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리를 비롯한 대호지면 일대에는 남이흥의 후손들이 많이 살며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충의사에서는 지금도 후손들이 매년 ‘남이흥장군문화재’를 하고 있는데요. 대호지·천의장터 4·4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책을 기획·편집한 남기천 기념사업회장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남기천 기념사업회장은 2019년에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애국 선열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해요. 이에 대호지·천의장터 4·4만세운동 기념 유적과, 학생백일장 우수작품을 함께 엮어 모음집을 함께 발간했다고 합니다. 이를통해 우리고장 선열들의 의연하고 굽히지 않는 힘찬 애국정신이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하네요.
대호지 역사 현장속으로 찾아가 직접 이야기를 전해주는 남미연 상무와 함께 충장사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남이흥 충장공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충장공 노모 정경부인 류씨 음언 어록도 있네요. 충장사는 조선시대 선조, 인조 때 목민관과 무장으로 활약하다 생을 마감한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636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남이흥 장군은 부모부터 고조부까지 4대를 봉사하던 조선시대 관례와 달리 충신으로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도록 조정에서 조치하였는데 이를 불천위제사라고 한다고 하네요. 해마다 음력 정월에 순절한 남이흥 장군과 7월에 사망한 아내 하동 정씨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데, 현종 6년(1667)부터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충장사는 조선 중기 충절의 상징인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왕명에 의하여 건립된 사당인데요. 남장군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인조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충장사에서는 매년 10월 남이흥 장군의 호국정신과 애국애족 정신을 후세에 널리 전파하고 고유 민속 문화를 보급⸱확산시키고자 남이흥 장군 문화제가 열리고 있는데요. 주요 행사로는 남이흥 장군 행렬 재현, 민족마상무예⸱택견⸱24반무예 시현, 취타대 공연과 궁도대회가 있습니다.
왼편으로 보이는 남이흥 장군의 후대가 살고 있는 정감있는 기와지붕집 옆으로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어요. 가을의 끝자락을 알리는 국화꽃이 노란미소를 건네며 인사를 하는것만 같습니다. 나뭇가지만 앙상한 배롱나무와 구름에 빼꼼히 햇살을 비추는 날씨가 매력적인 늦가을의 정취를 더하네요.
충장사에 오르다보면 오른쪽으로 남씨양세충신정려가 보입니다. 정려란 조선시대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렸는데요.
남이흥의 정려는 1627년(인조5)에 명정 받아 1636년에 건립된 것입니다. 정려각 뒤로 펼쳐져 있는 배롱나무의 수형이 인상적인데요. 봄에 꽃이 피면 장관일듯 합니다.
남씨양세충신정려각은 정면 2칸, 측면1칸의 우진각 지붕 건물로 되어 있어요. 처마 밑에는 '남씨양세충신정려'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의 북쪽 벽에는 남유, 남이흥 장군의 명정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불천위 사당인 충장사는 남이흥 장군의 위패 신주가 모셔진 사당인데 예약을 못한 관계로 들어가진 못했습니다. 충장사는 1667년에 세워진 건물이나 오랜 세월로 노후화되어 1968년 내부 공사를 했는데요. 사당 주위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전면에는 솟을삼문의 정문이 있고, 안의 사당은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는데요. 그 안쪽에는 각 칸마다 네 짝의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겹처마로 마무리되었고 측면에는 큰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고 해요.
문화재유물전시가 되어있는 제1모충관, 수장고가 있는 제2모충관의 모습입니다. 곤룡포, 녹구, 호패 등 500여 점의 유품들을 보존한 ‘충성을 사모한다’는 뜻의 모충관과 묘소, 고택, 신도비 등이 있는데요. 피 묻은 녹피방령포(갑옷 속 받침)와 상의는 당시 전황을 실감나게 하는 유품입니다. 장군의 관을 덮은 인조 임금의 곤룡포는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곤룡포(답호)라고하네요. 모충관은 평소에는 개방이 되지 않으며, 관람을 원할 시에 단체예약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남이흥 장군 문화제가 개최되는 때는 일반인의 자유로운 관람이 가능한데요. ‘남이흥 장군 문화제’는 애국 충절의 정신을 드높이는 교육적 행사이자 당진 시민에게 귀감이 되는 행사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1길 73-52
도호의숙은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강당(講堂)골에서 남이흥 장군의 후손인 의령 남씨 종중에서 그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종숙(宗塾)으로 시작되었다고 해요.
종숙, 남석구와 그의 조카 남보영, 남계옥에 의하여 1850년대 초에 이루어 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남보영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과 급제자 남규희와 백파 남택희가 그 뒤를 이었는데요. 이후 문호를 개방하면서 타성(他姓)도 함께 교육할 수 있도록 하여 도호의숙(桃湖義塾)으로 개편했습니다. 개편후 유진하와 그의 제자 이철승 등 유학자들을 초빙하여 한학을 비롯한 민족 교육을 실시했는데요.
남이흥의 후손 20명이 무과 등과자로 배출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대호지 4·4 만세 운동의 주역으로 이어집니다. 뒤이어 도호 학당으로 학맥을 이어오다 일제의 강압으로 폐쇄된 후 도이리 강습소로 이어 왔는데요. 이 마저도 1930년에 폐쇄됐다고 합니다.
도호의숙은 한학 뿐만 아니라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으로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는데요. 가학리 출생으로 성균관장을 지낸 이재서와 한학자 이병태를 비롯하여 의령 남씨 삼학사 삼명창이 도호의숙 출신이라고 하네요. 또한 남상락, 남계창, 남주원, 남상돈은 파고다 공원 3·1만세 운동 참여한 후 천의 장터에서 4·4만세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도호의숙에서 수학한 남상혁이 김복한 문하에서도 수학하면서, 김복한과 그의 제자 한용운, 김좌진 등도 당진 대호지면 사성리·도이리를 많이 왕래했다고 해요.
도호의숙에서 교재로 만들어 사용하던 <화서집>·<성제집>·<지산집>·<직암집>·<여인 교육 유인집>·<송자대전>등 수 많은 분량의 서책, 간찰, 시문 등이 있습니다. 현재 명문 도호의숙에서 교재로 만들어 사용하던 교재들은 대호지면 도이리 충장사 경내 모충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해요. 도호의숙의 교실로 사용하던 도이리 강당(講堂)은 없어지고 강당골에는 민가와 지명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도호의숙 앞에 있던 옛 우물을 기념해 도호의숙터로 보존하고 있어요.
대호지는 문화역사 자원도 많지만, 마을의 평안과 주민의 안녕을 위해 세워진 곳도 있다고 합니다.
대호지에서 나고 자라 현재 대호지에 살고 있는 주민과 함께 장정리에 있는 고래샘으로 이동했어요. 장정리는 원래 신라 경덕왕때부터 큰 우물이 있어 정곡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대호지면 장정리 고래샘은 지금도 다슬기, 가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네요. 찾아간 날은 비가 온 뒤라 물이 깊어 다슬기를 볼 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고래샘은 옛적부터 마을 주민들의 식수나 빨래터로 활용되었는데요.
주민들은 고래가 물을 뿜듯이 물이 잘 난다고 해서 고래샘이라 불렀다고 해요. 고래샘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당진시가 모두 가물었을 때도 가뭄을 모르고 농사를 잘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농사짓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지만, 경지 정리할 때 마을의 상징인 고래샘을 없애지 않고 정원을 조성해 쉼터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보존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