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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문화재는 불교 문화재와 연관이 많습니다. 삼국시대 부터 수 세기를 걸치면서 불교가 국교로 작용했던 점과, 서양의 문화가 일찍 동아시아로 전달되지 못했던 점이 작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처럼 문명의 발상지도 아니었기 때문에 세계적 문화유산이 없고, 지협적이 문화유산만 우리는 보유하고 있습니다. 딱히 불교 문화재만 우리의 대표적이 문화재는 또 전부는 아닙니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세종대왕이 창제한 우리의 한글, 측우기, 금속활자, 첨성대, 장묘 문화의 대표적인 왕릉 등등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 건축물이이나 조각품, 불화 등등 불교 문화재가 워낙 많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고 보일 뿐입니다.
누군가는 3년에 걸쳐 우리나라 왕릉을 전부 답사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재에 대한 열정은 자신의 발전과 함께 이 땅의 뿌리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탑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올렸지만, 현장에서의 이야기는 더 재미있고 볼 것이 많으며 우리 문인들에게는 많은 소재와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문화재 이야기가 카페의 "문학강의 노트와 평론" 방에 무슨 의미가 있는 글이냐고 말씀하실 분들도 계시리라 싶습니다. 누군가는 박물관의 청자를 감상하고 글을 짓기도 하고, 누군가는 인각사의 닳은 불상을 보고 멋진 시(詩)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비록 사진 몇 장과 퍼온 글과 주관적 생각을 올렸지만 그 사진과 글을 읽어 보시고 멋진 글을 탄생시킨다면 이 방에 올려도 될 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종교 편향적 글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평소 모르던 지식을 이 글을 통해 알아가는 것도 글감에 도움이 되리라 싶습니다.
탑(塔)의 역사적 시원
고대 그리스, 인도 사람들은 사람들은 물질을 구성하는 핵심을 원자나 요소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자나 요소의 결합방식에 의해서 물질이 다양하게 재구성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발전된 것이 오늘날 화학(化學)입니다. 하여 고대인들은 인간의 핵심에 대해서는 인간의 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뼈는 육체를 구성하는 단단한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에게는 인간에게 가장 단단하다고 생각한 것이 치아라 생각했고 치아 숭배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동물을 잡아면 강력한 동물의 치아를 뽑아서, 목걸이(강한 기운을 받기 위함)를 하거나 집에 장식으로 걸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삿된 기운을 물리칠수 있다는 믿음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불탑(佛塔)의 기원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불교를 일으킨 부처님은 80세에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밑에서 입멸에 들었다. 다비를 치르고 수습된 8말 4되의 부처님6 사리는 제천과 용중, 그리고 인도의 여덟 나라에 나누어 전해졌습니다. 부처님의 입멸은 불교도들에겐 애통한 일이었습니다. 사리를 얻은 여덟 나라의 왕들은 각기 제 나라로 돌아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탑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불탑의 출발입니다.
초기 우리나라 석탑(불탑) 발생시기와 양식
우리 나라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합니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木塔)의 건립 시기로,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초기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양식의 조형을 모방하여 누각형식(樓閣形式)의 다층으로 건립하였을 것이며, 방형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불탑(佛塔)의 변천사
인도의 탑(Stupa) 변천은 B.C.E 3세기경 마우리왕조(순수 원형의 탑) 부터 B.C.E 2세기경 인도.그리스 형의 야바나 왕국 탑으로 변천하게 되는데, 야바나 왕국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계 인도 왕국을 말하며 탑의 상륜부가 1개입니다. B.C.E 1세기경에는 인도 스키타이 왕조 시대로 탑의 상륜부가 3개로 늘어나고, A.C.E 2세기경 쿠샨왕조 시대에는 탑의 기단의 모서리 기둥 우주와 가운데 기둥 탱주가 생기면서 면석이 생겨 면석에 조각상을 만들어 넣게 됩니다. 이런 불탑은 소승, 대승불교로 분파되어 중국으로 A.C.E 1세기경에 전파되었고,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와 접목이 되면서 중국의 전탑, 한국의 석탑, 일본의 목탑 형식으로 발전이 됩니다.
인도의 탑(Stupa)은 우리의 무덤과 흡사합니다. 밥 공기를 뒤집어 놓은 무덤 형태인데, 벽돌로 만들고 그 위에 일산(日傘, 陽傘)을 씌워 놓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과 차이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벽돌로 탑을 만든 이유는 탑을 흙으로 만들면 우기에 빗물에 흘러내리기 때문에, 빗물에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존귀한 대상에게는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일산(日傘)을 받쳐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화강암이 많아 석탑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삼국시대때부터 조선초 무렵까지는 목탑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탑들은 전란으로 인해서 불에 타 없어지고 석탑만 많이 남았고, 또한 목탑은 관리비용이 많이 들어서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목탑을 개보수할 돈이 부족했던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한 석재인 화강암은 튼튼해서 잘 버티지만 깎기도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탑의 장중함보다 높은 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유럽의 대리석은 깎고 담듬기 쉬워서 기교를 비교적 많이 부릴 수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남아있는 석탑들은 주로 백제, 신라, 고려의 것들인데 백제와 신라 시대의 석탑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데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탑의 지붕(옥개) 모양입니다. 백제는 전체적으로 지붕이 거대하면서도 끝부분이 갈수록 얇아지고 위로 많이 들려 있습니다. 반대로 신라는 지붕이 아담하면서도 뭉툭, 통통합니다. 그리고 층수는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백제는 주로 5층탑을 기본으로 하되 각 층의 높이를 줄이고 지붕돌을 얇게 했으며, 신라는 3층탑이 기본인 대신 탑이 너무 낮게 보일 것을 감안해서 기단을 2중으로 하고 위층 기단부는 높게 축조하였고, 탑신부도 두텁게 해서 왜소해 보일 것을 방지했습니다. 고구려는 현존하는 석탑은 없지만 평양의 보현사, 평창의 월정사, 남양주의 수종사에 고려시대 팔각다층석탑들이 분포하는데, 이 지역들이 과거 고구려의 점령지였다는 점과 고구려 목탑지의 특성(팔각건물)과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계 석탑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신라 중대까지는 다른 장식 없이 깔끔하게 절제된 삼층석탑 위주로 세우지만 하대부터는 석탑에 다양한 조각을 새기는 세련된 정형석탑이 유행합니다. 문짝, 인왕상(금강역사상), 사천왕상, 팔부중상, 십이지신상 등. 예를 들어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 경주 원원사지 삼층석탑, 울산 간월사지 삼층석탑,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이 다양한 조각이 남아있는 하대 석탑입니다.
고려시대 들어서는 각 지방 호족들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표준양식의 보급이 눈에 띄던 신라 때보다 전국에서 독자적인 형식의 석탑들이 많이 건립되었습니다. 고려 말에는 경천사 10층 석탑처럼 몽골 제국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석탑도 등장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로 전반적인 불교 교세가 축소되고 석탑보다는 불상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 석탑 건립은 저조하고 석탑의 전체적 규모가 축소되었습니다. 층수는 높아지고 기단부, 탑신석, 옥개석은 낮고 간략화됩니다.
근현대의 탑은 정형화라는 석탑이 없고 높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석탑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쌍계사 구층탑, 봉화 축서사 사리탑 같은 경우라 하겠습니다.
불탑(佛塔)의 의미
부처님 입멸 후 사람들은 부처님을 추억하고자 했지만 그림이나 불상을 만들수 없었습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진리를 깨달은 위대한 성인의 형상은 만들수 없다고 금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무덤를 찾거나 붓다의 체취가 베인 유품을 보면서 아픈 마음을 달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붓다를 추억하게 되었는데 붓다가 정각을 이루었던 보리수나무, 설법을 상징하는 수레바퀴 모양의 법륜이 추억의 대상이 되었으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불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탑(佛塔)은 부처님의 정신세계를 조형물로서 형상화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부처를 떠나 법신(法身)으로 향하는, 이상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로 향하는 실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들은 불탑을 숭배하면서 부처님에 대한 공양과 공덕을 동시에 쌓고자 했습니다. 또한 탑을 세움으로써 정각을 이루고 해탈을 이룰 수 있게 되길 바랐습니다. 중생들은 부처라는 위대한 성인이 설법한 진리를 깨닫고자 했고, 다른 세계로 가버린 그를 영원히 기리는 진리의 상징으로 그의 분묘인 탑을 성심껏 장엄하게 꾸몄으며, 부처의 실체로서 인식되는 탑을 만방에 세워 널리 진리를 편 것입니다.
사리는 부다의 실제 유해인 진신사리와 상징화 하는 법산사리이며, 승려들의 승사리로서 사리는 3가지로 구분되며, 진신사리를 보관하는 곳이 탑(인도어로는 스투파)입니다. 그리고 승려들의 다비장에서 나오는 사리의 보관장치는 부도라 합니다.
법신사리는 불법(佛法, 불교의 가르침)이 부처의 또 다른 몸이라 하여, 불경을 사리처럼 간주하는 것으로,“석가모니 진언(경전)의 내용을 탑에 안치하고 예배하면 큰 공덕을 쌓으리라.”하는 것입니다.
하여 불탑을 석가모니 부처님과 동일시 하게 되었고, 사찰에서 탑돌이를 하는 것도 당시 부처님을 경배하던 것과 같이 우요삼잡(右繞三匝)을 하는 것입니다.
오른쪽(시계 방향)으로 3번 도는 행위는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에게 누구나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인도의 법당 형식은 탑(Stupa)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3번 돌도록 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존경을 표현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까지 이러한 형식은 잘 이어져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법당은 조선이 숭유억불의 세상이 되면서 법당을 크게 짓지 못하게 되자 공간확보를 위해서 불상이 뒤로 배치되게 됩니다. 법당과 요사체가 합쳐진 인법당이 등장하는 것도 하나의 요인입니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3번 도는 우요삼잡(右繞三匝)을 할 수 없는 법당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불탑에 (현존 불탑은 약 1,200여기이다)이 있으며 여기에 진신사리는 한계가 있기에 한국 불탑들은 금강경을 진신사리로 삼아 대체하여 넣은 경우가 많습니다.
신라시대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안치한 탑이 많은데, 불국사 석가탑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여러개의 석탑 내부에 작은 목조탑이 출토된 바 탑이란 석가의 진신사리를 넣는 장치이기에 일반적으로 소형 목탑을 석탑내에 넣어서 법신사리로서 대체한 것입니다.
참조 : 진신사리(정골사리, 골사리) 란
불교에서도 부처의 사리 중에서 단연 최고로 여겨진 것이 치아사리(齒牙舍利) 입니다. 치아를 일부 사람들은 뼈의 일부라고 하지만 뼈와는 전혀 다른 조직입니다. 그런 치사리(齒舍利)에 대해 『삼국유사(三國遺事)』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에는 "643년에 자장법사가 불두골(佛頭骨), 불아(佛牙) 100과와 부처가 입었던 비라금전가사(緋羅金點袈裟) 1벌을 가져왔는데, 자장은 사리를 세 군데에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에, 하나는 태화사 탑에,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봉안 하였다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중국과 한국의 최고 사리는 치사리(齒舍利) 였다고 보여지는 부분입니다. 인도에서 부처 입멸 후 화장하여 사리 분배를 하였을 때 가장 먼저 분배한 것이 치사리(齒舍利) 였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국왕 승계에 권위를 부여하는 불사리가 있는데, 그것은 최고의 사찰인 캔디 불치사의 치사리(齒舍利) 입니다.
뼈 숭배의 유풍은 신라의 골품제(骨品制)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은 "성스러운 뼈"와 "진짜 뼈"라는 의미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도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적에 절에 가서 경읽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삼보앞에 예배도 하고 염불도 하였을 것이므로 뼈가 희고 무거울 것이요, 여자는 아기를 한번 낳을적 마다 서말 서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섬 너말의 젖을 먹이어야 하므로 뼈가 검고 또 가벼우니라."라고 부처님께서 제자 아난에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뼈에 대한 구분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핵심적인 뼈는 두개골입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적멸보궁(사리를 봉안한 곳의 전각)이 있는 통도사와 오대산 중대에는 부처의 정골사리(頂骨舍利)가 모셔져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리를 봉안한 것이 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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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고 많으셨습니다.
신용성 시인님
내내 건안하소서.
고맙습니다.~
문인은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좋은 자료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