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2)—내성천 봉화(2)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9구간 (삼강→상주보) ① * [삼강 ←내성천 봉화]
2021년 11월 18일(목) [별도 답사]▶
내성천 봉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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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미(마을)’ 의성김씨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의 역사와 뿌리가 살아 숨쉬는…
봉화(奉化)는 우리나라 유림(儒林)의 전통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우리말 마을 이름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며, 있는 그대로 살아있는 민속촌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쉽지 않은 산간지역으로, 자연스럽게 전통문화와 선비정신이 잘 보존되어 왔다. 그 중에 ‘바래미’는 매봉산(587m) 남쪽 줄기에 자리 잡은 의성김씨의 집성촌이다. 봉화읍 중심에서 영주 방향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바래미’는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海低里)를 말한다. 바다와 거리가 먼 내륙의 산간 마을을 ‘바다밑’이라니? 동네 앞을 지나는 하천의 물[河上]보다 동네가 낮다는 뜻으로 ‘바다 밑’이라고 하여 ‘바래미’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를 한자어로 바꾸어 해저리(海低里)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봉화 ‘바래미마을’은 영남의 대표적인 동성촌으로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이 가문에서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대에 많은 문과 급제자들을 배출하였고, 당시 영남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 봉화 ‘바래미’의 의성김씨는 안동 임하의 ‘내앞마을’과 일족이지만 세계(世系)가 오래전에 갈라진 성주(星州)의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후예들이다. 조선 중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개암(開岩) 김우굉(金宇宏) 형제가 나란히 대과 급제해 벼슬살이를 마치고 동강은 성주(星州)로, 개암은 상주(尙州)로 낙향하고 개암의 현손(玄孫)인 팔오헌 김성구가 숙종 때 대사성을 마치고 이곳 봉화(奉化)에 와서 문호를 열었다.
☞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의 부친 하강(下岡) 김호림(金頀林)은 바래미 출신으로, 일족인 성주의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종가로 입양을 가서 심산(心山)을 낳았고 그리하여 심산은 동강종가의 주손(冑孫)이다. 특히 심산 김창숙은 3·1운동 직후 국제사회에 독립운동청원을 개진한 ‘파리장서’를 추진한 독립지사이다.
바래미의 ‘의성김씨 개암문중’이 1700년대 바래미 마을에 입향한 이래, 200년 동안 영남 선비의 중앙 진출이 어려웠던 조선 후기에 대과 16장과 진사 19분, 생원 44분의 소과 63장이 나왔다. 가히 그 학문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거에 급제를 하거나 벼슬에 오른 선비들이 많아서 영남일대 유림들과의 교류가 아주 활발했다. 이곳 출신의 김한동·김희주는 승정원 승지와 대사간을 지냈는데 정조의 치세가 좀 더 지속되었더라면 영남 판서·영남 정승이 되었을 인물이다. 정약용과 친교를 나누었고 채제공이 아꼈다.
‘바래미(마을)’은 원래 의령여씨들이 일부 살고 있었는데, 조선 숙종 때 관찰사를 지낸 의성김씨 ‘팔오헌 김성구’가 이 마을로 와서 우물을 만들고 농토를 새로이 개간하면서 마을도 번창하고 의성김씨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었다. 지금도 바래미에는 의성김씨와 타 성씨를 합해 9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전체가 ‘ㅁ’자형 전통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마을 중앙에는 학록서당과 큰 샘이 있고, 아랫마을에는 학이 날아와 앉았다고 하는 학정봉과 감태봉 아래 독립운동가 ‘남호 김뢰식’이 살던 남호구택과 영규헌, 김씨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윗마을 만회고택과 명월루는 3·1 운동 직후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던 곳으로 독립운동 그 중심에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있다.
봉화는 한국유림단 ‘파리장서’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봉화(奉化)는 일명 ‘파리장서(巴里長書) 유림단 독립운동 초안을 작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도 3.1독립운동 당시,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聯署)한 전문 2천674자에 달하는 장서로, 김창숙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도록 하였고 이를 다시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으며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은 체포·투옥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제1차 유림단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파리장서(巴里長書)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주선에 따라 이루어졌다. 심산은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바래미)의 의성김씨 팔오헌 김성구 공의 자손으로 태어난 경북 성주의 동강 김우옹의 양자(養子)로 간 (下岡) 김호림(金頀林)의 아들이다. 3·1만세운동 직후 심산에 의해서 이곳 봉화 바래미 만회고택 사랑방에 이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초안을 작성하여, 유림의 원로 면우 곽종석을 대표로 서명한 파리장서를 김창숙이 짚신으로 엮어 상하이임시정부로 가져가게 되었다.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에서는 다시 이것을 영문(英文)으로 번역하여 한문(漢文) 원본과 같이 3천부씩 인쇄해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했다. 이 파리장서 운동은 1919년 3월 프랑스에서 개최됐던 세계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의 유림대표들이 보낸 장문의 ‘대한독립청원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이고 대단한 사건이었다.
파리장서 (巴里長書)의 내용을 요약하면 — ‘첫째, 세계 모든 나라는 제각기 전통이 있으며, 서로 차별 없는 인류 공동의 길이 있다. 둘째, 모든 사람이나 모든 나라는 그 자체의 운용능력이 있으므로 남이 대신 관리하거나 통치하면 안 된다. 셋째, 한국은 삼천리강토와 2,000만 인구,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고,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는데, 일본은 강제로 국토를 빼앗았다. 넷째,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포악하고 교활한 수법으로 한국을 합병하여 세계 공의(公義)를 어겼다. 다섯째, 이에 유림들은 죽음으로서 세계평화회의에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고, 세계 각국 대표자들의 공정한 판단이 이천만 생명을 살리는 인류 공동의 길을 도모하기 바란다.’ / ‘연서인(聯署人)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
이 파리장서 독립운동은, 특히 봉화지역 유림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고초를 겪였다. 당시의 활동상이 관련 문헌(文獻)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바래미]는 일본 헌병의 혹독한 탄압으로 희생이 많았던 곳이다.
《유림의 독립운동》(최인찬 편저, 산청문화원 발행, 한림인쇄사, 2003.5.)』에 따르면,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선현들은 그 지방에서 명망이 높은 분들이었으므로 그 만세운동에 끼친 영향은 실로 심대하였다. 전국이 만세행렬이 오래도록 치열한 세를 지속한 이유가 바로 이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검거인원이 많았던 성주(星州)와 봉화지방은 왜헌(倭憲)의 혹독한 탄압으로 희생자가 많았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썼다.(92쪽) 이는 바로 노블리스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전형이었다.
둘,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바래미]는 의성김씨 온 가문이 들고 일어난 항일 운동으로, 유곡리[닭실]의 안동권씨와 함께 경북에서 가장 열렬하게 독립운동에 활약하였다.
또 《유림의 독립운동》에서 파리장서 서명자 의성김씨 김순영을 소개하는 글에서 “기미년 3월 파리평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소원(訴願)하는 청원서를 송치함에 있어 공(公)은 59세의 나이로 문중의 연배인 김건영과 함께 집안어른 김창우의 지휘 하에 온 가문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니 봉화의 유곡과 함께 경북에서도 가장 치열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라고 적었다.(168쪽)
셋,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닭실]와 해저리[바래미]는 유림단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특히 파리장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거액의 자금이 이곳 유림의 성금으로 이루어졌다. 또, 《유림의 독립운동》에서 봉화의 서명자 김창우를 소개하는 글에서 “공(公)은 평소부터 김창숙과 동족으로 의리와 교분이 있었으므로 청원서의 서명부터 전적으로 일문(一門)이 논의하여 궐기하였다. 이 때 봉화의 유곡과 내성(봉화의 구 지명)의 해저는 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다. 한때는 왜경에게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으나 시종일관 독립운동에 변함이 없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173쪽)
넷,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의 초안은 봉화 해저리[바래미] 만회고택에서 작성하였다.
《국역 유림독립운동실기(實記)》(유림독립운동실기편찬위원회, 도서출판 대도사, 2001.8.10, 대구)에 따르면, 봉화지역 서명자 권상익(權相翊)을 소개하는 글에서, 권상익은 “1919년 3월에는 면우 곽종석을 비롯한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으로 제출한 파리장서를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만회고택 명월루(明月樓)에서 직접 초안하여 파리 만국 평화회의에 보내는데 앞장섰으며, 1920년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요인 기암 이중엽의 촉탁을 받고 중국 대통령과 제 대신에게 보내는 ‘한국독립청원서’를 직접 집필하는 등 독립운동자금 모금 및 의병활동과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유죄판결을 받고 옥고를 당하였다.” (147쪽)고 기술하고 있다.
다섯, 봉화읍 바래미는 유림단독립운동의 총지휘자인 김창숙 부친의 고향이었기에 그 영향력이 컸다.
또 《국역 유림독립운동실기(實記)》의 서명자 영양출신 의성김씨 김병식을 소개하면서 “1919년 3월 경남 거창의 곽종석, 성주의 장석영, 송준필, 김창숙, 송규선이 중심이 되어 파리 평화회의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보낼 때, 그는 문중과 지방 유림의 대표로 솔선 서명한 유학자에게 거사(擧事)를 알려 동지를 규합, 여러 사람이 함께 서명하게 하였으며 특히 지파(支派)가 세거(世居)하는 봉화의 해저(海底)에서 순영, 건영, 창우 세 사람이 가담하여 함께 서명하여 충절의 문중에 명성을 높혔다.” (151쪽)고 했다.
또 《봉화독립운동사》(김희곤 외 지음, 봉화군 펴냄, 도서출판 성심, 2007.5, 안동)에 따르면, 파리장서에 참가한 봉화인을 소개하는 글에서 “파리장서에 참가하거나 서명한 인물로 봉화인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그 이유는 김창숙과 봉화의 인연이 절대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같은 책에서 이르기를, “그의 부친 하강(下岡) 김호림(金頀林)은 봉화 바래미 출신인데, 성주의 동강 김우옹의 주손(冑孫)으로 양자 들었고, 김창숙은 1879년 성주 사월리에서 문정공 김우옹의 13대 주손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봉화 바래미에는 김창숙의 가까운 친척들이 많이 살았고, 김창숙도 정서적으로 바래미를 고향처럼 여길 만했다.”(191쪽) 그리고 “서울에서 논의를 마치자마자 김창숙은 곽윤과 김황을 스승인 곽종석에게 보내 전말을 보고하고 청원서 준비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앞에서 본 것처럼 3월 15일경 서울로 집합한다는 전제 아래 국내 여러 곳으로 동참자를 확보하기 위해 흩어 졌다. 김창숙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가장 먼저 들어선 순흥에서 족숙 김교림을 방문하고, 이어서 가까운 친척들이 살고 있는 해저마을에 도착했다.”(중략)(193쪽)
여섯,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중 경북 유림이 45명 봉화 유림이 9명이나 서명했다.
그리고 또《봉화독립운동사》에는 “김창숙이 던지고 떠난 물결은 봉화의 바래미와 닭실 두 마을 인사들이 파리장서에 서명자로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에서 137명이 서명한 장서에 닭실의 안동권씨 문중의 5명, 바래미 의성김씨 문중에서 3명이 각각 서명하였으니, 많은 숫자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닭실 출신이면서 대구로 본적을 옮긴 권상문(權相文)까지 포함 한다면 숫자는 늘어난다.” (193쪽)
“김창숙이 먼저 방문한 해저마을부터 보면 김건영(金建永, 1848~1924)․김순영(金順永, 1860~1934)․김창우(金昌禹, 1854~1937) 등 세 사람이다. 다음으로 만난 유곡마을은 권명섭(權命燮, 1885~1960)․ 권병섭(權昺燮, 1885~1959)․ 권상원(權相元, 1861·1937)․ 권상위(權相瑋)․ 권상익(權相翊, 1863~1934) 등 다섯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장서에 서명하기로 약정하고, 그 사실들을 인근으로 확산시키는 활동을 보였다.”라고 기술했다.(193쪽)
일곱, 봉화읍 닭실과 바래미는 ‘유림단 제2차 장서운동’을 추진했다. 1차장서운동으로 인한 무도한 고초(苦楚)를 당하고도 다시 1920년 봉화에서 ‘제2차장 서운동’도 시도되었다. 1920년 11월경 이중업의 발기로 시도된 2차청원은 “이제는 사정을 달리하는 이색인종에게 의뢰하지 말고, … 4천여 년 동안 역사적으로 순치관계를 가진 중화민족에게 우리민족의 원정을 하소연하여 국권회복에 원조를 받자.”고 했다.
이들이 생각한 중국 유력인사는 손문(孫文)과 오패부(吳佩孚)였다. 유림단은, ‘중국 대통령과 중국대신들‘ 앞으로 보낼 청원서 각 1통씩을 봉화 닭실의 권상익(70)이, 중국군벌 오패부 앞으로 보낼 청원서 1통을 칠곡의 장석영이 각각 작성하였다. 이 3통의 청원서를 제출할 유림 대표로 이중업이 결정되었으나, 공교롭게도 그가 출발 직전이던 6월 갑자기 병사함으로써 중지되었다.
권상익이 쓴 두 번째 장서는 중국정부의 각료에게 보내는 것인데, 대개 내용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2차장서 의거는 파리장서 여파로 말미암아 고역을 치렀던 인사들이 결코 의기를 꺾지 않고 다시 청원서를 준비하고 나선 것이다. 거기에 권상익의 역할이 컸다. 당시 권상익(權相翊)이 중국으로 보낼 청원서를 작성한 장소가 바로 닭실의 사동(沙洞) 추원재(追遠齋)였다.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사실 파리장서(巴里長書) 독립운동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년 7월 10일~1962년 5월 10일)이 주도하여 시작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심산은 경상북도 성주의 의성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강 김우옹의 13대종손이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유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선비의 의리(義理)가 늘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다. 부친 김호림(金護林) 공은 공부하는 아들을 불러 농사일을 시키며 사람의 귀천이 따로 있지 않다고 교육시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울분을 토하다가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이완용(李完用) 등 오적(五賊)을 참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그 뒤 일진회(一進會)의 매국도당들이 한일합병론을 제창할 때에 “역적을 치지 않는 사람 또한 역적이다.”라는 격문을 돌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中樞院)과 일간신문에 성토문을 보냈다. 이 사건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성주경찰서에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0년 경술국치, 한일합방을 맞고는 아예 혼이 나가버린 듯 통음을 하며 “선비로서 세상에 산다는 것은 치욕이다.”라며 음주와 미치광이 노릇으로 날을 보내다가 모친의 따뜻한 교훈에 격려되어 4,5년간 두문불출 독서로 유학(儒學)에 정진하였다. 다시 절치부심(切齒腐心) 나라 되찾을 결의를 한다.
그러나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심산은 3월 1일 발표된 선언서에 유교 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보고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 라고 통탄하였다. 심산은 곧 3·1독립선언이 민심을 고무시켜 국내적으로 큰 전기를 마련했으니 이제 필요한 것은 국제적 활동이라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각 종교 대표자들은 곧 구속될 것이니 불행 중 다행으로 남아있는 유교대표가 국제활동의 사명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심산은 전국 유림을 규합하여 파리국제평화회의에 독립청원의 장서[巴里長書]를 제출할 것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국적 유림의 단합을 얻으려 했던 심산은 일반 보수적 유생들의 지역·학통·사색당파·사고의 차이 때문에 단합을 쉽게 이루어 낼 수 없었고,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 등 영남과 충청도 유림 130여명의 연명으로 된 장서(長書)를 작성하여 극비리에 출국 상해를 향하였던 것이다.
상해에서 독립 운동 동지들과 의논 끝에 독립청원서를 영역(英譯)하여 이미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金奎植)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하였다. 또한 이 장서를 수천 부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언론계, 여러 외국의 대사·공사·영사관 그리고 해외 각처 교포들의 거류지와 국내 각 지방 향교에 빠짐없이 우송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日帝)는 곧 국내 유림에 대한 일대 검거를 자행, 500여명이나 체포되는 대옥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소위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그것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유림의 참여라는 소극적 의의를 넘어 국내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민족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큰 것이었던바, 바로 심산의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1925년 봄,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과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강구하던 심산은 일본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실력을 배양하고 무력으로 일제와 싸우기로 하였다. 이에 심산은 군자금(20만원) 모금활동을 벌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행동대원을 전국 각지로 파견한 심산은 직접 영남지방으로 뛰어들어 동분서주하였다. 심산의 국내잠입 모금활동 사실이 탄로되어 유림의 피검자가 6백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2차 유림단 사건’이었다.
그는 일제의 고문과 옥중생활에서 중병을 얻어서 불구의 몸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벽옹(躄翁-앉은뱅이)’이라고 부르자 스스로도 이를 별호로 썼다. 그러나 불굴의 저항정신은 전혀 위축되지 않아서 가출옥의 감시 상태에서도 심산의 투쟁은 부단히 계속되었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끝까지 거부한 심산은 대구, 울산의 백양사(白楊寺) 등지에서 요양을 하면서 한용운(韓龍雲)·홍명희(洪命憙)·정인보(鄭寅普) 등 민족적 양심을 지켜온 분들과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으며 뜻을 함께 하였다.
거창(居昌)의 대유,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조선 한말 대표적 유학자, 파리장서의 유림대표
곽종석(郭鍾錫, 1846(헌종 12~1919)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토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명원(鳴遠), 호가 면우(俛宇)이며. 아버지는 원조(源兆)이다.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은 물론 도가와 불가의 경전을 섭렵한 뒤, 주자학 공부에 전념하여 20대 초반에 이미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25세 때 퇴계의 학통을 이은 대유학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 되어, 퇴계 이황의 주리론을 계승하면서 경상우도 남명 조식의 학문을 받아들여 나름의 심즉리설, 명덕주리설 등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했다. ―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각지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각국 공관에 열국의 각축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며, 조약체결에 참여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1910년(융희 4) 일제에 합병이 되자 비분함을 달래지 못하고 경남 거창(居昌)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뒤 영남과 호서 유생들의 연서를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호소문을 작성하여 김창숙(金昌淑)을 통해 상해를 경유하여 발송케 했다.(파리장서사건) 이로 말미암아 대구에서 재판을 받고 2년형의 옥고를 겪던 중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내 사망했다. 저서로 〈면우집〉이 있으며, 죽은 뒤 단성 이동서당, 거창 다천서당, 곡성 산앙재 등이 그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거창 곽종석 · 홍성 김복한 · 봉화 김창숙
매서운 선비정신과 강개한 절조
파리장서 유림대표 주역 삼인(三人)의 강개(慷慨)함이 가슴을 울린다. — 일제의 재판정에서 2년형을 받고나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은 “나는 살아서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여기에 왔다. 왜 종신징역을 선고하지 않고 하필 2년이냐? 내가 공소할 곳은 하늘밖에 없다.”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하체를 쓰지 못한 의성김씨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선생은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그리고 일제의 고문을 받아 거의 앉은뱅이가 되다시피 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은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에 있는가!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혁명에 불타는 마음은 움직이지 아니 하였다.”고 비장한 사자후를 토했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파리장서(巴里長書) 독립운동을 ‘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가전국 곳곳에 세워져있다. ‘파리장서비’는 1972년 10월 서울 장충단공원에 최초로 세워졌고, 이후 1977년 면우 곽종석이 주석한 경남 거창에, 1997년 대구 월곡역사공원에, 2007년 12월에는 경남 합천 일해공원에 합천출신 서명자 11인을 기려 세워졌고, 2009년 6월 전북 정읍의 정읍사공원에, 2014년 8월에 경북 봉화읍 해저리 송록서원 앞 잔디광장에, 2017년 3월 경남 김해시 내외동 연지공원에 김해 출신 서명인 4인을 기려 세워졌다. 이렇게 1973년도부터 현재까지 전국 7곳에 각각 ‘파리장서비’가 건립되었다.
바래미의 의성김씨 고택
봉화읍 해저리[바래미]에는 유서 깊은 고택들이 많다. 문화재자료 제18호인 남호구택은 1876년에 건립되어 남호(南湖) 김뢰식(金賚植)이 살던 곳으로, 경상도의 아주 명망 높은 부호였던 남호 선생이 상하이임시정부에서 군자금을 모금할 때 전 재산을 저당 잡히고 대부받은 돈을 내놓아서 그 공으로 지난 1977년에 건국공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또, 기념물 제117호인 ‘김건영가옥’은 구한말 독립운동가 해관 김건영이 지은 집으로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할 때 이곳 사랑채가 지역 유림들의 연명장소로 이용되었던 아주 곳이다. 김규영의 문과홍패와 김건영의 소수(疏首)의 망첩 등의 전적이 보관되어 있다.
그 밖에도 단사 김경온이 영조 원년에 진사를 하고난 뒤 지어서 은거를 하며 만권의 책을 읽었다는 ‘단사정’이나, 남호 김뢰식이 세워서 국명저와 중국 고대, 당송대의 중국본 서적이 보관되어 있는 ‘영규헌’, ‘병자각’, ‘수오당’, ‘개암종택’, ‘팔오헌종택’, ‘해와고택’ 등 선조들의 숨결이 고스라니 스며있는 수많은 고택과 유적이 남아 있었다.
봉화 바래미[海低里]는 을미년 안동의진 거병비로 학봉(鶴峯) 김성일의 검제마을, 그리고 석주(石洲) 이상룡의 임청각과 함께 각각 오백 냥을 냈다. 그리고 바래미는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독립운동가의 본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의 매서운 혼(魂)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의성김씨의 의기(義氣)와 충렬(忠烈)은 일제시대까지 이어져 독립유공 수훈자 14분이 나왔으니 이것이 바래미의 선비정신이 아닐 수 없다.
개암종택
개암종택은 의성김씨 개암공파(開岩公派)의 종가(宗家)로 바래미 고택 가운데 관리상태가 가장 좋다. 개암(開岩)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동생인 김우굉(金宇宏)의 호이다. 바래미 마을 동쪽 끝 산자락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집 앞에는 우물과 수백 년 된 소나무가 세월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해저리 바래미는 영남의 대표적인 동성촌으로 조선 정조 때 수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고 이 시기 영남 사림들의 정치·사회적인 활동에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1·2차 유림단 사건으로 불리는 항일독립운동에 의성김씨 김창우가 주도적으로 활약하였으며 후에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러한 독립운동이 주로 이 개암종가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만회고택
만회고택은 조선 순조 때의 문신인 만회(晩悔) 김건수(金建銖, 1790~1854)가 살던 집이다. 바래미 윗마을 오른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숲이 우거진 뒷산을 배경으로 남향이다. 김건수(金建銖)는 자가 공립이고 호가 만회(晩悔)이며 본관은 의성이다. 순조 30년(1830) 문과에급제하여 김해부사 및 승정원 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이 고택은 ‘ㄇ’자형 안채와 ‘T’자형 사랑채가 어우러져, 전체가 ‘□’자형의 구성을 하고 있다. 안채는 만회의 6대조가 입향하면서 이곳에 살던 여씨로부터 매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는 만회가 직접 건립하였다. 특히 경상도 북부지방의 □자형 구성의 고건축의 평면 배치법 등 조선시대 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 169호인 윗마을 만회고택은 조선 말기에 승정원 부승지를 지낸 만회 김건수 선생이 살았던 곳으로, 그 전 6대조부터 살아서 300년이 넘은 집이다.
‘만회고택’은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직후 유림들이 심산 김창숙을 중심으로 이곳에 모여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리고 1925년에 유림단 독립운동 자금 모금시에는 영남북부지방 유림들이 모여서 의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팔오헌종택
팔오헌종택(八吾軒宗宅)의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5칸 그리고 사당 정면은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상도 북부지역 사대부가의 거주생활을 살펴보는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가옥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터전이 되기고 한 이 집은 전통목조 수법에 의해 건축되었다.
팔오헌종택(八吾軒宗宅)은 바래미 입향조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1641~1707)가 창건하고 그 후손들이 조선시대 후반기에 현재의 건물로 중창하였다. 팔오헌(八吾軒)은 조선 헌종 3년 사마시에 장원, 헌종 10년에 명경과 갑과로 급제하여 현감, 수원부사, 지평, 수찬, 여주목사, 부승지, 정언, 강원동관찰사, 성균관대사성 등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다. 위민복리에 중점을 둔 팔오헌(八吾軒)의 사상과 철학은 참다운 목민관의 귀감이 되었고, 후세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숙종 조에서 ‘청백리(淸白吏)’로 추천되었다.
낙향 후, 팔오헌(八吾軒)은 자손들이 만대를 살아갈 터를 이곳 바래미로 정하고 ‘학록서당(鶴麓書堂)’을 세워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그 면학분위기가 대대로 이어져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팔오헌 김성구는 불천위로 봉해졌고, ‘봉화 10현’을 모시는 ‘송록서원(松麓書院)’에 배향되었다.
토향종택
토향고택(土香古宅)은 의성김씨 선조가 바래미에 입향한 이래, 11대째 후손들이 대대로 태어나 살아온 곳으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명품고택이다.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1524~1590)의 현손이자 봉화 바래미마을 의성김씨 입향조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1641~1707)의 넷째 아들 김여병(金汝鈵)을 11대조로 모시고 있으며, 다섯 칸 규모의 솟을 대문과 사방 일곱 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전형적인 영남 사대부가의 ‘□’자형 가옥이다. 안채는 입향하기 전에 지어진 건물로 400여년이나 되었다.
뒷산의 소나무를 병풍 삼아 자리한 토향고택의 안채는 김성구 선생이 입향하기 전에 지어진 건물로 350여 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사랑채는 1876년 숭혜전 참봉ㆍ통훈대부를 지내고 현 봉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조양학교(1909년)를 설립한 암운(巖雲) 김인식(金仁植, 1855~1910)이 중수하였다.
‘토향(土香)’은 김인식의 손자 김중욱(金重旭, 1924~1967)의 호이다. 김중욱은 일제 때 징집되어 만주에서 행군 도중 탈출하여, 중국 쑤저우(蘇州)ㆍ항저우(杭州) 등지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 해방 후 귀국했으며, 이후 중앙고보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제기획원 예산담당관을 지냈다. ― 토향고택 현판은 일찍이 작고한 선친을 기리기 위해 아들 김종구가 직접 써서 새긴 것이다. 또한, 토향고택의주인 김종구는 대대로 고택에 내려오던 많은 책자와 자료들은 역사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국가에 기증하여, 현재 과천정부청사의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다.
김중욱의 한글가사 〈춘풍감회록〉
일제의 강제징용 중 탈출하여 항일운동을 벌인
“갑신년(甲申年) 츄칠월(秋七月)에 남에 쌈에 칼을 빼여 부모(父母) 쳐자(妻子) 생별(生別)고 영문(營門)을 차져 드러 순일(十日)을 지난 후(後)에 평양셩 떠나가니 …”
〈춘풍감회록〉이란 가사집의 첫머리이다. 이 가사는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백두현 교수가 최초로 발견하여, 2006년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퇴계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영남학》 9호에 게재하여 소개한 작품이다. '갑신년 츄칠월' 즉, 1944년 9월 일제에 의한 강제 징병 제1기에 징발되어 부모와 처자식을 두고 떠나는 아픔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평양에 있는 일본군 군영에 머물다가 열흘이 지난 뒤 평양을 떠난다고 쓰였다.
이 〈춘풍감회록〉은 ‘김중욱’이 쓴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징용되어 중국의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고, 전투 중 일군(日軍)을 탈출한 뒤 중국군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해방을 맞이한 인물로 보인다. 해방 후 귀국하여 그간의 소회를 한글가사로 지어 읊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글쓴이 김중욱은 이렇게 전투에 참여하다 탈출하여 무덤에 숨어 있다가 중국군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다. 그 뒤 중국군 장교가 되어 선무조(宣撫組, 지방이나 점령지의 주민에게 정부 또는 본국의 뜻을 권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을유년 팔월 보름에 일본이 항복한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김중욱은 한 시라도 바삐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등불을 다시 발켜 파연의 먹을 가러 심즁 소회 그려 내여 우리 부모 게신 곳애 나의 임이 잇는 곳애 하로 밧비 보내고져 *촌개야 어셔 우러 지구를 빨니 돌여 날이 새게 하려무나 ···· 셔해에 배를 모니 ····· 한라산 놉흔 봉이 듕쳔에 웃둑 솟고 대소 어션이 다도해를 왕래하니 ···· 장부 소회 다 못하니 오호의히라 황해 바다 건너 와셔 내 여기 소리친다.”
여기서 '촌개야 어서 울러 지구를 빨리 돌려 날이 새게 하려무나'라고 하는 표현에서 김중욱의 기쁨과 기다림을 읽을 수 있다. 또 '서해로 나아가니 한라산이 보이고 다도해가 보였다. 장부 소회를 다 못 적고 황해를 건너와 내 여기서 소리친다'고 끝을 맺었다.
김중욱은 〈춘풍감회록〉 말미에 “이 노래를 고 이수호, 고 김춘섭 두 영전에 고하며 동시에 우리를 보호하여 주었던 중국군 장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여기에서 언급한 ‘이수호’와 ‘김춘섭’은 강제징병된 조선청년으로 그와 함께 일본군을 탈출한 동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광복 후 살아서 돌아온 김중욱과는 달리, 결국 이역만리 타국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까닭으로 김중욱은 함께 돌아오지 못한 그들을 이 작품을 통해 기억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춘풍감회록〉은 일제강점기 말 약 1년간 강제징병에 의해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청년 김중욱의 시련과 고난을 사실적으로 그린 기록문학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강제징병 관련 기록문학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징병당사자가 직접 남긴 한글가사 작품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일제강점기 식민지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근현대 기록문화유산 자료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남호구택(南湖舊宅)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남호고택은 1876년에 의성김씨 농산(聾山) 김난영(金蘭永)이 조선 고종 13년(1876)에 지었고 아들인 남호(南湖) 김뢰식(金賚植, 1877~1935)이 살던 집이다. 고택(古宅)이 아니라 구택(舊宅)이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다. 고택은 그저 오래된 집을 뜻하고, 구택은 대대로 그 집을 비우지 않고 사람이 기거한 집을 뜻한다. 남호구택은 건립 이후 계속하여 후손들이 거주하여 구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응방산 줄기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집은,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간체를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가 접하여 ‘□’자형을 이루고 있다. 정명 중앙부분에는 튀어나온 ‘도장방’이 있어 특이한 구성을 보이는데, 이 마을에는 이 같은 유형의 집이 몇 채 남아있다. 이곳에는 사랑채에서 사용되는 여러 기물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한다. 전체적인 집의 구성이 요철과 음양의 조화를 염두에 둔 구성과 배치로 균제미가 있어서, 단순하고 정제됐을 뿐 아니라 아기자기하고 실용적인 멋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 남호 김뢰식이 자신의 할아버지 노원 김철수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별채 영규헌은 집과 붙어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건축되었는데, 개인 서실 겸 마을 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경상도 봉화에 명망 높은 부호였던 김뢰식은 자신의 전 재산을 저당 잡힌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내놓은 공로로 1977년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당당한 모습으로 두 눈 가득 들어온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사회지도층이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존경할 만한 부자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자기 자신보다 대의를 먼저 생각했던 부자는 분명 존재한다. 지금은 노원 김철수의 5대손인 김호철 공과 그의 부인 김필영 여사가 집을 지키며 손님을 맞는다.
바래미마을 독립운동기념비
바래미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석판에는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바래미 출신 열네 분 지사(志士)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안동의 ‘내앞마을’, ‘하계마을’, ‘임청각’, ‘부포’, ‘무섬’, ‘하회’ 등과 더불어 한마을에서 10명 이상 우국지사(憂國之士)를 배출한 독립운동 성지 같은 곳이다. 전 재산을 상하이 임정의 군자금으로 낸 인물이 있고, 두 차례 유림단 의거(義擧)에 모두 적극 참여해 마을 전체가 일제 감시 대상이 됐다. 누군들 배움이 없고 뜻이 없었겠는가마는 나라 잃었던 시절에 내 한 몸 던진 선비의 기개는 청사에 빛나는 정신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바래미는 선비의 도(道)를 다한 자랑스러운 반촌이다. …♣ [계속] ☞ 내성천 봉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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