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에 가면 디제이에게 음악을 신청하여 노래를 들으며 쌍화차를 마시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76년 1월달이니까 39년전 일입니다. 스물 두 살 때...
부산역 앞에 태양다방이라는 음악다방이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 그 다방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다방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녀와 헤어지는 예식을 치루던 다방이었습니다.
불과 세 시간전에 바로 그 다방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는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 시간이 지나고 다시 그녀와 그 다방에 마주 앉았을 때 그녀의 표정은
해방을 맞은 자유인의 해맑은 표정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폴랭카의 'PAPA'를 신청했고, 그녀는 이종영의 '너'를 신청했습니다.
"네~ 조성재씨가 신청하신 폴랭카의 'PAPA'와 김지희씨가 신청하신 이종영의 '너'를
들려드립니다. 연인관계이신가요 ? 좋은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마냥 웃어제꼈지만 나는 뭔가 허전하기만 했습니다.
3시간 전.
"갑자기 이렇게 오시면 어떡해요 ?
이젠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요 !"
그녀는 부산 사투리로 쌀쌀하게 말을 쏟아냈습니다.
갓 여고를 졸업한 그녀는 남원에서 온 나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대학 시험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왔습니다. 혹시 잘 안되었다면 제가 다니는
대학에 원서를 내는게 어떨까 싶어서 왔습니다."
"그런 신경 안 써도 돼요. 저 부산대학교에 합격했거든요.
그리고 저 좋아하는 남자 친구 생겼어요. 그러니 이제 우리 그만 만나요."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영화처럼 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방을 나왔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 그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악수를 마친 나는 부산역 광장을 뛰듯 빠른 걸음으로 대합실로 향했습니다.
뒤에서 급하게 나를 따르는 그녀의 하이힐 뒷굽 소리가 딱딱딱딱 났습니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기차시간표 앞으로 가서 시간표를 쭈욱 훑어 보았습니다.
그 때 뒤 따라온 그녀가 내 팔을 붙들며 말했습니다.
"지금 서울 가는 기차 없어요. 밤 늦게 있어요. 시간 좀 내주세요 !"
시간표를 살펴보니 자정이 다 되어서야 기차가 있었습니다.
일단 기차표를 예매하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택시를 타고 송도해수욕장으로 갔습니다.
그녀가 여관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을 꾸불꾸불 앞장서 걸어갈 때 뒤 따르는 나는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가 무슨 요구를 해 올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져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습니다. 그녀는 겨울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공원 벤치로
나를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 시간 동안 새로 생긴 남자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자의 눈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아름답다는 것이며, 그 남자가
자신에게 손짓하면 지구 끝까지라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름없는 작은 신학교 1학년인 저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멋진 남자였습니다.
저는 그만 지레 주눅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녀를 놓아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양다방에서 나온 우리는 부산역에서 웃으며 헤어졌습니다.
그녀는 홀가분한 웃음이었고, 저는 씁쓸한 웃음이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
"잘 있어요 !"
그리고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은 저하고 인연이 있는지 3년 후 결혼한 아내의 고향 역시 부산이었습니다.
처가가 감전동에 있어서 주로 구포역에서 내리지만, 더러 부산역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태양다방 생각이 났습니다. 태양다방도 없어졌고, 부산역사도 새로 지어져서 옛 추억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태양다방과 그녀, 폴랭카의 'PAPA'와 이종영의 '너'를 들을
때마다 그녀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궁금해 졌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사실 그녀는 1974년도에 제가 삼청동에서 재수생활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학원'이라는 청소년 월간지가 있었습니다.
펜팔란에서 그녀의 주소를 알게 되었고 편지를 썼는데 놀라웁게도 그녀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전국에서 받은 편지 500여통 가운데 제가 뽑혔다는 것입니다.
사진을 보내지 않았기에 인물을 보고 뽑았을리는 없고, 아마도 주소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산2-10호'라고 썼기 때문이죠.
그녀는 학원지에 모델로도 사진이 실렸었다고 알려왔습니다.
충정로에 있는 학원사에 가서 그녀가 가르쳐 준 과월호 학원지를 사서 보니 과연 그녀의
사진과 이름이 있었습니다. 여고 2학년... 참 예쁜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실제로 만난건 두 달 후였습니다.
부산에서 올라온 그녀를 충무로에 있는 제과점에서 만났습니다.
교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이 사진보다 더 예뻤습니다.
함께 남산에도 갔습니다.
편지 교환이 계속 되었고, 두 번째 그녀를 만난것은 이듬해 신학교 1학년이던 여름이었습니다.
김포공항 입구 제과점에서 만났습니다. 김포공항 입구에 있는 교회에서 숙식하면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입니다. 회색 원피스를 입고 온 그녀는 저에게 수영장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이유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첫째, 한 번도 수영장을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둘째, 깡마른 몸매를 그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알통도 가슴살도 王자 복부살도 없었습니다.
셋째, 오른쪽 정강이에 나 있는 커다란 흉터를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혐오감을 주기 딱 알맞는 세 번의 수술 자국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만남이 부산역 앞 태양다방이었습니다.
40년이 다 되어가는데 마치 엊그제 일 같습니다.
김포공항앞 제과점에서 다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지금 25년째 살고 있습니다.
부산역은 처가에 갈 때마다 가는 곳입니다.
그녀와 헤어진지 40년이 되었지만, 그녀와 만났던 장소는 늘 가까이에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 지금은 김포공항 앞 제과점도 부산역 앞 태양다방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끔 가끔 그녀가 생각납니다.
그녀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첫댓글 그녀...철부지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잔인하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싸가지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헤어지면 그냥 헤어지지 멀리까지 온 남자를 붙들고 애인자랑을 하는 심사는 무엇인지. 후안무치이군요. 잘 헤어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타를 배려하는 습을 지니지 못한 존재는 평생을 싸가지로 삽니다. 짐작컨데 지금도 싸가지로 살지 않나 합니다. 그냥 웃고 마세요.
허선생님, 그런가요 ? 아이 시원해라 !
아마도 그녀는 제가 받은 충격을 완화시켜 주기 위해 설명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살아있다면 59세가 되었을텐데... 글 중에 그녀의 이름은 본명이 아님을 밝힙니다.
그 분은 어찌 사실까요
30 여년전의 아련한 수필을 읽는 마음입니다
김선생님, 저도 참 궁금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도 섭섭하거나 원망스런 마음 없습니다.
한 때 저를 좋아했던 여고생이었기에 고마운 생각뿐입니다.
@조성재 목사님은 충분히 그러실 분입니다
그 분도 지금은 초로의 여인이 되어 있겠지요
@조성재 그녀도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그래도 조목사님을 홀가분하게 보내준 여자입니다.
아름답게 추억할수 있는 여유를 가지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다 지나고 나면 현실보다 아름다운 포장지에 싸입니다.
오랫만에 올리신 글을 읽으며 빙그레 아이스크림이 아니고 그냥 웃어봅니다.ㅎㅎㅎ
제 글이 권사님에게 웃음을 선사했다니 기쁩니다. ( 나이 운운하는 것은 아직은 건방지지만...) 나이 60이 되고 보니 새록새록 옛 일들이 그립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이 행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