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학문의 맥 유학의 거유 목은 이색을 길러낸 함창 김문의 학문 숭상
조선의 학맥은
중국 공자, 맹자, 주자
조선유학의 본 고장 경상도
신라시대는 유학의 시초인 중국 공자-주자를 이어
-(신라조)의상, 원효, 설총(경산(원효+요석공주)- 최치원
(고려조) 안향(백운동, 소수서원) - 우탁(丹陽)/백이정(藍浦) 권보(안동)-이제현(경주)
목은 이색 외가 영해(대문장가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金澤((이색의 외조부 함창김 9세) 重大匡贊成事 咸寧君 金饒(함창김 10세 목은 이색 외삼촌) 목은 이색(영덕에서 태어나 외가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음)
조선시대는 목은 이색의 제자 정몽주, 길재, 정도전 이숭인, 권근
-길재-김숙자-김종직(선산)-김굉필-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손중돈(손중돈의 처 함원군 선의 동생)이다
---이황(1501-1570)으로 이어 영남학파의 주류를 이룬다.
이황 -김성일-장흥효-이휘일 현일(재령이)-이재-이상정-남한조-유치명-김흥락 김도화 이상룡 유인식
-류성룡-정경세-류진-류원지-정도응-박손경-정종로-류심춘-류주목-허훈,허유-이원조-이진상-곽종석 이승희-김창숙 )
정구-장현광(인동)-장경우-장응일-장벽-장대림,장대열-장주-장복추-장석영,장지연
-허목-이하진-성호 이익 右派 안정복-황덕길-허전-허훈,허유-장지연
眉叟 許穆 (陽川허) 안정복-신경준-정상기-최한기-김정호/지리지 편찬 전통/이익
-이가환, 이중환
성호 이익 左派-권철신-정약용
정구-이윤우-이도장-이원정,원록-이담명,이한명-(김성탁-김낙행)-이만운
조선거유 목은 이색을 길러낸 함창 김문
匡靖大夫 都僉議贊成事 金澤자(함창 9세) 배위는 영양남씨 (이색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이색의 외조부모이다.
가정 이곡은 金澤의 사위이고 고려말 대유 목은 이색의 아버지로 처가에서 이색을 낳아 영덕 괴시리에서 이색은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대 문장가이고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에 추봉(追封)된 김택 외할아버지에게 한학을 익혔다.
金饒자(함창 10세 이색의 외삼촌) 重大匡贊成事 咸寧君 金饒는 홍건적의 난에 공민왕을 모시고 안동으로 피난하여 홍건적을 물리치는 계책으로 咸寧君으로 봉해졌다
金饒(김요 함창 10세)는 함창에 세워진 고령 가야왕(古寧伽倻王)의 후손으로 고려 충선왕때 함창에서 대 문장가이고 重大匡 都僉議贊成事에 추봉(追封)된 김택의 아들로 태어났다. 1320년(충숙왕7)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의 좌윤(左尹)을 역임하고 중국의 학사방(學士坊)에 유학하였다. 중국 유학중 거기의 과거에 급제하여 그의 문명(文名)은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1361년(공민왕10) 10월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니 부득이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하게 되었고 이때 김요 는 왕을 모시고 남으로 가게 되었다. 함창까지 내려 왔을 때 함창의 국사봉(國師峰)에 주둔하고 흙과 돌로 성을 쌓았다. 그리고 거기서 수비하면서 서울인 개경을 다시 찾고자 계책을 꾸몄다. 그해 12월 안동에서 전세를 만회하여 홍건적을 몰아내었다. 그 공으로 중대광찬성사(重大匡贊成事)함녕군(咸寧君)에 봉해졌다. 그의 충의와 절개가 남달랐다. 늙으막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창으로 내려왔다. 서강촌(西江村-현 공검면 예주리(曳舟里)에 청향정(淸香亭)을 짓고 생질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고 작은 배를 만들었다. 강 건너 가정(稼亭)에 사는 매형 가정 이곡과 만나면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강촌(江村)선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자연을 즐기며 지내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또 마을 이름은 예주촌(曳舟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중대광찬성사(重大匡贊成事)함녕군(咸寧君) 金饒는 (함창10세)
饒자의 아버지는 贊成事 澤자(함창 9세)이며,
饒자의 매형이 가정 이곡李穀
饒자의 생질이 목은 이색[牧隱(李穡)]
“목은 이색은 외조부 찬성사 김택의 영향을 받았다”라는 사실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님은 본관지가 충남 서천의 한산(韓山)으로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과 함께 고려 3은의 한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야은 길재를 포함해서 4은으로도 부른다. 그런데 목은을 제외한 3사람은 경상도 출신으로 알고 있었는데 목은 조차 경북 영해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자랑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색은 어릴 때 외가집인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외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며 자랐으며, 괴시리 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 이라 부르다가 고려말 목은 이색선생이(1328~1396)이 문장으로써 원 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박사(歐陽博士) 구양현(歐陽玄)의 괴시 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효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지었다고 한다.
아버지 가정 이곡(李穀, 1298~1351)이 경상도 영해지방에 살던 사족(士族) 간재(簡齋), 김택(金澤?~?)의 사위가 되어 그가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급제하기 전에 유람(遊覽)으로 여기에 와서 김택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고’고 했다. 또 하나 흥미를 자아내게 하는 것은 목은의 외할아버지 김택의 본관이 함창 김씨라는 점이고, 이색이 할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닦았다는 것이다.
李穡의 淸香亭記
외삼촌 중추(中樞) 치정공(致政公)이 조그만 한 못에 연꽃을 심고는 그 곁에 정자를 세우려고 사람을 급히 쫓아 글을 보내어, 그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물어 왔다. 색(穡)이 이제 병든 여가에 오직 용릉(龍陵)의 주렴계(周濂溪) 광풍제월(光風霽月)같은 깨끗한 흉금을 사모하게 된지라, 드디어 그의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는 말을 취하여 대략 그 뜻을 서술하고자 한다. 하늘과 땅이 처음 나누어질 때 가볍고 맑은 것이 위에 있게 되었는데, 인물이 생겨날 때 이 기운을 온전히 타고난 자는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었으며, 그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있어서도 향기 높은 덕으로써 신명(神明)을 감동케 함은 옛 하ㆍ는ㆍ주와 같은 번영이 극한 시대에 찾아보더라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용릉이 송 나라의 문명 시대를 당하여 오계(五季 후량ㆍ후당ㆍ후진ㆍ후한ㆍ후주) 시대의 어둡고 막힌 혼란한 정치가 가져온 재앙을 추도(追悼)하여 성인 경전(經傳)의 태극(太極)의 본지를 추리ㆍ해명하여 공맹(孔孟)의 도통(道統)을 이었는데 그의 애완(愛玩)함이 이같이 극진하여 〈애련설(愛蓮說)〉을 지어 밝히는 데 이르고도, 오히려 그의 의사를 다하지 못하여 특히 결론에 이르기를, “연꽃을 사랑하기를 나와 같이 할 자 어떤 사람일는지.” 하였으니, 아득하고 적막한 천 년 전에 후생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킴이 깊도다. 색이 늘그막에 경전을 추구할 제 날로 그를 경모하더니, 다행히도 외삼촌의 사랑하는 바도 용릉과 같은지라, 내가 기뻐서 날뜀도 평일과 다름이 있는 것이다. 내가 상상하건대 시골의 부형과 빈객이 이르면 술잔을 들어 권하며 연구(聯句)시를 지을 것인데, 갠 날 물결 위의 연꽃과 비오는 언덕 아래의 연꽃, 바람결의 잎새와 안개 속의 꽃봉오리는 마치 그림 같으면서 그림이 아니요, 시(詩)가 아니면서 시같은 것이다. 홍안 백발이 그 가운데에서 술 마시고 즐기며 노래하고 춤추니, 이것이 바로 갈천씨(葛天氏)의 백성이며 희황씨(羲皇氏)의 세월이 아니던가. 마음이 편하여 몸을 마음껏 펴고 기운이 강건한 속에 조용한 날을 보내니, 홀로 맑은 연꽃의 향기가 아니라도 외숙의 맑은 덕이 더욱 멀리 전파하여 자손에게 유물이 될 것이다. 후일에 늙음으로써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가 이웃집 빈터를 얻어서 집을 지어 정하고 외출하실 때 지팡이와 신발을 신칙하며 모시게 되면, 다시 외숙을 위하여 시를 지으리라. 무오년 동지 전 9일에 쓰다.
함문의 후예로 부끄럽없도록 바르게 살아라
너 자신을 알아라
단디 살아라(Do the right)
똑 바로 살아라(Do the right)
옳은 일을 하여라(義在正我)
착하게 살아라.(止於至善)
매사 진실 하라(立處皆眞)
모든 순간을 성실하게 살아라(卽事而誠)
모든 순간 하게 살아라(卽事而謙)
상을 많이 받아 자신을 빛내고, 가문을 빛내고. 나라를 빛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서기 2023년 고령가야기 1981(고령가야 건국 4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