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장 무엇이 게으름뱅이의 밤잠을 앗아 가는가?
1 어음
만주촌(滿洲村)은 금릉에서 하룻길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작은 마을에도 객잔은 있었고, 그 객잔에도 제일 비싼 방은 있었다.
제일 비싼 방과 몇 개의 비싼 방, 그리고 그 보다 좀 더 많은 싸지 않은 방을 빌려 문등표국의 표사들은 저마다 여장을 풀고 쉬었다.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은 가장 좋은 방을 배정 받았을 뿐 아니라 다함께 모여 저녁을 먹을 때에도 가장 푸짐한 상을 받았다.
오십 명이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식당에 오직 문등표국의 일행들만이 꽉 차 있었다.
쟁자수들은 쟁자수들끼리, 표사들은 표사들끼리, 그리고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은 사형제들끼리 각자의 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어떤 사람들은 즐거운 듯이 떠들어댔고 어떤 사람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앞사람과 소곤거렸다.
이 작은 객잔의 점소이들과 주인은 무척이나 조용한 사람들이었고 음식을 나를 때 발걸음 소리조차 잘 내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다른 객잔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기이하게 여긴 검학이 한 표사에게 묻자, 금릉에 올 때마다 이 객잔을 지나갔던 그는 흔쾌히 답을 들려주었다.
"이 객잔의 주인은 아주 늙은 노인인데, 시끄러운 것을 무척 싫어하고 성미가 아주 괴팍하다더군요. 일 년 내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그를 묵노인(默老人)이라고 부른답니다. 여기 종업원들은 그 주인의 성미를 거스르기 싫어서 조용히 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지요."
"꺼억!"
조용한 가운데 검호의 트림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검호는 입안에 남은 음식의 풍요로운 맛을 되새김질하듯 입맛을 쩍쩍 다시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드디어 다 왔어!"
입 안 가득히 음식을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검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매가 두 눈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내일이면 금릉이야!"
검호는 산동을 떠난 이래 지금까지 이토록 풍족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다 자신의 덕분이라는 것을 조금도 감추지 않는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사제들에게 의젓하게 말했다.
"많이들 먹고, 푹 쉬라고. 금릉이 우리를 기다리니까 말이야!"
좀처럼 흥분하거나 당황하지 않던 지난날의 모습을 되찾은 듯 차분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검학이 불쑥 말했다.
"아란은 아직도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있어?"
검란의 이야기가 나오자, 들떠있던 사형제들의 기분이 푹 가라앉았다.
오직 그녀만이 이 자리에 밥을 먹으러 나오지 않고 정해진 자기 방에 콕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산동에서 출발한 이래 그녀는 억지로 입에 넣어주는 죽 이외에는 무엇 하나도 먹지 않고 있었다. 검란은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 같았다. 얼굴은 갈수록 창백해져 갔으며 장미꽃처럼 붉던 입술은 누렇게 말라붙고 있었다.
검매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에 죽 한 그릇을 청해뒀어. 지금 올라가서 먹여볼게."
검매가 객방이 있는 곳으로 갈 때까지 사형제들은 어두운 얼굴로 음식상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 갑자기 검호가 히죽 웃었다.
"너무들 걱정하지 마. 아란도 금릉에 도착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그는 갑자기 아주 짓궂은 한량이라도 된 듯이 손을 들어, 막 그들의 자리 옆을 지나가던 한 사람의 엉덩이를 툭 쳤다.
"그렇지, 꼬마야?"
엉덩이를 맞은 사람은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표사들 중에서도 유달리 어려보이던 소년 표사였다. 깡마른 몸에 햇볕에 오래 달군 듯한 갈색의 얼굴을 가진 그 소년 표사는 검호를 한 차례 매섭게 노려보고는 뭐라고 한 마디 할 듯 하다가 입술을 깨물고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검호가 갑자기 벌인 장난에 검웅과 검학은 할 말을 잃었다. 검호는 객잔의 문을 나가는 소년 표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히죽히죽 웃었다.
"그 녀석, 기분이 상했나본데? 하도 어려보여서 장난을 좀 친 건데, 미안하게 됐네?"
검호는 별안간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한 일을 저질렀으면 사과를 해야겠지. 나갔다 올게."
검호는 어안이 벙벙한 두 사제를 남겨두고 소년 표사를 따라 객잔을 나갔다. 검웅은 아직 입안에 남아있는 음식을 우물우물 씹으며 둘째 사형은 갈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검호가 나간 문 밖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검학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검웅에게 말했다.
"나도 좀 나갔다 올게."
그가 쏜살같이 객잔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검웅은 셋째 사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모두들 변했다. 산을 내려온 이후로 검표는 아주 변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검란은 귀신에 홀렸으며, 검학은 전보다 더욱 말이 없어졌고, 검호는 전보다 훨씬 뻔뻔해진데다가 가끔 알 수 없는 행동까지도 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검웅은 입 속의 음식과 함께 우울함을 씹었다.
'나하고, 사사저(四師姐) 뿐이야!'
검웅이 겨우 음식을 다 먹었을 때, 문 바깥에서 급한 말울음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천릿길을 한달음에 말을 몰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말발굽이 일으킨 흙먼지를 등에 업고 한 사람이 말울음소리보다 더욱 다급하게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식당 안의 표사들이 일제히 젓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객잔 안에 들어온 사람은 그들이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문등표국의 사람들이 혹시 여기 있소?"
그 사람은 얼마나 허둥거렸던지 눈앞에 있는 이들을 보기도 전에 급히 말부터 물었다. 비록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도 역시 식당 안의 사람들과 똑같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문등표국 안에서도 가장 빠른 기수(騎手)라고 불렸던 사람이고, 다급한 전갈을 전할 일이 있을 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표사들의 우두머리가 비틀대는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어디 다쳤는가?"
푸른 옷의 기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동료들을 찾아내어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곧바로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친 곳은 없고, 다만 급하게 말을 달려와서 좀 지쳤을 뿐이오. 진 총관으로부터 소국주(少局主)에게 전갈이 있소!"
의아한 눈으로 기수를 바라보던 표사들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굳지 않은 것은 검웅뿐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소국주? 소국주? 심 소저를 말하는 것 아닌가? 심 소저는 분명히 산동에 있을 텐데 어째서 여기에 와서 찾는 거지?'
검호가 소년 표사의 뒤를 쫓아서 나갔듯이, 검학도 소년을 보고 객잔을 나왔다. 하지만 검학이 본 소년은 검호가 쫓아간 소년과는 다른 소년이었다.
그는 우연히도, 아주 우연히도 멀리서 객잔 안을 쏘아보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검학이 쫓아오는 것을 보자 결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던 그 낯익은 얼굴은,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자 더 이상 달아나지 않고 그를 기다리며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검학은 낯익은 얼굴을 쏘아보며 물었다.
"내가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낯익은 얼굴이 되물었다.
"이미 유주에서 내 이름을 듣지 않았어?"
"아정이라는 이름은 들었지만, 그 이름이 진짜일지 확신이 없다."
낯익은 얼굴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이름은 진짜야. 하지만 소제갈이라고 불러."
검학은 다시 한 번 소제갈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유주에서도 보았고, 산동에서도 보았던 얼굴이지만 설화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다시 한 번 살펴본 것이다. 어쩌면 입매가 닮은 듯도 했고, 어쩌면 턱의 선이 닮은 듯도 했다. 하지만 눈만은 결코 그 누나와 닮지 않았다. 소제갈의 눈에는 설화와 같은 초연한 빛은 없고 오직 사악한 장난기로 가득했다.
검학이 소제갈에게 물었다.
"왜 날 불러냈어?"
"내가 언제 당신을 불러냈어?"
"그럼 왜 일부러 내게 얼굴을 보였지?"
소제갈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검학의 창백한 얼굴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우리 누나의 방에서 잤지?"
검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나랑 잤어?"
소제갈의 질문은 당돌했다. 검학은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됐군."
소제갈은 키득거리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같이 자게 될 꺼야. 누나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검학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검은 구름이 달을 가려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게 해주기를 바랬다.
소제갈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누나의 마음에 든 것이 당신의 그 빌어먹을 사형이 아니라 당신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군. 난 당신처럼 빌빌거리는 사람도 싫지만, 그보다 더 싫은 건 당신의 그 사형이야."
"우리 사형을 왜?"
"당신의 사형이 내 돈을 뺏어갔어. 그래서 유주에서부터 쫓아온 거야."
검학은 그제야 소제갈이 왜 자신들을 골탕먹였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왜 자신을 불러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소제갈이 잠시 머뭇거리며 검학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랑 거래하지 않겠어?"
"무슨 거래?"
"내가 당신의 사형을 골탕먹이는 것을 도와준다면, 당신이 내 누나와 잘 수 있게 내가 도와줄 게."
검학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내리쳤다.
짝!
호되게 뺨을 맞은 소제갈의 얼굴은 검학보다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소제갈은 덤비지도 악을 쓰지도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거절이야?"
"너는 네 누나를 팔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내 사형을 팔지 않아."
"당신도 바보로군."
소제갈은 쓰디쓰게 말을 뱉었다.
"당신도 바보고, 당신 사형도 알고 보면 바보야. 당신 사형제들은 모두 바보야."
검학은 '우리 사형은 알고 보면 바보가 아니라, 그냥 봐도 바보야. 알고 보면 바보가 아닐지도 몰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조숙한 소년에게 굳이 그것을 알려줘야 할 의무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다만 어째서 소제갈이 여기까지 왔으며, 어째서 자신을 만나려고 했는지를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소제갈은 부어오른 뺨을 만지며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누나는 내게 더 이상 당신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어. 왜 그랬는지 알아?"
검학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야. 물론 누나는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말야."
소제갈은 히죽 웃더니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당신들 뒤에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하더군. 괜한 일에 말려들지 말라고 말이야.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당신들의 목적지가 금릉이기 때문이야."
소제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금릉에는 갈 수가 없어."
검학은 소제갈을 다시 바라보았다. 소년의 몸은 갑자기 정말 소년답게 쪼그라들어 버린 것 같았다.
"천하의 어디라도 나는 갈 수가 있지만, 금릉만은 갈 수가 없어. 그래서 난 어떻게든 당신들이 금릉에 들어가기 전에 골탕을 먹이고 싶었지.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별 꾀를 생각해 내지 못했어."
소제갈은 눈을 반짝이며 검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묻고 싶은 거야. 당신들은 평생 금릉에서 살 거야? 아니면 언젠가는 금릉을 떠날 거야?"
검학이 대답했다.
"우린 아마 언젠가 금릉을 떠나게 될 거야."
소제갈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좋아! 그럼 됐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때는 내게도 좋은 생각이 떠오를 거야."
소제갈은 그의 등 뒤로 가득한 어둠 속을 향해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당신 사형에게 전해 줘. 금릉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이 소제갈이 다시 찾아갈 거라고.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면 금릉을 떠나지 말라고 말이야."
소제갈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잡으려고 하면 굳이 못 잡을 것도 없었지만 검학은 그 뒤를 쫓지 않았다.
그는 다만 생각했다.
소제갈에게 금릉이 결코 가서는 안 되는 금지(禁地)라면 설화에게도 역시 그러한 것일까? 어쩌면, 그와 사형제들에게도 금릉은 가서는 안 되는 땅이 아닐까?
검학은 갑자기 그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둠 속의 미아(迷兒)일 뿐이라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아침이 되고 해가 뜨더라도 그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한 명의 소년을 쫓아간 검호는 좀 더 많은 길을 걸어야 했다. 모욕을 당한 소년 표사는 그가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나중에는 바짓가랑이 사이에서 쉭쉭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그를 떨구어내려고 애썼다.
검호는 태어난 이래로 그만큼이나 빨리 걸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그 뒤를 쫓았다. 소년 표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초조한 듯 걸음을 빨리 하다가 별안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소제갈이 검학을 기다린 것처럼 검호를 기다려주려한 것은 아니었다. 소년 표사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하고 한 모금의 진기를 모으더니 별안간 번뜻 몸을 날리며 상승의 경신술을 펼쳐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나기 시작했다.
검호로서는 그를 쫓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만한 경신술이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입은 있었다.
"대체 어딜 그렇게 가는 거요? 옥구슬 아가씨!"
소년 표사의 몸은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그의 번개같은 경신술은 검호로부터 달아나는데 쓰여지지 못했다.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소년 표사는 검호가 있는 곳까지 되돌아왔고,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년 표사는 뾰족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도대체 당신은 예의가 있는 사람이에요, 없는 사람이에요?"
당연히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쪽이 옳은 대답이 되겠으나 검호는 입이 막힌 고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검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이 예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입을 막은 소년 표사의 손바닥에 얼른 입을 맞췄다.
"어머!"
소년 표사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검호의 입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불침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년 표사가 검호를 노려보았다.
"언제부터 내가 나인 줄 알았어요?"
검호는 히죽 웃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냄새는 잘 맡아요. 산동 제일의 갑부 심대인의 외동딸이신 지라 아주 특이한 향수를 쓰시더군요. 냄새가 톡 쏘는 것 같았지요."
검호는 소년 표사의 갈색 얼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얼굴은 물감을 칠해 갈색으로 변하게 할 수 있어도, 몸에 배인 향기는 없앨 수가 없지요. 그렇지 않소, 심 소저?"
갈색 물감과 몇 가지 술수로 그럴듯하게 변장하고 있던 심 소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산동에서 여기까지 한 마디도 내색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뭔가요?"
"뭐, 소저께서 굳이 감추고 동행을 하시는데 제가 소문 낼 이유가 있나요?"
"그럼 오늘 일부러 나를 희롱한 이유는 또 뭔가요?"
"내일이면 금릉에 도착하기 때문이지요."
심 소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이유예요?"
"금릉에 도착하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것이고, 앞으로 심 소저를 뵐 일도 없을 테니 작별 인사나 하려고 말입니다."
심 소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검호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이 작자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음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검호는 전혀 음흉하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시는 길이었습니까?"
심 소저의 얼굴에는 다행히 갈색의 물감이 칠해져 있어서, 그다지 많이 붉어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당신, 당신은 예의를 정말 모르는군요. 내가 여자인줄 알았다면, 때때로 쫓아오지 말아야 하는 곳도 있는 법이에요."
검호는 심각하게 물었다.
"위험한 곳입니까?"
심 소저는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려고 하셨지요?"
"알 것 없어요! 어서 객잔으로 돌아가기나 하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볼일을 보십시오. "
"당신은 무척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에요!"
"심대인께 옥구슬을 잘 지키겠노라고 맹세를 했기 때문에……!"
"당신이 지켜야 할 옥구슬은 내가 아니고……!"
심 소저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검호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나요?"
검호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히죽 웃었다. 심 소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 정말 음흉한 사람이군요!"
검호가 딴청을 피우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는 혹시 이곳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하셨던가요?"
그들이 서있는 곳은 을씨년스러운 폐장원(廢莊園)의 정문 앞이었다. 굳이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불빛 한 점 없고 썩어 가는 대문에 거미줄이 가득 쳐져 있는 것이 사람이 살지 않은지 최소한 십년은 넘은 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심 소저는 고개를 막 가로 저으려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멈췄다.
그녀의 태도는 아주 애매해서, 정말로 그녀가 이곳에서 약속을 한 것 같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심 소저는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그렇게 궁금하게 생각한다면, 어디 한 번 들어가 보시지 그래요? 나 대신 그 누군가를 만나게 될 수도 있을 테니!"
심 소저가 쌀쌀맞게 등을 돌리고 객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뜻밖에도 검호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 낡은 폐장원에 무척 흥미가 생긴 듯 썩어 가는 대문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심 소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귀찮은 진드기를 따돌린 것이다. 그녀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저 자가 졸졸 따라붙지 않을 때 얼른 측간에 가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귀찮고, 정말 싫은 인간 같으니라고!'
하지만 최소한 그녀는 검호가 겉보기처럼 바보는 아니라는 사실 하나 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끼이익-!
검호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폐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안에 누군가 있을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대문이 워낙 낡아서 부서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낡은 집의 냄새가 그의 콧속 깊이 스며들어왔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이 냄새는 그가 장백산의 절터에서 익히 맡아왔던 냄새였다. 그는 이 낡은 장원이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낡은 장원은 그를 별로 환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장원 안을 거니는 바람은 유달리 싸늘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나무와 풀들이 귀신처럼 머리를 흩뜨리고 자라나 있었으며 무릎까지 오는 잡초들이 그의 발걸음을 막았다.
게다가, 장원 안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끼이이!"
그 누군가는 그가 들어서자마자 적의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검호는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파밧!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이 팔에서 전해져왔다. 달려들었던 그 누군가가 뒤로 물러나는 것을 느끼며 검호는 재빨리 손가락 사이로 누군가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귀신도 아니었다.
조그맣고도 날쌘 날짐승이었다. 아니,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다시 그를 향해 쇄도(殺到)해 오는 모습은 마치 날짐승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조종되는 병기처럼 보였다.
날짐승의 발톱인지, 병기의 날인지 모를 것이 다시 그의 얼굴을 찍어왔다. 검호는 겁쟁이처럼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웅크리고 앉았다. 날짐승은 그의 팔에 붙어 그의 머리를 마구 쪼아댔다.
무지하게 아팠다. 팔은 물론이고 머리통에서도 피가 날 지경이었다. 검호는 비명을 질렀다.
"알았어! 나갈께! 나가면 되잖아!"
검호는 날짐승에게 무수하게 쪼이면서 허둥지둥 대문 쪽으로 달아났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지 않았다. 그는 대문을 걱정해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가 쫓겨서 문을 막 나설 때, 그의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은 사람의 집으로 가라! 이곳은 사람이 올 곳이 아니다!"
검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미 낡은 대문은 닫혀져 버렸고, 그를 쪼아대던 날짐승도 그의 몸에서 떨어져나가 사라져버린 뒤였다.
사람의 말로 이야기 한 것은 그를 쪼아대던 그 날짐승이었을까? 아니면 그 날짐승을 부리는 귀신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검호는 차마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낡은 집이 다 그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울상이 되어 상처를 어루만지며 객잔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객잔에 도착했을 때, 심 소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 소저는 더 이상 갈색 물감으로 얼굴을 가린 소년 표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흰 소복(素服)을 입고, 그 소복보다 더욱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검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진 총관으로부터 내게 전갈이 왔어요."
표사들도, 검호의 사형제들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뒤, 문등표국의 소국주 심 소저는 검호와 단 둘이 방에 앉아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군요."
그녀는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었던지 가늘게 목소리를 떨었다.
검호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심대인이?"
심 소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병환이라도?"
심 소저는 고개를 저었다.
"진 총관의 전갈은 다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내가 빨리 돌아와서 표국의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뿐이었어요. 사인(死因)은 가봐야 알 수가 있겠지요."
그녀는 목소리 뿐 아니라 손도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위태한 상태였다. 비록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착실히 해온 그녀였지만, 모든 일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아직 젊었고, 또 여자였다. 그녀를 금보다 더 귀하게 여겨주었던 아버지가 죽은 지금, 그녀는 갑자기 세상에 홀로 떨어져버린 것처럼 모든 일이 막막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였다. 표사들은 그녀의 아랫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하물며 위로는 더욱 받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검호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미워했지만, 그가 어떻게든 위로를 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검호는 위로를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진 총관은 심 소저가 이 표행에 합류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심 소저는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일 년에 한 번, 금릉으로 가는 이 암표행에 꼭 변복을 하고 따라오곤 했어요. 아버지와 진 총관과 표두만이 내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강호의 일을 익히는 경험도 되고, 또 암표행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니까……."
"중요한 암표행이니, 내일 금릉에 가서 일을 마치신 다음에 돌아가시겠지요?"
심 소저는 불끈 화가 치솟았다. 그녀는 검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표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이 암표행보다도 더욱 중요해요. 당신은 지금 제 말을 제대로 듣기나 했나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구요! 우리 아버지가!"
화가 나서 시작되었던 그녀의 말은 끝부분에 가서 눈물과 함께 터져버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깨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동안에 검호가 망설이며 그녀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심 소저의 어깨를 감싸안을 것 같던 검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도로 거두어졌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건, 한 순간의 위로가 아니야.'
그녀가 실컷 오열할 만큼의 시간을 준 뒤 검호는 다시 심드렁한 소리로 물었다.
"아무튼, 그럼 어쩌실 겁니까? 그 옥구슬을 나르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면서요?"
심 소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려는 거예요."
"무엇을요?"
"우리 표국 사람들은 나와 함께 지금 즉시 산동으로 돌아갈 거예요. 금릉은 이미 코앞이니, 당신 사형제들이 내가 말하는 곳까지 표물을 옮겨주세요."
검호는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왜 내가 그걸 해줘야 합니까?"
심 소저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제가 돈을 줄 테니까요."
"얼마나?"
"당신이 원하는 만큼!"
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어음을 하나 써줄 수 있소?"
"얼마 짜리로?"
"액수는 쓰지 말고, 언제든지 내가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해줄 수 있는 것으로."
심 소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써주는 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산동 제일의 갑부인 심대랑(沈大娘)의 어음인데!"
심 소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난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심대랑이 될 수 있어요?"
"아가씨는 예쁘고 돈도 많으니 곧 시집을 갈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심대랑이라고 불리게 될 겁입니다."
심 소저는 탁자 위의 붓을 들며 말했다.
"이곳에는 우리 표국이나 전장의 신용을 증명할 만한 어떤 도장도 없어요. 단지 내 필체만이 증거가 될 뿐이에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검호가 비로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심 국주(沈局主)!"
심 소저는 별안간 힘을 내어 한 장의 어음을 써주었다. 검호가 그녀에게 해준 것은 위로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데는 충분했다.
그날 밤, 문등표국의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은 마차를 끌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검호와 그의 사형제들은 그 객잔에서 하룻밤을 더 묵은 뒤, 아침이 되자 코앞으로 다가온 금릉을 향해 길을 떠났다.
검호의 품속에는 몇 개의 상자 안에서 꺼내고 꺼낸 한 개의 목갑이 숨겨져 있었다. 한 개의 붉은 비단주머니와 평범한 옥구슬이 들어있어야 할, 그 목갑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