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 한옥마을
* 방문일:2011.08.23 (화) : 정기휴무일(?)
* 방문일기
<2011.08.21> 서울에 있는 작은딸(대학1년) 원룸 이사때문에 올라갔음. 기존있던 원룸은 벽지에 누수가 생겨 부득이 보증금 올려서 다른 원룸으로 이사했는데 이사 옮기기 전 마침 해외여행후 귀국한 큰딸과 함께 좁은 원룸방에서 4식구가 하루를 보냄. 평소 온돌방 생활을 해 온 우리 부부는 좁는 침대에서 자다가 집사람이 먼저 침대에서 떨어짐(푸하하하~~).집사람에게 괜찮으냐는 말 대신에 아래 방바닥에 잠을 자던 애들이 다치지 않았냐고 물어서 아마도 섭했을지도...조심해서 잘 좀 주무시지 그랴...또 떨어질까봐 안쪽으로 밀어 넣어 자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뿔사 내가 침대에서 큰 굉음을 내며 떨어짐...아마도 2시쯤 되었을까? 에효...좁은방의 비애... 아마도 애들은 많이 아팠을텐데 잘 참아줘서 고맙고 몇 시간전 핀잔을 준 아내에게 얼마나 미안한지...쪽팔려 증말...하룻밤 보내기가 이리 힘들고 괴로워서야 원나참 참나원 나원참.....
<2011.08.22> 오후 2시에 이사를 옮기기로 되어 있으나 애들 짐이라도 조금 많아서 어떻게 옮길까? 아침부터 고민에 빠짐. 약 150m 거리라 이삿짐센터를 부르기도 뭐하고 들고 몇번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골탕들고..아침밥을 먹고 혹시 주위에 리어카라도 있으면 돈을 조금 주고서라도 빌리려 했는데 (한 2번정도면 다 옮길듯) 쓰레기 운반용 리어카가 반갑게 있었으나 자물쇠 굳게 채워짐. 아쉬운 분들을 위해 휴대폰이라도 적어 주세요 주인 아저씨...어떻게 옮길까 대략 난감함. 바로 그때 획기적인 생각이 스쳐 지나감...왕심리역 바로 근처에 이마트가 있는데 캇트를 이용하면 어떨까하고 얼마나 실을 수 있을지 현물을 확인함. 오늘따라 캇트가 왜 이리 커보이고 고마워 보일까?
100원으로 이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한대 100넣고 끌고 옴.약간 얼굴이 확끈거렸지만 이곳에 내가 살곳도 아닌데..순간의 쪽팔림이야 충분히 견딜 수 있지롱....5번 정도 왔다갔다 이사짐 무사히 잘 옮겼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학생들은 종종 이 방법으로 이사짐 옮긴다고 하네...앞으로 이마트를 많이 이용해야 겠음. (저녁에 이것저것 생필품등 몇십만원 팔아 줌)
자주 올 수 없는 기회라 대청소 실시...몇년 묵은 때가 서려있는 창문이며 방바닥,화장실 등을 광나게 청소함...이곳에도 싱글침대가 있길래 어젯밤 아픈 추억도 생각나 주인장에게 사정하여 침대를 치워달라고 요청. 요구사항 반영성공...(침대가 없으니 더 넓어진 느낌). 전번집보다 채광도 좋고 역과 학교도 가까워서 대만족이라 다행...오랜만에 삼겹살 구워 먹으며 소박한 가족파티...
<2011.08.23> 이사짐 정리가 다 된듯하여 작은애는 학교에 볼일이 있어 가고 집사람은 묵은 커텐 빨래와 반찬등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큰 딸과 함께 오전 8시30분경 남산골 한옥마을로 탐방함.사전 인터넷 탐색없이 오느라 오늘이 정기휴무일이네...에구...그래도 전체를 대충볼수 있어 서울에서의 추억을 만들수 있었음. 그 내용은 아래 사진으로 대신함. 오전11시 40분 작은 딸을 두고 큰애는 여행용 가방을 정리해서 대구로....우리들은 포항으로 내려옴.
어설픈 일기 끝~~~행복메세지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매주 화요일은 정기휴무일 - 한옥내부는 출입금지라 주변 모습과 담장넘어 촬영함
8월이라 더욱 생각캐 하는 우리나라 꽃 - 무궁화
올해는 광복 66주년이다.
한옥마을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오전 햇살이 비친 잔디밭의 푸르름이 너무 청초했음
제일 위쪽에 <망북루>가 있음
타임켑술 광장
타임캡술에서 바라본 서울시 충무로 일대
한옥마을 정기휴무라 담장너머로 촬영함
한옥개방시에는 내부에 들어가서 옛 생활도구를 볼수 있음
아웃사이더 촬영
천우각은 야외 공연장
도심내 쉼터로 숲풀이 잘 가꾸어져 있음 - 매미들의 여름날 합창이 정겹게 들려옴
옛사람은 가도 옛날의 흔적은 남는 것....
천우각 - 야외 공연장
한옥마을에서 바라 본 매일경제신문사 사옥
옛스런 물건들 - 정겨움
진입입구 관상용으로 심어논 벼 - 벌써 이삭이 피었음
수수도 여물고...아 가을이 올려나
토마토
나
큰딸
2011.08.23 행복메세지
■ 남산골 한옥마을
-위 치 :서울 중구 필동2가 84-1 일대 (옛 수방사 터)
1998년 4월 18일 개관한 남산골 한옥마을은 대지면적 총 79,934m²(24,180평)에 전통한옥 5동, 전통공예전시관, 천우각 광장동, 전통정원, 타임캡슐 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1994년 서울 정도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완공된 타임캡슐 광장과, 남산골의 정취를 고려하여 조성된 전통정원에다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전통가옥 5동을 이전 복원한 한옥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남산골 제 모습 찾기사업의 일환으로 수도 방위사령부 부지를 1989년도에 인수, 건물 철거 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의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타임캡슐 광장은 서울시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600개의 품목을 선정 타임캡슐에 담아 지하 15m에 매장해 놓은 곳이다. 이것은 400년후인 2,394년에 개봉하게 된다. 타임캡슐 광장을 따라 내려오며 펼쳐지는 전통정원은 남산의 산세를 살려 구릉지와 계곡을 완만하게 조성하고 소나무 등 향토수종을 식재하였으며 간간이 설치된 누각과 함께 멀리 펼쳐지는 시내 전경이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게 한다.
전통정원의 한켠으로는 5동의 한옥가옥들이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 내의 7,934m²(2,400여평)에 조성한 이 한옥마을은 순수혈통의 전통 가옥 5채를 이전 복원한 곳으로, 민속자료로 지정된 서울 시내 23채의 전통 가옥 중 변형이 가미된 것을 제외한 순수혈통의 한옥들로 종로구 삼청동의 오위장 김춘영가옥(구 김홍기 가)와 관훈동 민씨 가옥(구 이진승 가), 옥인동 윤씨가옥(구 서용택 가), 동대문구 제기동의 해풍 부원군 윤택영댁 재실(구 정규엽 가), 중구 삼각동의 도편수 이승업 가옥(구 조흥은행 관리) 등이다. 이 중 건물 이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은 옥인동 윤씨가옥만 새 자재를 사용해 복원하고 나머지는 모두 건물을 하나하나 뜯어내 이전 했으며, 재활용이 불가능한 목재는 설악산의 자생육송으로 대체하였다.
옥인동 윤씨가옥 에서는 예절배우기, 국방공예 등 문화학교,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에서는 서예, 한시, 사군가, 한문과목 등의 전통문화 강좌가 열린다. 관훈동 민씨 가옥에서는 전통촌에다 한국의 소리 공연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오위장 김춘영 가옥에서는 전통공예 기능을 전승, 보급하는 무형문화재 시연이 열린다. 도편수 이승업 가옥은 전통찻집으로 하고 있다. 또한 공예 전시관에서는 민화, 침선, 나전칠기, 전통매듭 등을 만드는 방법을 재연하고 각종 공예품도 전시 판매하고 있다. 공동마당에서는 전통 민속놀이 재현 행사 등이 열리고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 조성 연혁
89.09.25 수도방위사령부로부터 토지 매입
90.08.17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 기본방침 확정
93.12-28 남산골 제모습 찾기사업 지형복원 및 전통정원 조성공사 착공
94.01.13 민속자료(한옥) 이전복원방침 결정(용역기간:94.12.14~95.07.10)
95.11.28 남산골 한옥촌 조성공사(공사기간: 95.11.28~98.01.24)
98.04.18 남산골한옥마을 개관
<참고>
남산골 한옥마을에 가면 조선후기 상류층 저택의 전형을 보여 준다면서 복원된 조선시대 가옥 5채가 있는데 1977년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한 뒤.. 95~98년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 2채 ( 박영효 가옥과 순정효황후 윤씨 가옥 )가 기왕에 알려진 내용과 틀린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최근 서울시에서 2년간 다양한 문헌과 지도 등.. 사료를 정밀 조사한 결과 이 중.. 우리나라 최초로 태극기를 만든 부마도위 박영효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박영효 가옥”은 실제로는 친일파 민씨의 집이었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두 번째 황후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는 황후의 숙부인 경술국적 윤덕영이 주인이었던 벽수산장의 일부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박영효 가옥”은 민영휘의 소실로 풍문 여중고를 설립한 안위풍과 동일은행(옛 조선은행)이사장을 지낸 민대식, 민병수, 민윤식 등 민씨 자녀가 1970년대까지 거주하던 저택중 안채 일부와 문간채로 확인 되었습니다. 또 순정효황후가 나고 자란 곳으로 알려진 윤씨 친가는.. 큰아버지 윤덕영의 측실이 거주했던 곳으로 밝혀졌습니다.
서울시는 두 가옥이 실제로 박영효 가옥과 순정효황후 윤씨의 가옥이 아닌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으며..“박영효 가옥”은..“관훈동 민씨 가옥”으로 ,“윤씨친가”는 “옥인동 윤씨 가옥”으로 각각 바뀌게 됨을 알려 드리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블로그나 카페에 사진 올린 자료가 있으시면 정정해 주시라고 글 올렸습니다
◈ 옥인동 윤씨가옥(玉仁洞尹氏家屋)
-소재지 서울 중구 필동2가 84-1일원
집은 대략 1910년대에 지었다고 알려진 옥인동 47-133번지 가옥을 그대로 본떠서 새로 지었다. 당시 옥인동 47번지 일대 너른 땅은 순종(純宗)의 황후인 순정효황후(1894~1966)의 큰아버지 윤덕영(1873`~1940) 소유였다. 그는 20여 채에 달하는 집을 짓고 일가붙이와 모여 살았는데, 그 가운데 서양식으로 지은 사위집(옥인동 박노수 가옥,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과 윤덕영의 측실이 거처했던 옥인동 47-133번지 가옥만 남아 전한다.
1998년에 남산골 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옥인동 47-133번지 가옥을 옮겨 지으려 시도했으나 부재가 너무 낡고 손상이 심해 신축하였다. 세밀하게 고증하여 지었고, 원래 터가 진 땅의 높낮이 차이까지 일부나마 되살려 본래 분위기를 재현하였다. 매우 규모가 큰‘⨅자형’안채에 사랑채 구실을 하는 마루방과 대문간이 더해져 전체 배치는 ㅁ자형을 이루지만 아무래도 안채를 위주로 짠 공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간소하게 민도리집을 채택하였으나 안채 앞쪽은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머리에 익공(翼工)을 치장하는 등 건축구조와 세부기법은 당시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제기동해풍부원군윤택영재실
(祭基洞 海豊府院君 尹澤榮 齋室)
-종 목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4호
-지 정 일 1977.09.05
-소 재 지 서울 중구 필동2가 84-1일원
조선 순종의 장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지은 집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던 것을 1996년 남산골 공원을 만들면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집 뒤에 있는 사당은 4·19 때 소실된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본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면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형식이다. 평면을 으뜸 원(元)자 모양으로 꾸민 이 집은 제일 위에 사당을 배치하고 본채를 두었으며 본채 앞에는 대문을 두고 그 옆에 행랑채를 두었다.
본채는 부엌·안방·대청·건넌방·누마루 등을 배치하였고 사당은 1칸 집으로 본채보다 두 단 높여 지었다. 원래 사당은 임금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윤덕영이 경운궁을 헐 때, 그 재료들을 이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대체로 살림집 기능보다 제실 분위기에 맞게 지은 한옥이다.
조선조 제27대 순종의 장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 윤황후가 동궁계비에 책봉(1906)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집으로 전한다. 가옥전체의 분위기는 살림집이라기 보다는 제실용도에 걸맞게 되어 있다. 이 가옥의 뒤에 있는 사당은 원래 임금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서 순종의 장인 윤덕영이 임금이 제사하려 올때의 불편을 덜기 위해 경운궁을 헐 때 부재를 이용하여 제실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러
나 사당은 4.19때 소실되었으나 이곳에 이전하면서 복원하였다. 본채는 제실로 사용하던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이다.
건물의 원래 평면은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보이는 으뜸원(元)자 모양으로 제일 위는 사당을 배치하고 다음에 본채를 두었으며 본채 앞에는 대문을 두고 그 옆에 행랑채를 두었다. 사당은 본채보다 두단 높은 곳에 있는데 좌우퇴를 둔 단칸집이다. 몸채는 평면이 부엌, 안방, 대청, 건너방, 누마루의 순으로 배열되었으며 기타 부속되는 방들은 대청을 중앙에 두고 2칸 거리를 두어 나자모양으로 서로 대칭되게 앉아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살림집보다는 제실 용도에 맞게 짜여진 이 집은 동대문구 제기동 224에 있던 것을 1996년 남산골 공원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 관훈동 민씨 가옥(寬勳洞 閔氏 家屋)
-종 목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8호
-지 정 일 1977.03.17
-소 재 지 서울 중구 필동2가 84-1일원
관훈동 30-1상에 위치하고 있는 가옥은 최초 건립시기와 건립자가 불명하나 민영휘가 1895년 안국동으로부터 교동으로 이주하면서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일가를 거주하게 한 가옥 중 하나이다.
민영휘와 그 본처, 입양한 장남 민형식(閔衡植)은 경운동 64번지에, 민영휘의 첩인 해주마마 안유풍(安遺豊) 및 민영휘와 안유풍 사이에서 태어난 민대식(閔大植)은 관훈동 30번지와 1924년 이후 관훈동 198번지의 죽동궁(竹洞宮 : 명성왕후의 오빠 민승호와 조카 민영익이 거주한 곳)에, 민대식의 맏아들인 민병수(閔丙壽)는 관훈동 198에 살다 관훈동 30에, 민대식의 둘째 아들이자 요절한 민천식(閔天植)의 양자인 민병도(閔丙燾)는 경운동 68번지와 71번지에, 민대식과 중국인 나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민병옥(閔丙玉)과 민병완(閔丙琓)은 경운동 66번지에 거주하는 등 민영휘 일가는 경운동과 관훈동 일대 한데 모여 살았다.
1923년 무렵 관훈동 198에 있던 죽동궁을 민영휘가 해주마마에게 매입해 주면서 그 맏아들인 민대식이 죽동궁을 소유하게 되고, 대신 관훈동 30번지를 민영휘의 맏딸로 1922년 이혼하고 본가로 돌아온 민윤식(閔潤植)이 1924년 사들이는 형식을 취하여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으나, 그 조카이자 민대식의 아들들인 민병수 등이 여전히 관훈동 30에 거주하고 있었다. 관훈동 30번지에는 1936년 기준으로 총 6동의 목조와즙과 2층 양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1976년 관훈동 30번지에 있던 가옥 중 일부가 멸실되고 안채 일부와 문간채 등 목조와즙 2동만 남아있었으며, 이 가옥이 1977년 서울시 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이 가옥은 1966년 민윤식이 그 아들인 이홍재(李弘宰)에게 증여하고, 이홍재는 다시 1967년 그 자식들인 이전완·이진승·이문승·이정완·이규승·이사영 등 총 6인에게 상속함으로써 민영휘의 외손들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79년 박승규·이진환·성상호·유대열 등 4인에게 경락되면서 민씨 일가와의 관련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1980년 동북건설주식회사 ⇒ 1983년 유정순(가등기) ⇒ 1983년 조흥은행(가등기) ⇒ 1984년 대왕흥업주식회사(가등기) ⇒ 1986년 경인미술관으로 소유권이 여러 차례 이동하였으며 경인미술관 소유 당시이던 1995~1998년 남산골 한옥마을로 안채 일부와 문간채가 이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삼각동도편수이승업가옥(三角洞 都片手 李承業 家屋)
-종 목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0호
-지 정 일 1977.03.17
-소 재 지 서울 중구 필동2가 84-1일원
조선 후기 경복궁 중건 때 목수의 우두머리 격인 도편수를 맡고 있던 이승업이 지은 집이다. 1860년대에 지었으며 원래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있다. 안채는 ㄱ자형 집으로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이 있고 꺾여서 부엌이 길게 있다. 건넌방은 대청의 오른쪽에 있는데 앞뒤를 갈라 2개의 방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지붕인데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은 모양을 하고 있다. 서로 길이가 다른 지붕면은 서울에서 볼 수 없는 유형이다.
이 가옥은 원래 중구 삼각동 36-2에 있던 것을 1996년 남산골 공원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대문간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헐어서 없고 안채만 남아 있어서 전체적인 모습을 짐작하기 힘들다. 안채는 경기도에서 자주보는 곱은자집 형태로 평면은 정면 4칸, 측면은 5칸인데 간살이는 중앙에 좌우로 긴 2칸 크기의 대청을 두고 그 서쪽 두칸은 안방을 배치하고 있다. 안방앞에는 남북으로 길게 부엌이 놓여지고 대청 동쪽에는 건너방이 있는데 앞뒤를 갈라 2개의 방으로 하였다.
또한 안방의 뒤에는 한칸 크기의 뒷방이 있다. 안방과 부엌 및 뒷방에는 후퇴가 있으며 방 중앙에 기둥을 두어 옛 양식의 일고주오량구조로 하였다. 측면은 평주사량으로 하였기 때문에 지붕이 한족은 길고 한쪽은 짧은 모양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특히 부엌앞 측벽의 박공벽 전돌 처리라든가 서로 길이가 다른 지붕면 등은 서울에서 볼 수 없는 유형이며 부엌앞의 사분합 넌출의 창살문양, 선반 까치발에 새긴 초새김 등은 상당히 정교하고 건너방의 난간 및 대청 뒤의 난간처리가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 가옥은 조선조 말기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경복궁이 중건될 때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였던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 36-2번지에 있던 곳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안채에서 부엌과 안방쪽은 반오량으로 꾸며 전후면의 지붕길이를 다르게 꾸민 것은 특색 있는 구조이다.
◈ 삼청동오위장김춘영가옥(三淸洞 五衛將 金春榮 家屋)
-종 목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8호
-지 정 일 1977.03.17
-소 재 지 서울 중구 필동2가 84-1일원
조선 후기에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에 지은 집이다. 오위(五衛)는 조선시대 중앙 군사조직을 말한다. 지금 건물은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한옥마을로 옮겨 복원한 것으로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대문채와 연이어 돌출되어 있으며 사랑방·대청·건넌방으로 짜여있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으로 서울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건넌방, 왼쪽에 안방·부엌·마루·광을 두었다. 대문에 들어서서 왼쪽에는 문간방이 1칸 있다. 전체적으로 조촐한 양식을 보이는 집으로 안방 뒷쪽 벽을 독특하게 쌓아 집의 격식을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이 가옥은 조선조 말에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이다.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에 있던 것을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 하였다. 판대공을 사용하고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평민주택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안방의 뒤쪽벽, 즉 길가에 면한 부분에 사고석과 전돌을 사용하여 화방멱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첫댓글 광내고 한양가셔서 이쁜 따님과 데이트하셨네여~~~~~~~~~~~~~`ㅎㅎ
일기도 사진도 따님도 여행기록도 모두 예쁘네요.
행복메세지가 도린결에도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8월초에 이사해주고왔었죠 ^^ 더운날 이사 에피소드 만드느라 재미있었겠습니다 행복한가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