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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춘양면소로1리(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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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60~80년대 다방의 추억
실천747 추천 0 조회 79 12.11.13 00: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곳은 거리의 응접실이었다. 만인의 사무실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다. 한편으론 문학과 예술을 불태운 아지트였고 맞선과 데이트의 중심이었다. 나이 든 어른들의 사랑방이자 대학생의 공부방, 직장인의 휴게실이기도 했다. 실업자의 연락처였고 회사 없는 ‘사장님’의 둥지였다. 의자 깊숙이 들어앉아 조용히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담소하는 여유도 있었다.

 

 

 

전국민의 아지트 '다방'

 

그곳은 다방이다. 커피숍이나 카페와 어감은 물론 질도 전혀 다른, 말 그대로의 다방.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이 한국적 명물을 두고 어느 외국인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선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 허구한 날 사람들이 모여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진지한 토론을 한다. 거기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수시로 들락거리고 화제도 무궁무진하다.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새 참석자가 올 때마다 또 새 뉴스, 새 토론이 시작된다."


그렇게 거창한 토를 달아도 되는지 의문이나 사실 오랫동안 다방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었다. 거리엔 '한집 건너 하나' 꼴로 다방이 있었고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셔야 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중년의 느끼한 남성이 약간 코 먹은 목소리로 "0마담∼ 홍콩에서 배만 들어오면 말이야∼" 운운하며 다방 마담을 꼬드기는 농담마저 전국적으로 유행할 정도였다. 그만큼 다방의 마담이나 레지는 서민과 항상 마주하는, 친숙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직장이나 거래처, 교류 범위, 대화 상대에 따라 다방을 골라 다녔다. 동선에 따라 지역별로 몇 개의 단골다방을 두기도 했다. 1980년대 말, 서울에는 무려 1만 1천 개의 다방이 있었다. 낮에는 다방, 밤엔 술을 파는 이른바 '주다야싸'도 많았지만 인구 1천 명당 한  곳 꼴로 다방이 있었던 셈이다. 차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을 죽치던 손님을 쫓아낸 '인정머리 없는 다방' 고발기사를 쓸 정도로 언론도 다방과 주변 일에 민감했다. 서민경제를 얘기할 때도 다방 동향은 빠지지 않았다.

 

 

 

모닝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1970년대엔 신문사에서도 기자들이 다방에 가 아침커피 한 잔을 하고 와서야 일을 시작하는 관습이 있었다. 부장급 편집간부들이 회의를 하는 사이 내근기자들은 우르르 근처 다방으로 몰려갔다. 그리곤 너나없이 '모닝'을 시켰다. 모닝커피의 줄임말인 모닝은 설탕과 크림을 다 넣은 커피에다 계란 노른자를 하나 떨어트린 것. 어느 다방은 거기에다 참기름까지 한두 방울 친 국적불명의 모닝을 냈고 반숙이나 프라이를 서비스하기도 했다.


기자들 중 전날 술이 과했던 사람은 '위티'나 '하이볼'을 주문했다. 위티는 말 그대로 위스키+티, 하이볼은 위스키+소다수 음료다.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다시피 하는 신문사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다방 마담은 위스키는 더블로, 모닝에는 계란 노른자를 두 개 넣어주기도 했다. 아침을 걸렀거나 속이 편치 않은 이에겐 충분한 해장거리가 되었다. 마담은 그렇게 생색을 내면서 자기 몫의 음료도 얹어 시켜 손님이 계산하게 하는 상혼을 발휘했다.

 

3, 40분에 불과한 티타임인데도 화제는 무궁무진했다. 진행 중인 사건이 주로 화제에 올랐지만 회사 높은 사람들의 기류나 길흉사, 아이들 교육문제에 총각들의 결혼 고민까지 정말 다양한 논제가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됐다. 담배연기는 언제나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얘기가 재미있다 싶으면 마담과 ‘레지’ ‘카운터’까지 둘러서서 귀를 곧추세우곤 했다. 광화문 근처 다방에는 그런 기자들의 단골다방이 몇 군데 있었다.


얘기꽃을 한창 피우다가도 누군가 "부장회의 끝났겠다!"고 외치면 금세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정해진 순번에 따라 찻값을 내게 돼 있지만 대부분 "그어 놔" 한마디만 던지기 일쑤였다. 외상으로 하자는 얘기. 마담은 대충 그냥 넘어가지만 어떤 때는 막무가내 현금결제를 요구했다. 실랑이가 벌어지고 손님은 주머니 사정이 궁한 이유를 설명하고…. 집의 부인에겐 말 않던 속사정도 다방 마담에겐 솔직히 털어놓는 일이 적잖았다.


직업 중에서도 제일 바쁘다는 기자들의 다방출입이 그 정도였으니 보통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번 다방에 들어가면 서너 시간 앉아 지내는 것은 예사요 마담이나 레지와 차를 더 시켜야 하네, 아니네, 싸움도 적잖게 일어났다. 변두리 다방에선 동네 어르신이 들어오면 레지들이 어깨를 풀어준다, 팔다리를 주무른다고 난리를 쳤고 소문을 듣고 뛰어온 할머니가 마담과 대판 싸우는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다방에서의 에티켓을 알리는 몸가짐 백과까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다방업은 붐을 맞았다. 제대로 된 건물도 별반 남아있지 않던 시절, 명동에 돌아와 둥지를 튼 모나리자 다방은 갈 곳 없는 문인과 예술가들의 고향 같은 안식처였다고 한다. 71년 경향신문은 "요즘 다방은 인정보다 상혼이 앞선다."고 개탄하며 예전의 훈훈하고 아늑한 다방의 실례로 모나리자를 들었다. "다방 정면에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걸려있었고 마담은 항상 웃음 띤 얼굴로 분위기를 훈훈히 해주었고 조용한 음악이 6.25의 상처를 달랬다."


그런데 그 웃음 띤 마담이 다방을 그만두고 시집을 가게 됐던 모양이다. 그러자 단골손님들은 "모나리자도 시집간다."면서 아쉬움을 달랬다는 기사를 실었다. 또 명동 동방살롱 주인은 "아래층 다방 위에 문인들을 위한 집필실도 따로 마련해주고 한강 밤섬에서 카니발도 열어주는 등 요즘 상인과는 달리 인간미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도대체 당시 다방은 어쨌기에 신문이 그처럼 옛 다방의 정과 운치를 못 잊어하는 걸까.


 

"앉기가 무섭게 차를 주문하거나 서넛이 가서 한사람이라도 차를 안마시면 불도그처럼 눈을 뜨고 욕설까지 할 정도"로 당시의 다방은 각박해졌다고 신문들은 개탄했다. ‘시장 바닥처럼 시끄럽고' '브로커들은 탈세의 한 방편으로 다방을 이용하며' '대형화 기업화'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전화 있는 다방에 손님이 몰려 "사장님, 전화요" 하면 대여섯 명이 고개를 일제히 돌릴 정도니 '가난한 주제에 사장 좋아하는 허세'를 부린다고 꼬집기도 했다.


다방 경영이 기업화함에 따라 소위 '가오마담'이 다방의 꽃으로 손님을 끈다는 것도 뉴스였다. "중년층 샐러리맨이 많이 몰리는 다방마담은 한복차림으로 홀을 누비고, 젊은 대학생을 상대하는 다방에서는 젊은이에 맞먹는 발랄한 아가씨를 내세워" 핫팬츠가 유행하면 레지들에게도 그 옷을 입힌다는 것. 또 명동의 다방경영 원칙은 "보통 30세 내외의 마담 1명, 친절하고 예쁜 20세 내외의 레지 2명과 나머지 1명은 우악스런 아가씨를 끼어놓는다"고 했다. '우악스런 아가씨'가 왜 필요했는지 궁금해진다.


도시인이라면 다방 출입을 않고 살기 힘들다는 것이 당시엔 정설로 돼 있었다. 67년 매일경제는 '다방서의 에티켓'이란 '몸가짐 백과' 기사를 썼다. 거기서는 "차를 얼른 가져오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지르는 것과 옆의 박스에 있는 다른 사람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은 남의 응접실을 넘겨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자신을 천하게 보일 따름"이라고 충고했다. "다방에 너무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은 마담이나 레지의 눈총을 받게 되지만 차 주문을 너무 서둘러도 촌스럽게 보인다는 것"도 친절히 설명했다.

 

 

 

'꽁피 사건'에 커피 애호가 분노

 


에티켓까지 숙지해야 할 정도로 시민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만큼 다방은 된서리도 적지 않게 받았다. 61년 5.16쿠데타 직후인 5월 29일 전국 다방은 일제히 "오늘부터 커피를 팔지 않습니다."란 게시문을 내걸었다. 외래품 근절을 위한 자발적 움직임처럼 보도됐지만 사실 정부의 강압적 조치였다. 전량을 외국서 수입하거나 미군부대 PX를 통해 불법 유통되는 커피를 아예 뿌리 뽑자는 군부의 조치였던 것이다.


9월부터는 커피 홍차 코코아 레몬주스 등 외래품 일체와 국산과의 혼용도 판금 됐다. 단골들에게만 몰래 커피를 팔던 다방주인들이 치안재판에 회부된다는 등 당국의 위협에 손들고 문을 닫는 곳이 속출했다. 커피 등 외래품 단속은 60년대 내내 지속돼 업자들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포켓 속의 전용다방’이란 광고문과 함께 등장한 00커피 캬라멜이다. 맛이 외국산과 거의 비슷하다는 '인조 커피' 광고도 신문에 심심치 않게 실렸다. 다방에선 커피 대신 콩을 볶은 '콩피'를 내놓기도 했다.

 

70년대에 들어선 담배꽁초를 섞어 커피를 끓였다는 '꽁피 사건'이 커피 애호가들을 화나게 했다. 미제 커피 찌꺼기에다 톱밥과 콩가루 계란껍질을 섞어 만든 가짜커피 사범도 잇달아 적발됐다. 이런 판에 커피 수입이 자유화됐고 70년대 후반에는 커피 자판기도 등장했다. 집이나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맛있고 질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됐다. 거기다 오디오의 빠른 보급은 음악을 들으러 다방에 간다는 핑계마저 앗아갔다. 사람들은 터진 공간에 쭈그려 앉아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차를 홀짝이기보다 저만의 오붓한 공간에 들어앉아 쉬기를 바라는 족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은 다방

 

다방은 80년대 이후 급격히 침몰했다. 술집이나 서구식 커피숍으로의 업종전환이 빠르게 이어졌고 일부는 매춘을 겸한 티켓 다방으로 변질돼갔다.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사람들도 빠르게 밝고 깨끗한 사무실로 만남의 공간을 이동시켰다. 때로는 면도도 하지 않고 물들인 군용 점퍼를 입고 컴컴한 다방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문청들도 어쩐 일인지 다방문화의 쇠퇴와 함께 사라졌다.


45년 해방 무렵 서울엔 60개 정도 다방이 있었고 50년대 말엔 그것이 1천2백 개소였다. 63년엔 8백 개소로 줄었다 71년 1천4백, 72년 3천, 80년 4천, 87년 9천, 89년 1만1천 개소까지 크게 늘었다. 80년대의 놀라운 숫자 팽창은 사실은 '주간다방 야간살롱(주다야싸)' 술집이 대종을 이룬 것이었으며 원래적 의미의 다방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6780 다방은 지금 거의 골동품 수준으로 몇 곳만 살아남아 추억의 손님들과 함께 과거의 영광을 되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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