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터 높여서 지은 본관, 권위 세우려는 의지 엿보여
광화문 광장 달군 국민 함성 더욱 엄중하게 들렸을 터…
귀한 손님 맞이했던 영빈관 화강암 기둥…강인함 물씬
인왕제색도 같은 실경 ‘절정’
청와대 관저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입구에는 ‘인수문(仁壽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통령과 그 가족의 거주공간으로 생활공간인 별채, 전통양식의 뜰과 사랑채 등으로 구성됐다. 연합뉴스
금기의 땅을 꿈에서나 가볼 수 있었을까. 과거 권력자의 내밀한 공간을 일반인이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게 됐다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바로 청와대 이야기다. 윤석열 제20대 대통령이 서울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기면서 청와대는 만인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경치를 만끽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곳에 얽힌 사연을 미리 알고 간다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될 수 있다.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26㏊에 이르는 경내 구석구석을 돌며 그 역사적 의미를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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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터를 높여 권위를 세워라=고려청자를 닮은 비취색, 하늘에 닿을 듯 수려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청와대 본관 팔작지붕 모습이 마치 한폭의 그림 같다. 15만장에 이르는 청기와와 함께 다양한 동물 형태인 어처구니, 지붕 용마루 양끝을 장식하는 치미까지 확연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청와대와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얼마간 믿기지 않았다.
본관은 1991년 9월4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 때 완공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외교 업무가 폭증하면서 국격에 맞는 대통령 집무실을 새로 만들 필요가 생겨 신축됐다.
건물은 디귿(ㄷ)자 형태다. 건물을 마주 본 상태에서 왼쪽은 국무회의를 여는 세종실, 오른쪽은 임명장을 수여하는 곳인 충무실이 양쪽으로 뻗어 있다. 2019년 7월25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전달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세종실에는 역대 대통령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작품 보존을 위해 세종시에 있는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할 가능성이 크다.
원래 본관 앞에 태극기와 봉황기가 함께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태극기만 보인다. 대통령이 경내에 있을 때 게양하는 봉황기는 개방 후 더는 필요가 없어져서다.
충무실 앞 몇몇 큰 나무는 본관이 세워진 평지에서 4m가량 깊이의 구덩이 아래에 뿌리 내리고 있어 궁금증을 자아낸다. 과거 이곳을 짓기 전 터를 일부러 4m 정도 돋우어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관을 권위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던 군인 출신 대통령의 의지가 엿보인다.
역사는 때론 역설적으로 흐른다. 광화문 광장에 모인 국민이 낸 권력자를 향한 함성이 한층 높아진 본관에서 더 엄중하고, 명징하게 들렸을 테니까 말이다.
청와대 본관 내부 모습. 26일부터 일반인에게도 공개됐다. 건물은 ㄷ자 형태로 돼 있는데 정문을 마주 보고서 왼쪽은 국무회의를 여는 세종실, 오른쪽은 임명장을 전달하는 곳인 충무실이 양쪽으로 뻗어 있다. 연합뉴스
◆경무대터, 영욕의 역사를 간직하다=본관에서 관저로 가는 길 중간에 수궁터가 있다. 여기에선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눈에 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을 받은 명당자리라는 뜻이다.
이 비석 뒤에 바로 경무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의 본관이 건립되기 전까지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이곳을 집무실로 썼다.
복이 넘치는 땅이라서였을까. 나라가 바뀌어도 최고 권력자들은 이곳을 지켰다. 역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땅에 가장 먼저 관저를 지은 사람은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다. 그의 재임 기간(1936∼1942년)에 관저가 세워졌고 이후 총독 3명이 거쳐 갔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한반도 남쪽을 통치하는 미군정이 시작됐다. 군 통수권자 격인 존 리드 하지 사령관 역시 총독 관저를 그대로 사용했다.
경무대가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도 격동의 세월 속에서 이뤄졌다. 4·19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물러나고서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이 명칭이 부정적이라며 청와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제 잔재라며 허물어버리라고 지시하면서 경무대는 영욕의 세월과 함께 사진으로만 남게 됐다.
자못 아쉽다. 망국과 광복, 그리고 대한민국의 굵직굵직한 근현대사를 관통했던 이곳을 살렸다면 후손에겐 과거를 성찰할 귀중한 유산이 됐을 텐데 말이다.
◆영빈관에서 인왕제색도를 발견하다=영빈관은 이름 그대로 귀한 손님을 맞을 요량으로 1978년에 지어졌다. 본관 못지않은 웅장함에 보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2층으로 구성돼 있긴 하나 아파트로 치면 거의 5층 높이에 육박한다.
건물은 강인해 보이는 기둥 때문인지 남성미가 물씬 느껴진다. 모두 18개 기둥 가운데 영빈관 앞 4개는 이음새가 없는 화강암 덩어리다. 기둥 한개 중량이 60t에 이른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큰 공사였을지 가늠이 된다. 건축 재료로 쓰인 화강암은 전북 익산시 황등면에서 들여왔다. 여기서 나는 화강암은 철분 성분이 적어 예부터 고급 건축 자재로 손꼽혔다.
영빈관 관람의 화룡점정은 건물 바깥에서 찾아봐야 한다. 영빈관 정문을 마주 보고 왼쪽에 인왕산이 자리 잡고 있다. 딱 이 지점에서 본 산의 실경은 겸재 정선의 그림 ‘인왕제색도’와 거의 흡사하다. 이른 새벽 운무가 피어오를 때 지금의 영빈관 자리에서 인왕산을 응시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 있을 겸재의 진지한 얼굴을 상상하게 된다.
이문수 기자
첫댓글
참 기가 차는군요...
예전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