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지막 왕 보장왕과 고구려의 몰락
(?~ 서기 682년, 재위기간 : 서기 642년 10월~668년 9월, 25년 11개월)
연개소문의 반정으로 보장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악화된다. 당은 일찍부터 고구려를 침략하려 했으나 마땅한 명분을 찾지 못했는데, 마침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왕위에 앉히자 당 태종은 이를 빌미로 고구려 침략을 획책한다. 이에 따라 당은 총력전을 펼치며 고구려를 공략하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 아래 당나라의 침략에 대응한다.
보장왕은 평원왕의 셋째 아들인 대양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장[臧, 또는 보장(寶藏)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서기 642년 10월에 연개소문이 그의 큰 아버지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 제8대 왕에 올랐다.
보장왕이 즉위하자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게 집중되어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오른 후에 조정과 군권을 장악한다. 보장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체제가 성립되고, 이는 후에 고구려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반정과 독재에 항거한 세력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안시성 성주였다. 그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즉위시킨 후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조정을 장악하자 이를 불충으로 규정하고 항거할 움직임을 보인다. 연개소문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고, 결국은 안시성을 휘하에 넣지 못한 채 조애의 안시성 성주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킨다는 뜻을 밝히고 사태를 마무리 짓는다.
한편, 이 무렵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의 싸움은 642년 7월에 백제가 신라의 40여 개 성을 함락시켜 차지함으로써 백제에게 유리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그해 8월에 백제가 다시 신라의 요지인 대야성(합천)을 점령하면서 전세는 더욱 신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에 따라 신라의 선덕여왕은 그해 10월에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요청을 거부하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어부지리를 노리기로 하였다.
이 때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즉위시켜 권력을 장악한 것을 빌미로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세민은 그동안 진대덕을 보내 지형을 파악하는 등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신하들을 설득할 만한 대의명분을 찾지 못했다. 더구나 수나라의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략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그러던 차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세민은 이를 호재로 생각하고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했던 것이다.
이세민이 침략 전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내부 사정을 좀더 소상하게 파악할 필요성을 느끼고 643년 3월에 당에 사신을 보냈다. 사신을 보내는 명분은 도교를 널리 유포하기 위해 도사를 청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사신을 통해 당나라의 전쟁 준비 상황을 살피는 것이었다. 도교를 선호하고 있던 이세민은 연개소문의 내심을 눈치 채지 못하고 도사 8명과 노자의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으로부터 이세민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연개소문은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장정을 대거 징발하여 군사를 늘리고, 변방의 성곽을 수리하는 한편 진법 훈련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당의 침략에 대비하는 동안 신라는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신라는 643년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의 조공 길을 막고 있다고 하면서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되자 당의 이세민은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짠다. 당의 계략을 눈치 챈 연개소문은 백제와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신라 공략에 나선다.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협공하자 이세민은 고구려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당이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과거에 신라에게 빼앗긴 성읍을 되찾기 전에는 신라 공략을 멈출 수 없다며 상리현장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한다.
고구려에서 돌아온 상리현장이 연개소문의 말을 전하자 이세민은 '왕을 죽이고 이웃 나라에 대해 전쟁을 일삼는 연개소문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원로대신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원로대신들로부터 형식적인 승인을 얻어낸 이세민은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기로 하고 출전 준비에 돌입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전국에서 말갈 군을 포함하여 약 20만 병력을 형성하고, 그 중 5만은 한반도 쪽 변방에 배치하고 나머지 15만은 요동과 평양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또한 그때 안시성에는 안시성주의 독자적인 세력인 성민 7만과 군사 3만이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총 병력은 23만이었다. 연개소문은 이 같은 병력이면 충분히 당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혹 당 군이 바다를 타고 평양을 칠 것을 염려하여 보장왕을 비롯한 왕실 종친들은 대동강변의 하 평양에 머물도록 하였다.
고구려가 당의 침략에 대비하는 사이 당 태종 이세민은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45년 3월에 출전 명령을 내렸다. 이세민은 총 10만 병력을 동원하였는데, 그 중 4만은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발해를 통해 평양으로 향했으며, 나머지 6만은 이세민이 직접 거느리고 요수(난하)를 건너 육로로 진군하였다. 또한 돌궐 군과 거란군 수만 명이 당 군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되었으니, 침략군은 총 15만에 육박하였다.
이세민의 10만 병력 중 이세적이 이끄는 선봉대가 4월에 개모성을 공략하여 무너뜨렸고, 수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한 장량의 4만 군대는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이후 양국 군사는 한 달 가량 공방전을 지속하다가 5월에 장량이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은 요동성으로 진군하였다.
고구려 군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연개소문은 신성과 국내성의 4만 병력으로 하여금 요동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당 군은 수천의 전사자를 내고 패주하였는데, 다시 이세민이 이끄는 5만 병력이 당도하자 고구려 군은 뒤로 물러나 수성전을 펼쳤다. 이 때 요동성에서는 이세적이 이끄는 1만 병력이 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동성을 무너뜨리지 못하자 이세민은 자신의 정예부대 5만을 이끌고 이세적을 지원하였다. 이후 요동성은 당 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었다가 12일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요동성이 함락되자 백암성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백암성주 손대음은 이세민에게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백암성을 내주었다. 요동성과 백암성을 무너뜨린 이세민은 자신의 정예부대 5만과 이세적의 선봉대 1만, 돌궐과 거란군 수만, 고구려 군 포로 및 백성 5만 명을 이끌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다.
당군이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연개소문은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에게 총 15만의 군사를 내주고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세민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작전을 썼다. 이세민은 자신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다만 신하의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고 말하면서 신하의 예만 갖추면 빼앗은 성을 모두 돌려주고 돌아가겠다고 제의했다. 그러자 고연수는 이세민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싸움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이세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만 6천의 기습병을 조직하여 고구려 군을 급습하였다.
당군의 급습을 받은 고구려 군은 졸지에 혼란에 빠졌고, 그 과정에서 3만의 군사를 잃었다. 이에 고연수와 고혜진은 직할부대 3만 6천을 이끌고 이세민에게 항복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신성과 건안성으로 퇴각하였다.
이 때문에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난관에 봉착하였고, 이세민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시성주의 뛰어난 용병술에 힘입어 안시성의 군민들은 사기를 잃지 않았고,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당군은 피로에 지쳐 사기가 저하되었다. 심지어 이세민은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성을 쌓아 공격하였으나 역시 안시성주의 치밀한 방어벽에 밀려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이 토성 작전으로 당군은 많은 물량과 병력을 잃어야만 했다.
당군의 실패가 거듭되는 가운데 어느덧 겨울이 닥쳤다. 그 때문에 당군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 10월에 퇴각하기 시작했다. 당군은 퇴로에서 많은 동사자가 발생해 군사를 잃었고, 이에 따라 군사들이 대거 모사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장안으로 돌아간 이세민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다시금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에 1만 이하의 적은 병력을 동원하여 소모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세민은 또 한번의 고구려 침략을 위해 강남의 12주에서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전함 축조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648년 정월에 설만철에게 군사 3만을 내주고 전함을 동원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으나 당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 때문에 이세민은 649년에 30만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그는 649년 4월에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시를 남기고 죽음을 맞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당은 일시적인 휴전상태에 돌입했다.
하지만 휴전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이어졌다. 고구려 군과 백제군은 지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였고, 이에 따라 신라는 완전히 수세에 몰렸다. 그런 가운데 655년 정월에 고구려 군과 백제군의 협공에 밀려 신라는 23개 성을 잃었고, 신라의 무열왕(김춘추)은 당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은 그해 2월에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위 주랑장 소정방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 요수를 건너 고구려 군과 대치하였으나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이 때문에 약이 오른 당나라 고종은 658년에 다시금 정명진과 중랑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대패하고 돌아갔다.
그 후 당은 659년 11월에 설인귀를 앞세워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이듬해 6월에는 소정방이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신라와 함께 백제 공략에 나섰다. 이 같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밀린 백제의 의자왕은 그해 7월에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의자왕 및 백제의 신료들은 당나라로 끌려갔고, 백제는 남아 있던 신하들을 중심으로 백제부흥 운동에 돌입하였다.
백제를 무너뜨린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향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 군은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은 대동강의 하평양을 향해 진군하였고, 이에 호응하기 위해 당 고종은 67개 주에서 4만 4천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대륙 쪽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 무렵 부여풍을 위시한 백제 부흥군이 백제 땅의 서북부 일원을 회복하여 나당 연합군의 후미를 쳤다. 그 바람에 신라군은 다시 남진하여 백제군과 싸워야 했고,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서북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4만 4천의 당군을 패주시켰다. 이에 당군은 그해 4월에 다시금 대병력을 이끌고 수륙양동 작전을 구사하며 평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고구려 군에게 패배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이에 밀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당군이 주춤하는 사이 연개소문은 뇌음신에게 군사를 내주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연일 장마가 계속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해야만 했다.
그러자 그해 8월에 소정방은 10만 대군을 선단에 태우고 보장왕이 머무르는 대동강의 하평양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하평양성)을 포위했지만 공방전만 지속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무렵, 서쪽에서는 당 고종이 보낸 당군이 요수(난하)를 넘어 압록수(랴오허)를 향해 밀려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장남 남생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내주고 압록수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9월에 당군이 압록수를 넘어 쳐들어왔으나 남생이 이끄는 고구려 군에게 밀려 퇴각하였다.
이렇듯 당군은 패배만 지속하다가 665년 정월에 방효태를 앞세워 다시금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방효태 군대는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 군과 사수언덕에서 혈전을 벌이다가 패배하여 몰살하였으며, 방효태는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 때 소정방은 여전히 하평양성을 포위하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전면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포위를 풀고 황급히 퇴각해야만 했다.
고구려는 이렇게 연개소문의 지휘 아래 군관민이 일체가 되어 매번 당군을 퇴각시켰지만, 666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 간에 정권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 직위를 이어 조정을 장악했다. 하지만 남생의 동생 남건과 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남생의 측근들을 없애고 남생을 소환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남생은 국내성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아들을 당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남생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 고종은 설필하력으로 하여금 남생을 마중하게 하였고, 남생은 군대를 거느리고 당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 보장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조정은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생의 군대를 앞세우고 이적, 설필하력, 하처준, 백안륙 등에게 대군을 내주어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버렸다.
연정토의 투항은 남건을 매우 당황케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이 대군을 형성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이에 따라 667년 9월에 신성 근처의 16개 성이 함락되었고, 다시 남소, 목저, 창암 등의 요지가 함락되었다. 그 후 부여성과 그 주변의 40여 성이 함락되었고, 668년 9월에는 보장왕이 머무르던 하평양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고 남건, 남산 등과 함께 장안으로 끌려갔다. 보장왕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여전히 당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구려의 역사를 포함하여) 고구려는 9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한편 장안으로 압송된 보장왕은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하여 당의 벼슬을 받고 그들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물렀다. 그런 가운데 670년에 검모잠이 보장왕의 외손자인 안순을 왕으로 세우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검모잠과 안순 사이에 갈등이 생겨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또한 671년에는 그때까지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안시성이 무너지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672년 5월에 당의 대대적인 공략에 밀린 고구려의 잔여 병력은 대부분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후 보장왕은 신성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를 통할하다가 677년에는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임명되어 요동에 머물렀다. 그는 이 때 고구려의 재건을 노리며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 하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양주(지금의 사천성 공주)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682년에 사망하였다.
보장왕이 죽은 뒤 당나라 조정은 그의 시신을 장안으로 옮겨 돌궐의 가한(추장)이었던 힐리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다. 보장왕은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 '보장'을 묘호로 삼는다.
2. 보장왕의 가족들
보장왕은 두 명의 부인에게서 아들 넷을 얻었는데, 첫째 부인이 복남, 임무, 덕무 등을 낳았으며, 둘째 부인이 안승을 낳았다. 가족 중 부인들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네 아들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다. 이에 아들들의 삶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한다.
복남(생몰년 미상)
복남([福男,혹은 남복(男福)]은 보장왕의 맏아들이며 태자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며, 666년에 보장왕의 명령을 받아 당나라 태종이 태산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산신재(山晨齋)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682년에 보장왕이 죽자 당나라는 686년에 복남의 아들 보원에게 조선군 왕의 직위를 승계시키지만 보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복남이 적어도 686년 이전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무(생몰년 미상)
임무(任武)는 보장왕의 둘째 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647년 12월에 보장왕의 명령을 받아 당나라에 다녀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보장왕은 당나라의 재차 침입을 막기 위해 임무를 장안으로 보냈다. 그리고 당 태종으로부터 화친을 약속 받고 귀국하였는데, 당 태종이 약속을 어기고 이듬해 4월에 고구려를 침입하는 바람에 화친조약은 깨졌다.
임무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며,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덕무(생몰년 미상)
덕무(德武)는 보장왕의 셋째 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699년에 당나라로부터 안동도독부에 봉해져 고구려 지역을 다스린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이 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안승(생몰년 미상)
안승(安勝)은 보장왕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669년 2월에 고구려인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했다. 이에 신라는 안승을 받아들여 보덕국왕에 봉했으며, 680년에는 문무왕의 질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후 683년에는 경주에 머물며 소판이라는 봉작을 받고 김씨 성을 받아 신라의 귀족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연개소문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위함으로써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서부의 귀족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연자유와 아버지 연태조는 모두 대인의 신분으로 재상 반열에 올랐다.『삼국사기』와『신당서』는 개소문의 성씨를 ‘천(泉)’씨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개소문의 ‘연(淵)’씨 성이 당나라를 세운 이연의 이름과 같다 하여 고의로 천씨로 바꿔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연개소문은 아버지 연태조가 죽은 후에 서부의 대인 작위를 이어받으려 했는데, 당시 신하들이 연개소문의 성격이 지나치게 호방하여 위험한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작위 계승에 반대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자신이 직접 궁궐로 나아가 작위 계승의 정당성을 연설하여 가까스로 서부 대인 작위를 얻을 수 있었다.
서부의 대인이 된 연개소문은 아버지 연태조가 추진하던 장성 축성 작업을 지휘 감독하였다. 631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약 16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연개소문은 군사를 동원하여 영류왕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제거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함이었으며, 다음으로는 고구려를 당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당나라에 조공하여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자는 온건파였고, 다른 하나는 당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이루며 고구려의 독자성을 고수하자는 강경파였다. 영류왕은 즉위 초부터 온건파에 기울어져 있다가 강경파의 거두인 대대로 연태조가 죽자 완전히 온건파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조정은 온건파가 득세하였고, 강경파는 변경으로 밀려나가서 장성 축성 작업에 동원되어야 했다. 그리고 급기야 온건파는 강경파의 핵심 인물인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에 연개소문은 성곽 축성을 위한 출정식을 핑계 삼아 도성의 남쪽에서 축성 작업에 참여하는 군대를 사열하기로 하고, 조정 중신들을 그 자리에 초청하였다. 그리고 중신들이 사열식에 참여하기 위해 식장으로 들어서자 모두 죽여 버렸다.
이렇게 해서 백여 명의 온건파 중신들을 제거한 연개소문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궁성 안으로 들어가 궁성을 장악하고 영류왕을 살해하였다. 이로써 하루아침에 조정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보장왕을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스스로 막리지에 오른다.
막리지는 연개소문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관직으로 행정권과 병권을 동시에 가진 무소불위의 작위였다. 연개소문은 이 작위를 바탕으로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 철저한 공포정치를 지속한다.
연개소문이 이렇게 일시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자 일부 지방 세력들이 반발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연개소문에 굴복하였고, 다만 안시성의 성주만이 유일하게 연개소문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연개소문의 호출을 받고도 전혀 응대를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연개소문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한다. 그런데 안시성 성주는 군민들을 모두 성안에 집결시켜 체계적으로 정부군에 대항함으로써 수성전에 성공한다. 이에 연개소문은 자칫 내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안시성 성주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키고 더 이상 그를 소환하지 않았다. 또한 안시성 성주 역시 자신이 연개소문을 붙잡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면 국가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영류왕이 제수한 안시성 성주직을 유지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짓는다.
이 사건 이후 연개소문은 안시성의 독자성을 인정한 채 나머지 성곽의 성주와 조정 관료들을 대폭 교체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자신이 주관해오던 장성 축성 작업을 완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사의 수를 대폭 늘린다.
이러한 그의 강병책은 누차에 걸친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권력이 연개소문 일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지면 조정의 일대 혼란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고 666년에 그가 죽었을 때 조정의 혼란상은 현실로 드러났다. 그가 죽자 그의 세 아들은 둘로 나뉘어 정권다툼을 벌였고, 이것이 결국 조정의 내분으로 이어져 고구려의 멸망을 가져온다.
연개소문이 죽자 큰아들 남생이 막리지 지위를 이었다. 그리고 남생은 막리지에 오른 후 전국을 순행하며 각 지방의 성주들을 독려한다. 그런데 남생의 두 아우인 남건과 남산은 측근들로부터 남생이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남건과 남산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남생 역시 자신의 측근들로부터 두 아우가 형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남생은 동생들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자신의 심복을 평양에 보냈다. 하지만 남생의 심복은 남건과 남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남건과 남산은 권력을 장악하고 왕명을 빙자하여 남생을 평양으로 소환한다. 하지만 남생은 소환에 응하지 않고 국내성에 몸을 피했다가 당 고종에게 자신의 아들 헌성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남생의 요청을 받은 당 고종은 설필하력에게 군사를 주고 요수로 가서 남생을 마중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남생은 자신의 친위 군사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여 설필하력의 호위를 받으며 장안으로 간다.
그 후 남생은 당군의 안내자가 되어 고구려를 침략한다. 남생처럼 고구려 지리에 익숙한 안내자를 둔 당나라 군대는 거침없이 고구려 땅을 유린할 수 있었고, 급기야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같은 결과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체제가 고구려의 멸망의 주된 원인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비록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국력이 안정되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그가 죽으면서 그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조정은 권력다툼의 장으로 급변하였고, 그것이 곧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고구려의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권력다툼 때문이었다는 뜻이다. 그 누구에 의한 것이라도 독재체제는 국가를 멸망으로 이끈다는 평범한 진리를 연개소문이 진작 알았더라면 고구려가 결코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4. 당 태종의 침략전쟁과 안시성 싸움
당 태종 이세민은 645년 3월에 정예군 10만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들 10만 병력 중 6만은 육로로 진군했고, 4만은 선단을 이용하여 해로로 진군했다. 그리고 4월에 이세적이 이끄는 선봉부대가 요수를 건너 신성에 도착하여 고구려 군과 접전을 벌였고, 며칠 뒤에는 장검이 거란과 돌궐군 수만을 이끌고 건안성으로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세적은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장검 역시 건안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신성과 건안성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우회로를 택하여 개모성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개모성이 함락되어 고구려 군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양곡 10만 석을 탈취 당했다.
한편 선단을 형성한 장량 일행은 4만 3천 병력을 이끌고 그해 4월에 동래를 출발하여 발해를 건너 비사성을 공격하였다. 비사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과 해안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당군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구려 군은 적은 병력으로 4만 명이 넘는 당나라 군대와 대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구려 군은 지치기 시작했고, 성안의 음식물도 고갈되어 갔다. 그리고 한 달간 계속되던 공방전은 5월 초에 당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이세적이 이끄는 선봉대와 이세민의 주력부대, 돌궐 및 거란군 수만 명이 요동성을 공격하여 12일 만에 함락시키고, 다시 백암성을 항복시켰다. 그리고 5월 중순에 마침내 안시성에 도착하였다. 이로부터 안시성 성주와 이세민의 5개월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다.
안시성은 평양으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성으로 전략상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그 때문에 고구려는 안시성을 매우 견고하게 축성하였다. 더구나 안시성의 성주는 지략이 높고 용맹스러운 장군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웠을 때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충절을 지켰으며, 이 때문에 연개소문이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연개소문은 안시성 성주의 직위를 그대로 인정하고 안시성을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세민은 어떻게 해서든 안시성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시성만 무너뜨리면 고구려 군의 사기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질 것이고, 그 이후에는 평양성 진입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고구려 군 15만 병력은 고구려 정예부대와 말갈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이끄는 장수는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었다. 이세민은 이들 고구려 군이 방어진을 형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장인 고연수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고연수가 그다지 뛰어난 장수가 되지 못한다는 판단을 하고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이세민은 고연수가 필시 군사의 수를 믿고 맞대응을 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세민의 추측대로 고연수는 당군과 맞대응을 벌일 생각이었다. 이에 전쟁 경험이 풍부한 대노 고정의가 맞대응을 하면 피해만 초래할 뿐 별다른 이득이 없다면서 방어벽을 형성하여 지구전을 펼 것을 주장했다. 고정의는 지구전을 펴다가 적이 지치면 기습대를 조직하여 적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 간단하게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고연수는 고정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고현수는 먼저 기병을 보내 상대방의 기를 눌러 놓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안시성 40리 지점까지 진군하였다. 이 때 이세민은 혹 고연수가 수비벽을 형성하고 진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궐 기병 1천을 내보내 고구려 군을 유인하는 전략을 썼다. 돌궐 기병 1천을 맞이한 고연수는 간단하게 그들을 물리쳤고, 그래서 자신감을 갖데 되었다. 이에 따라 고연수는 개활 전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안시성에서 동남방으로 8리가량 떨어진 야산 아래 진을 쳤다.
하지만 개활 전을 전개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었다. 고구려 군은 원래부터 산악전과 수성전에 익숙했기 때문에 개활 전을 전개할 경우 패할 가능성이 더 많았다. 더구나 당군에게는 개활 전에 사용하기 편한 돌차와 윤차 등의 기계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고연수가 개활지에서 맞대응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적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록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해도 당군은 모두 정예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고구려 군은 고연수의 직할부대 이외에는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이세민은 이 같은 고구려 군의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민은 고연수에게 심리전을 전개한다. 이세민은 더욱 완벽한 승리를 위해 치밀한 작전을 구상했던 것이다.
이세민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전했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묻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전투를 벌이는 것은 내 본심은 아니다. 지금 내가 너희 나라에 들어와 마초와 양식이 부족한 관계로 몇 개의 성을 빼앗기는 했으나 너희가 신하의 예절을 갖춘다면 빼앗은 성은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고연수는 이세민의 편지를 받고 방어 태세를 늦췄다. 이세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날 밤에 기습병 2만 6천을 보내 고구려 군을 급습하였다. 고연수는 병력을 이끌고 협곡으로 밀려나왔고, 이세민은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협곡을 포위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하였다. 이 때문에 고구려 군은 혼란에 빠져들었고, 그 혼란한 틈을 당군의 맹장 설인귀가 파고들었다.
이렇게 하여 졸지에 고구려 군 3만이 전사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직할부대 3만 6천을 이끌고 이세민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흩어져 고구려 진영으로 달아났다.
이에 따라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고연수가 항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연개소문을 땅을 쳤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그는 평양을 공격하기 위해 몰려온 장량의 4만 군대와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안시성 성주의 뛰어난 지략과 용맹성에 의지해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편, 고연수를 항복시킨 이세민은 기고만장한 태도로 안시성 공략 계획을 수립했다. 이세민은 이제 안시성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이세민은 안시성을 피하여 건안성을 공략하려 했다. 건안성을 공격해 무너뜨리면 안시성은 자연스럽게 고립되어 양식이 부족해질 것이고, 그렇게만 되면 스스로 문을 열고 항복해 올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더구나 안시성은 요새 중의 요새인 데다가 안시성을 맡고 있는 성주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세민은 ‘성 가운데는 공격하지 말아야 할 성도 있다.’는 병서의 말을 인용하며 안시성 공략을 주저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하 장수 이세적은 이세민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세적은 비록 건안성이 약하여 안시성에 비해 무너뜨리기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안시성을 놔두고 건안성을 공격하다가는 군량을 탈취당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당의 군량은 요동을 통해서 수송되고 있었다. 그래서 당군이 모두 건안성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안시성의 고구려 군이 요동에서 건안성으로 이어지는 수송로를 차단하면 당군은 꼼짝없이 굶어죽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이세적의 설명을 들은 이세민은 결국 생각을 바꾸어 안시성 공략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안시성 안에는 약 10만 명이 있었다. 안시성 주둔군 3만 가량과 백성 7만이 모두 그 속에 있었던 것이다. 안시성 성주는 백성과 군사뿐 아니라 그들의 양식과 가축까지 모두 성안에 집결시키고 총력전을 펼칠 기세였다.
드디어 이세민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당군이 안시성을 향해 몰려가자 조용하던 안시성에서는 갑자기 함성이 터져 나왔고, 곧 이어 화살 세례가 이어졌다. 이 때문에 선봉장 이세적은 첫 공격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물러나왔고, 그 분을 삭이지 못해 다음날 성을 향해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리겠다.’고 소리쳤다. 이 말에 안시성의 군사와 백성들은 더욱 단결하여 당군의 공격에 결사적으로 대항하였다.
안시성에 대한 당군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항복한 고연수는 이세민에게 오골성을 공격하라고 말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었을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지 못한 인물이라 하루아침에 성을 함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고연수의 주장은 당군이 오골성을 공격하면 안시성에 대한 공격력이 약화되고, 한편으론 신성과 건안성의 10만 고구려 군이 당군의 뒤를 칠 수 있다는 계산을 깔고 있었다. 이세민과 이세적은 고연수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며 받아들일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신성과 건안성이 고구려 군에게 후미를 공격당하면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된다는 장손무기의 주장에 밀려 당군의 오골성 공격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후 이세민은 전력을 다하여 안시성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안시성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사방에서 줄과 사다리로 성벽을 기어올랐지만 번번이 안시성의 공격에 밀려 실패하였고, 돌대포를 쏘아 성벽의 작은 담을 무너뜨리면 여지없이 그 자리에 목책이 세워졌다.
이에 이세민은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성을 쌓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당군은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성 축조 작업에 돌입하였고, 작업 시작 60일 만에 토성을 완성했다. 토성의 높이는 안시성보다 두 사람의 키 높이만큼이나 더 높았고, 당군은 그 위에서 안시성 안을 내려다보며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때문에 토성은 단지 안시성 안을 관찰하는 역할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산이 무너져 내려 안시성의 일부가 그 충격으로 무너졌다. 산에서 너무 많은 흙을 파내는 바람에 산사태가 났던 것이다. 안시성 성주는 그 위기 상황을 호재로 이용하기 위해 군사 수백 명을 밖으로 내보내 토성을 급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내 토성을 탈취하여 그 곳에 참호를 파고 방어진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당군이 어렵게 쌓은 토성은 고구려 군의 방어벽이 되고 말았다.
기껏 쌓아올린 토성마저 고구려 군에게 빼앗기자 당군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고, 이세민 역시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거기에다가 9월로 접어들면서 추위가 닥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이세민은 부랴부랴 철군을 서둘렀다. 추위가 거세지면 말을 먹일 풀도 없어질 것이고, 국내의 식량 부족으로 군량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세민은 철수하면서 혹 고구려 군이 후미를 칠까 봐 안시성 앞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퇴각 명령을 내렸다.
당군이 퇴각할 때 안시성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한 명의 장수가 올라와 그들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바로 안시성의 성주였다. 이세민은 그의 지략과 용맹에 고개를 숙이며, 겹실로 짠 비단 1백 필을 안시성 성주에게 전하고 퇴로에 올랐다.
이세민이 요수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겨울 기운이 완연한 10월이었다. 하지만 요수는 아직 얼지 않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당군은 진흙길을 통과해야 했다. 수레와 말은 모두 진흙에 빠져 오도가도 못 하였고, 군사들은 추위와 허기에 지쳐 아우성이었다. 이세민은 그 모든 것이 안시성 공략에 실패한 결과라고 자책했다.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의 영웅호걸로 통한 이세민을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쫓겨 가게 한 안시성 성주는 불행히도 사서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와서 송준길과 박지원은 이름이 전하지 않던 이 안시성 성주를 양만춘(梁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고구려 말의 학자 이색과 이곡은 당 태종 이세민이 안시성 싸움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당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는 주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안시성 싸움에서 패배하여 회군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당 태종을 물리친 안시성 성주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안시성을 지키며 고구려 재건을 노렸는데, 불행히도 671년 7월에 안시성은 당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불세출의 영웅 안시성 성주가 이 때 죽었는지 아니면 그가 죽은 뒤에 안시성이 무너졌는지는 알 수 없다.
출처 : SKS'S 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