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39 서양철학07 에픽테토스의 담화록 1
[인문학 고전콘서트] 23부-에픽테토스의 담화록 1강 서양철학 개론(5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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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전 콘서트.. 혀가 잘 안 풀리네. 에픽테토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서양에서는 유명한 분입니다. 칸트나 서양철학의 대가들이 다 이분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많이 철학을 했다고 고백하고요. 인터넷 돌면 명언록에는 꼭 끼어 있는 분이에요, 이분이. 많은 명언을 많이 날리신 분인데 명언이라는 게 진리에 맞으니까 자명하니까 어떤 세대와 시대를 초월해서 계속 유통되는 거겠죠. 그래서 이런 어떤 자명한 얘기를 많이 하셨던 실전 철학파예요. 이론 철학을 하신 게 아니고 실전 철학을 하신 분인데 에픽테토스의 실전 철학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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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바로 하실 수 있는 거예요. 여기 앉아 계신 이 자리에서 바로 아 나도 이제 철학자가 되는구나라고 바로 철학의 길로 들어서실 수 있는 그런 실전 철학을 강조하신 분입니다. 로마 때요. 그다음에 로마의 에픽테토스는 재미있는 게 노예 출신이고요. 아주 데뷔를 이루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 출신이죠. 황제죠. 그래서 황제로서 철학을 한 내용이 명상록이라는 글에 담겨 있습니다. 에픽테토스의 대화록이나 담화록 이러는데요. 논어 같이 남하고 대화 나눈 내용을 그대로, 제자들이랑 대화 나눈 내용을요 아니면 어떤 비판가들이랑 대화 나눈 내용을 그대로 적어놓은 겁니다. 에픽테토스의 담화록이 훨씬 재밌어요, 제가 읽어본 바로는. 그거는 실감나게 동양에서 뭐가 비슷할까 맹자 같은 글이 비슷해요. 반대자랑 대화를 해가면서 논쟁을 통해 설득해가는 과정이나 제자한테 설명을 해가는 과정이 재밌어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 명상록은 자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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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한테 한 얘기이기 때문에 어떤 반대나 이런 어떤 다른 이견이 없잖아요. 자기 얘기만 쭉 적혀 있는 거고 에피테토스의 담화록을 보면 대화하면서 훨씬 생생하게 상대방을 설득시키려고 여러 가지 얘기들이 나오면서 훨씬 깊은 철학적 내용을 보여줍니다. 그런 거 다 맛이 다르니까 잘 활용하시고요. 그런데 에픽테투스나 마르크스 아우레우스의 철학의 근원이 어디 있냐면요 소크라테스입니다. 다 이분들은 소크라테스 신도들이에요. 신도라는 게 이제 아주 어떤 종교적일 정도로 그렇게 소크라테스를 인간으로서 가장 모범적인 인간, 성인으로 보고 추종하고 자기들도 성인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이게 그런 어떤 신앙으로서만의 종교가 아니고요. 이성으로 그들을 존경하고 따르고 그들이 살았던 것처럼 살려고 노력했다는 거죠.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어떤 교라고 봐도 돼요. 이게 이런 어떤 그런 광신적인 종교 느낌이 아니고요. 제가 볼 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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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교를 공자의 교라고 할 수 있다면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어떤 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유교를 공자교라고 할 수 있다면 예수교가 있고 석가모니교가 있죠. 마찬가지로 희랍철학은요. 여러분이 그냥 철학하면 서양의 철학이 있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희랍철학은 소크라테스교예요. 그렇게 이해하셔야 돼요. 소크라테스의 그 철학을 소크라테스의 그런 인간 인격을 인간상을 추종하는 어떤 큰 흐름 속에서 철학이 발전하기 때문에 “서양의 모든 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다”라고 화이트헤드가 말할 정도로요. “서양의 모든 철학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합니다, 진정한 시작은. 그래서 그렇게 알아두시면 이해하시기가 편할 거예요. 왜 제가 교 이런 말을 좀 과한 표현을 썼느냐? 그분들은 진짜로 소크라테스처럼 되길 원해서 철학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 마음을 좀 이해하시라는 거예요. 그냥 철학을 해야지 단순히 이렇게 한 게 아니에요. 철학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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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되는 것, 이런 정도 느낌으로 철학을 했다는 겁니다, 고대에는. 내려오면서 물론 여러 가지 복잡해졌지만 어떤 소크라테스의 그 영향력이라는 건 엄청납니다. 그런 거를 오늘 뭐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텐데요. 특히 에픽토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아주 완전한 인간이라고 부르면서 소크라테스처럼 되기 위해 모든 인간들은 노력해야 된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추종정했어요. 근데 재밌는 거는 이분들은 그러면 무슨 학파냐 플라톤이냐 뭐 소크라테스 제자들이 소크라테스 소씨 제자가 누구 있죠? 플라톤이 아카데미아를 만들어서 아카데미학파가 있고 그 제자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왔죠. 이 플라톤하고 또 다른 입장에서 이쪽은 철학 학당을 제대로 열고 했다면, 누구죠, 이쪽 우리가 흔히 아는 디오게네스, 디오게네스 쪽은 이쪽 흐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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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죠, 견유학파라고 그러죠. 개 견(犬)자 써서요 유자 유(儒)자. 안티스테네스라는 그 제자가 이쪽 계열입니다.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라고 불리는데요. 이쪽은 개 같은 선비라는 겁니다. 개 같은 선비가 나쁜 의미가 아니고요. 우리 욕으로서의 개 같은 이런 게 아니고요. 개처럼 가진 거 없이, 있죠, 필요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볼 때 너무 개처럼 사는 거 아니냐라고 할 정도의 그런 유자들, 선비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죠? 세상에 대해 뭔가 냉소적이고 그래서 키니코스 학파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시니컬하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거든요. 뭔가 세상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본다. 그런데 이들이 한 게 뭡니까? 이들이 한 이 견유학파가 주장하던 게 디오게네스가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막 다녔습니다. 사람을 찾는다고 그래서 이 진짜 눈 뜬 사람, 깨어 있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찾아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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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게 하겠다는 게 목표예요. 그러니까 결혼도 안 하고 가진 것도 없어요. 옷 한 벌 지팡이. 유명하죠. 무슨 통에서 살고 디오게네스. 알렉산더 왕이 왔는데 “햇빛 좀 가리지 마라.” 요즘 같으면, 뭐죠, 선풍기 좀 가리지 마라. 더울 때는 그런 마음으로 나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가리지나 마라. 자연이 주는 나한테 주는 혜택을 가리지나 마라 하는 정도로 이 자연 그대로 따라가는 삶을 추종하고. 이게 다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이유가요. 플라톤이 그 제자라는 건 너무 당연히 알겠지만 이쪽 계열도요 우리가 진짜 소크라테스를 잇는다라는 사상으로 이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서양철학의 흐름을 이해하시면요.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퍼지는 걸 이해를 하셔야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공자 유교 그러면 유교 전에도 요순 다 유교의 대가들이 있었지만 공자부터 시작하잖아요. 공자가 유교를 정리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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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도 그전에 다양한 철학들이 있었어요. 자연철학들. 탈레스니 피타고라스니 엠페도클레스니 거의 교주급들이에요. 한 명 한 명이 거의 큰 교단을 갖고 있는 교주들이에요. 피타고라스교는요 엄청났고요. 그 당시에 이미 어떤 종교 수준의 교주들의 어떤 수준의 어떤 철학을 한 철학자들이 많았는데요 소크라테스가 나오면서요 이런 어떤 신비한 얘기가 싹 걷히고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게 인간한테, 인간이 인간의 길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준 건 소크라테스고요. 선이 무엇인가를 주로 철학한 게 소크라테스예요.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건가? 이것만 연구해 가지고 기존의 모든 철학자들 물리치고 철학에 거의 뭐죠? 정장이 된 거죠. 가장 어른이 된 거는요 이것도 재미있는 겁니다. 그전에 피타고라스니 누구니 하는 건 온갖 신통력과 이설이 많아요, 그 기이한 설들이. 그런데 이분은요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이분은 오로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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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어떻게 사는 게 제일 옳은지 인간의 이성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자명하게 탐구해서 그걸 아테네 사람들하고 공유하겠다는 이것만 이렇게만 살았는데 제일 대가가 됐다는 거. 이것도 좀 한번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고요. 이렇게 해서 디오게네스 이쪽 흐름은 요즘 보면 또 이쪽도 보면은요.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보면 소크라테스의 그 정신을 이은 거예요. 나는 아테네를 깨우는 등에가 되겠다. 그러니까요. 이 플라톤이나 이쪽은 오히려 이분들이 볼 때는 너무 현실 안주적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진짜 계승자다. 이 사람들은 통나무에서 자면서 덜 먹고 안 입고 그리고 부지런히 하는 일은요 사람들한테 소크라테스가 지적하고 다녔듯이 다니면서 지적하고 다니는 거예요. 너 자명하냐? 그럼 당시 최고의 인텔리들한테 자명하냐고 자꾸 물어봤다가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했잖아요. 아테네를 불안하게 만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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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잘난 체 하고 살고 있는데 물어본 거예요, 가서. 우리 홍익학당이 지금 하듯이 자명하세요? 이 말이 듣기 싫은 거예요. 자명하세요? 그래서 저거 좀 없애야겠다. 그래서 고소를 했더니 다들 좀 없애길 원했죠. 그래서 불러놨는데 소크라테스가 좀 주눅이 들어야 되는데 더 당당하게 얘기한 거예요. 나한테 최고의 설법의 자리가 왔구나 해가지고 아주 그냥 아테네 사람들한테 경악할 정도로 센 얘기를 해버리니까 사형이 바로, 거의 자살이다 싶을 정도예요. 그 소크라테스의 변론 변명이라고 하는 글을 읽어보시면요 이거는 뭐 거의 날 죽이쇼 하는 내용이에요. 더 세게 얘기를 해버려요. 그 자리에서 예 니네들 이거 좀 알고 살아라 하고 이렇게 세게 쳐버리니까 사형 떨어졌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 사형이 내려도 그 당시에 도망가면 끝이에요. 잡으러도 안 와요. 그러니까 도망가면 됐는데 도망을 안 간 겁니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늘 얘기한 게 국법을 존중하고, 그렇죠, 이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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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대로 양심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는데 내가 늘 법의 혜택을 받고 살다가 법에서 나한테 불리한 결정을 했다고 내가 도망을 가면 그게 내가 평생 한 철학이 뭐가 되냐? 친구가 이미 돈도 다 써놨다고 간수도 다 매수했으니까 가기만 하면 된다고 가자고 하는 걸 안 가요. 아주 그 당시에 허술했어요. 가면 됐는데 안 가요. 그래서 소크라테스 그거를 사람들이 이제 오해해서 악법도 법이라고 했다는 말을 이렇게 많이 하는데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그런 말 자체가 없습니다. 변명이 아니죠. 크리톤이라는 친구랑 대화한 대화가 있어요. 여기 여기 보시면 나중에 제가 이 책 소개해 드릴 텐데 요즘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최신 번역본인데 이게 지금 죽는 과정대로 해놓은 겁니다. 최후의 대화들이에요. 에우티프론에서는 고소한 고소당한 상황에서 자기 부모님 고소, 고소하러 가는 친구랑 나눈 대화고요. 변론은 법정에 가서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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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을 변명을 한 거고요. 이제 사형 떨어진 뒤에 크리톤이라는 친구가 도망가자고 꼬시는데 나는 왜 도망을 못 가는가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해요. 여기서 지금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했다고 자꾸 이제 이런 말이 도는데 방송에도 공공연하게 EBS 이런 방송에 나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콥도 법이라고 했습니다. 악법도 법이라고 한 적이 없어요. 법이 악하다고 한 적이 없어요. 나는 평생 국법으로 보호를 받고 살아온 사람이 나한테 불리한 판결이 났다고 법을 어길 수 없다 이렇게 얘기했죠. 전혀 다른 얘기죠. 악법도 법이야 따라야 돼. 이렇게 얘기한 적이 없다고요. 읽어보시면 알아요. 이 글을 읽어보시면. 그다음 파이돈은요 마지막 죽는 날 얘기예요. 죽는 날 아침에 또 철학적인 논쟁이 벌어져요. 죽기 전에 이런 얘기나 하고 가자 하면서 영혼은 과연 불사인가? 영혼불멸에 대한 얘기를 나눠요. 죽기 전에 그 얘기 좀 해주세요. 해가지고 죽기 전에 나누기 딱 좋은 주제다. 죽을 때까지 아직 시간 있으니까 하자 하고 아주 특이한 인물인 게요. 시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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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았다고 좀 이따 저녁 독약을 좀 이따 먹자는 걸요 빨리 주라고 하는 분이에요. 나 나 먹고 가야 되니까 빨리 주라. 철학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영혼은 불멸이고 나는 내 이성으로 내 영혼을 단련했기 때문에 이 죽음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움이 없고 어차피 어차피 죽을 일이고요. 죽음 때문에 내가 두려워서 조금이라도 생에 집착하고 싶지 않고 난 내 이성적으로 자명하게 영원히 어떻게 죽은 뒤에 영혼이 갈 길에 대해서 난 자명하게 확신하는 결론을 다 내렸고, 내 육체에 대한 욕망도 나는 다 극복했기 때문에 그렇게 집착하고 싶지 않다 해서 독약을 미리 달라고 해서 먹고 이렇게 돌아다니라 그래요. 그래서 다리가 묵직할 때까지 돌아다니라 그래요. 그러면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이제 다리부터 조금씩 조금씩 마비되는데 행복하게 죽었어요. 자기는 이제 죽으면 거기 신들의 세계, 신들이 있는 세계로 간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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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자기는 이성을 계발, 이성을 밝혔고 욕망을 극복했기 때문에 당연히 신들의 세계로 간다고 확신하고 죽었어요. 이렇게 죽기까지 과정을 다룬 겁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이 정신이 철학을 만들어낸 거예요. 그전에 어떤 철학자도 못 보여준 거예요. 철학 때문에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죽음에 임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이성으로 늘 냉정하게 자명한 것만 선택하는, 이 모습을 실제로 보여줬기 때문에 철학이 만들어진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그때 안 죽었다면요 소크라테스도 말만 그럴싸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죠. 저는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한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 내가 몸으로 보여주자. 아무리 입으로 떠들어도 이 시대는 내 얘기를 안 들어준다. 그러면 내가 철학이 뭔지를 좀 더 보여주자. 그래서 최선을 다해 자명한 얘기를 하고 그런 환란에 처했을 때도 의연하게 딱 죽음을 담담히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요. 그 정신이 이어져서 뒤에 지금 에픽테토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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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늘 할 사람들은요 여기랑 상관이 없어요. 이 소크라테스가 간티로 제논이라는 분이 만든 스토아학파거든요. 근데 왜 소크라테스로 시작하느냐? 저도 연결을 그렇게 안 지으려고 했는데요. 스토아학파는요 소크라테스니 뭐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좋은 철학은 다 집대성에서 만든 철학이에요. 스토아라는 게 당시 그리스 아테네 아고라 있죠. 아고라 광장에 이런 뭐죠? 회랑이죠. 회랑의 회랑을 스토아라고 한대요. 그래서 그 회랑에서 주로 철학자들이 얘기를 나누고 학문을 논하는데 거기서 주로 이렇게 제논이 얘기를 많이 해가지고 스토아학파가 됐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사실 이런 걸 집대성했기 때문에 제논은 좀 살짝 달라요, 이분들이랑.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영혼불멸이었죠. 그런데 이 스토하학파에 오면 사람이 죽으면 싹 흩어지고 끝난다는 사상이에요. 단 근데 이게 일반적인 유물론하고 달라요. 우리 육신은 다 어디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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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육신은 지수화풍으로 흩어져서 지수화풍 각각 우주로 돌아가고 우리 이성은요? 이성은 누스라고 하죠. 스토아학파에서 이성은, 몸과 마음이 다릅니다. 몸은 다 흩어지고 몸과 영혼이 있으면 영혼 중에, 영혼 중에 또 하나 분리시켜요. 이성 누스라고 합니다. nous 이 이성만은 이거는 신적인 거거든요. 신이랑 같은 거예요. 신이 우리에게 준 거고 신의 분신이고 이게 기독교로 치면 성령입니다. 신이랑 둘이 아니에요. 이성이라는 건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우리가 흔히 요즘 이성적이다 이런 말들은요. 이성을 참 잘 모르고 쓰는 말이에요. 이성의 정말 말단이에요. 이성이라는 건요 그대로 신이에요, 고대에서. 로고스라고도 하죠. 누스라고도 하고 때에 따라서 이제 조금씩 다르게 쓰는데요. 이거를 로고스라고도 합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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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게 신하고 둘이 아니죠. 로고스는 신의 질서예요. 신이 가지고 있는 질서이기 때문에 신의 한 모습이고 신의 한 작용이에요. 그래서 이 이성이, 이성이 있다는 건요. 질서나 원칙을 생각해 보세요, 이성은. 원리, 우리 한문으로 번역할 때도 원리 리(理)자 쓰잖아요. 우리 조선 선비들이 평생에 걸쳐서 그리고 조선 500년에 걸쳐서 추구했던 거를 한 단어로 하라 그러면 리(理)거든요. 이기론(理氣論) 중에서 질료인 기(氣)는 질료잖아요. 재료를 질서 지우는 건 원리거든요. 아무리 재료가 많이 모여도 원리가 없으면 정보가 없으면 이게 그 원리대로 돌아가질 않죠. 그래서 원리를 제일 중시했는데 그 원리가 로고스고 서양에서는 원리가 우리, 우리 정신 안에 원리가 있다는 거예요. 우주적인 질서가 우리 머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거예요, 영혼에. 그래서 우리가 생각을 할 때 질서정연하게 생각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때 질서정연한 것만 이성이라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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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철학에서 여러분 이성 그러면요 신이에요. 신이 원래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우리도 질서정연하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로고스에서 나온 말이 뭐죠? 논리학. 논리나 이런 말도 다 이렇게 로직이라든가 여기서 나온 거잖아요. 말이나 언어도 다 우리가 로고스라고 하는 이 이성에서 가져오는 이유가요 질서정연하게 말을 해야 되니까요. 논리. 그래서 논리학을 나중에 논리학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건 말단이에요. 논리가, 생각해 보십시오. 너의 논리가 옳은지 나의 논리가 옳은지 누가 알아내나요? 우리 영혼에 이미 뭐가 옳다 그르다 판단에 대한 정보가 이미 로고스로 와 있기 때문에 아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논리 자체도 이미 몇 단계 건넌 거라고요. 진짜 질서는 어디 있나요? 우리 영혼 안에 있어요. 여러분 영혼 안에 있다가 여러분이 맞는 얘기를 들으면 질서정연하게 언어가 만들어지는데 그 질서정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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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언어에 집착하면 논리학에 빠지는데 그걸 맞다라고, 이해되시죠,그런 말들이 질서정연하게 만들게 하는 더 근원적인 질서가 있어야겠죠. 그 말이 맞다고 여겨지는. 여러분 1 더하기 1은 둘이다.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시죠? 경험적으로도 이 펜 하나랑 두 개를 하나를 더 하면 두 개가 느니까요. 그런데 보십시오. 제가 제 책에도 많이 얘기하지만 체험하고 실제 팩트랑, 논리학의 대전제입니다,팩트랑 논리로 전개한 거랑 맞아야 그 논리는 진실이 되거든요. 진리가 되는 거 간단해요. 개념하고 즉 어떤 명제랑 그 팩트가 맞아야 돼요. 개념을 가지고 말을 만들었는데 그 말이랑 실제 사실이랑 안 맞으면 여러 논리를 증명해서요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고 했는데 소크라테스가 혹시 안 죽어버리면 이거는 가짜가 되죠. 근데 여지없이 죽거든요. 그래서 이 말이 진리가 되거든요. 그런데 보십시오.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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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가 체험과 개념, 가설과 실험이 만나야 진리가 된다고 하는데 이걸 누가 정했나요? 우리가 정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배운 적도 없어요. 이해되세요? 우린 태어나서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이해되십니까? 이 말. 실험해보면 알지라는 말을요 누구나 똑같이 그렇게 쓰는데 실험해봐야만 맞다고 해라라고 배우신 적 있으세요? 아니에요 그래야만 내 마음에서 내 마음에 원래 있던 선천적인 질서, 로고스가 맞다고 인가를 해줘요. 그래서 내 이성이 작동을 하면서 그거에 대해서 합리적인 의견을 내서 말이 되게 만들어요. 내 정신 안에서요 계속 질서가 들어 있고 원래, 신의 질서가 이미 들어와 있고 이 질서가 내 정신 안에서 계속 질서정연한 말을 계속 말과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 이게 로고스의 기의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성적이어야 돼 하는 게요. 이성적이라는 게 요즘 이성적이라면 뭘 말씀하는지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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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이어야 돼 합리적이어야 돼 같은 말인데요. 합리적은요 로고스에 부합하게 생각하라 말하라는 뜻입니다. 근데 요즘 생각하는 합리적인 건 뭔데요? 경제학의 대전제가요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다 이게 뭔 뜻인지 아십니까? 가격이 싸면 사고 비싸면 안 산다. 그래서 합리적이다. 이성을 되게 아주 하찮은 데에서만 지금 설명하고 있다고요. 이성적이라는 걸요. 여러분이 신의 질서라는 고대철학에 이걸 다 잘라버리고 저 말단 말이 합리적이라든가, 뭐죠, 손해 보지 않는다든가 지금 이런 식으로만 말이 그럴싸하게 말을 잘한다든가 이걸 지금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면 큰 오산이라고요. 이성적이라는 거는 자연의 질서, 신은 그대로 지금 스토아학파에서 신은 그대로 자연이에요. 자연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러니까 이런 피조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주 자체, 우주 자체, 자연 자체를 신으로 본 겁니다. 이걸 보고 자연을 신으로 봤다고 돌멩이를 신으로 봤단 말이냐 그게 아니고요. 돌멩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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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서도 신의 질서가 구현되고 있잖아요. 우주 전체를 통해서 신의 질서만이 그 안에서 다 모든 걸 만물을 질서정연하게 만들고 굴리고 운용하고 있죠. 경영하고 있죠. 자연 안에서도 신을 보는 겁니다. 우주 안에서도 신을 보고. 그래서 신 우주 자연 하나 더 하면 제우스라 그래요. 지금 서양, 서양철학을 지금 조금씩 따라가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신을 이성을 제우스라고까지 부릅니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제우스는 하느님이란 우리말로 그냥 하느님으로 아시면 돼요. 하느님이다. 제우스란 그 용어에도 익숙해지셔야 됩니다. 하느님을 제우스라고 부르는. 이슬람은 뭐라고 부르죠. 알라라고 부르죠. 기독교에서는 여호와라고 부르죠. 희랍에서는 제우스라고 불러요. 희랍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도 그렇고 다 제우스라고 불러요. 신은 그냥 제우스예요. 인도 가면 뭐라고 그래요? 브라만이라고 부르죠. 그냥 신의 다른 이름들이라고 생각하셔야 돼요. 이렇게 번개 들고 있는 제우스 상상하시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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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상에 아주 반대예요. 그런 신화들에. 신화들은요 너무 인간 냄새가 너무 나게 신들을 격화시켜 놨잖아요. 그래서 그런 신화를 믿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래서 다만 그 신으로서의 제우스, 이 소크라테스의 이런 제시한 원형적인 사상들, 인간은 이성을, 이건 다 소크라테스가 한 얘기예요. 이성에 따라 살아야 되고 그게 신의 질서고 우리 영혼 안에는 이성이 있어서 우리는 신을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신을 잘 받들어 섬겨야 한다는 이런 사상을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것들이 지금 그대로 스토아학파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소크라테스랑 스토아학파의 연결점이 되니까 스토아학파의 핵심이 되면서 동시에 연결점이 되니까 이 얘기를 알아두세요. 다만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이런 이성만 불멸이 아니라 그 이성을 담고 있는 영혼도 불멸이라고 봤다면 스토아학파는요 이성만 원래 신이었으니까 신의 세계로 돌아가고 영혼이나 몸은 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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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요? 해체된다고 봤어요. 흩어져서 지수화풍 다 원형으로 돌아가서, 뭐죠, 본 재료 찰흙으로 사람을 빚었다가 흩어버리면 찰흙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빚으면 새 사람이 되겠죠. 새 영혼이나 새 몸이 돼서 또 나온다고 봤어요. 그래서 우주는 끝없이 이렇게 돌고 돌면서 재합성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중간에서 이성에 따라 살아야 된다. 이게 스토아학파의 기본 정신인데 스토아학파에서도 전기 중기 후기가 있는데 후기 철학자들이에요. 에픽테토스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나 근데 에픽테토스 중기부터 벌써 어떤 플라톤의 영혼불멸사상 같은 게 스토아학파에 다시 들어옵니다, 세게. 제논의 원 사상보다는 영혼불멸설이나 이런 것도 같이 들어와요. 그래서 학자들마다 이제 조금씩 달라져요. 지금 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영혼불멸, 영혼불멸에 반대하는 데 투철하고요. 에픽테투스는 좀더 소크라테스 입장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영혼불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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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했는데 주장 안 하기 힘들겠죠. 에피테토스는 소크라테스를 훨씬 더 따라요. 그리고 다 해체돼서 다 흩어지고 이성 누스만 영원하다는 입장은요. 소크라테스 이전에 어떤 철학자가 이런 주장을 했냐면요. 아십니까? 헤라클레이토스. 뭐로 유명하죠? 만물은 유전한다. 만물은 흐른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만물은 계속 변한다. 누스 빼고는 다 변한다. 이렇게 모든 변화하는 주제하는 그 정신, 신의 이성만 영원하고 나머지는 다 변한다고 본 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스토아학파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사상보다 어느 부분은 이 사람을 따르는 게 많아요, 스토아학파는. 다 해체된다 이런 걸 강조할 때는요. 소크라테스는 영혼불멸론이고 그 불멸을 믿고 행복하게 죽은 사람이죠. 이걸로 극단적으로 구분하세요. 지금까지 서양철학 간단하게 지금 서양철학사의 핵심만 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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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소크라테스 전에 선배들이 많아요. 엠페도클레스 지수화풍 사원소를 주장한 사람이에요. 우주는 지수화풍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밖에 아니다. 또 누구죠? 아낙사고라스 같은 사람은 누스를 주장했어요. 누스만이 영원하다. 누스, 신의 정신이 우주를 좌지우지한다 경영한다. 이런 여러 주장들을 했는데 우주는 물에서 나왔다. 탈레스 불에서 나왔다. 헤라클레토스. 헤라클레토스는 불과 누스를 같이 봤어요. 그러니까 불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단순한 불이 아니고요. 이성을, 신의 이성을 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이런 학설들이 각개로 돌다가 소크라테스에 와서야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냐는 주제로 딱 모든 게 정리가 돼요. 그 모든 걸 정리해가지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냐? 선하게 신의 이성에 맞게 매순간순간 이성에 맞게 자명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신의 질서는 원래 자명할 텐데 왜 내 영혼은 자명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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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물어본 겁니다. 왜 내 영혼은 안다 모른다도 선명하게 그걸 구분하지 못하는가? 왜 모르는데 안다고 생각하는가? 소크라테스는 이게 불만인 거예요. 다 같이 신의 이성이 우리 정신에 다 있는데 왜 모르는데도 안다고 하면서 버티고 사냐는 거죠. 당시 지식층들을 보니까. 식자층들이 너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다 다 알아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강조하거든요. 나는 모른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내가 다 모르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러니까 이것도 지혜죠. 모른다는 거 알아도 지혜예요. 동양에서 논어에 똑같은 얘기인데 공자님이 자로야 내가 안다는 걸 설명해 줄게 아는 건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거 모른다고 하는 게 아는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소크라테스는 안 거죠. 알아버린 거예요. 자기가 모르고 살았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그 얘기 간단하게 소개하면 친구가, 친구가 아테네에서 신탁이라고 그러죠. 신한테 뭘 바치고 이제 계시를 받는데 그 계시에서 뭘 물었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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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서 누가 제일 지혜롭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소크라테스라고 한 거예요. 그 얘기를 해주니까 소크라테스가 당황한 거예요. 나는 모르는 게 많은데 왜 나더러 제일 지혜롭다고 하지? 했는데 그래서 당시 최고의 인텔리들을 다 만나고 다녀서 내린 결론이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아는데 저 사람들은 모른다는 걸 모르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무지의 자각이 철학에서 제일 중요하구나 이런 명언을 날리고 몰라서 죄를 짓지 알면 죄를 안 짓는구나라는 말도 소크라테스가 한 명언입니다. 무지가 악이다. 알면 지가 덕이다. 알면 죄 안 짓는다. 소크라테스의 모든 서양철학의 고대 서양철학의 기본 입장입니다. 인간은요 제가 이런 얘기 많이 했는데 막 두서없이 가는데 잘 따라오고 계시죠. 자명하십니까? 지금 머릿속에 헝크러지시면 안 돼요. 제가 늘 인간을 이렇게 정의하지 않았습니까? 애고적으로 볼 때는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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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많은 인간, 욕심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게 합리적이죠. 이익은 취하고 해로움은 피하는 게 합리적이죠. 지금 이 정도의 합리적 이성적이라는 말만 지금 통용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는 겁니다. 경제학에서도 이 정도의 합리성을 말하는데 진짜 합리성은 뭡니까? 호선(好善) 선이면 좋아하고 이건 이때는 미워할 오(惡)자입니다. 여긴 악할 악(惡)자. 글자는 같지만 선은 좋아하고 악은 미워하는 게 진짜 이성이죠. 신의 이성이 여러분 안에서 작동한다면요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에고가 에고가 여러분의 이성을 가린다면 이성이 욕망의 시녀로서 복무한다면 여러분 이런 판단만 하시게 돼 있습니다. 이때 이익이 나쁜 게 아니라 이익의 기준이 소아적인 여러분 애고라는 거죠. 여러분 자신만 이해한다는, 여러분 자신한테 이롭냐 해롭냐? 그런데 이거를요 다르게 보면요. 지금 제가 이런 얘기도 한 번씩 할 때가 있어요. 사실은요. 호선오악(好善惡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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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피해(好利避害)랑 같은 얘기라는 걸 한 번씩 얘기한 적이 있어요. 뭐냐면 호리피해를 만약에 기준을 소아가 아니라 대아로 바꿔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신의 이성에 부합해버려요. 신의 이성은요 신한테 이로운 걸 좋아하고 신한테 해로운 걸 싫어하니까요. 신한테 우주의 자연에 해로운 게 뭡니까? 악이죠. 우주의 이로운 건 선이죠. 이해되세요? 그런데 이 서양철학자들은 다른 측면에서 이렇게 얘기해요. 모든 사람들은 호선오악(好善惡惡)한다고 그래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한대요. 이거 맹자보다 더하지 않나요? 서양철학자들은요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게 만들어져 있대요. 성선설을 주장해요. 그런데 왜 저 사람들 그런데요. 악한 사람이 훨씬 많잖아요. 그럼 물어보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서양철학은 뭐라고 할까요? 그 사람은 그게 선인 줄 안다. 이해되세요? 이게 서양철학의 기본 관점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랬고 모든 스토아학파도 다 이 입장이에요. 그 사람은 그게 선인 줄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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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줘야 된다. 신의 이성이 온전히 발현되지 않아서 선이 아닌데 선인 줄 알기 때문에 하는 거다. 그래도 그 사람도 선인 줄 알아서 하는 거지 그게 옳은 줄 알아서 그렇게 해야지. 그게 잘못됐는지 아는데 그렇게 한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실제 그러지 않나요? 그 약육강식 막 그 있잖아요. 남의 회사 다 잡아먹고 막 성공하는 그런 악덕, 악덕업자한테도 물어보시면 이래요. 아니 이게 옳지 않냐라고 하실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뭡니까? 이게 선이지 않냐 이럴 수밖에 없지 않나 이렇게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즉 선악을 몰라서 그렇지 알면 그 사람도 그렇게 안 할 거다가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겁니다. 몰라서 죄 짓는다. 알면 죄를 짓지 않는다. 이때 안다는 건요. 이성을 온전히 회복한 겁니다. 신의 질서를 온전히 자기 개념에서 회복한 거예요. 이 이성이라는 말이 지금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까 뭐랑 같으세요? 신의 질서이자 동시에 맹자가 말한 시비지심이라는 거 아시겠습니까? 서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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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랑이요 동양에서 말하는 맹자가 말한 시비지심 인간이 갖고 있는 선천적인 선악 판단 능력이에요. 이 선악을 어떻게 판단할까요? 원래 선이 뭔지 악이 뭔지 아니까 판단하죠. 여러분이 배울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의 본성은 선이 뭔지 악이 뭔지? 선악만 판단하는 게 아니고요. 시비지심으로 뭘 판단하는지 아십니까? 선악을 여러분 판단하고 계시고요. 그다음에 진위(眞僞)라고 하죠.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해요. 뭘 알 때는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중요한데 진실이 뭐냐? 간단합니다. 진실은 체험과 개념이 합치된 거, 가설과 실험이 합치된 걸 진실 그래요. 선악은요. 남한테 피해가 안 가는 거 모두에게 좋은 거 모두에게 해로운 거 그다음에요. 미추 아름다운 거 추한 거 이거는요. 여러분이 전혀 공부하실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요. 왜냐 여러분 안에 여러분의 영혼 안에 이성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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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육신에 영혼이 담겨 있고 영혼 안에 이성이 담겨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성의 소리를 들으면 이성의 소리를 더 많이 들으면요 다 알 수 있어요. 이상하게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이건 찝찝해요. 이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이건 아름답지가 않아요. 이게요 저 궁극적 차원에서는 애고의 차원에서는 소아적인 욕망이나 편견이 감이 되면요 달라지지만요. 개인별로 다 애고 입장을 떼놓고 우주의 로고스의 입장에서의 진선미는 한결같습니다. 진리가 선하고 선한 게 아름다워요. 여러분 그 양심적이지 않은 행동을 보면 추하다고 느껴지죠. 그렇지 않으세요? 옳지 않은 걸 보면 추하다고 느낍니다. 추하다. 미추가, 그건 미추지심(美醜之心)이 작동한 겁니다. 옳지 않다는 거는 선악지심이 발동된 거죠. 그러면 그게 진리냐 아니냐는 시비지심 진의를 가르는 진희의 마음이 발동된 거예요. 이 세계가 함께 돌아가요. 그래서 여러분 로고스에 부합하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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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일이어야 되고 진실이어야 되고 그게 아름다워야 됩니다. 여러분은 본능적으로 이 진선미를 찾아서 살고 계세요. 그런데 오판을 해가지고 진리가 아닌데 진리인지 오판을 해버리면요. 악을 하게 돼요. 당당하게 그리고 추한 일을 자기도 모르게 합니다. 아름다운 줄 알고요. 어떤 사람이 되게 아름답다고 우기는데 여러분이 볼 때 되게 추한 그런 모습들이 많이 있지 않을까요? 본인은 모르고 있는. 그래서 이 안타까운 상태라는 겁니다. 그래서 중생을 볼 때요. 이 서양철학에서 중생을 볼 때 어떤 마음으로 보냐면요. 그런 악인들을 볼 때 환자로 봐요.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이성이 안타까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 선악을 판단 못할 정도로 이성이 온전히 발현되지 않고 있는 동물하고 인간 사이에서 동물 쪽에 되게 가까운 온전한 인간이 못 된 상태, 되게 안타까운 그러니까 동양말로 뭐죠? 금수같다라고 하죠. 동양에서 그런 상태로 보니까 환자로 봐서 고쳐줘야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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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로 보기 때문에 안타깝게 보고 빨리 고쳐줘야 된다는 입장이에요. 이성이 바른 사람이 고쳐줘야 그러니까 아까 그 견유학파들 디오게네스나 안티스테네스 이런 사람들은 다 뭘 하는데 사명을 갖고요. 보살 정신을 가지고요. 내가 지금 결혼해서 가정 꾸리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온 중생을 깨어나기 위해서 너희가 신의 자녀고 신의 자녀라는 말을 바로 씁니다. 스토아학파는 우리가 신의 자녀고 신의 온전한 분신으로서 이성을 온전히 쓸 줄 알아야 우리 진짜 인간이 된다는 얘기를 계속 해주고 다녀야 이게 사명이에요, 견유학파의.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그냥 쉽게 디오게네스는 통에 살았구나 뭐죠? 지팡이 하나에 옷 한 벌 걸치고 살았구나 이렇게만 아시면요 별 도움이 안 돼요. 왜 그렇게 살았을까 이게 전혀 해결이 안 되잖아요. 그 사람들은 그게 인간의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한 거예요. 플라톤은 플라톤대로 올바른 국가를 만들고 인간들이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온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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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발휘하고 사는 게 최선이라고 본 거고요. 이 사람들은 이 사람들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한 겁니다. 그 계승에 또 견유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스토아학파예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다 받아가지고 후대에 뭐 헬레니즘 시대라고 하죠. 그때의 대표적인 철학이 스토아학파고 이 스토아학파는 로마에서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노예도 스토아학파를 하고 에픽테토스요. 황제도 스토아학파였죠. 예 이게 이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여러 지적을 했는데 비판받는 것 중 하나가 기독교 탄압인데요. 이분은 이분대로 철학을 가지고 당당하게 기독교를 탄압한 겁니다. 기독교보다 우리는 로마에 이미 충분히 그런 사상이 있다라고 본 거예요. 그 입장도 이해해 줘야 돼요. 우리 종교를 탄압하다니 이러지 마시고 각자의 입장이 있는 건데 이쪽은 저쪽 입장을 이해해 줬는지? 로마의 문화와 전통 속에 소화돼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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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성적인 이런 철학의 흐름이 있다는 걸 알고. 보십시오. 기독교분들 오해하지 마시고 이제 제 혹시 강의 들으시는 분들도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보십시오. 우리 안에는 선악을 판단하고 시비를 판단할 수 있는 신의 이성이 다 내재돼 있고 이것만 발휘하면 우리는 신의 자녀가 돼서, 이분들은요 우주인 사상이 있어요. 지구도 무시해요, 이분들은. 우리는 전체 우주가 신의 이성을 따르는 게 최선의 인간의 길이기 때문에 우주인으로서 지구에서 나라 나누는 것도 안 좋아해요, 스토아학파는. 세계인 우주인으로서 신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갑자기 어느 종교가 하나 들어오더니 다 필요 없고 예수라는 한 인물만 믿으면 된대요. 여러분 믿으시겠어요? 여러분 머릿속에서 이미 나도 신의 자녀로서 신의 이성이 온전히 구현되고 있는데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믿음만 있으면 된대요. 한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아들이라는 것만 믿으래요. 이런 식 포교가 잘못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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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못 믿는 거예요. 이성이 살아있는 사람일수록 못 믿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요? 이해되세요? 이제 이 얘기 나가면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랬을 거라고요. 제 생각이 아니라 그 당시 로마의 지성인들이 볼 때는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우리 유교 선비들이 기독교를 볼 때도 그렇게 봤어요. 인의예지의 리(理) 우리 똑같습니다. 선비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유가랑 제일 똑같아요. 신기하죠. 불교랑 기독교랑 많이 유사한 부분이 있듯이 희랍철학과 유교는 거의 한 철학이에요. 이 이성이 리(理)고요. 그렇죠. 도(道)고 리(理)예요. 이게 도이자 리예요. 큰 길이라는 측면에서 도죠. 우주가 걸어야 할 길이라는 측면에서는 도리(道理)예요. 이거는 공자 이래 도리만 우리는 추종해 온 거잖아요, 그 유교에서는. 우리 조선 선비들도 그랬고. 500년간 도리만 따르자 희노애락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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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사단이라는 인의예지라는 도리로 다스리죠. 똑같은 사상이죠. 그래서 동양은 설명이 더 잘 돼 있어요. 이성, 이성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줄까? 인의예지신. 대문까지 만들어서 딱 이성에 대해서 더 전문가들이었어요, 조선 선비들이. 저는 그렇게 자신합니다. 이분들도 이성 얘기를 하지만 이성에 대해 여러 가지 표현을 하지만 정리된 걸로는 이쪽이 짱이에요. 인의예지신 지난번 주자 옥상 강의할 때도 명확하게 원리는 이성은 인의예지신. 딱 설명하잖아요. 거기에 부합되면 신의 질서에 맞는 거고 그거에 부합되지 않으면 편견이고 욕심인 거다. 정확하게 정리를 했잖아요. 이런 측면을 잘 이해하셔야 돼요. 이렇게 살아오고 있는데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어떤 사람 하나만 믿으면 된대요. 믿냐 안 믿냐? 교회에 나가냐 안 나가냐만 중요하대요. 믿으시겠어요? 이성적이라면. 그러니까 수준 높게 예수님이 포교할 땐 그렇게 안 했잖아요. 이해되세요? 성경에 그런 식으로 전도를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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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으로 설득을 하고 신의 뜻대로 살으라고 도와주는 거죠. 신의 뜻대로 살기를 도와주면서 전도를 할 수 있었다면요 다른 종교의 유입이 훨씬 더 풍성한 어떤 문화적 결실을 낳았을 겁니다. 안 그러고 상대방을 이해 안 하고 접근하면요 서로 경계를 하기 때문에 탄압으로 이어집니다.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탄압이 돼요. 왜냐하면 서로가 지금 서로를 경계하게 되잖아요. 서로 소통이 안 돼요. 그다음에는요 그러면 주먹 나가게 돼 있어요. 힘이 센 사람 주먹이 더 많이 먹히겠죠. 그래서 무자비한 탄압으로 이어져요. 그래서 이런, 이런 상황을 앞으로 피하려고 해도요. 전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입장들을요 저희가 보면 더 황당하잖아요. 서로 같은 얘기하고 있는데 예수님 이렇게 제일 잘 사신 분이 예수님인데요. 자기 내면의 신의 이성,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만 사세요. 예수님 성경 보세요. 예수님은 이쪽으로 가고 싶었으나 성령이 이쪽으로 가자고 하니까 이쪽으로 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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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을 피하게 해주세요. 그래도 아버지 뜻대로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신을 설명해 달라는 제자의 요구에 예수님이 화를 내면서 그러세요. 너는 그동안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걸 다 봤잖아. 그런데 왜 하느님을 아버지를 모르느냐 그럽니다. 신의 이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면요 신의 이성 그대로 사는 사람 모습 보면 알겠죠. 예수님이 하고 싶었던 게 그거예요. 신의 이성 그대로 삶으로써 사람들한테 보이지 않는 이성을 구체화시켜주려고 자기 사명으로 알고 했는데 제자가 오래 같이 있던 제자가 아버지는 어떻게 생긴, 그러지 말고 아버지 좀 보여주세요 하니까 확 역정을 냅니다. 실망했다고. 너 나랑 같이 있지 않았냐 어떻게 그 말을 할 수가 있냐. 이렇게 이 정도로 아주 요한복음에 보면 아주 충격받으세요. 내가 말하고 행동한 거 봤으면 아버지를 네가 안 거다. 이해되세요? 여러분도 그렇게 사시라는 겁니다. 스토아학파 철학,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다 그거예요. 우리가 신의 이성대로 삶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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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그걸 우리가 구현하자는 게 모든 철학자들의 몫입니다. 이런데도 지금 서로 이렇게 이해를 못하겠다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제가 또 계획에 없던 얘기 한참 했는데 계획에 없던 건 아니죠. 이런 얘기를 드리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드리게 됐네요. 그래서 시간을 많이 갖는데 서양철학을 왜 우리가 알아야 되는지랑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지. 동양철학을 아는데 서양철학을 모르겠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인간의 기질 차이 너무 보지 마세요. 동서 차이가 얼마나 된다고요? 스토아학파는요. 우주가 우주적 차원에서 놀았어요. 외계인도 이러고 있을 거라고 다 판단하고 얘기한 건데 지구에서 조금 언어 다른 거 문화 다른 거 가지고요 동서를 쪼개고 남북을 쪼개고 이래서 서로 사상이 틀려 이렇지 않습니다. 기질이 좀 다른 거지 문화가 좀 다르지 신의 로고스가 다를 리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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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로고스는요 온 우주에 가도 다 그거예요.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한테 하지 마라. 이게 우주 법칙 아니겠습니까? 생명체가 생명체가 우주에 존재한다면 이건 공통된 설법 아닐까요? 우주가 그 생명체한테 명령하는 게 그거 아닐까요? 너 살겠다고 남 괴롭히지 마라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남도 살고 싶다. 이해되시죠? 너무 자명한 이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겠다는 그 무리가 소크라테스 이래 제대로 이제 펼쳐진 겁니다. 이게 서양철학의 실체예요. 서양철학을 막연하게 철학, 동양에 철학이 없었어. 이런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데요. 동양에 철학이 없었어. 이게 동양이 없었나요? 똑같이 있었어요. 철학이 뭔지 모르니까 이런 얘기를 하신다. 그래서 진짜 철학자는요. 논리가 센 사람도 아니고요. 스토아학파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철학자는 뭘까요? 이성으로 자기 감정을 절제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서양 에픽테토스가 특히 강조했는데 스토아학파에서 철학자냐 아니냐는 딱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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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판나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안색이 변하면 철학자가 아니고 안색이 안 변하면 철학자예요. 철학자 판별법이 이거예요. 실제로 나와요, 어록에. 이해되세요?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지는 거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때 안색이 변하면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겁니다. 자명한 걸 못 받아들여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욕바라밀이 부족한 거야. 이 상황을 인욕을 못하는 거, 지금 감내를 못 하는 거예요. 다 알겠는데 나는 못 견디겠다. 이상하지 않느냐? 풍랑 만나서 배가 지금 난파돼서 만약에 죽게 되면 당연히 죽게 되는 거고 그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일이지 그걸 거부한다고 배가 안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요. 이해되세요? 죽음에 대해서,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죽음을 얘기해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보시면 계속 죽음 얘기가 나오는 게요. 인간이 제일 못 받아들이는 게 죽음인데 죽음은 누구한테나 찾아오거든요. 자명한 일이죠. 그리고 우리가 거부할 수 없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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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하죠. 그러면 흔쾌히 받아들여야 되는데 왜 흔쾌히 못 받아들이냐는 거죠? 이게 벌써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개인의 감정에, 사단보다는 칠정에 충실한 삶 아니냐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철학은 실전 철학이에요. 스토아학파한테 말로 떠드는 사람 다 필요 중시 안 해요. 논리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일 다행이다고 생각, 자기가 주장한 게 논리학 안 배운 게 제일 다행이다. 논리학 깊게 안 들어간 게 제일 다행이다라고 명상록 제1장에 써 있어요. 내가 그런 데 빠졌으면 엉뚱한 데 시간 보낼 뻔했다. 논리가 아니다는 거. 자명한지 아닌지 왜 몰라요? 논리 따져보셔야 자명한가요? 오히려 논리 따지자는 사람은요. 속셈이 좀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죠. 불쌍한 사람 되게 도와주고 싶어. 그럼 도와줘. 그러면 될 걸 논리를 좀 따져보자. 이러면 뭔가 지금 도와주기 싫다는 거 아닌가요? 어떻게 하면 안 도와줄 수 있는 논리를 찾아내서 변명을 하려고 그래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논리라는 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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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악용해요. 어만 데 이용해요. 진리는 그냥 통으로 들어와요.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 시비지심 양심이 있기 때문에 맹자가 양지라고 하는 그 이성적 판단 능력이 있기 때문에 딱 판단 능력이 이미 떨어져요. 옳은지 그른지는 이게 너무 너무 맞는 얘기예요. 이건 너무 틀린 얘기예요. 그런데 솔직히 내 에고로는 맞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때 그럼 다들 서로 눈치를 봐요. 뭘 눈치 보는지 아십니까? 지금 우리 사회도 그래요. 누구 하나가 좀 변명해주는 그럴싸한 명분이 있는 얘기를, 논리를 전개해 주길 바래요. 맞는 거를 안 해도 되는. 그걸 그때 누구 하나가 그럴싸한 논리로 그래도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아라고 하면 다 확 그쪽을 동조해주면 끝나니까요. 인간 에고들은 다 이렇게 굴러갑니다. 분명 이게 옳은 줄 알아도 조심합니다. 말 내가 괜히 먼저 했다가 정 맞을까 봐 조심하다가 누가 좀 우리를 좀 변호해 주는 얘기 안 해주나 하다가 누가 해주면 거기 편들어주는 걸로 끝냅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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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지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이때 만약에 다들 신의 이성이 안에서 현현하면요 누군가가 옳은 얘기를 자명한 얘기를 했을 때 전 국민이 자명하다고 인정해 주겠죠. 이러면 끝나요. 이러면 인류 역사가요 제가 장담하건대 역사에 없던 일이 일어나요. 왜냐하면 역사에 이런 일이 없었거든요. 대부분 그 이성이 마비된 채로 살아왔는데 이성이 눈을 뜨고 정신 차리는 게 인류의 과제지 지금 와서 이성이 필요한가? 뭐 이런 철학도 많아요. 이제는 감성이다. 뭐 이런 아주 갈 때까지 가보실 요량이신 것 같은데. 감성이라는 건요 파편적입니다. 제일 무섭지 않습니까? 제가 감성적으로 한번 살아볼까요? 좋다고 고백했다가 5분 뒤에 싫어졌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지금 내 감정이 싫은데요. 감정이란 이런 거예요. 조변석개예요. 순간순간 변하는 게 감정이에요. 이성적이니까 버티는 거예요. 그게 옳은지 아니까 그래도 버티는 거지 이성 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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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하면요 순간순간을 살겠다는 겁니다. 그 순간 나한테 좋아 보이는 거. 그런데 보십시오. 진짜 철학자도 사실은 그 순간순간 좋아 보이는 것만 하고 있다는 거 아시겠어요? 기준이 다른 거예요. 내 욕심에 좋아 보이는 거냐? 내 양심에 좋아 보이는 거냐? 그것 때문에 인간의 수준이 달라지고 차원이 달라지는 거예요. 이렇게 좀 이 정도 지금 아주 개론인데요. 거의 서양철학 개론을 한 것 같은데 이해되시죠? 이게 서양철학의 제일 근원적인 어떤 화두고 핵심입니다. 뒤로 내려올수록 이런 정신들이 많이 악화돼요. 이런 실전 철학보다는 논리에 자꾸 빠져요. 되게 지엽적인 문제에 빠져요. 고대철학으로 올라갈수록 통 큰 얘기가 나오는데 밑으로 내려갈수록 되게 지엽적인 데 빠져서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힘든 걸 논리적으로 증명하겠다고 평생을 보내다가 끝나고 끝나고 하는 그런 철학들이 너무 많아요. 지금 여러분 삶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철학이 진짜 많습니다. 시간이 너무 나고 우리가 한 천년쯤 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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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정도는 아주 엄하게 써도 될 것 같으면 그런 책 보셔도 되는데 여러분 정말 책 읽을 수 눈 빛나고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중요한 걸 보셔야 되면 서양 고대철학을 보세요. 중세부터 안 돼요. 중세부터 기독교가 들어가가지고요. 기독교 예수님이, 저는 예수님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들어갔다는 게 왜 문제를 일으켰냐면요. 이성을 다 신앙과 이성이 적당히 만나면서 다 흐려버려요. 이성적으로 자명하다고 결론이 나야 하는데 믿음의 문제가 그걸 다 흔들어놔요. 그래서 자명한 얘기를 끝까지 주장하지 못해요. 믿음이랑 충돌이 나면 다 틀어져버려요. 이해되세요? 철학은 신학의 하녀였기 때문에 시녀였기 때문에 중세는. 중세 되게 철학적이지 않냐라고 얘기하지만요. 이미 결론을 정해 놓은 그런 철학은 자명하냐라고 물어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내 믿음을 변호해 주는 멋진 논리를 철학에서 찾아와 봐가 쉬워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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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부터는요 벌써 변질됩니다. 고대철학의, 서양철학을 알고 싶다면 고대철학을 보시라는 저는 근대 이후는요. 고대철학을 좀 복원하겠다고 시도했지만 아주 지엽적인 데만 빠집니다. 그래서 그래서 제가 서양철학을 하나 꼭 소개해 드린다면 소크라테스 글이나 지금 에픽테토스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거를 권해드리는 이유가요 이분들의 이 철학들이 가장 어떤 생생한 고대철학을 잘 설명해 주니까요. 또 하나 더 권한다면 보에티우스의, 그리스 로마 철학의 아주 마지막 집대성자입니다. 보에티우스라는 분이 기독교에서도 천주교에서 성인이에요. 순교, 기독교인으로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성 세인트가 붙는데요. 그분이 철학의 위안에서 기독교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순수하게 자명한 얘기만 하세요. 왜 철학을 해야 되는지, 인간은 왜 선하게 살아야 되는지, 악한 사람은 뭐가 문제인지 오늘 나눈 내용이랑 거의 똑같습니다. 그걸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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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요. 그래서 그게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한 권을 권한다면 제가 철학의 위안을 주로 권하거든요. 거기 이론적인 것까지 자세히 소개가 잘 돼 있거든요. 그리고 쉽게 접근을 하려면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보시면, 쉽게 이분 글은 짧지 않습니까? 지금 트위터 글 보듯이 가볍게 보실 수가 있어요. 한글 한글, 하루에 짧은 글 하나만 보셔도 돼요. 그걸 가지고 하루 종일 생각을 하시다 보면 여러분 지혜가 느시고 서양철학이 뭔지 아실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이제 공부를 해나가시면 되겠습니다. 5분 쉬고 다시 할게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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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39 서양철학07 에픽테토스의 담화록 1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