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아픈 역사의 흔적이지만 이제는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한 곳이다. 계절마다 유채꽃, 해바라기, 소철나무, 백일홍, 코스모스, 수선화 등등 온갖 꽃이 피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아픈 역사를 위무한다. 고통도 재산으로 삼아버린 항몽유적지는 꽃나들이 아름다운 포토존으로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1. 대강
명칭 : 항몽유적지(抗蒙遺蹟址)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로 50 (고성리 1126-1번지)
문화재 지정 : 사적 제 396호
방문일 : 2022.4.27.
2. 둘러보기
1) 소개
현재 15리에 이르는 토성(土城)과 삼별초(三別抄) 군사들이 궁술훈련 때 과녁으로 사용했던 ‘살맞은 돌’, 성의 건물 문지였던 ‘돌쩌귀’, 김통정(金通精) 장군이 성 위에서 뛰어내린 발자국이 파여서 샘이 솟는다는 ‘장수물’, 삼별초 군대가 급수로 이용한 ‘옹성물’·‘구시물’, 옥터 등이 남아 있다.
이 유적지는 1977년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총화단결을 다짐하는 뜻에서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석성(石城)인 내성(內城)이 위치했던 9천여 평의 경내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우는 등 성역화되었다.
진도에서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 군대가 제주에 들어온 것은 1270년(원종 11) 11월 3일 이문경(李文京) 부대의 제주 명월포(明月浦) 상륙이었다. 이문경 부대는 이미 제주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관군(官軍)과 송담천(松淡川)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제주도 내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어 1271년(원종 12) 5월 김통정은 진도의 용장성이 무너지자, 남은 삼별초 군대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와 이문경 부대와 합세하여 대몽항쟁을 위한 본격적인 방어 시설을 구축해 나갔다.
이 항몽유적지는 1273년(원종 14) 4월 고려의 김방경(金方慶)과 원장(元將) 흔도(忻都)가 이끄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삼별초가 토벌되기까지 대몽항쟁의 거점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사적지 정문 순의문
유적지 안 발굴지들
항몽순의비. 제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항몽순의비문
순의비를 둘러싼 담장 밖. 소나무가 눈에 띈다.
비석 쪽에서 바라본 정문
항몽유적지 전시관
전시관 내부 전시물
순의문 밖
순의문 밖 정면에는 엄청난 크기의 팽나무가 서 있다. 그 앞과 옆으로 돌쩌귀와 수정사지 유물이 있다.
수정사지 유물 주춧돌. 고려시대 창건, 조선시대까지 존속하면서 130여명의 노비를 보유한 거찰로 사세가 큰 사찰이었다. 서귀포 하원동 법화사지와 제주시 삼양동 원당사지와 비견되는 제주 중요 사찰로 제주 불교사의 중요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정사지 유물은 항몽유적과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비슷한 연대 유적이라 이곳에 전시되고 있다. 항몽유적과 직접적 관련은 없는 불교 유물이어서 제주 국립박물관에서 전시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외 수정사지 출토품 기와는 제주도 기와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 사료로 쓰이고 있다.
나무에 대한 설명이 없다. 팽나무로 보이는데, 돌쩌귀와 수정사지 유물 사이에 거대한 팽나무는 제주도 주요 신목으로 쓰이고 있어서 제주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돌쩌귀. 김통정 장군이 항파두리성을 쌓을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지 않다.
토성 가는 길로 제주도 전통적인 묘소가 보인다.
3. 관람 후
제주는 삼별초 마지막 항몽 지역이다. 몽골이 항파두리를 점령한 1273년 후 1374년 최영 장군에게 토벌되기까지 100년간 제주는 몽골의 직접 통치를 받았다. 관련 유물이 도처에 있지만 아직도 지속적으로 발견발굴되고 있다.
몽골은 제주를 남송과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제주가 동북아 해상로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제주 주거여건의 한계가 더 많아 유적지가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은 경우가 많다.
몽골에 제주에 끼친 영향은 다각적인데, 우마사육의 확장으로 인한 경제력의 신장, 외부인의 유입으로 인한 인구 증대 등등을 들 수 있다. 몽골족과 제주여성간의 혼인도 이루어졌다. 제주 산촌 형성은 목축업의 번성 덕분이었다. 제주어에도 몽골어 차용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제주 전통주 소주 고소리술도 몽골에서 유입된 것으로 본다.
2011년 항파두성 시굴좃에서는 '고누놀이판'이 출토되었다. 고누놀이는 통일신라 이래 계승되어온 놀이문화이다. 삼별초 내에서 행해졌던 놀이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제주 항쟁은 고려가 몽골로부터 드물게 독립성을 갖는 데 기여했다고 보기도 한다. (김일우, 항몽유적의 문화콘텐츠화, 제주의 소리 게재분 참조)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더 많은 고증을 요구한다. 제주만 직속령으로 하고 고려 왕실은 그대로 존속하게 한 것은 몽골 세계정복의 매우 예외적인 조치였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일본 정벌에 유리하다고 파악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2차 원정에서 충렬왕은 적극적으로 토벌에 협조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은 고려를 커다란 의미에서 동족으로 보았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세조 쿠빌라이가 고려는 그냥 두라고 했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몽골족 내부의 여러 민족끼리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언어문화적 거리가 있는 그룹이었으므로 고려 정도는 방계 민족으로 취급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도 우리는 몽골을 매우 가까운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몽골 사람도 마찬가지다.
몽골은 일본 정벌을 위한 목마장을 제주에 설치하고, 함선을 조성하는 등 일본 침공을 위한 준비를 하였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제주말 조공요구로까지 이어져 제주민의 고난은 왕조를 바꾼 후에도 계속되었다.
문제는 몽골의 100년이나 되는 제주 직할통치의 의미와 실상이 너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당시의 문서는 모두 소실되었다 해도 후대의 누군가가 정리해서 보관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런 소식은 없다. 조선조 제주목사들이 와서 제주풍물과 여러 사실에 대한 기록을 남겼지만, 매우 협소하고 소략하다.
제주는 한문기록과 한글기록의 유산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유학이 기층 학문으로 자리잡지 못했고, 한글 문서도 많이 발견되지 않는 걸로 보아 한글 사용도 많이 활성화된 거 같지 않다. 역으로 그것이 제주 고유문화를 지켜온 토대였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적 관점에서 거꾸로 역사와 문화을 재구하여 제주사의 의미를 밝혀야 한다. 제주어에 몽골어의 흔적이 10개 정도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것만일 리 없다. 뭍의 언어에서도 궁중언어는 물론이고 '보라매' 등 많은 어휘에 흔적이 남아 있다.
제주 학자만이 밝힐 수 있다. 100년이나 생활속에 얽힌 문화의 흔적이 너무 없다. 제주문화의 특성 확인에서도 선행되어야 할 탐구인 듯하다. 어차피 문화는 섞이고 섞인 문화를 생활 속에서 선별해 자기 문화로 갖추어 나가기 마련이다. 제주 관광문화의 커다란 지도를 그리는 데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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