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징(許徵) 용진공 허징(龍津公 許徵)은 시조로부터 15세손이며 판도좌랑공 관(冠)의 현손(玄孫)으로 아우 손(愻)은 제주도 입도조(入島祖)이다. 공민왕 11년 임인(壬寅1362)에 무과(武科)로 현달(顯達)하였고 충정왕(忠定王)의 사위로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공암군(孔巖君)에 봉해지고 우왕(禑王)11년 을축(乙丑1385)에 용진현령(龍津縣令)을 거쳐 공양왕(恭讓王)2년 경오(庚午1390)에 병마참의(兵馬參議)에 승임되고 공양왕(恭讓王)4년 임신에 병마단련판관겸 북도순검사(兵馬團練判官兼 北道巡檢使)로 서북변경의 수비실태를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하던중 이해 7월 이성계가 등극하여 집권함에 의분을 참지못해 경국(傾國)의 위변(危變)을 통탄하면서 송악동(松岳洞) 남현(南峴)에 동지72인과 함께 모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결의를 다지고 관복들을 벗고 사배(四拜)를 올린 다음 통곡하면서 미치광이 행세로 파포폐립(破布廢笠)으로 북관(北關)땅을 향하였다. 따라서 형은 북쪽 산간으로, 아우는 남쪽섬으로 들어가 형제의 후손들이 남북분단을 이루고 있다. 이태조와 태종은 여러차례 선무사(宣撫使)를 보냈으나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생애를 마쳤다. 기오집(騎午集)에 "북도순검사 허징은 여조(麗朝)의 경국위변(傾國危變)을 당함에 함경북도 길주(吉州)로 피신 또한 두문동(杜門洞)으로 둔거한 72인중 36인의 수장(首長)이라 하였다. 공의 6세손인 양천군 허방(陽川君 許昉)의 행장기(行狀記)에는 송악동록(松岳東麓)하에 1척 비석이 있는데 이는 조선조에 불복한 제신으로 두문동72인을 열록(列錄)한 비석이라 하고 비문 한 구절속에 기록하기를 현령(縣令) 허징은 여조실위(麗朝失位)에 통곡하여 양광피발(佯狂被髮)로 입북(入北)하였으며 아버지는 허흠(許欽)이고 할아버지는 허강(許綱)이며 묘는 구작목우지장(俱作牧牛之場) 운운"이라 적고 있다. * 선무사(宣撫使) : 조선시대에 국왕이 특별히 지방에 파견한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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