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윤선도 유적 ▣ 낙서재, ▣ 곡수당, ▣ 동천석실 현재 건축물들은 당시 것은 아니고 2002년부터 기록과 발굴을 거쳐 복원된 시설이다. -------------------------- [詩 4편] ● 보길도 망끝에서, 이재익_서두 ● 냇가의 작은 모래알, 이재익_서두 ● 동천석실 그꽃, 이재익_38번 ● 낙서제 우음, 윤선도 한사_17번 --------------------------- ♣ 학정 이재익 시인의 발길은 의미를 추구한다. 보길도 망끝에서 이재익(학정)
섬들은 잠겨있는 창고 연육교, 연도교, 배들은 그 창고 열쇠 풍광에 마음비우다 문득 한 생각, 빈 깡통은 냅다 걷어차이듯 나도 신선*에게 걷어차일라 망설이다 신선은 사람 심성과는 다르지.
비운 마음에 꾸역꾸역 들어오는 저 울음소리? 아, 돌아오지 않는 남편 하염없이 기다리던 보길도 망끝 망부석부인 통곡소리.
또 한 노인의 큰 탄식음은 83세 송시열 노옹* “허, 윤선도 옹은 편히도 가셨구려 나랑 그렇게 맞짱뜨더니* 이런 보물섬에 박혀 천수를 누렸구려, 난 살아도 산목숨 아닐세 한 발 이미 무덤 속에 걸쳤고, 자꾸 미리 걱정하는 병, 윤선생 약처방이 아쉬워”
울음 탄식 명상이 카타르시스 땅끝, 망끝, 바닥치면 올라갈 일만 남아, “희망시작, 첫 땅!” 땅끝* “비우고 채우는 힐링의 출발” 망끝. ---------------- * 선선 ; 망끝 전망대 마을 선창리(仙昌里) 지명 전설에 의하면, 한라산신이 지리산신의 초대를 받고 가던 도중 이 곳 망월봉에 잠시 쉬면서 마을 번창 예견했다한다. * 송시열(1607~1689) ; 숙종의 장희빈 소생 세자책봉에 반대하다 1689년 제주도 귀양. 도중에 보길도 백도리에 머물러 한시 한수 남겼다. 그해 다시 서울로 불려가다 정읍에서 사사됨. * 맞짱 ; 남인 윤선도(1587~1671)는 서인 송시열과 정치적 앙숙, 제1차 예송논쟁에 패하여 삼수, 광양 등 6년 귀양살이. * 약 처방 ;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당쟁 대립, 인간적으로는 서로 신뢰. 송시열이 의술이 뛰어난 윤선도로부터 약첩 처방을 받아 병환이 나은 적 있다. * 희망시작, 첫 땅! ; 해남 땅끝 구호. ‘비우고 채우는 힐링의 출발’은 학정이 만든 구호. "희망 시작, 첫 땅!" 이라니 기대를 걸어야지 2019년 보길도 망끝전망대. 이제는 친구들과 서로 의존하죠. 2006년. 보길도 망끝전망대. 젊을 때는 혼자서도 망망대해에 설 수 있었다. 정미와 양석이가 이 자리에서 사랑의 언약을 했다고 했네. 정말 신성한 자리네. 13년 이상이 지났네. 그들은 지금 잘 살고 있겠지.
▣ 곡수당 1. 낙서재 올라가는 입구 주차장에서 출발하면 200m지점 좌측에 곡수당이 있고, 300m 우측에 낙서당이 있다. 윤선도 옹이 길잡이 하인 하나 세워 뒀죠. "어서 오세요" 언제나 싱그러운 인사부터 드리죠. 2. 우선 곡수당이다. * 난간 남쪽에 取適軒, 서쪽에 益淸軒이라고 학관(윤선도 아들명)의 글씨 편액이 있었다고 한다. 학관이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조성한 시설이다. * 아들 학관은 서자로 5남 이었지만, 아마도 여러 아들 중 효자이며, 뛰어난 인재였던 것같다. 이 곡수당을 설계하여 지은 것을 보면. 日三橋 명이 있는 바와 같이, 하루 3회 문안을 드렸다 한다. 이성계 5남 이방원도 가장 뛰어나 태종이 됐지요. 3. 곡수당 ; 윤선도 아들 학관이 거주한 휴식처 윤선도의 많은 문학작품도 이 서자 아들 학관이 관리하고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4. 곡수당의 서재 탐방객은 누구나 여기서는 방향이 혼돈된다. 이 곡수당은 낙서재 동쪽 계천가이다. 5. 곡수당 * 동쪽 언덕에 점성암이 있었는데, 절이 아니라 자제와 문인 제자들 거처라고 한다. 6. 곡수당의 야외장식으로 세워진 바위. '달마와 여의주' 같은 느낌이 든다. 7. 곡수당 상연지 곡수당 바로 옆에 좀 좁지만 상연지가 있고, 멀리 떨져서 있는 하연지는 제법 규모가 큰 30 여평 연못이다. * 보길도의 윤선도 유적지 여기저기 규모로 보아서 유사시에 왕(인조)을 위한 행궁으로 대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주장도 있다. 병자호란시 강화도와 남한 선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만약의 경우 전란으로 밀리면 왕의 피난처로 대비한 측면도 있지 않았나?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인조와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은거하던 윤선도는 가솔과 노비들(600 여 명을 소유?) 중심으로 근왕병을 조직해서 강화도로 배를 타고 갔다. 그러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되돌아와 육지를 밟지 않겠다는 각오로 제주도로 가서 은거할 생각을 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보길도에 자리잡은 것이다.(환도 후 임금을 찾아 뵙지 않았다고 영덕으로 1년간 귀양도 갔다) 그 때가 51세 1637년 이며, 이후 1671년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기간은 34년간이지만, 이곳에 내내 보길도에 은거하지는 않았다. 벼슬을 하거나 귀양도 갔으며, 이 곳에 순거주 기간은 13년 간이며, 7차례 육지를 드나들었다한다. * 노비가 많았다면 어떻게 숙식을 제공했을까? 솔거노비도 있고 외거노비도 있었다. 솔거노비는 숙식을 같이 하지만, 외거노비는 준평민처럼 따로 독립해서 거주하며, 노비라는 신분에 따라 주인에게 신공(노비세)을 바치면 되었다. 8. 곡수당에서 건너편 산비탈 동천석실을 당겨서 봤다. * 동천석실은 낙서재 정북쪽에 해당한다. * 계천의 물소리는 옥구르는 소리같다하여 낭음계라한다. 9. 곡수당 10. 곡수당 ▣ 낙서재 11. 낙서재의 <동와>라고 하는 한칸자리 집이다. 서와도 있다. 이곳은 모두 복원된 건물이다. * 소은병(小隱屛) 바위 ; 낙서재 뒤 산쪽에 있는 큰바위. 주자의 행적을 흠모, 추종한다는 뜻으로,주자가 무이산의 한 봉우리에 붙인 이름을 가져와 명명. * 낙서재 ; 학문과 독서의 즐거움을 나타낸 3칸 건물. 강학 독서공간. * 거북바위 ; 자연석을 거북모양으로 조금 순질한 낙서재 앞 바위 * 무민당無悶堂 ; 낙서재, 거북바위 앞. 생활처소. '세상을 피해 산다' 는 의미.(아직 복원되지 않음) * 동와東窩, 西窩 ; 窩는 움집와, 무민당 양옆으로 작은 한칸자리 집. 부속건물 한칸짜리 사랑채, 침실이었다. 지금 보기로는 아마도 비서 하인이 거처하는 수위실 역할이었을 지도. 12. 낙서재의 동백꽃. 겨울에 피었네. * 꽃말 ;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 동백꽃 금기사항 ; 佛殿이나 병문안에 사용하지 말것. * 동백나무 망치를 걸어두면 전염병, 귀신을 좇는다는 속전이 있다. * 산다(山茶)라는 별칭. 13. 낙서재의 사당. 윤선도가 85세 때(1671년) 여기 낙서재에서 별세했다. 이 사당은 초장(草葬)을 지낸 곳. * 초장이란 초분(草墳)이라고도 하고, 섬지역에 주로 성행한 1차 장례법이다. 곽을 지상에 안치하고 짚이나 풀, 띠풀로 덮어서 오래두면 뼈만 남는다. 그 동안 그 앞에서 자주 제사를 지낸다. 몇 년 후 이 뼈를 잘 간추려 2차로 땅에 묻는다. * 우리 역사상 고대에 나오는 세골장(洗骨葬)과 같은 것이다. * 윤선도의 묘는 선조들의 세거지 해남 녹우당 부근 금쇄동에 있다. * 윤선도는 1671년 6월 11일 별세하고, 3개월 여 여기에 안치됐다가 9월 22일에 해남 금쇄동으로 옮겨 매장됐다 한다. * 화가 공재 윤두수는 윤선도의 증손자, 정약용은 (외5대조부) 외6세손자이다. 14. 낙서재(樂書齋), 강학, 독서당. 음식을 할 수있는 부엌은 없다. 별채가 있었을 듯. 침소는 무민당에 거처하며, 새벽 첫닭이 울면 벌써 기침하여 몸을 씻고 정신을 차리며, 경옥주 한잔 하고, 독서를 하거나 제자를 가르칠 일과를 준비하였다. 부지런하고 엄격한 선비다운 행자(行姿)다. 15. 낙서재의 사당/ 원거리(건너편 산의 동천석실에서 당겨 찍음) * 건너편 산중턱(낙서재 정북쪽)에 있는 동천석실과 낙서재 사이에 서로 깃발을 흔들어 교신했다 한다. * 낙서재 뒷산은 격자봉(430m)이다. 적자봉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윤선도가 격자봉으로 명명했는데, 나중에 발음이 적자봉으로 변했고, 윤선도 유적 복원사업이 확대되면서 다시 원이름 존중. * 이 지역에는 황칠나무 자생지요, 재배도 많으며 , 황칠나무 막걸리가 특산물이다. 16. 17. 樂書齋(낙서재)
滿腔浩氣無人識(만강호기무인지)
* 해남 윤씨 * 號는 孤山(벼슬할 때 일시적으로 양주에 낙향, 그곳의 지명) . 시호 ; 忠憲公 18. 낙서재. 윤선도 당시에는 茅屋(띠풀집)이었고, 후손이 와가로 개조했다한다. 19. 곡수당 20. 낙서재의 동와 21. 낙서재, 주위에 정자가 있었다 하나 흔적이 없다. ▣ 동천석실 22. 한칸짜리 검소한 공부방(상)과 한칸짜리 침실(하) , 20m 상하거리 23. 동천석실에서 건너편 곡수당과 낙서재를 당겨(주~움) 찍었다. * 뒷산은 격자봉(433m). * 세연정~동천석실 올라가는 도로변까지 약 2km 거리. * 도로변~ 동천석실 ; 가파란 산길 약 500m 거리. 24. 동천석실 올라가는 중 25. 동천석실은 윤선도의 별장인 셈이다. 26. 동천석실(홍보자료). 여름철 문이 활짝 열렸네. 27. 동천석실 ; 하늘정원 / 세연정 ; 땅의 정원 28. 동천석실 29. 동천석실 올가가는 중 30. 동천석실. 차바위, 차를 끊여서 마셨던 바위 31. 동천석실, 용두암(도르레) 장치를 하여 밧줄로 저 아래에서 음식을 날랐다 한다. 바위 양쪽에 홈이 파져있다. 32. 동천석실앞 33. 동천석실앞 34. 동천석실 올라가는 길 35. 동천석실에서 내려다 봤다. 인공 연못이다. 못 가운데 통로를 희황교라 칭했다. 36. 이 조그만 인공 연못 하나, 그 주위에 중국 고대 전설시대 삼황중 복희씨의 다리라고 거창하게 끌어대 명명하였으니, 하염없이 외로이 세상을 멀리하고 산속에 거했던 고산 윤선도 선생 만년의 의연한 생활모습을 짐작한다. 37. 동천석실 올라가는 길 38. 무슨 꽃이었을까? 꽃 지고 말라버린 꽃씨 형상. 이 모습 보고 시한편 뚝딱! 동천석실 그 꽃 이 재 익 '나는 50세가 넘어서야 명주나 모시옷을 입었다. 너희들도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도록하여라' 이 말 실감나려면 보길도 동천석실로 가 보아라. 한 두 평에 스스로 갇혀 내면을 압축시켰던 님 산중턱 섣달 그믐 찬바람 속에서도 그 400년을 한결같이 대를 이어 지키는 제자를 만날지니. 아름다운 미소를 먼저 보내고 다음에 향기를 떠밀어 흩고 나도 곧 가마 하면서도 꼿꼿이 마른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있다. 멀리는 희황(羲皇)의 그림자, 가까이는 고산(孤山) 선생 체취가 남았으니, 아직 배우고 명상할 일이 더 남았으니. 꽃도 좋은 자리에 태어나면 맑은 품성을 지니는 꽃같지 않은 영물이 되나보다. 39. 겨울에 남은 마지막 단풍잎 하나, 색깔이 아직 곱다. 40. 20m 아랫쪽 침실. 한칸짜리 침실은 검소한 면도 있지만, 난방문제도 만만찮을 것이기에 좁으나 따뜻하게~ 41. 이 소박한 한 칸짜리 좁은 침실! 윤선도가 가산으로 원림을 만들기는 했지만, 천성이 근검한 분이었다. 함경도 유배시절에 편지를 보내 아들들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나는 50세가 넘어서야 명주나 모시옷을 입었다. 너희들도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도록하여라" 42. 동천석실, 여기저기 바위들 43. 침실 44. 침실 45. 동천석실 46. 동천석실 47. 동천석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