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철원 겨울 논길을 걸었습니다. 들은 비어 있었고 모이를 찾다 지친 참새 몇 마리가 전선에 앉아 쉬고 있었을 뿐 주위는 그저 황량하기만 했습니다. 세상은 온통 소란스럽기만 하지만 빈 들판은 고요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간간이 날아오르는 새들, 전봇대. 홀로 걷던 그 길은 문득 외할머니를 추억하게 했습니다.
참 쓸쓸한 삶을 사셨던 나의 외할머니. 참빗으로 고이 빗어 넘기어 쪽진 머리, 쪼글쪼글한 얼굴 피부, 험한 농사일에 기역자로 구부러진 허리, 그래서 유독 작아보이던 키. 지금 생각해도 가슴 저린 것은 딸만 둘 낳았다는 이유로 평생 외할아버지로부터 부인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시다 떠나셨다는 점입니다. 그런 한 때문이었을까요? 외할머니는 지독한 골초였습니다. 늘상 양쪽 볼이 쏙 들어갈 정도로 맛나게 곰방대를 빨면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영천 최씨인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네요. 입성에 관한 한 정말 깔끔하셨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자세도 꼿꼿하셨고, 의관을 갖추지 않은 채로는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으셨죠. 검은 갓에 호박색 구슬 갓끈, 말끔하게 다려진 두루마기에 동그란 멋내기 뿔테안경까지 걸친 모습으로 집을 나서곤 했습니다.
한량이셨을까요?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만 무려 세 분이나 되었습니다. 첫 번째 할머니가 앞에서 소개한 나의 진짜 외할머니입니다. 두 번째 할머니는 내가 주막할매라 불렀던 분입니다. 청송 방향 큰길가 너배(합덕) 입구 삼거리에서 자그마한 주막을 운영하시던 여장부 스타일의 풍채 당당한 분이었지요. 외할아버지와 정이 들어 대처에서 함께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만 확실한 건 아닙니다.
주막할매는 노상 농익은 홍시(술) 냄새 폴폴 풍기면서 “내 새끼, 내 새끼!”를 연발, 얼굴을 비벼대는 통에 더러 귀찮을 정도로 정 많은 분이었습니다. 내 호주머니에 용돈을 찔러 넣어주기도 하셨는데 오지 외딴 주막일망정 주모답게 음식 솜씨 하나만큼은 대단하여 나를 만족시키곤 했습니다. 파 송송, 다진 마늘에 고춧가루 솔솔 뿌린 양념장을 베이스로 향긋한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자글자글 끓여낸 말린 갈치조림. 그 맛보는 재미로 진짜 외할머니에게 심정적 배신을 때리고 주막할매에게 귀여움을 받으려 애쓰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의 눈에 비친 한, 두 외할머니 사이는 좋았습니다. “우리 형님, 우리 형님.”하면서 외할머니를 챙기는 걸 여러 번 목격했거든요. 그러나 주막할매는 나이 더 많은 외할머니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가셨습니다. 그 후에 들어오신 세 번째 외할머니가 잠시 주막을 맡았으나 내 기억에 그 분의 존재감은 미미합니다. 정도 들기 전에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셨고, 그 분도 홀연히 사라졌으니까요.
중학교 3학년 무렵 이맘때였을 겁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고 짐을 챙기기 위해 입암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이제 서울로 떠나면 외할머니를 다시는 뵙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장터 ‘점빵(구멍가게)’에서 누리끼리한 봉지에 담겨진 20원짜리 말아 피우는 담배 ‘풍년초’ 다섯 갑을 구입, 10리 길을 걸어 들고 찾아간 너배 마을 입구. 주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우회전하여 다시 5리 정도 더 걸으면 외갓집이 나타나고, 사랑채 어두컴컴한 골방에 누워계시는 외할머니를 뵙게 됩니다. 기력과 정신은 거의 다해 가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장죽은 손에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손으로 꾹꾹 눌러 가루담배를 곰방대에 채워 건네니 화롯불에 불을 붙여 맛있게 잡수시면서 혼잣말처럼 “인자, 니 언제 또 볼 수 있겠노?” 하셨습니다. 울컥해졌지만, 외할머니 손을 잡은 채 마치 곰방대에 담배를 눌러 담듯 꾹 울음을 참았습니다.
다시 입암으로 돌아오자니, 어느새 산 그림자가 동쪽을 향해 길다랗게 길을 덮고 있었습니다. 곧 어두워질 참이었습니다. 전봇대(전화만을 위한)가 줄지어진 길을 걷다가 쓸쓸해진 마음에 국민학교 4학년인가 5학년인가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시가 저절로 생각났습니다.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선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되돌아 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박두진의 시 <돌아오는 길>
31호 국도, 깔린 자갈을 피해 타박타박 길을 걷자니, 명미쯤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였습니다. 중학교를 지나고 상투반, 합류대를 건너 도가집 뒤 방천 위에 올라서니 집집마다 하나둘씩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룻밤을 보내야 할 안마 초입의 내 방으로 눈을 돌려보았습니다.
아무도 날 기다리지 않을 그곳에 불이 켜져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까닭 모를 서러움과 외로움에 복받치어 비로소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일이면 3년간의 외로움을 마감하고 다시 미래를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세상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201년 2월 말, 환갑이 지난 나이에 이 무슨 팔자인지 다시 길을 걷습니다. 이번에는 구철원 논길입니다. 황량한 길을 걷자니 비비새, 전봇대, 외할머니, 길, 외로움 등의 추상명사와 보통명사 그리고 여러 장면이 시공을 초월하여 마구 뒤섞이어 오버랩 됩니다. 길 아닌 길을 걸으면서 살았던 30대에 즐겨 들었던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를 흥얼거려 봅니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 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중략)
어디서 왔는지 내 머리위로 작은 새 한 마리 날아가네.
어느새 밝아온 새벽하늘이 다른 하루를 재촉하는데.
종소리는 맑게 퍼지고 저 불빛은 누굴 위한 걸까.
새벽이 내 앞에 다시 설레이는데.
전인권이 결성한 락 밴드 ‘들국화’가 1987년에 발표하여 크게 사랑 받은 번안곡입니다. 원곡은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인 ‘알 스튜어트Al Stewart’의 <The palace of Versailles 베르사이유 궁전>입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일화를 교묘하게 조합한 가사에 ‘포크 락Fork-rock’적 요소를 가미한 음악 스타일을 개발한 아티스트입니다.
<사랑한 후에>는 한때 마음 울적한 청춘들이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즐겨 불렀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박완규 등 많은 가수들도 이 노래를 커버했습니다. 2004년에는 프로젝트 그룹 ‘페이지Page’도 커버했습니다. 원제목에 딱 한 자 더 추가하여 <사랑한 후에 난>이라는 타이틀로요.
그룹 페이지의 보컬은 오현란, 안상예, 이가은, 고아미, 고가은이 차례로 맡았는데, 이 곡은 3대 이가은이 맡았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가수로서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훌륭한 아티스트입니다. TV출연을 자주 하지 않아 얼굴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뛰어난 보컬 실력을 인정받아 여러 드라마의 OST를 불렀습니다. <벙어리 바이올린> <Love is blue> <지독한 사랑> <블루노트> 같은 명곡도 있습니다.
<사랑한 후에 난>은 락과 발라드의 흔치 않은 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전인권과 이가은이 함께 취입한 것이 아니라, 전인권의 음반에서 부분적으로 샘플링하고 이가은의 목소리를 덧입혀 발매한 것입니다. 이런 작업은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경우인데, 발라더Ballader 이가은의 청아한 목소리와 라커Rocker 전인권의 거친 샤우팅, 둘의 조합이 이 의외로 그 조합이 아주 신선하여 즐겨 듣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중음악의 장르 중 락Rock와 발라드Ballad에 대해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락Rock, 초기인 1950년대에는 로큰롤Rock'n Roll(Rock and Roll)이라 하여 백인 음악인 컨트리Country(존 덴버의 음악을 연상하면 됨)과 흑인음악인 블루스Blues가 합쳐지고 비트가 빨라진 음악 형태를 지칭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Hound dog>나, 척 베리의 <Roll over Beethoven> 같은 곡을 상상하시면 되는데, 흔들고[Rock] 구르듯[Roll] 신명나는 음악이라는 뜻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큰롤은 줄여서 ‘락’이라 줄여서 부르기 시작했는데, 통상 4인조 또는 5인조 밴드로 구성됩니다. 음악적 특징은 현란한 연주의 전자기타와 키보드, 육중한 음색으로 청중들의 가슴을 두드리는 베이스, 굉음에 가까운 드럼 스티킹sticking, 마음껏 내지르는 보컬의 샤우팅입니다.
유교적 사고에 젖어있는 분이나 잘 다듬어진 교육을 받은 분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연주 행태가 또 다른 특징이지요. 사운드는 정신을 놓칠 만큼 시끄럽기 그지없고, 연주중에 악기를 때려 부수는 등 매우 거칩니다. 본디 ‘락’이란 장르가 기성세대의 권위와 보수적 태도 그리고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저항을 표방으로 탄생한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항정신을 ‘락 스피릿Rock spirit’라 합니다.
아, 여기서 ‘팝Pop’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한때 우리는 장르에 관계없이 외국음악 특히 영미 대중음악을 통틀어 ‘팝송’이라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도 많고요. 그런데 팝이라는 개념은 1960년대에 락이 발생하면서 생긴 용어입니다. 락 정신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락 이외의 모든 음악을 상업주의에 휘둘린 불순한 음악으로 폄하하여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런 즉 락을 포함한 모든 영미 대중음악을 ‘팝송’이라 하는 것은 라커Rocker들을 모욕하는 셈이 되나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폄하하던 팝 뮤지션들만큼 상업적일 뿐 아니라 미디어에서 불러주지 않아 언더그라운드에서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음악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락에 대해서 자세하게 ‘썰’을 풀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형편이니 이 정도로 간략하게 끝내겠습니다.
다음은 발라드Ballad입니다. 락 외의 팝은 대체로 매우 개인적인 가사가 특징입니다. 팝송에서 사회적 현안을 비판한다든가 저항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회적 비전을 제시하는 경우도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대부분 사랑 또는 낭만에 대하여 노래합니다. 사랑의 만족 또는 좌절이 단골 주제로서, 자기 고백적 스토리텔링 형태를 가지는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뻔한 클리셰Cliché 아닙니까? 동서고금을 통하여 언제나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주제입니다. 통속적 음악이 가장 쉽게, 먼저 와 닿기 때문이지요. 인간사가 워낙 통속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그렇지 않던가요? 마치 지금의 내 심정 또는 과거의 내 추억을 표현해주는 것 같은 느낌요. 누구나 한번 이상은 경험한 바 있을 겁니다.
사랑노래의 대표적인 장르가 발라드입니다. 본디 발라드란 서사시 또는 문학적 줄거리를 다루는 기악곡을 의미하는 용어였습니다만, 어느새 느린 템포에 감상적인 선율로 이루어진 사랑 노래를 일컫는 장르로 자리잡게 됩니다.
자항을 추구하는 거친 음악 락,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을 주제로 하는 말랑말랑한 음악 발라드. 이렇게 주제와 사운드가 상반되는 장르의 음악이 어렵사리 만나 조화를 이루었으니, 그게 전인권과 페이지의 <사랑한 후에 난>입니다.
(페이지 이가은)
누가 내게 손을 내민 것처럼 어디선가 흐르는 노래
언젠가 그대 내게 불러주던 잊고 있었던 음악인데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던 입술위로 흐르는 눈물
내 곁에 살아 숨 쉬는 향기가 그대여 이제야 알았지
(들국화 전인권)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페이지 이가은)
이제 난 그대와의 추억이 잊혀지길 바라기보다
아무렇지 않게 기억해지길 나는 그저 바랄 뿐인데
아직 혼자만의 긴 긴 하루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해
시간은 내게만 멈춰 서 있고 슬픈 음악 같은 추억들
(들국화 전인권)
어디서 왔는지 머리위로 작은 새 한 마리 날아가네
어느새 밝아온 새벽하늘이 다른 하루를 재촉하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오늘 밤엔 수많은 별이 기억들이
내 앞에 다시 춤을 추는데
첫댓글 구장터 점빵을 알고 너배를 기억하는 것 보니 표도 좀 오래된 사람 같습니다.
구수한 외할머니 이야기는 우리들의 외할머니 이야기 같습니다.
우리 외할머니도 딸 셋만 낳고 아들을 못 낳아 평생을 구박 속에 살으셨고,
내 장모님은 딸만 여덟인가 아홉을 낳아 넷만 건지고 아들을 못 낳아
본인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딸들도 구박을 받아 홧병으로 환갑도 채우지 못하시고 가셨습니다.
장인 어른이 다른 여자를 취해도 딸만 낳았는데 원인이 자기 아들에게 있는 것은 묵살하고
며느리만 구박하던 옛날 시어머니
지금도 그이야기만 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노래 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