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제1장 중관학파 수행론/대10
2.금강경의 수행론 (9)공과 연기
♧인과설의 선업과 악업의 상속성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무아론은 인과론의 연기설과 한 쌍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연기론을 떠나서는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물(物)이 어떻게 형성되었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과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업과 악업의 상속성이다. 계를 어기는 행위를 하면, 그로 인한 불이익이 현재 또는 미래에 닥친다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계를 지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
♧자성의 원어에 대하여 고찰해보고 설명해 보세요
▶업이 상속을 하려면 업이 상속할 수 있는 자체적 힘이 있어야만 한다. 불선법에는 불선행이 가져다주는 과보의 성질이 있어야 하고, 선법에는 선행이 가져다주는 과보의 성질이 있어야 한다. 이 과보의 논리는 불교 윤리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만약 선법과 악법의 과보를 가져오는 성질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교 윤리학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성질(自性)을 팔리 불교에서는 ‘sabhāva’ 산스트리트 불교에서는 ‘svabhāva’라고 한다.
♧중론의 자성인,타성인,동시인,무인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을 붙여 보세요
▶<금강경>은 중관학파의 소의경전이고 <중론>은 소의논서에 해당한다. <중론>에서는 자성인, 타성인, 동시인, 무인 등 4가지의 인과를 모두 부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자성인과 타성인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도덕적으로 인과를 말할 수 있는가’가 중관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법칙성이
있어야만 한다.
만일 법칙성이 없다면 우연주의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인과의 윤리를 말할 수 없다. 만약 자성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석에는 쇠를 끌어당기는 자성이 없다는 논리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자석이 쇠를 당기는 것과 같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중관학파는 인과에 어떤 법칙성을 줄 수 있는가? 아니면 인과 부정론자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불교의 발달사에 등장한 속제와 유위의 진제, 무의의 진제 등 이 3가지 관점에 주목해야 한다. 속제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에 개념이라는 이름을 붙이 것이다.
♧속제를 교재를 중심으로 설명해 보세요
▶예를 들어, 죽비, 책상, 마이크, 컴퓨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속제라고 한다. 마이크는 본래 마이크라고 이름 할 수 있는 자성이 있지 않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서로 합의하에 마이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꼭 마이크가 아니더라도, 그것은 강, 산, 들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제에는 자성이 없다.
●청정도론 제2권 제21장 도닦음에 대한...
16. 무상하고 괴로움이요 무아인 것은 즐길만한 것이 아니고, 즐길만한 것이 아닌 것은 탐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너짐에 대한 관찰을 하면서 이 상카라들은 무상하고 괴로움이요 무아라고 보았을 때 이들을 역겨워하고 즐기지 않으며 탐욕을 빛바라게 하고 탐하지 않는다. 그가 이와 같이 탐하지 않을 때 우선 세간적인 지혜로 탐욕을 소멸하게 하고 일어나지 않게 한다. 즉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속제(俗諦)
속제란 글자 그대로 세간에서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속제를 세속제라고도 부릅니다.
이 세간이 흘러가는 것에서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속제란 상대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이 세속이란 상대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영원하다의 상대적인 것은 영원하지 않다 무상이요,
행복하다의 상대적인 것은 고통이다라는 고요,
실체가 있다의 상대적인 것은 실체가 없다라는 무아입니다.
삼해탈문인, 공/무상/무원 .... 이 자체가 이미 깨달음입니다.
[無我] === [空]
[無常] === [無相]
[苦] === [無願]
우선, 속제인 무상/고/무아를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목적은
중생의 항상하다는 그 전도몽상을 파괴시키기 위해서 항상하다는 반대인 무상을 설하셨고,
중생은 모든 걸 즐거움이라고 보는 그 전도몽상을 없애기 위해서 즐거움의 반대인 고를 설하셨고,
나라는게 있다는 그 전도몽상을 없애기 위해서 나가 없다는 무아를 설하셨습니다.
속제인 무상/고/무아도 역시 마음을 관해야 하고,
진제인 공/무상/무원도 역시나 마음 그 자체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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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의 진제를 교재를 중심으로 설명해 보세요
▶유위의 진제는 인간이 능동적인 개념을 일으키지 않아도 수동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물질, 몸이라고 하는 것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땅을 밟을 때 땅(地)의 딱딱한 성실, 물(水)의 촉촉한 성질, 불(火)의 따뜻한 성질, 바람(風)의 움직이는 성질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몸, 땅 등의 개념은 이름이라서 개념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없다.
반면 지수화풍의 성질은 우리가 개념을 일으키지 않아도 수동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아비담마에서 유위의 진제라고 말한다. 지수화풍 사대가 뭉쳐져 있는 것은 책상이나 탁자나 컴퓨터이다. 이러한 것은 개념을 말하는 것이고, 실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이 가지고 있는 딱딱함, 습윤성, 따뜻함의 성질, 움직이는 성질들이다.
♧무위의 진제를 교재를 중심으로 설명해 보세요
▶나 혹은 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속제가 되는 것이고, 나와 나의 몸이라고 말하기 전에 이 몸을 구성하는 최소의 경험적 대상인 지수화풍의 속성을 지각하면 유위의 진제라 한다. 상대적이고, 조건 지워진 것이기에 유위(有爲)이고, 개념 없이 지각할 수 있으므로 진제(眞諦)이다. 인과율과 자성은 이 유위의 진제에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무위의 진제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서, 거기에는 주관도 객관도, 모두 조건 지어지고, 형성된 것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불교 논리학의 역사에서 법무자성(法無自性) 즉, 인과를 말할 수 없는 단계는 그러므로 속제와 무위의 진제인 열반의 상태이다. 그러나 유위의 진제인 지수화풍 사대, 선법과 불선법 등의 상태는 모두 인과율에 의해서 지속된다. 그러므로 무위의 진제는 열반의 상태이며, 탐진치 삼독이 없기 때문에 인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고, 나와 너라고 하는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인과를 초월한 것이다.
●청정도론 제2권 제21장 도닦음에 대한....
세 가지 해탈의 관문
이 지혜가 [무상, 고, 무아의]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의 관찰로 일어날 때 세 가지 기능(根)들 가운데 하나의 지배력으로써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67. 세 가지 관찰을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라 부른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 해탈의 관문들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한다. ⓵ 모든 상카라들이 한정되어있고 둘러싸여있는 것으로 보게 하고, 마음이 표상이 없는(무상無相) 경지로 들어가게 한다. ⓶ 모든 상카라들에 대해 마노를 분발시키고, 마음이 원함이 없는(무원無願) 경지(界)로 들어가게 한다. ⓷ 모든 법들을 타인으로 보게 하고, 마음이 공(空)한 경지(界)로 들어가게 한다. 이 세 가지 해탈의 관문들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한다.
♧금강경 제9장 일상무상분을 구마라습,현장,현진, 강미농 금강경 강의 본 가운데 한 가지를 사경하세요
제9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수보리여! 너의 뜻에 어떠하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는가?” 수보리가 말하기를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수다원은 성류(성인의 흐름)에 든다고 하지만 들어간 바가 없고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 이름이 수다원일 뿐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니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일왕래이나 왕래함이 없고 이 이름이 사다함일 뿐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다시 오지 않는다[不來]고 하지만 실로는 오지 않음이 없고 이 이름이 아나함일 뿐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실로 아라한이라 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생각하면 이는 곧 아. 인. 중생. 수자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서 제일이라 하십니다.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했다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려니와 수보리가 실로 행하는 바가 없으므로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이름하셨습니다.”
2. 무주無住로써 이해를 도움
1) 과果를 잡아 널리 밝힘
(1) 사과四果를 총론
1)초과初果가 상相을 여의었음을 밝힘
‘무주로써 이해를 도움’ 대과는 5개의 중과로 나눈다. 처음 나오는 중과는 ‘과를 잡아 널리 밝힘’이다. 즉 제9분에서부터 제10분의 앞부분에 이르는 것이다. 이 중과는 앞서 ‘일체 현성은 다 무위법으로 차별이 있다’는 것을 예를 들어 증명한다. 또 ‘응당 법도 비법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은 취할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것과 멀리 서로 호응한다. 얻으나 얻음이 없는 법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이른바 불법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얻음이 없이 얻은 바가 없는 것, 이것이 얻는 것이다. 마음이 갈 곳이 멸하고 언어의 길이 끊어졌는데 어찌 법을 취하며 어찌 법을 설하겠는가? 총체적으로 그 양변에 머무르지 말라는 뜻을 밝힌 것이다. 과지果地가 이와 같으니 인지因地를 알 수 있다. 소승小乘이 이와 같으니 대승大乘을 알 수 있다.
“수보리여! 너의 뜻에 어떠하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는가?” 수보리가 말하기를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수다원은 성류(성인의 흐름)에 든다고 하지만 들어간 바가 없고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 이름이 수다원일 뿐입니다.”
초과初果는 삼계三界 88가지 번뇌를 끊고 이미 진공의 이치를 보아 아도 없고 아소도 없음을 안다. 만약 ‘내가 과를 얻겠다’는 생각을 지으면 이는 아견에 의지하는 것인데 어떻게 과를 얻는다고 하겠는가?
이과 이상은 이를 본보기로 하면 된다. 수보리가 사과四果의 명상名相으로 판별해 해석했다. 과의 상에 집착하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하는 것이다. 이는 법을 설하는 선교방편이다(불야는 활구이다. 오히려 얻음이 없지 않고 또 능히 생각을 짓지 않는다. 시명의 명은 가명으로 이 또한 가히 명확하지 않다. 명확하지 않으면 생각을 짓게 되고 얻은 바 있음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어 수다원은 한자로 번역하면 입류이다. 이미 열반 끝의 흐름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이 흐름을 따라 근원을 찾음으로써 열반의 피안에 도달한다. 입류라고 칭하기는 했으나 실로 들어간 바가 없다. 불입이하의 구절은 바로 그 까닭을 해석한 것이다. 대개 근과 진은 서로를 상대하며, 이름이 육입이다. 근과 진이 서로 들어간다고 말한다(저 눈은 색을 대한다. 즉 색이 있으면 눈에 들어온다. 눈은 색이 굴리는 바가 된다. 이 또한 눈이 색에 들어간다고 하고. 나머지는 이를 모방한다). 서로 들어가는 까닭은 식이 분별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정식을 비웠음을 밝힌 것이다. 육진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무’로써 이를 이름했고, 이름하여 입류라고 했다. 또 육진에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정식을 비운 고로 이름이 입류이나 실로 들어가는 바가 없다. 임시로 입류라고 이름했을 뿐이다. 고로 이 이름을 수다원이라고 했다. 여기서 이름은 가명이고 명상이다. 이 과 다음에 이름이 나오는 구는 다 이를 본 받으면 된다. 뜻을 풀어 말한다면 ‘만일 내가 능히 흐름에 들겠다는 생각을 지으면 이는 분명히 들어가는 바가 있다. 만약 들어가는 바가 있으면 정식이 여전한 것인데 어찌 초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이다, 종합하면 과를 얻는 것은 바로 무념無念으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염念을 지으면 곧 과를 얻는 것이 아니다.
2) 이과二果가 상相을 여의었음을 밝힘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니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일왕래이나 왕래함이 없고 이 이름이 사다함일 뿐입니다.”
범어 사다함斯多含을 한자로는 일왕래一往來라 이른다. 초과를 증득해 마치고 욕계 사혹의 상상에서 중하에 이르기까지 함께 육품을 끊었다. 오히려 하의 삼품이 남았다.(욕계 사혹은 모두 구품이다. 오품을 끊어 마치고 중중품을 끊는
데 이르면 이과향이라고 한다. 육품을 끊음에 이르면 이과를 얻었다 한다). 모름지기 천상에 한 번 갔다가 한 번 인간 세계에 와서 끊기 때문에 일왕래라고 칭한다. 그러나 삼중에 실로 왕래의 상이 없다. 왕래의 상이 없으므로 한 번 왕래한다. 또 왕래의 상이 없는데 어찌 일차 왕래와 이차 왕래의 다름이 있으리오. 이 또한 가명으로 일왕래라고 했을 뿐이다. 뜻을 풀어 말하면 ‘혹시 일왕래의 생각을 지으면 이는 분명히 왕래의 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과二果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이다.
3> 삼과三果가 상相을 여의었음을 밝힘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다시 오지 않는다[不來]고 하지만 실로는 오지 않음이 없고 이 이름이 아나함일 뿐입니다.”
범어 아나함阿那含은 한자로 불래不來이다. 이과를 증득해 욕계 아래의 삼품 사혹을 끊은 것을 말한다. 색계 사선천에 붙어살아서 인간 세계에 오지 않는 고로 불래라고 칭한다. 그러나 심중에 실로 ‘온다’는 생각이 없다. ‘온다’는 뜻이 없으므로 오지 않는다. 이른바 ‘온다’는 것이 없는데 어찌 ‘오지 않음’이 있으리오. 이 또한 가명으로 불래이다. 뜻을 풀어 말하면 ‘혹시 불래라는 생각을 지으면 이는 분명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이어서 오히려 담박하게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온전히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정식이 아직도 있다는 것으로 초과에 응하는 바도 아닌데 어떻게 삼과를 얻었다 말하겠는가?’이다.
4> 사과四果가 상相을 여의었음을 밝힘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실로 아라한이라 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생각하면 이는 곧 아. 인. 중생. 수자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범어 아라한阿羅漢은 한자로 무생無生이다. 삼과를 증득해 마치고 사선천에 있으면서 욕계와 색계 두 세계의 72품 사혹을 끊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여 후유를 받지 않는다. 생사를 끝내는 고로 무생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심중에 실로 법 또한 없다. 그 법이 없기 때문에 생멸심이 쉬는 고로 무생이라고 한다. 뜻을 풀면 다음과 같다. ‘혹시 무생이라는 생각을 지으면 이는 분명히 법이 있는 것이다. 이미 법상이 있으면 아. 인. 중생. 수자에 집착한다.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범부인데 어떻게 사과四果를 얻었다 말하며 무생법인을 증득했다 하겠는가?’
(2) 스승과 제자가 증득음 이룸
1> 해당하는 근기를 잡아 증득을 얻음이 없음
⓵부처님 말씀을 인용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서 제일이라 하십니다.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쟁無諍, 즉 다툼이 없다는 것은 사물과 다투지 않는 일체 평등을 뜻한다.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다툼이 없다. 무쟁은 타인을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이의 마음을 수호하면 괴로움이 나지 않는다. 이 삼매를 닦는 것이 어찌 대비가 아니겠는가? 삼매가 이루어지는 까닭은 인, 아, 시비의 상이 다 공하기 때문이다. 『열반경』에 이르기를 ‘수보리가 허공의 땅에 머무를 때 만약 중생이 내가 서 있는 것을 싫어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마땅히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면 나는 마땅히 종일토록 서서 자리를 이동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허공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와 같음을 볼 수 있다. 장로가 해공제일解空第一인 고로 능히 삼매에 들었다.
(10대 제자는 각각 특별한 장점이 있어 다 제일이라고 칭한다. 대가섭은 두타제일이라고 칭하고 아난은 다문제일이라 칭한다. 사리불은 지혜제일, 목건련은 신통제일, 라훌라는 밀행제일, 아나율은 천안제일, 부루나는 설법제일, 가전연은 논의제일, 우바리는 지율제일, 마지막으로 수보리는 해공제일이다).
삼매는 한자로 번역하면 정수正受이다. 또한 정정正定이다. 모든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름이 정수이다. 일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체의 움직임도 없다. 이를 일러 정정이라고 한다. 사람을 일러 범부라고 한다. 범부는 다툼을 좋아하니 어찌 다툼이 없으리오.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은고로 사람 중에 최고 제일이 된다고 했다.
욕자는 뜻이 넓다. 두루 사혹을 가리킨다. 삼계의 탐하는 등의 번뇌를 끊어야 바야흐로 참으로 욕망을 여윌 수 있다. 무릇 아라한이 되면 욕망을 여의지 아니함이 없다. 욕망을 여의는 것 역시 반드시 사물과 다투지 않는 것이다.
다만 무쟁삼재를 얻지 못하면 장로 또한 이 제일이라는 칭호를 사양해야 한다. 게송에 이르기를 ‘저 수보리에 의지한 자는 이종의 장애를 여읜다’고 설한다.
(「신안소新眼疎」)에 견사혹은 마땅히 이종의 장애가 된다. 뜻이 좁다). 옛날 주에 이르기를 ‘욕망을 여의는 것은 번뇌장을 여의는 것이다. 일체 아라한이 공유하는 바이다(견혹 사혹은 통틀어 번뇌가 된다)’라고 했다. 비록 무쟁삼매를 얻었으나 얻은 바 있음을 두지 아니하면(즉 스스로 무쟁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그 선정에 있다는 것까지도 잊는 것이다.
이를 일러 삼매의 장애를 여의었다고 한다. 이에 참으로 무쟁을 얻고 참으로 삼매를 얻는다. 고로 제일로 욕망을 여윈 아라한이라고 칭한 것이다. 이 구절에 맞게 그것을 말하면, 비단 모든 사람 중에 최고로 제일이라 칭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존이 평일에 장로를 칭찬하고 찬탄하는 말이다. 고로 불설이라고 했다. 장로는 이미 스스로 선정에 있음을 잊었다. 모든 제자도 미치지 못하고 오직 구경각자만이 능히 이 삼매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고로 오직 부처님만이 설한다. 불은 구경각을 칭하는 것이다. 이 과는 바로 공행의 일을 표시해 든 것이지 상을 여윔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다음 과에서는 바야흐로 상을 여윔에 대해서 진술한다). 고로 여래설이라고 하지 않고 불설이라고 한다. 여래는 성품의 덕을 칭한다. 성性을 말하면 즉 무쟁과 제일 등등의 명상은 다 설할 수 없는 것이다. 본경에서 ‘일一’이라고 칭한 것 중애 묘한 뜻을 지니지 않는 게 없음이 이와 같고 이와 같다.
⓶ 상相을 여윔을 진술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
유통본에는 세존 두 자가 있다. 사경과 고본에는 그것이 없어 생략했다. 여기의 양 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장로는 ‘다만 욕망을 여윈 아라한’이라고만 말했다. 무쟁삼매라고 말하지 않는 것에는 묘한 뜻이 있다. 바로 스스로 무쟁삼매에 든 것 자체를 잊고 선정에 있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 보통 욕망을 여의는 것은 오히려 얻는 바가 있는 데에 있지 않다. 스스로 무쟁삼매를 얻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⓷ 까닭을 해석
가. 반대로 나타냄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했다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려니와”
‘아약작니념’ 구와 관련해 승조의 주에는 본래 아자가 없었다. 이다음 구절을 살펴보면 아 자가 있는데 원래 이것이 생략되어 있었다. 지금 본은 이미 하나의 사경에 의지한 고로 이에 따랐다. 아라한도는 욕망을 여윈 것을 말한다. 아라한은 한자로 번역하면 적정寂靜이다.
또 무사無事라고 한다(사상事相을 말한다). 무사는 상을 밖으로 다하고 마음을 안으로 쉬어 내외가 다 고요하며 언제나 고요한 것으로 무쟁삼매의 별명이다. 행은 공행功行이다. 요樂는 좋아한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계합한다는 뜻이다.
대개 좋은 것이 지극한 것을 요樂(락)라고 한다. 성명이 있어야 그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란나행을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행과 계합하여 간극이 없는 증득의 뜻을 말한다. 앞 구절에서는 ‘욕망을 여윈다’고 말하지 않고 바꾸어
‘아라한도’라고 말했다. 뒤의 구절에서는 ‘무쟁삼매’라고 말하지 않고 바꾸어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는 두 이름의 뜻이 같음을 취한 것이다(아라한은 무생이라고 하는데 한마음도 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아란나는 내외가 다 고요한 것이다. 또한 한마음도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얻는 바가 있으면 진실한 뜻이 아님을 다시 나타내 쉽게 밝힌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나타냄을 얻는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처럼 아등의 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요, 상을 취하면 아我등의 상에 집착하는 것과 같음을 다시 한번 밝힌 것이다.
아我에 집착하면 왜 보살이 아닌가? 공행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까닭이다. 마음에 망념이 일어나면 반드시 취착함이 있다. 집착하면 상을 이룬다. 그 상은 아. 인. 중생. 수자가 된다. 대개 망념을 일으키는 까닭은 다른 것이 없다. 능득能得과 소득所得의 정을 잊지 않는 까닭이다. 능득은 곧 아상이다. 소득은 인상人相이 된다(누가 능득이 되는가? 아 이다. 고로 능은 아 에 속한다. 능에 상대적인 것이 소所가 되는데 오히려 아 에 대한 것이 인人이 된다. 고로 소는 인상이 된다). 능소가 하나가 아닌 것이 중생상이 되고, 집착해 가져서 끊지 못하는 것이 수자상이 된다. 하나라도 얻었다는 생각을 지으면 얻지 못한다. 보시를 하면서 하나라도 보시했다는 생각을 지으면 보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대심을 발해 대행을 행하는 자는 절대로 상에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보시하는 자가 만약 보시하는 바가 있다는 마음을 두면 크게 뜻을 바꾸어야 만족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널리 보시를 행하겠는가? 나머지는 가히 예로써 알 수 있다.
나. 바로 밝힘
“수보리가 실로 행하는 바가 없으므로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실무소행’ 구절에서 실로 그 행하고 아는 바가 없다고 지은 것은 행하나 그 행하는 바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얻은 바가 없다’는 뜻도 또한 이와 같다. 하나도 행하는 바가 없는 것을 하나도 얻은 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햐 한다.
앞서 ‘실로 얻는 바가 없다’는 것에 이어서 ‘실로 행하는 바가 없다’고 한는 데는 깊은 뜻이 있다. 대개 수행을 할 때 ‘행하는 바’가 없어야 바야흐로 ‘이름이 아란나행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행하는 바가 없어야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인지因地 단계의 사람이 들으면 당황하게 된다.
만일 머무름이 없고 상을 여의지 않으면 이 수행은 헛된 것이다. 앞서 과위를 들어 말한 것은 인지의 사람들을 위하여 대조를 지은 것이다. 지금 소승의 과위를 이미 마쳤다고 말하면서 ‘실로 행하는 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지적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내가 실로 행하는 바가 없다’고 말하지 않고 수보리가 말하게 한 것에도 깊은 뜻이 있다.
대개 실로 행하는 바 없다는 것은 스스로 곁에서 관하여 보아 얻고, 아울러 본인이 실로 행하는 바 없음까지도 잊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행하는 바 없다는 것은 심중에 두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심중에 두면 상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아. 인. 중생. 수자에 집착하는 것이다.
또 말의 형세를 보면 수보리가 세존을 대신해서 말한 것이다. 세존이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좋아하는 자’라고 설한 것은 다른 것이 없다. 수보리가 실로 행하는 바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명而名의 명은 또한 뜻이 있다. 아란나행을 좋아하게 하는 것 또한 명상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性의 측면에서는 이 말에 집착하지 않는다.
위 몇 과의 뜻을 모아 관하면 무릇 반드시 얻으나 그 얻은 바 없음이 참으로 얻음이 됨을 밝혔다. 만약 얻은 바가 있으면 곧 얻음이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행하나 그 행한 바가 없음이 바른 행이 됨을 알게 하였다. 만약 행하는 바가 있으면 곧 행이 아니다. 어떻게 얻은 바, 행하는 바가 없는가? 염念
을 짓지 않는 것이다. 염念을 짓지 않는 것이 바로 취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 방침임을 가리켜 보인 것이다. 이를 안 연후에 머무름 없어야 비로소 들어갈 곳이 있다. 이것이 다 열어 밝히고자 하는 바이다.
[ 개인 사유 토론 발표 ]
속제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이해한 대로 이야기 나누어 보세요
——-2568년 1월 9일 혜연 무구행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