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에게해)/아타톨리아반도의 문명
현재 터키의 역사에 관해서..
터키는 유럽/아시아대륙을 연결하는 교량역활을 하는 천혜의 요충지다.특히 전체국토의 3% 정도 지역이 유럽대륙에 속해있는 발칸반도의 일부인 트라키아반도이며 아시아쪽의 반도는 아나톨리아 반도이다.터키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북쪽으로 흑해,서쪽으로 에게해,남쪽으로 지중해가 있다.터키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 만큼 매우 어려운 일도 없다.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터키의 역사로 다룰 것이냐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난제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아타톨리아 반도에 살고있는 터키인의 모습에서 그 이전에 그 땅을 땀과 피로 일구던 수많은 민족들이 있었고 그들은 서로 서로에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이어왔기 때문이다.즉,그들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가 싶다.흔히 그리스/로마 역사의 장소인 현, 그리스/이탈리아의 유적보다도 터키영토 애게해의 지역에 더 많은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좀 헷갈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나톨리아반도에 지금의 터키를 이루는 종족이 등장한 것은 9세기 경에 동쪽으로부터 별안간 나타낸 셀주크투르크족이 이곳을 점령해 세력을 넓히며 확장한다.6세기 경에 동쪽의 강대했던 돌궐족으로 이들이 한때 당나라를 위협하면서 대치하던 흉노일파 후손으로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주변의 종족과 혼혈 및 교류를 통해서 그 모습이 그 당시 몽골리안이 아닌 유럽인종으로 변모한다.그들 대부분은 이슬람의 교리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개종한다.
훗날 광대했던 오스만제국 시절에는 이슬람세계 칼리프까지 자처했다.어쨌든 유목민족답게 지금도 그 풍습이 남아있고 이들은 목축을 하며 양고기를 즐겨한다.또한 투르크인들의 신생아들은 거의가 몽골반점을 가졌다고 하며 돌궐은 중국식표기, 이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트렌스 유라시아어로 우랄알타이어의 언어이며 그들이 어찌 언어만 갖고 갔겠는가..돌궐을 "흉노의 일파" 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의 푸른 늑대 토템(이리와 관련된 설화)이 있다는 점에서 흉노와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돌궐족은 6세기 경에 알타이산맥 부근 평원에서 생활했는데 보통 몽고와 내몽고,상서성 일대의 유목민족이라 하며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해 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투르크메니스탄 및 터키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특히 현재 터키는 돌궐제국이 수립된 552년을 국가의 출발점인 건국연도로 삼고있다.즉,돌궐-->투르크 -->터키로 변천해 온 것이다.결국 셀주크투르크를 거쳐 13세기경 오스만투르크 제국이라는 걸출한 이슬람국가가 형성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20세기 초까지 7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중동과 유럽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거느린 강대국으로 전성기를 누린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몽골의 후예라고 자처하며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동부유럽.중앙아시아 및 인도의 북부를 장악했던 티무르제국의 중심세력도 아마 투르크족과 몽골의 혼혈로 추정이 되고 있다.한편으로 13세기 티무르의 침입에 의해서 오스만투르크는 거의 괴멸직전까지 갔던 시절도 있었으니 다소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티무르 사후 오스만투르크는 아나톨리아반도를 대부분 장악하면서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반면 중앙아시아의 사마라칸트를 다시는 장악할 수 없었던 티무르의 후손들은 인도북부를 침입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무굴제국을 세운다.아쩌면 이들은 인류사에 있어 몽골과 더불어 대제국을 이룬 민족이면서 이슬람교가 거대한 세계 3대 종교로 확장되는데 기여를 했다.그들이 없었다면 이슬람이 세계종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로마에 의해 기독교가 전세계의 종교가 되었듯이 오스만 및 무굴제국에 의해 이슬람교가 정립된 사실에 역사는 매우 아이러니 하다.만약 이들이 불교를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꿨을지 모른다.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로는 동쪽의 중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및 동북아시아에서 그 꽃을 피웠다.그런데 이런 세계종교를 확장하고 전수한 종족들이 농경민족이 아닌 유목민족들이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있다.
불교는 동쪽 중국변방 오호(흉노.선비.갈.저.강)의 유목민족에 의해 전파발전되어 세계종교로 확립이 되었고 기독교는 게르만의 유목민족에 의해서, 이슬람은 앞서 언급한 돌궐(투르크)족으로 인해 세계종교로 확립이 되었으니 세계 종교역사에서 이들의 역활이 경이롭기만 하다.이점 각설하고 터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Hagia Sophi)은 에게해 일몰을 지켜볼 수 있는 최고/최적의 공간이며 에게해를 통틀어 인간이 창조해낸 문화·문명 의 정수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정교의 대성당으로 537년(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졌다.이후에 오스만이 지배자로 변한 뒤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인류 모두의 기억이자 유산이다.건립이래 무려 1,483년간 현재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소피아 성당은 "성스러운 지혜" 라는 의미로써 그리스어를 기원으로 한 말이다.지혜만이 아니라 크기면에서도 무려 1,000년 가까이 세계최대의 실내건물로써 군림해 왔다.이를테면 1,520년에 이탈리아의 가톨릭이 소피아성당을 의식해서 더 크게 만든 것이 스페인 세비야대성당이다.
실외 건축물로서 1세기 건립이래 19세기초까지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 곳이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이다.검투사가 벌인 죽음의 이벤트와 더불어 황제인 네로가 기독교도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곳이기도 하다.동에서는 신을 찬미하는 성스런 공간이 서에서는 기독교 탄압을 위해서 피비린내 나는 무대가 세계최대 건축물의 역사인 것이다.비잔틴제국은 1,453년 멸망한다.이로써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BC 330년에 수도를 옮겨서 근 천년을 이어오던 제국이 오스만제국의
메호멧 2세에 의해 새로운 주인으로 바뀐다.
이후 이곳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개명된다.비잔틴 제국당시 소피아성당:아야소피아는 바로 이슬람모스크로 재활용된다.오스만은 아야소피아를 모스크용 모델사원으로 지정한다.이란.이라크.시리아와는 달리 정형화된 모스크 모델이 없었던 나라가 오스만이다.곳곳에 세워진 숱한 기존의 그리스정교 성당들이 모스크로 개조된다.우상을 금지하는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성당 내 예수와 마리아,성자에 관한 벽화·모자이크 장식물들도 전부 철거된다.
기존의 대성당에는 없었던 이슬람의 새로운 건축 관련양식도 하나가 더 추가된다.뾰족하게 세워진 첨탑,즉,미나레트(Minaret)이다.첨탑코란(Quran)을 전하는 초대형의 스피커 타워이자 모스크를 지키는 호위무사로서 첨탑이다.보기에 따라서는 기독교 전체의 숨통을 조이는 예리한 창과 칼로 비친다.아야소피아는 1,931년 새롭게 변신한다.공화국 터키가 박물관으로 개장했기 때문이다.기독교나 이슬람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열린.문화.
문명 그리고 역사의 현장으로 바뀐 셈이다.
21세기 아야소피아는 이스탄불을 찾은 관광객의 0순위 방문지로 부상한다.더구나 세계 유네스코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며 종교·인종·민족을 초월한 에게해의 최대명소가 된다.아야소피아에 가본 사람이라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탄성이 터져 나올 것이다.서쪽으로 통하는 입구에서 무려 중앙제단이 놓인 동쪽 끝까지의 거리가 82m에 달한다.폭은 73m 초대형 돔형이 들어선 대규모 지붕까지의 높이도 55m에 달한다.
그러나 강대했던 오스만제국은 1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패망하고 만다.터키는 초대 지도자 케말 파샤가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호멧 2세의 관용에 따라 그리스정교식 건물인 아야소피아를 허물지 않고 모스코로 전환시킨 이후, 근세 터키의 독립 후에 이르기까지 박물관 전용지침을 지켜왔으나 현재 터키는 다시 아야소피아의 모습을 모스크로 다시 전용하였다.박물관이 아니라 모스크로 다시 바꿔서 운영하고 있다.
아야소피아의 모스크 전용은 터키의 현 대통령 에르도안이 주창한 것이다.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동서양의 역사가 교차하는 터키영토의 에게해는 아름다움과 성스로움으로서 자연이 숨쉬는 곳이다.그리스와 이탈리아 때문이겠지만 어느 정도의 세계사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중해보다 인근의 에게해가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질 것으로 본다.비슷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바다가 지중해와 에게해이다.바다 아래와 위 그리고 주변의 환경·역사·문화·문명이 전혀 다르다.
고대의 그리이스.로마.그외 수많은 민족과 문명이 명멸했던 두 바다와 인접한 사항에 관련된 얘기를 해보자면 에게해는 그리스와 터키에 인접한 좁고도 깊은 바다이다.동서의 길이가 612㎞로 지중해의 3,900㎞에 비해 대략 6분의 1크기에 불과하다.고대 그리스가 에게해를 중심으로 고대 로마가 지중해를 배경으로 성장한 점이 너무나 의미심장하다.만약에 로마가 에게해에 인접한 곳에 있었다면..아니 그리스가 지중해를 내려다 보는 지역이었다면 인류의 문화·문명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대리석과 조각상 신전을 봐도 그리스/로마의 지역 어디에서 창조됐는지 간단히 알아낼 수가 있다.두 바다의 차이를 알 수 있다면 두 제국이 창조해낸 문화.문명의 원형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일몰풍경은 에게해와 지중해를 비교할때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부분이다.일출은 서로가 비슷하지만 일몰은 전혀 다르다.험한 산들은 에게해를 이해할 수 있는 첫번째의 단서,급경사 바위산과 바다의 조화는 에게해의 풍경이자 특징이다.깎아지른 절벽의 바로 밑이 푸른 빛의 에게해이다.지중해 주변에 깎아지른 바위산들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 모래나 땅으로 연결된 바다이다.비교하자면 로마의 수도는 7개의 낮은 언덕을 배경으로 한 평지인데 비해 그리스 아테네신전이 집결된 아크로폴리스는 150m의 절벽 바위산에 자리잡고 있다.평지에서 보는 것과 기암절벽에서 경험한 일몰이 전혀 다르다.수평선에 걸린 태양의 색깔은 물론 주변의 분위기와 새들의 울음소리 조차도 다르다.두 바다크기에서 오는 차이겠지만 지중해는 인간의 상상력과 손길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초대형 우주이벤트를 위한 공간이다.에게해 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도록 설계된 숨소리와 땀 냄새도 나눌 수 있는 작은 극장용 무대같은 바다이기도 하다.
"빛에 반사된 바다의 모습" 이 두 바다를 구별하는 분기점 중 하나로 태양과 수평선에 얽힌 풍경도 다르지만 태양의 위용을 받쳐주는 바다의 모습이야말로 확실하게 다르다.너른 문명의 두 바다에서 펼쳐지는 초대형 이벤트 등의 주연은 단연 빛나는 태양이다.바다 전체에 영원한 생명들을 불어넣는 주인이기도 하다.일몰직전의 전체가 빛나는 것은 인간의 감사에 대한 그런 마음을 태양에 전하려는 지중해/에게해의 전체적 몸짓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태양에 화답하는 풍경인 상황.극장용 무대로서의 에게해는 깊고도 은은한 맛을 풍기며 손에 잡히는 공간이다.태양빛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바다의 표면에 드리워진 수 많은 그림자들이 핵심이며 빛이 옆으로부터 비치며 드러난 엷은 흔적이다.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살을 가르고 지나간 뱃길의 일직선 윤곽 바다 위의 흔적이 마치 삶의 궤적같다는 생각이 든다.초대형 여객기가 남긴 넓은 흔적.작은 어선이 만들어낸 좁은 뱃길만이 교차한다.
그러나 해가 수평선으로 넘어가면서 크고 작은 흔적도 전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호화여객선이든 고기 잡이 어선이든 신이 창조해낸 세계는 전부 없음(무)으로 끝난다.흥미로운 것은 바다 위 뱃길의 흔적이 하루 단위로써 전부가 정리된다는 점이다.다음 날 일출과 함께 크고 작은 그림자의 전부가 에게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시 화제를 돌려서 터키에 관해 알아보자.헌법상 공화국인 터키는 정교분리에 철저히 입각한 나라다.60대 이상의 한국인들이라면 한때 이 터키가 한국의 모델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듯 하다.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5·16군사 정변의 주체세력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미래의 모델 중 한명이 터키의 국부인 케말파샤( Kemal Pasha)이다.정교분리 원칙에 입각해서 유럽형의 근대화를 단기간에 시행했던 인물로써 터키인들이 대부분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국부이다.1,931년 아야 소피아의 박물관 전용도 정교분리에 입각하여 케말파샤가 내린 결단의 산물이기도 하다.그런데 현재의 터키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생각이 국부가 내린 결정을 정면으로 바꿨다고 볼 수 있다.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합치를 주장하는 인물이 에르도안이기 때문이다.
세속화한 터키가 아니라 이슬람으로 재무장한 무함마드의 나라로 가자는 발상이다.400만으로 추정되는 시리아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코란에 명기된 이슬람의 형제에 대한 의무에 기초한 것이라 강조한다.현재 터키의 에르도안이 아야소피아 문제를 모스크로 둔갑시킨 것은 아주 간단하다.그가 정치적·경제적 실정을 만회하고 종교를 통해 지지기반을 다지자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라고 유럽언론들은 분석한다.
마치 한국정치에 있어 퇴임하여 물러난 문재인 정권의 상식화된 "이벤트 쇼" 소재로서의 아야 소피아인 셈이다.그러니 역설적으로 이슬람의 아야소피아 문제는 터키만이 아닌 세계 기독교권 전체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그리스정교의 대부격인 그리스 가톨릭권인 유럽과 러시아 정교도는 터키의 모스크 전용에 반대했었다.대다수의 기독교/천주교를 믿는 유럽에서 아야소피아가 갖는 역사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이슬람·기독교 사이의 전체 평화와 화해를 상징한다는 공간이란 점에서 아야소피아의 박물관 유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던 점이다.
이스탄불에 그리이스 정교 바르톨로메오스
(Bartholomew 1세)는 아야소피아 문제와 관련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받는 인물이다.전 세계이 3억신자를 가진 그리스정교 총주교(Ecumenical Patriarch)이다. 로마 바티칸의 교황에 버금가는 위상과 의미를 가진 그리스정교 수장이며 총본부가 그리스가 아닌 이스탄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듯 하다.바티칸이 그러하듯 기독교도라면 그리스정교의 총본부 방문이 종교적 의무이다. 그리스정교 총본부는 오스만이 지배하기 시작한 1453년 이후 터키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스로 옮기거나 정교인구가 대부분인 러시아로 갈 수도 있었지만 과거 속의 콘스탄티노플에 그대로 머물고 있어 언젠가는 콘스탄티노플이 다시 기독교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신념 때문이다.이슬람의 관용이기도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았다.제국 내에 흩어진 수많은 기독교 신자와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서 그리스정교 총본부의 유지를 허락 아야소피아를 기반으로 했던 정교 총본부는 현재 이스탄불 외곽의 주택지로 옮겨갔다.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매우 허름한 공간으로 바티칸에 비해 판잣집 수준으로 보인다.기독교도라면 접하는 순간 비통한 심정이 들 것이다.이교도이슬람의 치하에 얼마나 많은 박해가 있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제단으로 통하는 성당의 중앙문 위에서 교수형에 처해 졌었던 총주교도 있었다.제270대 바르톨로메오스1세 총주교는 아야 소피아의 모스크 전용에 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국가권력에는 어쩔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스정교는 에게해를 통해 성장한 종교다.예수를 한번 만난 적 없는 사도 바울이 바다를 오가며 개척한 종교가 그리스 정교의 원류다.사람들은 흔히 카톨릭과 기독교를 서방의 종교라 칭하는데 실제적으로 그리스정교를 보태야 된다.더구나 터키는 우리처럼 철저히 종교의 자유가 아주 보장된 나라이다.믿는 종교가 이슬람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이슬람 원리에 입각하여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나라이기도 하며 과거 오스만투르크의 시절에 이슬람의 종주국(칼리프)을 자처했던 나라이기도 했다.
22년 3월 16일, 코로나를 극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