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15 소아암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1 - "'흡연 때문에 폐암’ 첫 인정…배상책임無” 흡연과 폐암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다. KT&G 측은 "역학적 인과관계만으로 개별 흡연자의 폐암과 흡연의 인과 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밝혔고 원고 대리인은 "재판부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도외시하고 거대 기업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추가 소송이나 상고 여부는 판결문 검토 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2007 - 盧대통령 "북한에 다 줘도 남는 장사" "남북관계 풀리면 마셜플랜 이상 성과 거둘 것" 이탈리아를 방문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15일 북핵 6자회담 합의와 관련해 "협상이 다행이 잘 타결됐지만 속으로는 우리가 다 주더라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북한에 다 줘도 핵 문제가 해결되면, 결국은 우리에게 남는 장사가 된다"고 말했다. 강승민 기자 /재경신문 2007-02-16 08:15 입력 http://finance.jknews.co.kr/article/news/20070216/3071487.htm
1998 - 미국의 저널리스트, 소설가 마사 겔혼(Gellhorn, Martha) 사망 겔혼 [Gellhorn, Martha Ellis, 1908.11.8~1998.2.15] 미국의 언론가·소설가. 초기 여성 종군기자 중 한 사람으로,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아픔을 숨김 없이 묘사했다.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짧은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겔혼은 헤밍웨이의 '각주'(脚註)에 불과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했다. 약 60년 동안 활동하면서 겔혼은 여러 전쟁을 취재했으며, 소설로도 각광을 받았다. 겔혼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브린모대학에 다녔으나 1927년 작가가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잡지〈뉴 리퍼블릭 New Republic〉을 비롯한 여러 출판물에 글을 기고한 뒤 연방긴급구제국(Federal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에 일자리를 얻어 미국을 순회하며 대공황에 관해 보도했다. 〈내가 목격한 재난 Trouble I've seen〉(1936)은 당시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1937년 겔혼은 주간지 〈콜리어스 위클리 Collier's Weekly〉의 제안을 받아들여 종군기자가 되었으며 첫번째로 스페인 내란을 취재했다. 헤밍웨이와 사귀기 시작한 때가 이 시기였다.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1940)를 그녀에게 헌정했으며, 두 사람은 1940년 결혼하여 1946년 이혼했다. 겔혼은 세계 각지를 누비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제3차 중동전쟁(1967), 베트남 전쟁 등을 취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에는 들것 운반병으로 변장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몰래 취재하기도 했다. 겔혼은 81세 되던 해인 1989년에도 미국의 파나마 침공을 취재하기 위해 전선으로 달려갔다. 정치가를 믿지 않았던 겔혼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열성적으로 옹호했다. 군더더기 없는 산문으로 유명했으며, 장편 〈전쟁터 Stricken Field〉(1939), 〈키 작은 나무들에도 꼭대기가 있다 Lowest Trees Have Tops〉(1967)와 중편소설집 〈아프리카의 기후 Weather in Africa〉(1978) 등의 작품을 썼다. /브리태니커
1993 - 예술의 전당 전관(全館) 개관 서울오페라극장 개관 예술의 전당(藝術의 殿堂, Seoul Arts Center)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종합 예술 시설이다. 음악당과 서예관, 미술관, 오페라하우스 등 문화복합센터로 되어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문화예술축전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역사 1983년 1월 정부는 예술활동의 종합기능을 담당하게될 예술의전당을 서울에 건립할 방침을 정하고 부지선정에 나섰다. 이는 86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겨낭한 발표이기도 했다. 최초 계획당시 부지는 서울시청이 이전하기로 했던 강남구(현재 서초구) 서초동 967번지 일원이었으나, (현재 대법원 부지로 사용중) 부지규모가 3만평에 불과하여 예술활동의 총 본산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해 보류했다. 최종 부지는 같은해 9월 남부순환로와 우면산 사이의 산자락 (면적 :231,000m²) 으로 결정, 1984년 11월 14일 국립국악당과 함께 기공식을 가졌다. 예술의전당은 1단계(84년~88년)와 2단계(88년~93년)으로 나뉘어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1985년 11월에는 기존 58,667평의 부지에서 68,068평으로 부지가 확장되었다. 1988년 2월 1단계 공사인 음악당과 서예관이 완공되어 개관되었다. 1990년 10월에는 한가람미술관과 서울예술자료관이 개관했고, 1993년 2월 15일 서울오페라극장(현 오페라하우스)가 오픈되면서 완공되었다. 시설 현황 /위키백과
오늘의 역사 (2월 15일)[1993년] 미칼 코바치, 슬로바키아 대통령에 당선 슬로바키아 의회는 15일 미칼 코바치 전 체코의회의장(62)을 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에 선출했다. 경제학자인 코바치 신임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메치아르 현 슬로바키아 총리와 절친한 사이로,집권 민주 슬로바키아 운동당 후보로 출마했었다. /조선닷컴 2017-02-15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31_0027
1990 - 영국의 패션 사진작가 노먼 파킨슨(Parkinson, Norman) 사망 파킨슨 [Parkinson, Norman, 1913.4.21~1990.2.15] Norman Parkinson, CBE (21 April 1913 – 15 February 1990) was a celebrated English portrait and fashion photographer. Biography Parkinson (birth name Ronald William Parkinson Smith) was born in London, and educated at Westminster School. He began his career in 1931 as an apprentice to the court photographers, Speaight and Sons Ltd. In 1934 he opened his own studio together with Norman Kibblewhite, in London's Piccadilly. From 1935 to 1940 he worked for Harper's Bazaar and Bystander magazines.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e served as a reconnaissance photographer over France for the Royal Air Force. In 1947 he married the actress and model Wenda Rogerson. From 1945 to 1960 he was employed as a portrait and fashion photographer for Vogue. From 1960 to 1964 he was an Associate Contributing Editor of Queen magazine. In 1963 he moved to Tobago, although frequently returned to London, and from 1964 until his death he worked as a freelance photographer. He was made a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in the 1981 New Year Honours. Phot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Norman_Parkinson
1989 - 한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모태범(牟太釩) 출생 모태범 [牟太釩, 1989.2.15~ ] 모태범(牟太釩, 1989년 2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이다. 은석초등학교 때 선수 생활을 시작해 잠실고등학교 재학 중 국가대표로 뽑혔다. 2010년 현재 한국체육대학교에 재학중이며, 스피드 스케이팅 부문 남자 500m·1000m·1500m에 출전하고 있다. 2009년 12월 11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 1500m에서 1분 42초85로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3위에 올랐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에서 1차 시기 34초 923, 2차 시기 34초 906을 기록하며 종합 69초 82로 금메달을 따냈다. 모태범이 딴 금메달은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빙속(쇼트트랙 이외 종목) 역사상 첫 금메달이다. 주니어 대회 /위키백과
1988 - 예술의전당 음악당과 서예관 개관 오늘의 역사 (2월 15일)[1988년] 예술의전당 음악당과 서예관 개관 국내최초의 종합예술센터인 예술의전당이 1단계공사를 마치고 1988년 2월 15일 전두환 대통령 내외를 비롯, 각계 인사 1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서초구 서초동 우면산 기슭 현장에서 개관식을 갖고 문을 열었다. 개관식은 예술의 전당 이사장의 건립현황보고, 기념휘호비 제막, 서예관 개관기념 `한국서예 1백년전`, 음악당 콘서트홀 개관기념음악회, 음악당에서의 개관 축하리셉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날의 개관기념음악회는 올림픽 팡파르를 시작으로 베토벤의 `교황곡 제9번, 합창`의 4악장을 금난새씨가 지휘하는 KBS교향악단과 3백여 명의 연합합창단이 연주했다. 예술의전당은 이번에 1차로 음악당과 서예관을 개관했고, 1989년에는 미술관과 자료관을, 1992년에는 축제극장과 야외극장을 완공, 종합문화센터가 됐다. /조선닷컴 2017-02-15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29_0078
파인먼 [Feynman, Richard P(hillips), 1918.5.11~1988.2.15] 오늘의 역사 (2월 15일)[1988년]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사망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1988년 2월 15일 LA에서 사망했다. 그는 20세기를 살다간 물리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중후하고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아인슈타인에 비하면 그는 스스럼없이 소탈하고 버릇없는 미국인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천재 물리학자였다. 그는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 업적도 있지만 어려운 과학을 명쾌하게 전달하는 과학의 전도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운 전문 서적인 `양자역학과 경로적분`으로부터 `발견하는 즐거움`처럼 일반인을 위해 자기 생각을 파인만 특유의 표현으로 엮은 책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는 퍽 다양하다. 평생을 지식의 밑바닥에 있는 본질만을 찾아냈고 또 그것을 이해하는 데 천부의 소질을 가진 파인만은 그래서 총장직 같은 감투나 노벨상 마저 과학의 본질이 아니기에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918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MIT공대를 졸업한 후 프린스턴대에서 이론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대에는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에도 참여했다. 1945년부터 코넬대와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고 1965년에는 양자전기역학의 초기 공식화에 대한 부정확성을 수정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조선닷컴 2017-02-15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409_0002
1984.02.15 - '한국미술 5천년전' 런던에서 개막 1981.01.07 - '한국미술 5천년전' 미국 뉴욕에서 개막 1980.09.16 - '한국미술 5천년전' 미국 보스턴에서 개막 1976.02.23 - '한국미술 5천년전' 일본 교토에서 개막
1980 - 해군 제독 손원일(孫元一) 사망 손원일 [孫元一, 1909.6.22(음력 5.5)~1980.2.15] 손원일(孫元一 , 1909년5월 5일(음력) ~ 1980년2월 15일)은 평안남도강서 출생으로 호는 수향(水鄕),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손제독은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해방이 되자 우리의 바다는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였다. 그 후 해군 초대 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장관, 초대 서독대사 등을 역임하고 1980년 2월 15일 서거하여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특히, 손 제독은 해군참모총장 재임기간 중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 참전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도입하였다. 또한 해군병학교(현 해군사관학교), 해병대 등을 창설하였으며, 전사편찬실 및 해군음악대 등을 발족하여 군 사기 진작과 조직체계 개선에도 앞장섰다. /위키백과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창설 10주년 우표'의 발행을 위해 애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1977 - 동양화가 허백련(許百鍊) 사망 허백련 [許百鍊, 1891.11.2~1977.2.15] 1896년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 1910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 3년을 수료하고 그림공부에 전념, 1935∼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수석입선하여 화단에 등장하였다.
1972 - 미국의 저널리스트 스노(Snow, Edgar) 사망 스노 [Snow, Edgar Parks, 1905.7.19~1972.2.15] 미주리주(州) 캔자스시티 출생. 교외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미주리대학교(1925~1926)와 컬럼비아대학교(1927)에서 수학하였다. 학생시절에 캔자스시티의 지방지 《스타》의 통신원으로서 신문기자의 첫발을 내디뎠다. 1928년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차이나 위클리 리뷰[密勒氏評論]》의 부편집장(副編輯長)으로 활약하면서 중국문제 연구에 전념하였다. 1934∼1935년에 옌징대학[燕京大學] 강사로 출강하고, 동시에 《뉴욕 선》(1934∼1937), 《런던 데일리 헤럴드》(1932∼1941) 등의 잡지 특파원으로 극동·중동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였다. 저작 활동으로는 1932년에 처녀작 《극동전선(極東戰線)》을 출판하고, 1936년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옌안지구[延安地區]에 들어가 마오쩌둥[毛澤東]과 회견하고 저술한 《중국의 붉은 별》로 중국 공산당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이후에는 《아시아 전쟁》(1941)을 출판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 평론활동을 계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종군기자로 중국은 물론, 아프리카·인도·소련 등을 방문, 《우리편의 민중》(1944) 《소비에트세력의 형태》(1945)를 출판하였다. 전후(1960, 1965, 1970)에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저우언라이[周恩來] 등과 회견하고 중국의 실정을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중공사정에 정통한 기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naver
역사속 오늘[1969년 2월 15일] 콩코드여객기 첫 선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YTN 2013-02-15
1966 - `강강술래`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강강술래 전라도 지방에 전하는 민속놀이. 1966년 2월 1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해마다 음력 8월 한가윗날 밤에, 곱게 단장한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일정한 장소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원형으로 늘어서서,‘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놀이이다. 강강술래를 할 때는 목청이 좋은 여자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앞소리[先唱]를 부르면, 놀이를 하는 일동은 뒷소리[合唱]로 후렴을 부르며 춤을 춘다. ‘강강술래’라는 말은 한자의 ‘强羌水越來’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강강’의 ‘강’은 주위 ·원(圓)이란 뜻의 전라도 방언이고, ‘술래’는 한자어로 된 ‘巡邏(순라)’에서 온 말로서 ‘경계하라’는 뜻이니, 이는 ‘주위를 경계하라’는 당시의 구호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주위의 뜻인 ‘강’이 둘 겹친 것은 특히 주위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술래’가 ‘수월래’로 들리며, 그렇게 기록되기 쉬운 것은, 진양조(晋陽調 또는 진양)로 길게 뽑을 때 ‘수월래’로 들리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표기는 ‘강강술래’라고 하는 것이 옳다. /네이버
핀란드의 정치가, 법률가 케코넨(Kekkonen, Urho, 1900~1986)은 피엘라베시 출생, 1928년 헬싱키대학을 졸업하고 1936년 동 대학에서 민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36년 농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 이후 법무장관 ·내무장관을 역임하였다. 1950년 총리를 거쳐 1956년 대통령에 취임, 1962 ·1968 ·1978년 연속해서 재선되었다. 비동맹중립정책을 취하여 1961년 베를린위기 때 소련으로부터 압력을 받았으나 직접 소련을 방문, N.S.흐루시초프에게 자국의 입장을 양해시킴으로써 국민의 두터운 지지를 획득하였다. 1981년 건강악화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naver
1962 - '아라비아의 로렌스' 막바지 촬영 역사속 오늘[1962년 2월 15일] '아라비아의 로렌스' 막바지 촬영 1962년 오늘, 세계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아라비아의 로렌스' 촬영현장. /YTN 2013-02-15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2132107481362&s_mcd=0422&s_hcd=
1961 - 대구 서문시장에 큰 불 역사속 오늘[1961년 2월 15일] 대구 서문시장에 큰 불 설날 명절 분위기에 싸여있던 1961년 오늘! /YTN 2013-02-15
[어제의 오늘]1953년 제1차 통화개혁 단행 ㆍ악성 인플레 잡기 큰 효과 못 거둬 통화개혁(currency reform): 평가(平價)의 변경, 새로운 통화체계·통화단위의 채용 등 통화제도에 대한 대폭적 개혁조치의 총칭. 전쟁 발발 전날인 1950년 6월24일 558억원이던 화폐발행액은 52년 말에는 1조원을 돌파했고, 통화개혁 전날인 53년 2월14일에는 1조1367억원을 기록했다. 수요와 공급, 통화량 등 모든 측면에서 악성 인플레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물가는 해방직후에 비해 무려 18배나 급등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인플레를 잡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허사였다. 전쟁으로 누적된 인플레를 정리하는 동시에 산업의 부흥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이 절실했다.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이 통화개혁이었다. 화폐단위는 100 대 1로 평가절하됐고 원(圓)에서 환으로 이름도 바뀌었다. 임지영 기자 iimii@kyunghyang.com /경향닷컴 2011-02-14 21:09:3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2142109375&code=100100&s_code=ap005
1946 - 좌익진영,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 오늘의 역사 (2월 15일)[1946년] 좌익진영,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 1946년 2월 15일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됐다. 민전에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계 29개 정당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비롯한 全우익 정당사회단체와 중도파 정당들이 연합해 비상국민회의를 구성하자, 반탁세력에 대항하고 합법적 찬탁 지지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 민전 결성의 배경이었다. 좌익의 결집된 의사표명 집단으로 활동하던 민전의 위치가 불확실해진 것은 11월의 남로당 결성 후부터였다. 그럼에도 12월 29일 남산에서 15만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미소공위 속개를 위한 군중대회를 열었는가 하면 1947년 3·1절에는 남산에서 10만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따로 기념식을 갖고 공위 속개를 촉진했다. 하지만 수명을 다해가는 민전은 1948년 5·10총선거와 8월15일의 남한 단독정부수립과 더불어 소멸한다. 1948년 북민전과 합동, 조국전선으로 변모한다. /조선닷컴 2017-02-15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6_0293 1942 - 싱가포르 영국군인, 일본군에 항복 [오늘의 역사] (1942. 2. 15) 일본, 싱가포르 점령 /브리태니커 2017-02-15 http://premium.britannica.co.kr/history/default.asp?num=521 (참고) [역사 속의 인물] 불운한 장군 아서 퍼시벌 "예스냐 노냐?"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가 "항복조건을 협상하고 싶다"고 한 영국군 사령관 아서 퍼시벌(1887~1966)을 이렇게 윽박질렀다. 잔말 말고 항복문서에 서명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상징하듯 싱가포르 함락은 영국군 사상 최대의 치욕이었다. 싱가포르 방어군 8만여 명을 포함, 말레이 주둔 영국 연방군 13만6천 명이 항복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일시에 항복한 것은 영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하다. 1887년 오늘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오지 않았지만 장교양성 과정을 거쳐 1차대전에 참전한 이후 고속 승진을 거듭해 중장까지 올랐다. 싱가포르 함락 당시 그의 병력은 8만8천 명에 달했지만 3만6천 명의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물과 석유, 탄약 등 모든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막느라 혼이 빠진 본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도 물자 부족이 심각했다. 그가 좀 더 투지를 보였다면 싱가포르를 지킬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야마시타도 인정했다. 종전 후 그는 자신의 전략이 "효과있는 허세였다"고 털어놨다. 죽기로 싸우면 이길 수 있었지만 일본군의 허세에 겁부터 먹은 '새가슴'이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12월 2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4522&yy=2011
- 'Alarm, 1919, Family' - 'Our Lady of Malevolent Hearts Tenderness'
- 'The Red Horse' - 'Mother and Child, Petrograd, 1918'
- 'Self-portrait, 1918'
1939 - 러시아의 화가 페트로프봇킨(Petrov-Vodkin, Kuz'ma) 사망 페트로프봇킨 [Petrov-Vodkin, Kuz'ma Sergeevich, 1878.11.5~1939.2.15] 러시아의 화가. 제정 말기와 소비에트기에 걸쳐 활약하였다. 모스크바미술학교의 V.A.세로프 교실에서 공부하고(1897∼1905) 뮌헨으로 가서 아슈베 교수의 지도를 받고 귀국 후 ‘미르 이스쿠스토바(예술세계)’ 등의 모더니즘 그룹을 편력하였다. 초기의 야심작으로 상징과 색채가 대담한 《노는 아이들》(1911) 《붉은 말의 목욕》(1922)과 일련의 농촌 모자도(母子圖)가 있으며, 혁명 후에는 《1818년의 페테르부르크》(1920) 《코미사르의 죽음》(1928)이 대표작이다. 격변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한 전율과 태동하는 새 질서 속에서 긴장된 기대감이 미묘하게 교차하며, 적(赤) ·주적(朱赤) ·담청(淡靑) 등 선명한 발색과 사각적(斜角的) 비전으로 엮어낸 비범한 공간감각이 담채의 차분한 재질적 효과를 나타낸다. /네이버
- German KdF car 1936 - 히틀러, '국민차(Volkswagen)' 제조계획 발표 오늘의 역사 (2월 15일)[1936년] 히틀러, ‘국민차(Volkswagen)’ 제조계획 발표 히틀러의 두 가지 꿈은 ‘세계정복’ 과 ‘국민차(Volkswagenㆍ폴크스바겐)’ 보급이었지만, 그는 생전에 후자만 달성했다. 1936년 2월 15일, 그는 1차대전 패전 후 도로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며, ‘폴크스바겐’ 제조계획을 발표, “전국민에게 차 한대씩 나눠 주겠다” 는 공약을 내걸었다. 1934년 5월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히틀러와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가 함께 차를 마셨다. 이른바 ‘천사와 악마의 만남’. 히틀러는 훗날 ‘딱정벌레’(Beetle)란 이름을 얻은 차량의 기본틀을 이때 제시한다. ‘보통사람’ 이 굴릴 수 있고, 가족 모두(5인) 탑승하며, 최고시속 100km를 내는 공냉식 엔진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불가능하리란 예상과 달리 포르셰는 독일자동차공업협회(RDA)와 함께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1938년 5월 팔레르스레벤(볼프스부르크)에 폭스바겐 생산공장이 생겼다. 이듬해 2차대전이 터지자 공장은 로켓 전투기 폭탄 등 군수품 제조에 참여해야 했고, 폴란드 러시아 헝가리 등 나치 점령지역에서 징발한 강제 노역이 이뤄졌다.‘히틀러 차’ 는 내수용에서 군수용으로 전환되면서 견고함을 입증했지만, 종업원 대부분을 차지한 강제 노역자들이 구타와 고된 노동으로 숨져갔다. 폭스바겐은 여전히 나치 협력의 멍에를 지고 있다. /조선닷컴 2017-02-15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328_0020
오늘의 역사 (2월 15일)[1927년]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창립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1927년 2월 15일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항, 정치-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한 독립운동단체 ‘신간회’를 창립했다. 안재홍 백관수 신채호 등 34인이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월남 이상재가 초대 회장에 추대됐다. 신간회는 창립 때부터 조선일보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대부분의 지회가 조선일보사 지국이었고 일제 탄압속에서도 조선일보는 `신간회 기사일속` `신간회 각지 소식`이란 고정난까지 두었을만큼 신간회 대변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국내외에 100여개가 넘는 지회를 조직했고 회원도 많을 때는 4만여명에 달했다. 1920년대 중반이후 신간회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민족독립이론을 발전시킨 점이다. 3.1운동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면서 자유주의를 기저로 한 민족주의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러던 것이 신간회에 의해 민족독립을 상위개념으로 하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결합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를 지원하는 한편 대규모의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조병옥 이관용 등 간부 44명이 체포돼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창립 이래 해산된 1931년 5월까지 4년여 동안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해온 신간회가 해산한 것은 일제의 직접적 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좌우갈등을 극복하지 못해서였다. /조선닷컴 2017-02-15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6_0291
박화목 [朴和穆, 1924.2.15~2005.7.9] 호는 은종(銀鐘)이다. 1924년 2월 15일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태어나, 평양신학교와 만주 봉천 동북신학교를 거쳐, 한신대학교 선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41년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그 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구원과 동심의 세계를 서정적으로 그린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한국 아동문학 발전에 한 몫을 하였다. 1957년 첫 시집 《초롱불》을 출간한 이래 《시인과 산양(山羊)》(1958), 《그대 내 마음의 창가에 서서》(1960), 《꽃 이파리가 된 나비》(1972), 《천사와의 씨름》(1975), 《이 사람을 보라》(1986), 《순례자의 기도》(1989) 등 모두 16권 시집·동시집을 출간하였다. 그밖에 저서 《아동문학개론》(1995)을 비롯해, 수필집 《보리밭》 《그 추억의 길목에서》, 동화집《아기별과 개똥벌레》 《인형의 눈물》등을 남겼다. 가곡 〈보리밭〉과 동요 〈과수원길〉의 작사가로도 유명하며, 2005년 7월 9일 숨을 거둘 때까지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기독교방송 편성국장,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아동문학회장, 크리스천문인협회장, 한국열린문학회장, 한국아동문학협회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기독교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 한국전쟁문학상, 옥관문화훈장, 황희문화예술상, 한국아동문화대상 등을 받았다. /naver
1915 -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언론인 클라우디아 존스(Jones, Claudia) 출생 존스 [Jones, Claudia Cumberbatch, 1915.2.15~1964.12.24] Claudia Cumberbatch Jones (15 February 1915—24 December 1964) was a black nationalist, political activist, journalist and Communist in the United States. She served as secretary for the Women's Commission of the CPUSA and was tried alongside its president, her friend Elizabeth Gurley Flynn, and 11 other communist leaders. She is remembered in the UK as "the mother of Notting Hill Carnival". Born in Belmont, Port of Spain, Trinidad, she moved to New York City at eight years old, her family's emigration motivated by the post-war cocoa price crash in Trinidad. Her mother died five years later, and her father eventually found work to support the family. She went on to win the Theodore Roosevelt Award for Good Citizenship at her junior high school. Due to poor living conditions, in 1932 she was struck with tuberculosis, a condition that irreparably damaged her lungs and plagued her for the rest of her life. Communist and Civil Rights Activism in the US and the UK http://en.wikipedia.org/wiki/Claudia_Jones
알런 [Arlen, Harold, 1905.2.15~1986.4.23] 버펄로 출생. 15세 때 클럽의 피아니스트가 되고, 그후 피아니스트 겸 가수로서 활약하였다. 1927년 뉴욕시로 나와 30년에 작곡한 《게트 해피》로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고, 이후 영화주제가 《무지개 저편에》, 뮤지컬 《블루머 걸》 《세인트루이스의 소녀》 《꽃집》 등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naver
1903 - 테디 베어 美서 첫선 [책갈피 속의 오늘]1903년 테디 베어 美서 첫선 학창시절, 짝사랑하는 애가 생기면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http://news.donga.com/3//20070215/8407881/1
오리크 [Auric, Georges, 1899.2.15~1983.7.24] 로데브 출생. 파리음악원 재학중에 사티, 라벨, 스트라빈스키 등의 근대양식의 영향을 받아 지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인정을 받고, 특히 극장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20년대에 들어서는 오네게르, 미요 등과 교유하며 ‘6인조’에 참여, 이 무렵부터 10년간은 현대음악에 관한 평론활동도 하였다. 그는 음악가로서는 드물게 사회적 관심이 깊어 1936년에는 R.롤랑의 《7월 14일》을 작곡하여 이목을 끌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P.엘뤼아르의 시 《불행한 프랑스》를 작곡하는 등, 반나치 레지스탕스운동에 가담하였다. 작품에는 관현악곡과 가곡 등도 많으나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처녀의 호수》 《자유를 우리에게 A Nous la liberte》(1932), 전후의 《오르페 Orphee》 《미녀와 야수 L’Agle
고부군민은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1894년 1월 10일(음력)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naver
배리모어 [Barrymore, John, 1882.2.15~1942.5.29] 미국의 연극배우. '멋진 프로파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배우로, 정중한 남자 주연배우 역과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햄릿의 연기로 유명하다. 연극배우인 모리스 배리모어와 조지애나 배리모어의 아들로,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다가 1903년 미국으로 돌아와 연극에 데뷔했다. 가벼운 희극의 배우로서 인기를 모으기도 했지만, 심각한 역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출연한 중요한 작품으로는 〈정의 Justice〉(1916)·〈피터 이벳슨 Peter Ibbetson〉(1917)·〈농담 The Jest〉(1919)·〈리처드 3세 Richard Ⅲ〉(1920)·〈햄릿 Hamlet〉(1922 뉴욕, 1925 런던) 등이 있다. 1913년부터 영화에 출연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Dr. Jekyll and Mr. Hyde〉(1920)·〈귀여운 장난꾸러기 Beloved Rogue〉(1927)·〈모비 딕 Moby Dick〉(1930)·〈그랜드 호텔 Grand Hotel〉(1932)·〈8시의 만찬 Dinner at Eight〉(1933)·〈변호사 Counsellor-at-Law〉(1933)·〈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1936)·〈멋진 프로파일 The Great Profile〉(1940) 등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다. 재능이 뛰어나서 당대의 가장 훌륭하고 멋진 배우로 평가되었지만, 연기력보다는 가끔 보여주는 화려하면서도 고약한 행동으로 더 잘 알려졌다. 1977년 존 코블러가 쓴 그의 전기 〈천국의 저주받은 자들 Dammed in Paradise〉이 출판되었다. 배리모어가의 2세들 중(존 외에 에텔과 라이오넬이 있음) 존만이 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연극 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딸 다이애나(1921~60)는 장래가 촉망되는 여배우였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자주 연기활동을 중단하다가 결국 자살했다. 1958년 그녀의 자서전 〈너무 많이, 너무 일찍 Too Much, Too Soon〉(1957)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존 드루 배리모어로 알려진 그의 아들 존 블리스 배리모어 2세(1932~)도 영화배우였다. 그는 영화 〈이티 E. T.〉(1982)에 출연한 아역배우 드루 배리모어(1975~)의 아버지이다. /브리태니커
1875 - 러시아의 안과의사 필라토프(Filatov, Vladimir) 출생 필라토프 [Filatov, Vladimir Petrovich, 1875.2.15~1956.10.30] Vladimir Petrovich Filatov (Russian: Владимир Филaтoв, 15 [O.S. 27] February 1875, Saransk, Russian Empire - 30 October 1956, Odessa, Ukrainian SSR) was a Russian ophthalmologist and surgeon best known for his development of tissue therapy. He introduced the tube flap grafting method, corneal transplantation and preservation of grafts from cadaver eyes. He founded The Filatov Institute of Eye Diseases & Tissue Therapy in Odessa, Ukraine. Filatov is also credited for restoring Vasily Zaytsev's sight when he suffered an injury to his eyes from a mortar attack during Battle of Stalingrad. First corneal transplantation was attempted by Filatov at 28 February, 1912, but the graft grew opaque. After numerous attempts over the course of many years, Filatov achieved a successful transplantation of cornea from a diseased person on 6 of May, 1931. http://en.wikipedia.org/wiki/Vladimir_Filatov
섀클턴 [Shackleton, Ernest Henry, 1874.2.15~1922.1.5] 아일랜드의 킬키어 태생이다. 덜위치칼리지를 졸업하고, 1901년 R.F.스콧을 따라 남극을 탐험하였다. 1907년 탐험대를 조직하여 님로드호(號)로 남극 탐험에 나섰다. 1909년 1월 9일 남위 88°23'에 도달하여, 그때까지 인류가 도달할 수 있었던 최남단에 이르렀다. 이 탐험항해에서 남자극(南磁極)을 발견하였고, 에러버스 화산(火山)을 조사하는 등 학술상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1919년 이 탐험의 공로가 인정되어 경(卿)의 칭호를 받았다. 1914년 인듀어런스호로 재차 남극을 탐험했으나 중도에 웨들해(海)에서 빙산을 만나 난파, 선원 5명과 함께 6.6m 길이의 작은 보트를 타고 1,280km 떨어진 사우스조지아섬으로 구조를 청하러 가, 엘리펀트섬에 남겨두고 온 전 승무원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1921년 3번째로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으로 향했으나, 중도에 사우스조지아섬 앞바다에서 심장병 발작으로 죽었다. 왕립지리학회 외에 많은 상을 받았다. 저서에 《The Heart of the Antarctic》(1909), 《South》(1919)가 있다. /naver
오일러 켈핀 [Euler-Chelpin, Hans (Karl August Simon) von, 1873.2.15~1964.11.7]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여러 가지 효소를 연구하여 현대 효소화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베를린대학교, 괴팅겐대학교, 뵐츠부르크대학교 등에서 배웠다. 처음에는 물리화학을 연구하고 스톡홀름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점차 생화학 분야로 옮겼다. 알코올발효 효소계로서의 치마아제(Zymase)와 공존하여 발효를 지탱하는 저분자물질로서의 코치마아제(Cozymase)의 개념을 세우고, 1929년 A.하든과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그해 스톡홀름대학교의 생화학연구소장이 되었다. 효소 외에 비타민 ·필수지방산 등 생리화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연구를 하였다. /naver
기욤 [Guillaume, Charles Edouard, 1861.2.15∼1938.6.13] 스위스의 플뢰리에 출생. 취리히공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포병 사관으로 병역을 마친 후, 1883년 파리 근처에 있는 세브르에 신설된 국제도량형국(國際度量衡局)에서 근무하였다. 초기에는 온도 측정을 연구하였고, 기상학에 대한 중요 문제, 특히 새로운 표준 미터법이 정해져 가고 있던 당초의 문제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수은온도계의 보정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미터 원기(原器)의 열팽창을 확립하기 위하여 도량형국이 사용하는 온도계에 세밀한 눈금을 정하였다. 또 니켈강(鋼)을 연구하면서 불변강(不變鋼:앰버)을 발명하였고(1897), 그 응용에 관한 여러 가지 연구 발표를 하였다. 이 업적으로 인하여 192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15년 국제도량형국장에 취임하여 1936년 퇴임, 그 후에는 명예국장으로 지냈다. /naver
1857 - 러시아의 작곡가 글린카(Glinka, Mikhail) 사망 글린카 [Glinka, Mikhail (Ivanovich), 1804.6.1~1857.2.15] 러시아의 작곡가. 1804년 스몰렌스크주에서 출생하였다. 대지주의 아들로 페테르부르크에서 F.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나, 음악가가 될 마음이 없어 처음에는 교통성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26세 때 건강문제로 이탈리아와 독일로 여행을 떠나, 이 여행 중 베를린에 머문 것이 그의 생애를 결정지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화성과 작곡을 S.W.덴에게 배우고,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개시하였다.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는 푸슈킨, 주코프스키 등 문학서클의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의 자극으로 오페라 《이반 수사닌》(1836)을 썼는데, 이것이 러시아음악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를 비롯한 여러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1844년에 다시 외국여행을 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유럽 각지를 순방하였다. 그러는 동안 베를리오즈와 친교를 맺고, 에스파냐에서는 작곡을 위한 소재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첫 작곡가,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이는 19세기 러시아 음악의 양식을 결정하는 데 어떠한 작곡가보다도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며, 차이코프스키나 러시아 국민악파의 음악도 이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외의 작품으로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한 화려한 카프리치오소》(1845) 《카마린 스카야》(1848) 등의 관현악곡이 유명하다. /naver
루트 [Root, Elihu, 1845.2.15~1937.2.7] 1845년 2월 15일 뉴욕주(州) 클린턴에서 출생하였다. 변호사로 출발, 뒤에 정계에 진출하여 미국 공화당의 유력자로서 1899~1904년 대통령 W.매킨리, T.루스벨트 밑에서 각각 육군장관을 지냈고, 육군대학 설치 등의 군제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또 쿠바·필리핀에 대한 정책을 수행하였다.
1835 - 그리스의 작가, 초대 IOC 위원장 비켈라스(Bikelas, Demitrious) 출생 비켈라스 [Bikelas(Vikelas), Demitrious, 1835.2.15~1908.7.20] After a childhood spent in Greece and Constantinople, he found fortune in London, where he married. He then moved to Paris, on account of his wife. Abandoning business, he dedicated himself to literature and history, and published numerous novels, short stories and essays, which earned him a distinguished reputation. Because of his reputation and the fact that he lived in Paris, he was chosen to represent Greece in a congress called by Pierre de Coubertin in June 1894, which decided to re-establish the Olympic Games and to organise them in Athens in 1896, designating Vikelas to preside over the organisation committee. After the Games were over, he stepped down, remaining in Athens until his death in 1908. http://en.wikipedia.org/wiki/Demetrius_Vikelas
(발췌) 쿠베르탱은 스포츠야말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세계 청년들의 희망이라고 믿고 1889년 ‘프랑스 스포츠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는 이와 더불어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의 청년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우정을 나누게 한다면 이는 곧 세계평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1832 - 쿠바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루이즈 에스페라도(Ruiz Espadero, Nicolás) 출생 루이즈 에스페라도 [Ruiz Espadero, Nicolás, 1832.2.15~1890.8.30] Nicolás Ruiz Espadero (Havana, February 15, 1832 – Havana, August 30, 1890) was a Cuban pianist, composer, piano teacher and editor of the posthumous works of American composer-pianist Louis Moreau Gottschalk. At his time Espadero was the most famous Cuban composer, the only one published abroad, the only one who, at least in the eyes of his Cuban contemporaries, could compete with composers from Europe. Yet of all the Cuban composers of th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he was the most parochial and idiosyncratic one. Without schooling and formal musical training, he grew into a chronically shy person, emotionally dependent on his mother. He composed and practised a lot, but gave few concerts and had little contact with other (normal) people. Espadero never left Cuba, indeed he seldom ever left Havana or for that sense his own house, where he lived with seventeen cats, surrounded by stacks of European music scores, mostly mediocre ones. Universally described as a recluse, he died from accidental burns after his usual bath in alcohol - one of several musicians to die of rather unnatural causes (Jean-Baptiste Lully and Charles-Valentin Alkan would be among some of the other ones). Although brought up in a cosmopolitan atmosphere and surrounded by black Cuban music, he was the one Cuban composer who adopted but little of the local music tradition that so abundantly inspired Manuel Saumell before and Ignacio Cervantes after him. He had quite a few pupils, and he must have taught them well, because some of them became fine musicians themselves. Nothing of Espadero’s music has remained in the repertoire, some of it perhaps deservedly so, yet some of his later pieces – allegedly his best output, albeit never printed - would certainly warrant a closer look. A CD with a selection of his piano music came out in 2006.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Nicol%C3%A1s_Ruiz_Espadero
Susan B. Anthony dollar /wikipedia
앤서니(앤소니) [Anthony, Susan B(rownell), 1820.2.15~1906.3.13] [책갈피 속의 오늘]1820년 여성 참정권 代母 美 앤서니 출생 “남자 햇빛과 여자 햇빛, 남성용 봄과 여성용 봄이라고 말한다면 우스꽝스럽지 않겠는가. 인간의 정신도 성별을 따질 수 없을진대 남자다운 교육, 여자다운 교육이니 하는 것은 더 우스꽝스럽지 않은가.”(수전 앤서니 씨의 글 일부) 1820년 2월 15일 여성 참정권 운동의 ‘어머니’ 앤서니 씨가 미국 애덤스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정신과 관련해 성별을 따지는 것이 전혀 우스꽝스럽게 여겨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젊은 시절 금주(禁酒)운동에 열성적이던 앤서니 씨는 1853년 술 판매 금지법을 만들자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서명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청원 자체가 기각됐다. 당시 여성이 대학 교육을 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성인 벨바 로크우드 씨가 1869년 조지 워싱턴대의 전신인 컬럼비안칼리지 법학부에 원서를 내자 학장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부인, 당신의 입학을 허용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남학생 법학도들의 정신이 산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크우드 씨는 1873년 어렵사리 변호사가 됐지만 법정에 설 수 없었다. 여성 변호사에게도 법정 변론권을 달라고 청원했지만 법원은 “남편인 판사 앞에서 아내인 변호사가 변론하는 등 ‘위험하고 괘씸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는 힘겨운 로비 끝에 1879년 여성 변호사로서는 처음으로 법정에서 변론했다. 여성이 정치 지도자를 뽑을 수 있게 된 것은 더 훗날이다. 앤서니 씨는 1872년 대통령선거 때 시험 삼아 투표를 했다가 벌금형을 받았다. 유권자가 아닌데 투표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1869년부터 1906년까지 의회가 열릴 때마다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다. 전미여성참정권동맹 등의 단체도 설립했다. 앤서니 씨가 사망한 지 14년 뒤인 1920년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는 수정헌법 19조가 통과됐다. 이는 ‘수전 앤서니 수정법안’으로 불린다. 여성이 현재의 권리를 갖기까지 벌인 많은 투쟁은 지금 보면 앤서니 씨의 말처럼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50년 후에 혹 우스꽝스럽게 보일 불합리와 불평등이 지금도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동아닷컴 2005-02-14 18:51:00
매코믹 [McCormick, Cyrus Hall, 1809.2.15~1884.5.13] 1831년부터 기계 리퍼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는 농부·대장장이·발명가인 로버트 매코믹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학력은 지방 학교에서 교육받은 것이 전부이다. 신중하고 단호하며 사려깊었던 그는 전생애를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보냈다. 아버지 로버트 매코믹은 몇 가지 실용적인 농업용 기구들을 발명했지만 미국과 영국의 다른 발명가들처럼 성능이 뛰어난 리퍼를 발명하는 데는 실패했다. 1831년 22세 때 사이러스 매코믹은 리퍼 발명에 착수했다. 이때 발명한 2륜마차같이 생긴 리퍼는 2개의 진동 절단날, 곡물을 옮기는 릴, 떨어지는 곡물을 받는 밑받침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 기계는 후에 만들어진 곡물수확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브리태니커
1781 - 독일의 극작가, 비평가 레싱(Lessing, Gotthold Ephraim) 사망 레싱 [Lessing, Gotthold Ephraim, 1729.1.22~1781.2.15] [책갈피 속의 오늘]1781년 獨극작가 레싱 사망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1729∼1781) 선생님, 오늘은 독일의 빛나는 극작가이자 사상가였던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225년 되는 날입니다. 이 자리에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괴테, 실러 등 나보다 더 큰 별들도 아직 등장하지 않았는데 보잘것없는 사람을 초대해 주다니.”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유럽과 아랍이 심각한 문화충돌을 겪고 있습니다. 덴마크 신문이 마호메트의 얼굴을 풍자만화의 소재로 삼은 데 격분한 이슬람교도들이 유럽인 관련 시설을 공격하는 등 소동이 일어났지요. “나는 생애를 통해 모든 종교가 서로 관용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희곡 ‘현자(賢者) 나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기독교인이거나 유대교인, 이슬람교도이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보다 인간 형제 아닙니까? 관용과 인본주의 없이는 인간이 세상에 행복하게 공존할 수 없습니다.” ―방금 언급하신 ‘현자 나탄’을 비롯한 여러 작품 속에서 선생님은 비기독교인을 선량하고 이성적인 존재로 그리셨습니다. 그 때문에 고초도 겪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종교의 가르침이 주는 본질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적대시하는 것은 자신이 모시는 예수를, 모세를, 마호메트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작품 속에서 유대인 나탄이 말하는 ‘반지의 비유’가 특히 인상 깊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 동방의 왕가가 오팔 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왕들은 대대로 가장 덕이 높은 아들에게 그 반지를 물려주었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왕이 복제품 반지를 두 개 만들어 세 아들에게 하나씩 반지를 물려주었던 거죠. 사람들은 어느 반지가 진짜인지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판관은 현명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대대로 덕이 높은 후계자가 반지를 소유해 왔으므로, 세 명의 아들은 각각 자신의 행실을 통해 진정한 반지의 주인이 자신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바로…. “그렇습니다. 여러 종교가 저마다 자기만이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주장에서 그치지 말고 모든 종교인은 자신의 덕을 통해, 인간 사회에 주는 선과 광명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진정 선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입증해야지요.”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동아닷컴 2006-02-15 03:03:00 http://news.donga.com/3//20060215/8275474/1
1775 - 250대 로마 교황 비오 6세(Pius Ⅵ) 취임 교황(재위 1775∼1799). 이탈리아 체세나에서 마르코 아우렐리오와 안나 데레사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1735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페라라 대학에서 법학을 계속 공부하다가 이곳의 교황 대사인 T.루포의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1740년에 새 교황으로 베네딕토 14세(재위 1740∼1758)가 선출되면서 루포가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로 임명되자 그의 교구를 대신 관리하였다.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침공하여 볼로냐·페라라·모데나·로마냐 등의 교황령을 잃었으며, 1798년에는 로마가 점령되고 로마공화국이 선언되자 교황청은 로마에서 쫓겨났고 남아 있던 다른 교황령마저 잃고 말았다. 프랑스 군대에 의해 1799년 3월 28일 프랑스 남부에 있는 발랑스로 끌려간 교황은 그곳에서 같은 해 8월 29일에 사망하였으며, 1802년 2월에 그의 유해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이장되었다. /naver
1751 - 독일의 초상화가 티슈바인(Tischbein, Johann Heinrich Wilhelm) 출생 티슈바인 [Tischbein, Johann Heinrich Wilhelm, 1751.2.15∼1829.6.26] 독일의 초상화가. 독일의 철학자인 괴테의 친구였다. 티슈바인은 베를린의 프로이센 궁정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미술활동을 시작했다. 1779년 이탈리아에 갔으며 1789년 나폴리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799년 전쟁으로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독일 북부로 피신했다. 티슈바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캄파냐에서의 괴테 Goethe in the Campagna〉는 두 사람이 로마에서 나폴리로 여행한 1787년에 그려졌다. 괴테는 티슈바인에게 신고전주의 운동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권유했지만, 그는 후에 독일 낭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티슈바인은 3세대에 걸쳐 20명이 넘는 화가를 배출한 가문의 일원이었다. 이 가문의 다른 중요한 화가로는 헤센의 카셀에서 궁정화가로 초상화와 신화적인 그림을 그린 대(大)요한 하인리히 티슈바인(1722~89), 초상화가인 요한 발렌틴 티슈바인(1715~68), 안톤 빌헬름 티슈바인(1730~1804)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 The sculpture coin featuring Georg Rafael Donner
- 'Vienna Academy of Fine Arts, medal' - 'Donner Fountain', Vienna
1741 - 오스트리아의 조각가 게오르크 라파엘 도너(Donner, Georg Raphael) 사망 도너 [Donner, Georg Raphael, 1693.5.24~1741.2.15]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 사이의 과도기적 작품으로 유명한 조각가. 청년시절 하일리겐크로이츠에서 성직과정을 밟던 도너는 조각가 조반니 줄리아니를 만나 조각을 해볼 것을 권유받고 줄리아니의 화실에서 작업하다가 나중에 빈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몇 년 동안 잘츠부르크에서 살다가 빈으로 되돌아가 그곳의 노이어 마르크트(새로운 시장)에 〈신의 섭리 Providence Fountain〉를 비롯한 유명한 분수(1738~39)를 조각했다. 본래 이 조각상은 도너가 애용하던 재료인 납으로 주조되었으나 1873년에 청동 복제품으로 대체되었다. 다른 작품으로는 빈 시청 안마당에 세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분수〉 및 빈 벨베데레에 있는 〈황제 카를 6세 Emperor Charles Ⅵ〉가 있다. 세련된 형식과 뚜렷한 윤곽은 동료 및 선배들의 과장된 바로크 양식과 대조를 이루며 추종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좀더 고전적인 양식을 받아들이게 했다. /브리태니커
루이 15세 [Louis XV, 1710.2.15~1774.5.10]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715∼1774). 루이 14세의 증손. ‘친애왕(le Bien Aime)’이라 불렸다. 부르고뉴공 루이와 M.A.사부아의 아들로 베르사유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왕위에 오르자 오를레앙공 필리프가 1723년까지 섭정하였다. 섭정 때에는 루이(14세) 때의 전제에 대한 반동으로 자유와 해방감에 싸였고 언론이 활발해졌으며 신학 대신 철학이 일어났는데, 몽테스키외, L.S.볼테르 등이 정부나 제도에 대한 공격에 선봉을 섰다. 섭정 필리프가 1723년에 죽자 부르봉공이 뒤를 이었으나 1726년부터 왕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예리한 감수성과 두뇌를 가졌으면서도 루이 14세와는 달리 소심하고 방탕하여 엄격한 의식이나 정치를 싫어한 왕은 정사를 A.H.플뢰리에게 맡겼다. 플뢰리는 재정질서의 회복, 통화 안정, 무역 확대에 힘을 기울여 한때 국력이 회복되었으나, 폴란드계승전쟁, 오스트리아계승전쟁 등에 말려들었다. 7년전쟁 때 왕은 애인 퐁파두르의 진언을 받아들여, 숙적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고 영국과 싸웠으나 대패하여 신대륙과 인도의 광대한 영토를 잃었다. 왕은 전후의 재정 궁핍을 타개하기 위하여 특권자에게도 과세하려다가 파리고등법원과 충돌하였다. 왕의 전 애인 퐁파두르와 새로운 애인 뒤바리의 책략으로 추방당한 재상 E.F.de 슈아죌의 뒤를 이은 르네 드 모푸는 고등법원을 폐지하고 새로운 재판소를 만들며 연금의 난발을 막고 부동산세와 염세(鹽稅) 등의 징수로 재정적자를 메우려 하였다. 그러나 모순은 그대로 다음 시대로 이어져 점차 프랑스를 혁명의 길로 몰고 갔다. /naver
- 'The Wet Nurse' 방 로 [Van Loo, Charles-Andre, 1705.2.15~1765.7.15] Carle Van Loo라고도 하며, Van Loo는 Vanloo라고도 씀.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의 화가. 18세기 중엽에 유럽 왕족과 상류층 사람들을 그린 우아한 초상화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플랑드르계의 유명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인 장 바티스트 방 로가 그를 돌보면서 그림을 가르쳤고 로마에도 데려갔다. 그들은 파리로 돌아와 1724년에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방 로는 1727년에 로마로 다시 가서 여러 개의 상을 받았고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토리노에 들러, 사르데냐 왕의 궁전에 그림을 그렸다. 1734년에 파리로 돌아온 뒤 1737년에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고 1763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왕의 전속 수석 화가로 임명되었으며 프랑수아 부셰와 함께 파리 상류층과 외국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퐁파두르 부인은 벨뷔에 있는 저택에 그림을 그려 달라고 의뢰해 왔다. 방 로는 로코코 시대에 프랑스에서 역사적·종교적 주제를 잘 그렸던 대표적인 화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표현 양식은 매우 다양하고 기교가 상당히 뛰어났지만 특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니콜라 랑크레를 연상시키는 그의 세밀한 풍속화는 특히 요한 하인리히 티슈바인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브리태니커
르무안 [Lemoyne, Jean-Baptiste, 1704.2.15~1778.5.25] 흉상 조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조각가. 아버지 장 루이 르무안과 로베르 르 로렝의 제자였으며, 루이 15세의 조각가로 임명되었다. 그는 왕의 초상을 많이 제작했는데, 보르도(1743)와 렌(1754)의 궁전 광장에 놓여진 커다란 조상뿐 아니라 흉상으로도 만들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었다. 그는 볼테르(1748), 몽테스키외(1767), 퐁파두르 부인(1761) 등 그 시대 프랑스 사회 지도자들의 초상들도 많이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바로크 양식이며 로코코적인 우아한 장식성도 겸비하고 있다. 장 앙투안 우동,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 장 바티스트 피갈, 장 자크 카피에리 등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랑스 조각가들이 그에게서 조각을 배웠다. /브리태니커
- Italy, 2000 Lire (1973, Banknote)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1564.2.15~1642.1.8] [오늘의 인물] 갈릴레오 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태어남 / 1642년 1월 8일 죽음 갈릴레오는 근대 과학, 특히 역학과 실험물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탈리아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이다. 그는 처음에는 피사대학교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학을 공부했으나,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피렌체대학교에서 수학 공부를 계속해 파도바대학교 수학교수가 되었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를 옹호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만든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망원경으로 달 표면을 관측하고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했다. 이런 연구들로 교회와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1633년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말년의 8년간을 자택연금 생활로 보낸 끝에 '진공' 연구로 유명한 제자 토리첼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1992년에야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오의 완전 복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브리태니커 2017-02-15 http://premium.britannica.co.kr/people/default.asp
"자연의 책은 수학기호로 쓰여 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멜란히톤 [Melanchthon, Philipp, 1497.2.15~1560.4.19] 인문주의자 로이힐린의 친족으로, 로이힐린과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12세에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들어갔고 17세에 튀빙겐대학교에 들어가서 교육·편집에 종사하였다. 1518년 비텐베르크대학교에 초빙되어 그리스어 교수를 하면서 루터의 사상에 공명하여 친교를 맺고, 라이프치히 논쟁에서는 그를 지지하였으며, 《신학강요(神學綱要)》(1521)를 펴내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조직신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 후 신학·철학 교수를 하며 1530년에는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신앙고백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썼다. 성서의 독일어 번역에도 협력하였으나, 온화한 성품의 학자여서 종교개혁운동에 표면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성직자의 새로운 교육제도, 일반 고등교육의 학제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김나지움 설립에 이바지하였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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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