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은혜되게
롬 11장 1-10절
로마서 11장은
“하나님은 과연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하나님은 과연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힘주어 이렇게 대답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구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를 믿는 자는
부끄럼을 당치 않게 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 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놀라운 복음을 감격적인 복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가장 먼저 믿어야했던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해서 거부했을까요?
이해하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 거부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의 복음을 이미 들었고
구원의 복음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그런 비극을 선택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로마서 10장 21절에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그들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그 교만 때문에
불순종 때문에 메시야를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며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다가도
예수를 오래 믿게 되면
기득권이 생깁니다.
종교적인 업적을 쌓으려 합니다.
그래서 믿음보다는
행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계급을 가지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고
배우기보다는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영적인 교만과 불순종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다 잃어버리고
구원까지도 잃어버리게 된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셨습니까?
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 고
강하게 대답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했고 불순종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증거는 바울 자신의 간증이요
둘째 증거는 구약시대 엘리야의 예입니다.
첫째 증거로 바울은 이런 간증을 합니다.
1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자요 베냐민 지파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순수한 혈통에서 난
이스라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자신이 예수믿는 사람을 죽였고
그들을 핍박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 예수를 핍박한 경험이 있는
나를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지 않느냐?’
하는 뜻입니다.
참으로 흉악한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불러서 도구로 쓰셨다면
이스라엘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구원받아서 목사가 된 것을 보면
여러분에게는 더 큰 소망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면
저보다 더 훌륭하신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큰 하나님의 복을 받겠습니까!
내가 구원받았다면
다른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면
내 가정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증거는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기 자식이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지라도
자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자식을 버리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엘리야의 예를 듭니다.
구약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은
아합 왕 때였습니다.
왕이 어두우면 그 시대가 어둡습니다.
아합 왕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세벨이 시키는 대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잡아 죽였고
제단을 허물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대결을 합니다.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바알선지자 450명은
자기의 신을 부르며
방언을 하며 춤을 추며 주문을 외웠지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불이 내려와 제단을 불사르고 말았습니다.
그때 450명의 바알 선지자는
깊은 계곡에서 몰살당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하자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런 능력의 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연유로
이세벨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제단도 허물어졌습니다.
자기 밖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도망을 갔습니다.
지치고 지쳤습니다.
그는 너무 힘이 들어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합니다.
그 내용이 3절입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엘리야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도망갈 곳도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차라리 날 죽여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고독과 외로움 앞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4절입니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엘리야야 두려워 말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네가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죽었지만
내가 숨겨놓은 사람들이 7천명이 있다.”
이 소리를 듣고
엘리야는 아마도 기절을 했을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정말 의로운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정말 옳은 일을 하고 있다면
자기 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내 곁에서 어슬렁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혼자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혼자인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와서 돕습니다.
숨어있던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를 위하여 7천명의 사람들을 숨겨놓았는데
그들이 나와서 너를 도울 것이다.
결국은 믿음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망하는 것 같으나 망하지 않고
넘어지는 것 같으나 넘어지지 않고
없어지는 것 같으나 없어지지 않고
꿋꿋이 오늘날까지 교회가 이어져 온 것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집어 삼키려고 합니다.
권력을 동원하고, 물질을 동원하고,
세상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고 했지만
결코 전부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소망과
승리의 카드를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승리의 카드 하나를 갖고 계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은혜요,
복 이라고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의 사람들을 통해 엘리야를 도왔던 것처럼
지금도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습니다.
이 ‘남은 자’ 는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결코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하고
수 천년 동안
전 세계에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스럽게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의인 7천명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이 숨겨놓은 카드
이것이
여러분을 위해서도
준비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민족에게
이런 복이 있음을 믿습니다.
제가 믿는 것 중의 하나는
북한에 김정은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의인 7천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토굴에서, 골방에서, 사형을 당하면서까지도
신앙을 지켜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음을 믿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지 않습니까?
유대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매를 맞으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복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기로 결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교만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인에게 온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와는 무관한 나라였습니다.
우리는 불교와 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이 땅에 선교사를 보내주시고
학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고
병원을 만들게 하셔서
부흥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수를 오래 믿어보았자
3~4대입니다.
그 세대동안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부흥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 같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 같이 느껴집니다.
예루살렘에 가 보십시오.
교회가 없습니다.
복음도 없습니다.
예수가 태어난 곳에 예수가 없습니다.
그곳은 관광지일 뿐입니다.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남은 자로 불러주시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도 많고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가서 수혈을 해 주어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구원은 은혜로 된 것입니다.
행위나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율법으로만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도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자르셨습니다.
하물며 우리 이방인들이겠습니까?
우리는 처음도 은혜요
나중도 은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구원이 합해져서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구원의 아이러니 입니다.
이스라엘이 구한 것은 얻지 못하고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제외된 사람은 다 완악하여 졌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구원을 구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민족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살려주시고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의 기록을 인용하여
왜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못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혼미한 정신 때문입니다.
둘째는 보지 못하는 눈 때문이요
셋째는 듣지 못하는 귀 때문입니다.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고,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고,
그토록 하소연을 했건만
마음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지만
은혜받지 못한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죽이기까지 강퍅해지지 않았습니까?
저는 여러분 중에
혼미한 정신에 빠진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보는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들려주어도 듣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득권입니다.
이스라엘은 기득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은혜가 없어지고 사랑이 없어진 것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하루 세끼 밥상을 받습니다.
그렇게 먹으면 건강해 집니다.
힘이 솟고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그런데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
정신이 혼미한 사람은
밥을 먹을수록 건강이 나빠집니다.
종교적인 형식에 얽매여 있는 사람
교회만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밥상이 올무가 되고 덫이 되고
거치는 것이 되며 보응이 됩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밥을 먹으면 힘이 나고
뛰고 걷고 찬송하고
창공을 향하여 독수리처럼 날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들에게
귀한 말씀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남은 자로써의
사명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