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사대부 들 중 개혁을 원하는사대부 중에 목은(이색), 포은(정몽주) 은 고려라는 왕조안에서 개혁을 하려던사람들이었고 삼봉(정도전), 강무(남은), 우재(조준) 등은새로운 왕조를 통한 개혁을 원했다.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과, 이방원, 세조 정변 과정에서 공신 책봉된 이들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성종 초기까지 왕실과 결합하여 권력을 독점, 유향소를 장악하고 공물 방납과 대외 무역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세조 이후 고위 관직 독점과 경제 비리가 만연했다.이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한 성균관 학파를 훈구파라불렀고, 지방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수련하던 세력들을 사림파라 부르고 이들 중엔 가난한 선비들도 있었고 중 소 지주도 있었지만 사림파의 주축도 문벌귀족 김굉필, 정여창, 퇴계(이황), 율곡(이이), 김종직 등은 사대부였고 그들의 물질적 토대는훈구파와 다름없이 토지와 노비였으며 지방민이 아닌 대지주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훈구파가 협력 하였고 세조의 아들 성종이 즉위하고 또 사망 하면서 연산군이 즉위하는데 연산군 시절 사림파 김종직이 단종을 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대한 간접적 비판한 '조의제문’의 내용이 들어 나면서 연산군은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실증을 느낄때였고 훈구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을타도 하려는사림파의 약점을 노리고 있던 터라 유자광이 김종직과 껄끄러운 사이임에 연산군을 부추기면서 사림파의 많은 인물들이 죽임을 당했고 (무오사화)
연산군은 어머니 윤 씨의 폐비와 죽음에 관하여 대신들을 2차로 숙청하고(갑자사화)
국정을 돌보지않아 1506년 훈구파 대신들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옹립했다.(중종반정)
중종은 정권을 장악한 훈구파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젊은 사림세력을 등용, 그중 조광조는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급진적 개혁 의지에 왕의 개혁 노선과 차이가 있었고 중종반정 공신 명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조광조를, 반역을 꾀했다고 훈구파가 모함하여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들을 숙청하였다. (기묘사화)
중종 사망 후 인종 명종 시기엔 외척 윤 씨들의 권력 투쟁으로 (을사사화) 사림세력이 약화되었다. 사림파의 기나긴 수난에도 이들은 끈질기게 지방의 서원에서 꾸준히 인재를 길러 내 중앙 정계로 진출했지만 새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 훈구파는 세력이 약해져 갔다.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파가 중앙 정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말았지만, 그 내부에서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대립하여 1575년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지고, 동인인 퇴계(이황)와 남명(조식)의 제자들을 중심으로한 세력을 키웠고 서인은 율곡(이이)과 성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는데 1589년 동인인 죽도(정여립)가 반란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기회로 동인은 몰락하게 된다(정여립 모반사건)
동인의 몰락 후 집권한 서인의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 세자 책봉을 간청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서 서인들이 실각해 버린다.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다시 집권 하게 되는데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는 일본의 정탐 결과를 놓고 일본침략을 우려한 서인 황윤길과 침략은 없을 것이란 동인 김성주의 주장이 수용된다. 와중에 세자 책봉 간청으로 서인들의 처벌을 놓고 이산해 의 강경파 세력과(북인) 일부만 처벌 하자는 류성룡의 온건파(남인)로 분열 된다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의 방어, 명나라의 지원으로 일본을 물리쳤다. 지루한 전쟁 끝에 황폐함 속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인홍 곽재우 등의 북인이 정권을 쥐는데 선조의 후계자를 두고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새로 태어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으로 나뉘게 된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대북파가 정권을 차지하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소북파와 영창대군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축출 하는데, 이러한 광해군의 행위를 패륜으로 간주한 서인들이 1623년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을 임금으로 옹립한다. (인조반정)
그 후 북인은 모조 리몰락하고 인조와 서인들은 친명 외교를 펼치다가 청나라에 무릎꿇고 만다(병자호란)
1659 년효종이 사망하자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을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예송논쟁)
예송 논쟁은 두 차례나 반복 끝에 (가해예송 갑인예송) 임금인 현종은 사망한 효종이 차남 이지만 적법한 왕위 계승으로 장남의 예를 갖추어도 된다는 남인의말을 허락했다. 1674 년 즉위한 숙종의 초반에 예송 논쟁에서 승리한남인들이 집권했는데 남인의 영수 허적과 그 아들이 역모를 꾸민것이 발각되어 남인 세력이 대거 실각한다(경신환국)
이를 통해 집권한 서인 세력들은 남인 세력의 처벌을 놓고 강경파와(노론)온건파(소론)로 분열되고 이후 서인(노론, 소론)은 숙종이 후궁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 하다가 1689 년 재차 실각하여 송시열 등은죽임을 당하고(기사환국)
다시 남인이 정권을 쥔다. 그리고 숙종은 원래 왕비인 인현왕후를 폐비 시키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는다. 그후임금은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 시키려 하였고 그를 반대하하는 남인은 몰락하고 만다. (갑술환국)
또 다시 집권 하게된 서인 들은 이미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상태였고 숙종의 후계자를 놓고 장희빈의 아들을 지지하는 소론과, 무리수 출신인 숙빈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이 대립한다. 1720년 숙종이 사망하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고 소론이 집권 하는데 이에 반발한 노론이 경종에게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한편 뒤로는 역모까지 꾸몄다는 것이 포착되자 분노한 경종과 소론에 의해 노론의 세력들이 대거 숙청 당하게 된다(신임옥사)
재위 4년 만에 경종이 죽자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한다. 영조는 당파를 초월한 탕평책을 펼치기 위해 골고루 등용했는데 소론 강경파가 일부 잔존한 남인들과 연합하여 1728년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인좌의난)
반란이 진압되어 소론이 몰락하고 노론이 득세 했지만 영조는 탕평책을 재차 실시한다.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 정조 역시 탕평책을 실시 당파의 색채는 거의 지워졌으나 조정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 세자를 동정하는(시파)와 죽는것이 당연 하다는(벽파)로 나뉘게된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이며 선왕 정조의 충신 김조순이 순조를 보필한다. 1832년 김조순이 죽고 그 가문인 안동 김씨와 왕실의 외척인 풍양 조씨에 의해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1498년 연안군시기에 훈구파와 사림파의 본격적인 대립으로 촉발된 붕당정치는 약 330년 속하다가 막을내린다.
당파의시작인 훈구파와 사림파의 당쟁에서의 다툼은 관직과 토지를 두고 다툰 신흥세력과 기득권 세력, 출세와관직의 독점에 의해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 사림파들의 공격이 진정한 민생을 위해 나섰던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조선시대 사림들이 말하는 청빈이나 안빈낙도는 어렵고 서러운 하소연 할 수 없는 빈민들을 위함이 아닌 빈민을팔아 정권 회복과 파벌 안녕을 얻고자 했던것은 아닐는지…
4대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와 모반사건(정여립 사건,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국민 안정과 국력 배양에는 남의 얘기었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권 탈환에 몰두하여 아무 준비도 없이 수모를 당한 병자호란, 한심한 예송 논쟁, 3대환국(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임옥사 이인좌의 난, 이모두가 위민과 부국 강병은 언제나 뒷 전 이었다. 물론 경세치술에 전력을 다 하며 개혁을 기치로 걸었던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 뛰어난 유학자이자 경세가 였던 (율곡) 이이, 임진왜란 위기를 수습하며 시대를 성찰한 류성룡, 인문부터 과학기술까지 망라한 ‘르네상스’적 정치인 정약용, 도학에 구속 되지않고 부국강병과 이용 후생을 실천한 (잠곡) 김육 같은 정치가도 있었지만 조선의 흐린 물을 맑게 만들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견제 세력이 필요함은 왕정 시대나 민주주의 시대나 필요 불 가결하여 위정자들의 독주를 막고 나쁜 시정을 바로잡아 한 발 앞서가는 정치 발전에 기여함은 좋은 현상이지만 당리당략, 개인 영리에 함몰되어 부강한 국가와 국민의 안락을 생각지 않는다면 올바른 정치라할 수 없을것이다. 물질 문명과 과학이 발전한 지금도 정치는 몇 백 년전의 위정자들을 닮아 국민을 불모로 삼아 당리당략과 자신의 이익 추구에 힘 쓰는 모습들이 왕정시대에 사는것같은 착각을 느끼곤한다.
조선시대의 정치가 국력 신장과 국민 안위를 멀리 했기에 외세 침입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던 뼈아픈 역사속에서 현대의 위정자 들도 잊지말고 기억하여, 정권 유지와 기득권을 위한 표 구걸보다 국민 안위와 부국강병에여. 야 를 막론하고 통일된 마음으로 함께 힘써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국속에도 흙탕물 속에 함께 뒤범벅되어 진주를 찾기가 힘들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다산)정약용 이나(잠곡)김육 같은 인물의 출연을 바라고 원함은 민초들의 지나친 욕심으로 보이지 않길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