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김문택-
한 끼니를 싣고
골목을 빠져나간다
몇 개의 골목이
하루치 목숨을 건질 수 있을까
길바닥에 엎드려
호흡을 가다듬는 폐지들
저들의 수명도
늙은 손아귀에 달려 있다
진통제 한 줌 먹고
밥벌이 나서는 손수레
횡단보도, 인도블럭에 주차한 자동차들 때문에
위태롭다
길 위의 할머니
-풀잎 노을/강희안-
노을은 그대에게 무엇이 되나요
발밑의 풀잎을 느끼는 바람의 정원
낮달 그리메로 남은 산정에 귀 대이면
능선을 가로질러 온 한 점 물초롱새가
피나무 가지에서 제 공명에 떠네요
풀잎은 그대에게 무엇이 되나요
가만 눈을 들고 읽는 구름의 암호
노루귀 수풀에서 낮달과 눈빛 맞대며
서로의 먼 거리에 한 줄기 바람 불 때
노을은 그대에게 무엇이 되나요
-노을 만 평/신용목-
누가 잡아만 준다면
내 숨 통째 담보 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노을 만 평에 꽉 차서 날을 만한 철새
한 무리 사둔 친구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친구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노을 만 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가고 싶네
-노을/김영혜-
맨입으로 먹어야 제맛을 알제
구순이 넘은 외할머니
달그락거리던 틀니를 빼고
합죽합죽, 오물오물, 쪽쪽
홍시를 드신다
애써 오므린 쪼글한 입술 사이에서
가끔씩 검버섯 같은 씨앗이 똑똑 떨어진다
저녁 해, 늘어진 괄약근이 움찔움찔 하더니
터진 홍시처럼 좍 벌어지고
우듬지 까치밥 몇 알 더 붉어진다
-노을을 개키다/박정이-
어둠이 깔려 있는 밤
창문에 내 얼굴을 비벼본다
내 시간의 등에서 퍼져나간
초승달 밭에서 나는,
노을빛 가을국화차 한잔을 들이 마시고
지친 내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생각을 했다
이슥하게 다가서는 노을들
나는 무서울 만큼의 정적 속에서
그걸 차곡차곡 개켜갔으며
잘 포개졌다고 생각했던 노을이
하루의 잘못 포갠 시간들을
조용히 개켜갔다
나는 낮동안 내내 찢긴 춤을 추던 만남을
조용히 개켜 놓았다
이제, 만남을 벗은 달빛의 바람도
지친 하루를
저문 시간에 걸어놓고 있었다.
-마라도 노을/고정국-
오늘 이 해역을 누가 혼자서 떠나는갑다.
연일 흉어에 지친 마지막 투망을 남겨둔 채
섬보다 더 늙은 어부 질긴 심줄이 풀렸는갑다.
이윽고 섬을 가뒀던 수평선 태반 열어 놓고
남단의 어족을 다스린 지느러미를 순순히 펴며
바다는 한 척 폐선을 하늘 길로 띄우나니.
우리가 잔술 내리고 노을 앞에 입을 다물 때
수장水葬을 치러 낸 바다가 무릎께 와 흐느끼고
까맣게 타 버린 섬이 다시 촛대를 일으킨다.
-삽시도의 노을/조경진-
노을, 저것은
세상 뒤안길 걸어가는 노인의 눈빛이다
아니다, 축제 피날레의 함성이다
아니다, 경계를 어우르는 샤먼의 굿판이다
노을 저켠 세상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꺼지지 않는 유적의 숨결처럼
절집 물고기 허공의 외침으로 깨어나는
하루를 허물고 또 짓는 세상
드렁칡으로 얽힌 세상을 끌고 온 노인이
황토 빛 바람을 밟고 천천히 걸어가고
태양이 뻗은 마지막 촉수에 찔린
붉은 양떼를 따라가다
문득 뒤 돌아보니
손바닥 만 한 내 생의 빈 뜰에
‘스피노자’가 사과나무를 심는다
노인이 노을에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는다
다 타버린 해의 실루엣
셔먼의 굿판이 막을 내리면
또 하루가 생의 나이테를 두르고
삽시도는 다시 촛불을 켤 것이다
-새벽노을/정희성-
어제 못다 운 사람이
성산포에 앉아 있나 보다.
따라 울다 못 떠난 사람이
이리 붉은 눈시울로 같이 오나 보다.
세상 사람들 억울한 일 한 가지씩 토해 놓아
성산포 오늘 많이 아프다.
-너무 무거운 노을/김명인-
오늘의 배달은 끝났다
자전거를 방죽 위에 세워놓고 저무는
하늘을 보면
그대를 봉함한 반달 한 장
입에 물고 늙은 우체부처럼
늦기러기 한 줄
노을 속으로 날고 있다
피멍든 사연이라 너무 무거워
구름 언저리에라도 잠시 얹어놓으려는가
채 배달되지 못한
망년(忘年)의, 카드 한 장
-노을 밥상/한보경-
잘 볶은
그의 저녁이 내게로 왔다
지리멸렬한 두통을 매단
아스피린처럼 묽은
진통의 시간이 건너왔다
어둠이 오기까지
밥상 앞에 앉아 마지막 비린 슬픔을 버무렸을
그를 생각했다
비늘처럼 빛나던 것들은
슬픔의 낱장을 켜켜이 숨기고 있다
잘 볶은 지리멸이 입 속에서 바스락거린다
슬픔의 부스러기에서
그가 숨긴 눈물 비린내가 난다
저녁의 먼 뒤편
지리멸렬한 두통을 잘게 썰어 그는 내게 보낼
지리멸을 볶고 있다
마른 그의 눈빛처럼 지리멸은
늘 지리멸렬했고
아린 눈물로 밑간을 한 지리멸렬을 씹으며
생각난 듯, 나는 그를 만난다
마른 슬픔에서 잊었던 물기가 스며나온다
오래도록 나는
붉어진 그의 눈빛을 조리고 있다
비린 눈물이 자즉자즉 잦아든다
저녁 햇살에 널어놓은
지리멸렬들은 꾸들꾸들 말라가고 있다
처서가 지나간다
서른의 치마자락을 들추며
낮은 바람이 된 처서가 지나간다
서른의 서러운 눈빛을 하고
-노을 꽃밭/전 숙-
보건진료소 하얀 벽에 노을 꽃밭이 걸려 있다
사금 든 꽃, 고실라진 꽃, 검버섯 가득 피운 꽃
기역자로 휘어진 꽃들이 이글거린다
언제 찍혔나, 저 꽃밭
들여다보니 구멍이 뻥뻥 뚫려있다
시간의 직업은 구멍 뚫는 일
폐가처럼 꽃들의 옆구리에 구멍이 늘어간다
구멍을 통해 바람 한 줄기 불어나가고
눈물이 방울방울 걸어온다
약과 주사로 시간과 노역의 구멍을 메우고
안마의자의 안마를 받아야 하루를 건너는 꽃들
달달한 차 한 잔씩 나누며 저녁놀이 타오른다
더 이상 잊히지 않으려는
기억의 호미질에서는 캄캄한 목초액만 올라온다
어느새 숯처럼 타버린 시간들
길은 점점 어두워지고 구멍이 아가리를 벌려도
무성한 풋것과 맞닥뜨려 지는 법 없다
푸른 풋것들 노욕이라 꼬집지만
그 노욕이 저녁놀을 저리 뜨겁게 사르는 숯덩이다.
-노을/윤 효-
스러지는 햇빛이 달빛에게 부탁합니다
" 좀더 뜸을 들여 주시게 "
스러지는 달빛이 햇빛에게 부탁합니다
" 그대가 좀더 익혀 주시게 "
이들의 말을 누구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뜨물 같은 세상 오늘도 설익습니다
서녘 하늘이 저녘에 붉게 물드는 까닭입니다
동녘 하늘이 아침에 붉게 물드는 까닭입니다
-노을/조봉익-
느그아부지가 2년만 더 살다 오라 글드라
자식덜헌테 짐 되지 말고
고상도 허지 말고
이태만 더 살다 오라고 허드라
사월의 해질녘 아직 찬데
붉은 운판(雲版)이 울고 있다
썩을 놈의 영감탱이
썩을 놈의 영감탱이
죽는 날을 세어 보는 셈법인 것을
그해 사월의 노을은 알았을 게다
느가부지가 백 판 자빠져 놀기만 헌 줄 알았는디
없응께로 참말로 일 겁나게 했드라
내뱉던 한숨이 선소리였다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만 부화를 한다
-노을/이깅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항구다
네 모습이 붉다
내 모습도 붉다
무수한 생명이 남겨놓은 소리
양면성을 지닌 발자국 소리가 빛의 균열에 순응하면
파르르 오감을 느끼는 노을 속 구멍들
먼 바다를 향해 붉은 깃을 세운다
펄럭거리던 돛, 아득히 밀려드는 섬의 물결
지나간 시간, 어스름의 메아리는
그리움보다 쓰라린 공터의 사색을
즐기겠구나, 검은 울음을
다 토해낸 구멍 많은 어느 당산나무처럼
너와 나의 거리가 멀수록
은밀히 포효하는 형상인가, 끼룩끼룩
기러기 떼 날아올라 우리 자리를 힘차게 다독여도
자꾸만 다른 모습이다
앞뒤가 충만한 황홀함으로
더 깊이 더 가벼운 안식으로
또 다른 계절의 문이 숨을 크게 몰아쉰다
네 모습이 편안하다
내 모습도 편안하다
-몰운대(沒雲臺) 저녁노을/정일근-
몰운대의 저녁을 보지 않고
내게 사랑에 대해 말하지 마라
멀리 태백산 피재에서 시작된
한 방울의 물이 낙동강을 만들어
길고 긴 물길 남해로 돌아갈 때
강의 팔짱을 끼고 부창부수 함께 흘러온
우리 산줄기 낙동정맥(洛東正脈)이
부산 남자처럼 작별을 하는 몰운대
강이 흘리는 이별의 눈물이 뜨거워져
구름이 안개로 부서지며 쓰러지고
산은 마침표처럼 침묵하며 바라볼 뿐인데
웅녀(熊女) 같은 땅의 강과
환웅(桓雄) 같은 하늘의 산이 나누는
아뜩한 별사를 읽지 못하고는, 감히
가벼운 세 치 혀로 사랑 타령은 하지 마라
몰운대 저녁노을이 다대포를 덮을 때
강과 산의 작별을 가슴 치며 바라보다
바다가 먼저 붉게 울어, 하늘의 눈시울이
덩달아 붉어지는 것도 보지 못한다면
사랑 때문에 울어본 적 있었냐고
그런 어둔 눈으로 내게 묻지도 마라
-노을 음계/김진돈-
햇살이 석촌호수에 박혀 있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해거름이었고 호수
모퉁이로 찻집이 몰려온다 산책길이 팔짱을 낀 채 둘레를 돌고 있었다 벤
치엔 할머니가 둥근 길을 한동안 되풀고
회전기구가 석양을 비틀고 있었다 몸을 돌리며 그림자를 지우고 있는
가로등, 햇빛 한 입 물고 있는 새 한 마리 무심히 보고 있었다
시간의 주름 속으로 번져가는 겨울
석양에 스며드는 웅크린 식탁
가지엔 홍시 하나 노을로 앉아 있고
석양 그림자에 짓눌린 방이동 먹자골목, 가난을 빼들고 있는 군고구마
아저씨 등 뒤로 네온사인이 팽팽해진다 모퉁이로 돌 때마다 눈동자가 구
겨진 저녁을 빨아들이고
노을은 펄럭이는 그림자를 탁본하고 있었다 오늘도 스마트폰엔 우리들
의 낯선 문자가 끼어 있었다 헤진 엄지손이 허공에 매달리고 어깨와 어깨
사이로 붉은 입술들이 떨어진다
-노을/전유정-
저 하늘도
하루의 허물을 반성하는가.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크기에
저렇게까지 붉게 타오를 수가 있을까.
크고 작은 봉우리들로
하늘과 맞다은 저 산마저
하루를 정갈하게 하느라
저렇게 붙어서 같이 타오르는가.
그 빛에 물들고자
온 몸을 내맡긴 채 마주 서는가.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