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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2013년 모 잡지 봄호에 실린 글인데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아 스크랩해 두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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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의학의 정수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
글. 김호(경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역사와 허구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의를 꼽으라면 그 누구도 주저 없이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을 꼽는다.
방송국을 통해 여러 번 드라마로 제작되었을 만큼 허준의 이야기는 ‘신분을 극복한 드라마틱한 인생’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에게 알려진 허준의 실체가 역사적 사실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을 고증해야 하는 역사학의 부담과 달리 대중매체는 자유롭게 허구와 진실을 오간다.
자유로운 그만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가 대중에 미치는 효력은 한 편의 역사 논문이 따라갈 바가 아니다.
허준에 대한 잘못된 정보는 드라마 등 대중 매체의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
가령 드라마는 전라도 장성 출신의 허준을 경상도 지리산 자락의 산청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설정할 뿐 아니라,
허준보다 150년 뒤의 의원 유이태(드라마에서는 ‘유의태’로 구현)를 그의 스승으로 삼기도 한다.
심지어 사람의 몸을 갈라 안을 들여다보는 해부학과는 전연 거리가 먼 조선의 의학을 뒤집기도 한다.
밀양의 한 얼음동굴 안에서 스승 유의태의 몸을 갈라 의학의 진수를 얻는 허준 의 모습이 그러하다.
허준을 둘러싼 오해의 장막을 걷어내고 역사적 실체에 다가서 보자.
믿어야 할지 의심스러운 과거의 편린과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여기서 믿을만한 사실들을
골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수십 년 전 충청도에 전해오는 허준에 관한 설화를 들어보자.
이곳을 방문한 한 국문학자는 팔십 노인으로부터 허준의 설화를 들었다.
이야기는 가난한 허준이
부인의 핀잔을 견디지 못하고 돈 몇 푼을 얻어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시장에 나서는 데서 시작한다.
시장에 나가 보았으나 별로 장사에 재주가 없던 허준은 매일 허탕만 치고 집으로 돌아오길 반복하였다.
어느 날 시장에 나가 있던 허준은 풍채 좋은 노인이 삿갓을 매매하여 이득을 보자 그를 따라가서 배우기로 하였다.
노인은 산속으로 마냥 들어가더니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고 하산하라고 종용하였다.
그러나 허준은 그를 졸라 제자가 되기로 하였다.
노인은 허준에게 10여 년 이상의 고생을 각오하느냐고 묻고는 그렇겠노라고 대답한 허준에게 의술을 가르쳤다.
의업을 마친 허준은 고향에 돌아가 명의로 이름을 떨치다가 중국의 천자를 고치는 수행 길에 올랐다.
중국에 가는 도중 호랑이를 치료하게 되고 호랑이는 보은의 선물로 침과 회혼포(回魂布)라는 보물을
허준에게 주었다. 중국에 도착한 허준은 천자의 병을 고치지 못하는 곤란을 겪다가 드디어 호랑이의 선물로
황제를 치료하고 많은 상과 칭송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현재 전국적으로 전해지는 허준 전설 은 10여 가지가 더 되는데 이야기의 구조는 대개 비슷하다.
전설의 원형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희령(李希齡, 1697~1776)이 저술한
『약파만록(藥坡漫錄)』이 라는 책에는 앞의 허준 이야기와 유사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구조 역시 거의 유사하다. 특히 맹수의 질병을 치료해 주고 명의(名醫)로 도약한다는 모티브,
그리고 중국에 다녀와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틀 역시 동일하다.
다만 호랑이 대신에 코끼리가 등장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상의 전설과 이야기들로는 허준의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
전설은 다만 허준이 당 대 중국의 선진 의학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향약(鄕藥) 의술을 한 단계 고양시킨 공로를
중국의 황제 치료의 상징을 통해 암시할 뿐이다.
그렇다면 역사 속 허준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미 언급한대로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전라도 지역의 향의(鄕醫)로 이름을 날리던 허준은 30세에 내의원에 출사한 이후
76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내의원 어의(御醫)로 활동 했다.
그의 일생은 대략 세 단계로 구분된다.
먼저 성장기다.
30세 내의원에 출사하기 전 허준은 전라도 지역과 경기도 파주 및 서울 지역을 오가면서 의술로 이름을 날렸다.
두 번째는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내의원 어의 시절이다.
30세에서 60세 전후에 이르는 30여 년을 허준은 내의원의 의사로 활동하였는바
당시 그는 의학의 스승인 양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의서를 집필하던 말년의 시간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의보감』은 허준의 노년 작품으로 그의 오랜 경험과 성숙한 의학 지식이 집대성된
결과물이었다.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 이후에도 당시 유행하던 성홍열이나 온병을 치료하기 위한
전문 역병 의서를 집필하였다.
허준은 한 마디로 평생 의술을 연마하고 의학을 연구한 의학자였다.
때문에 허준 사후 수백 년이 흐른 뒤에도 조선 사람들은 허준을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학과 역사에 널리 밝았으며 특별히 의학에 정밀하였다
〔自幼好學 博通經史 尤 精醫學〕”고 기억하였다.
전라도에서 자라다
허준의 본관은 양천, 호는 구암(龜巖)이다.
그의 아버지 허론(許碖)은 무과 출신으로 지방관을 두루 거쳤으며,
어머니는 영광김씨 무인 가문의 서녀(庶女)였다.
대부분의 서녀들이 그랬듯이 허준의 어머니 역시 허론의 첩이 되었고,
전라도 장성에서 서자인 허준을 낳았다.
조선 시대 서자는 과거에서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자들은 의원이나 역관 등
중인직에 진출하였다. 허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어려서부터 경학과 역 사를 공부하였지만
그가 최종적으로 택한 학문은 의학이었다.
청년 시절 허준은 주로 호남 및 기호 지역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조 때 정승을 지낸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일기인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젊은 시절 광주와 담양 그리고 해남 등지에서 향의로 활동하던 허준의 일상이 묘사되어 있다.
유희춘은 해남 출신의 대표적인 호남 사림이었다.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난 허준은 외가가 광주에 있었던 관계로 일찍부터 유희춘 가에 왕래하였다.
특히 유희춘의 문인이 김안국이었는데, 김안국은 허준의 5촌 당숙이기 도 했다.
김안국· 김정국 형제의 아버지 김연이 허준의 조부인 허곤의 사위였으므로,
김안국은 양천 허씨의 외손이 된다. 허준과도 멀지 않은 인척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김안국은 1542년(중종 37년)에 온역 치료 전문서인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을 편찬하였으며,
동생 김정국 역시 1538년(중종 33년) 전라도 남원에서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을 간행하는 등
의학에 관심이 높았다. 허준이 의학에 입신하게 된 배경에 친· 인척이었던 김안국과 김정국으로부터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김안국의 제자였던 유희춘이 허준을 특별하게 배려했으리라는 추측도 무리가 아니다.
전라도 지역에서 성장한 허준이었지만
20대 후반 30대 초가 되면서는 호남을 넘어 서울에까지 그의 명성이 전해졌다.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유희춘은 허준을 자주 서울로 불러들여
자신의 병은 물론 부인의 고질병 치료를 부탁하였으며,
허준으로 하여금 송순(宋純) 등 주변의 친구들을 치료하도록 주선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후일 허준은 자연스럽게 서울과 전라도 지역을 오가며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했다.
담양의 유희춘과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을 비롯하여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그리고 파주의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등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속에 허준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가령 1587년 9월 성혼이 정철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이달 초 이튿날 전라도 순천에서 부치신 편지를 받았으니, 어찌 기쁘고 반가운 마음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급히 봉함을 열어보고 근황이 좋지 못함을 알게 되니 염려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허준이 와서 전하기를
노형(정철)이 술을 끊고 수양해서 얼굴이 붉은 옥과 같으며 술 때문에 생긴 코끝의 붉은 반점도
모두 없어졌다고 하여 몹시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겼는데,
이제 편지를 보니 잘못 전해진 뜬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의원 어의로 명성을 떨치다
특히 동향(同鄕)이었던 유희춘의 허준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매우 컸다.
1569년 윤6월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洪曇, 1509~1576)에게 허준의 내의원 의원직 천거를 부탁하였다.
허준의 나이 30세로 그의 첫 번째 내의원 출사(出仕)였다.
그동안 허준의 의술이 서울과 주변의 양반들에게 매우 훌륭하다고 정평이 나있었지만
정식으로 직함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유희춘의 도움으로 모든 의원들의 선망인 내의원에 출사한 것이다.
허준은 본격적으로 당대 최고의 어의 양예수로부터 의학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양예수의 의술은 당대 최고였으며 그가 남긴 『의림촬요(醫林撮要)』가 후일 『동의보감』의 기초가 되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양예수를 만난 것은 허준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양예수와 허준의 사제 관계는
후일 ‘양예수가 『동의보감』 을 편찬하던 중 완성하지 못하자 문인 허준이 이어받아 완성했 다.’는
전언(傳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허준이 36세가 되던 1575년부터 『실록』에는 내의원 의원으로서
왕의 진찰에 참여하는 허준의 모습이 나타난다. 비록 안광익(安光翼) 혹은 양예수 등 수의(首醫)를
뒤따라 거명되고 있기는 했지만 내의원 어의로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는 데 이른 것이다.
30대 중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허준은 임금의 시의(侍醫) 가 되어 입진하였다.
허준에게 42세가 되는 1581년은 매우 의미심장한 한 해였다.
이때 허준은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맥경(脈經)』을 왕명에 의하여 직접 교정 출간함으로써
그의 의학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42세의 나이로 허준은 당시 의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경락서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을 교정하고 개편하였다.
일을 끝마친 허준은 발문을 지어 ‘인체의 경락은 곧 나라의 기강과 같다.’면서 지금까지 의론(醫論)이 미숙하여
이와 같은 기본 의서를 정리하지 못하다가 이제 자신의 손으로 가능해졌음을 은근히 자축하였다.
1590년에 허준은 당시 왕자(후일 광해군)를 구료한 공으로 당상관의 가자(加資)를 명받기에 이르렀다.
이해 12월 광해군이 두창(천연두)에 걸려 고생하였는데 다른 의관들이 고치지 못 하는 것을 그가 살려냈던 것이다. 당시 허준은 내의원 정(正)이라는 3품직에 근무하고는 있었으나 당하관 품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당상관(堂上官)에 오르는 가자(加資)는 가벼이 처리될 문제가 아니었다.
서자로서 그것도 기술직인 의관이 당상관의 품계를 받는 일은 많은 조정 신하들의 불만을 일으켰다.
1591년 1월부터 4월에 이르는 동안 사간원은 허준에게 가급(加 給)된 자품(資品)의 환수를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당시 선조의 의지는 확고했으며 허준은 의사로서 당당히 당상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53세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준은 왕궁을 떠나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으며,
노쇠한 양예수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내의원을 주도해 나갔다.
내의원 재직 시 허준의 뛰어난 의술은 세상이 모두 아는 바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허준에게 왕진을 부탁하려고 그의 집을 찾았다.
허준은 몰려드는 환자들을 모두 진찰할 수 없자 아예 집 안 대문을 걸어 잠그고 환자를 돌려보냈다.
그에 대한 악평 이 쏟아졌다. 허준이 거만하고 게을러 환자 보기를 거절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허준은 효자들의 이야기에나 등장했다.
효자의 정성이 얼마나 지극하기에 게으른 허준을 감동시킬 수 있었느냐는 반문이었다.
먼저 효자 박준의 일화를 들어보자.
그는 아버지 박희성이 중풍에 걸리자 정성으로 시약하고 하늘에 호소하여 아버님의 목숨을 구했다.
물론 허준의 집을 찾아 갔다. 알려진 대로 허준은 환자 보기를 거절하였는바,
약을 물으러 오는 자가 문 앞에 가득해도 절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준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아침 반드시 닭이 우는 새벽에 달려가 울면서 왕진을 호소하였다.
그 모습이 매우 간절하여, 드디어 허준이 진실한 효성에 감동하였다.
허준은 문을 열어주지 않은 노복을 꾸짖고 ‘박준은 진실로 효자로다.
추운 계절에 문밖에 오랫동안 세워둔다면 반드시 상할 것이니 먼저 따뜻한 방에 들이라’고 명하고는
집에 왕진하여 간호하니 아버지 박희성의 풍병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듣는 이들 모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뿐이 아니다. 허준은 본디 게으른 자로 묘사되었고,
이렇게 태만한 허준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효자의 지극 정성뿐이었다.
이조판서를 지낸 심각(沈詻)의 이야기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한 데다 우애가 깊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앓아눕자, 심각은 정성으로 시약하였고 낮밤을 가리지 않고 분주하게 의관을 찾아다녔다.
허준은 평소에 매우 게을러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심각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왕진하였다는 것이다.
허준을 매우 태만한 자로 서술하고 그를 감동시킨 지극한 효성을 대비하는 방식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허준의 의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잘 말해 준다. 수많은 환자들이 그에게 약물을 물어오므로
허준은 문을 걸어 잠근 채 이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허준의 처방과 왕진을 얻어낸 일은 지극한 효성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1596년(57세) 『동의보감』 편찬을 명받은 허준은
유의(儒醫), 정작(鄭碏)과 어의 양예수를 모시고 의서 편찬 작업을 추진하였다.
1597년 왜란이 재발하자(정유재란) 의사들이 모두 흩어지고 『동의보감』 편찬은 중단되었다.
이후 허준은 민중들의 구급용 의서 편찬에 힘써 『언해태산집요』(산부인과용 의서),
『언해두창집요』(천연두 전문의서), 『언해구급방』(구급 의서)을 연이 어 저술했다.
이들 언해본 의서들은 후일 『동의보감』 편찬의 밑거름이 되었다.
선조는 궁궐의 의서 500여 권을 내어주면서 『동의보감』 편찬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허준은 의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609년 광해군은 의주에 유배 중이던 허준을 서울로 불러들여 『동의보감』의 완성을 부탁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610년 드디어 허준은 71세의 나이로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해 냈다.
대단한 노익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준은 자신의 책을 조선의 보물이라는 자신감에서 ‘동의보감’이라 명명했다.
저간의 사정은 『동의보감』의 서문에 자세하다.
조금 길지만 중요하므로 옮겨본다.
“우리 선조 임금께서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미루어 여러 사람을 구제하는 인술(仁術)을 펴리라 마음먹고
의학에 뜻을 두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일찍이 병신년(1596년)에 태의(太醫) 허준을 불러 하교하였다.
‘근자에 중국의 의서들을 보니 모두 이런저런 책들을 뽑아 놓았지만 볼만한 것이 없었다.
그대가 여러 의술을 두루 모아 하나의 책을 편집하도록 하라.
사람의 질병은 모두 조섭을 잘하지 못한 데서 생기니, 섭생(攝生)이 우선이고
약석(藥石:약물과 침)은 다음이다.
여러 의서들이 매우 번잡하니 중요한 부분을 가려내고,
궁벽한 시골에 의약이 없어 많은 이들이 요절하는데 우리나라에 향약(鄕藥)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므로 잘 분류하고 이름을 함께 적어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허준이 물러가 유의(儒醫) 정작과 태의 양예수와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으로 더불어 출판을 준비하고
그 대강(大綱)을 이루었는데, 정유년(1597년)에 난을 당하여 의관이 별같이 흩어져 그치게 되었다.
이후 선왕(선조)께서 허준에게 하교하여 혼자 편찬하라 하시고 의서 500여 권을 내주시어
참고하도록 하였으되 책이 절반에 이르지 않았을 때 그만 승하하셨다.
성상(광해군)께서 즉위하신지 3년 경술년(1610년)에 허준이 비로소 일을 마치어 진헌하고
제목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 하니 모두 25권이었다.”
『동의보감』 간행 이후에도 허준은 1613년과 1614년에 연이어 역병이 창궐하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신찬벽온방(新撰辟瘟方)』 과 『벽역신방(辟疫神方)』을 저술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615년(광해군 7년) 76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으니
나라에서 그의 품계를 정1품으로 높여 주었다.
허준은 의원으로 출신하여 정1품의 품계를 받은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살진, 미소의 허준
이상으로 허준의 인생을 간단하게 서술해 보았다.
사실 허준 이 전라도에서 나고 자라면서 송강 정철과 미암 유희춘 그리고 우계 성혼 등
16세기 중반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과 교류하였다는 기록과
『동의보감』처럼 조선 500년을 대표하는 의서를 편찬하였다는 사실만으로
허준의 역사적 실체를 모두 그려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저 대단한 의학자라는 생각이 들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의술로 명성을 날리던 내의원 시절,
밀려드는 환자들을 거절하여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는 기록을 통해
그려진 허준의 이미지는 거만한 어의의 모습으로 이 역시 허준의 전부라 할 수 없다.
사실 모든 역사 기록〔史料〕을 글자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은
어떤 자료이든 기록자의 편견이 불가피하게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료가 없다면 허준에 관한 그 어떤 연구나 언급 자체가 불가능할 것은 물론이다.
역사가는 가능한 진지하면서도 객관적인 서술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
어떤 자료는 박식하고 의학에 뛰어난 자로 허준을 묘사하지만 다른 기록은 경솔하여
왕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거나 게을러 일반인들의 왕진을 극구 거절한 의사로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에 마지막으로 허 준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 하나를 첨가하기로 한다.
임란 후 선조 임금은 자신과 함께 의주로 피난한 공신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들의 초상을 그려 주었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신흠(李信欽, 1570~1631)이 일을 도맡았다.
당연히 어의로 참여한 허준의 초상도 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허준의 초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허준의 초상을 본 사람의 말은 전한다.
‘몸이 비대하여 살졌으며 미소 띤 얼굴을 보니 누구라도 허준의 초상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 눈을 감으시고 약간 살진 얼굴에 웃음 짓는 허준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그가 바로 조선 최고의 의사 허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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