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여인을 보호하려 했던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답: 왜 이렇게 한많은 여성들이 신으로 태어났는가? 상처를 극복하면서 치유력이 생긴 것. 한이 흥으로 치환했을 때의 멋과 맛이 있다.
-문: 신화는 신화로 보자는 얘기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원래적으로 얼과... 신화 수업을 가부장적 표상으로 보여주는 점이 있는데, 거기에 훨씬 더 양성평등적이고 생명중심적인 것이 살아 숨 쉬고 있는데, 샤머니즘의 할망 이야기는 그것 자체가 사회상의 반영이며 정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본다. 모계사회의 반영일 수 있는 신화 속에서, 의문점이 되는 건데.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은 제주 사회의 신화를 얘기하고 있는 사회가 잠시 남성 중심으로 간 흔적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답: 역사적인 흔적은 항상 신화에 남는다. 그런데, 하루방의 얘기를 하는 것은 설문대 할망의 얘기 10조각 중에 할방 얘기는 하나가 있다. 할망이 남성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 그럼 중성인가?
-답: 양성이란 표현에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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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불교의 생명사상
진월 스님
불교는 지역에 따라 변형되어 왔을지라도 영원불변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그럼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것이 있는가? 구체적 역사 문화 속에 인도, 중국과 다른 무엇을 찾아보았는데, 화랑도의 풍월지도라고 할까, 세속오계. 우리의 생명윤리, 생명존중의 사상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보형보살의 10가지 서원은 민중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거기 나오는 내용이 생명존중. 화엄사상이란, 잡화엄식.
어떤 정원에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한 가지 꽃만으로는 아름답지 않으며, 여럿이 있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성, 개성, 부분과 전체, 조화와 통일을 상징화한 것이다. 물속의 고기, 동물, 새, 벌레, 식물, 미생물, 바위, 땅까지도 불성이 있다는 것. 불교가 생명이라는 말 자체는 삶과 죽음은 손과 같은 의미,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님.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의 문제, 고통의 문제는 번뇌, 윤회로 설명한다. 진리세계와 열반의 세계 모든 생명들이 결국은 하나임과 동시에 부처가 될 수 있다. 열반의 세계가 가능하고, 그걸 잘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불자이고, 나와 더불어 불자와 함께 깨쳐나가자고 하는 것.
불교가 우리 용어로 ‘피스’나 ‘라이프’란 게 근대화되면서 번역되어 새롭게 되었다. 더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어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좁은 개념을 가지고 사용하고 있다. 불교의 생명은 죽음이 없는, 모든 생명체가 열반이라 할 수 있는 이상세계, 환희와 깨침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의 목표는 생명이고, 고통에서 해탈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모든 생명이 그 속에서 올바른 지혜와 자비를 느끼면서 살아가고픈 그런 것이다. 불교가 여러분과 무관한,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명과 무생물을 포함한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연기론은 더불어 사는 삶, 화엄사상은 어울려 사는 삶, 계율은 함께 사는 삶과 같은 존재방식 생활방식을 제시해주는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문: 자연이나 바위, 어떤 것이라도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가는 것에 대해 뭐라 생각해요?
-답: 불교에서 말하는 것 3가지 중 하나는 무상.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무아) 고통과 번뇌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한다. 지금 얘기하신 것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옷이나 벽에 칠한 색깔이 변한 것. 그걸 생명이라 하면 특별히 말할 것은 없고, 불교에서는 그런 건 이미 수천 년부터 예견되었고. 점두(點頭)한다는 말은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다. 이걸 이해 못 하는 사람과 얘기 못 한다고 해서, 산으로 가 바위에게 얘기했는데 진짜 바위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현대과학이란 게 그렇다. 물을 정말 잘게 나눴을 때 전자마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잖은가. 생명은 영원불멸한 게 사실이다. 생사가 있지만 깨친 사람이 보면 그런 것은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괴로워할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진리, 리얼리티를 깨치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현상에 울고 웃고 집착했던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문: 우리나라 정서에서 운동을 하고, 했던 사람으로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지율 스님의 몸을 버리면서, 도법스님의 대안 없이 교조적인 행동에 대해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답: 지율스님의 천성산 도룡뇽 지키기 운동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것은 불교에선 자비중. 대비를 얘기할 땐 동체대비를 얘기한다. 동정적인 것이 아니라, 너와 나를 초월하는 관심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 대비인 것이다. 지율스님의 그런 행동은 동체대비라고 볼 수 있다. 꽃과 나무의 아픔이 자기의 아픔처럼 느껴지는 것이고, 자기 몸의 고통을 돌보지 않고 그런 것은 자비의 마음이다. 우리 사회를 위해, 옳다고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 지조 있고, 소신껏 초지일관하게. 테레사 수녀의 경우, 여러분도 그분보다 못할 게 없다고 보지만 남을 위해 헌신하고 자기 자신의 이기를 버리고 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넘어서 동식물과 무생물과 함께 하는 것이 생명존중의 참모습이다.
-문: 세상의 일각에서는 스님이 수천억의 예산으로 책정된 정부 계획과 싸우는 것을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멀리 보면 국가는 효율성을 내세우면서 그렇지만. 지율스님의 행동은 작게 보면 효율성에는 밀리지만, 멀리 보면 이런 행동을 통해 앞으로 버려질 많은 예산들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영성적 차원의 결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은호: 스님께서는 불교가 범세계적 진리를 말하는 종교가 되지 않았냐고 하는데, 동감하구요. 주제가 한국불교의 생명사상이라 하셨는데, 한국불교에 대한 독자성이란 게 있는가?
-문: 황우석의 배아줄기세포에 대해 불교계가 침묵하고 있는데, 배아줄기는 바로 난자에서 채취하고 그러려면 난자를 거래하고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 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반생명적인 행위가 될 소지가 충분한데, 자연의 생명을 우롱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인간의 욕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며, 자연의 섭리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답: 하루를 살아도 가치 있게 살아야 하는데, 많은 삶 중에 가장 가치 있게 살 만한 존재 가 되어야 하는데, 범죄행위라든지, 인류에 해를 끼친 사람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이 생명이 연장이 되는, 어떤 삶이 가치 있고 유익한 것일까를 생각해야한다. 오래 살아야 할 만한 것을 생각해야 하고, 생명의 연장, 이식문제. 대순리에 따르는 삶에 동의를 하지만 어느 쪽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다. 한국적 불교는 이렇다. 인도는 뿌리, 중국은 줄기, 우리나라는 꽃을 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특성은 융통성이 있고, 보편적이고 통불적인 의미의 불교로, 우리의 체질에 알맞은 것이다.
<출처; 2005세계생명문화포럼>
https://cafe.daum.net/gycenter/EPrM/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