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에 대한 小考
한국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노벨상 시상의 계절이 다가오면 우리나라에서 누가 후보에 올랐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옛날 소설가 김동리선생이 ‘사반의 십자가’를 쓸 때 노벨상 수상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후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작품성이나 인지도나 판매 부수에서 높은 평판을 받는 시인 혹은 소설가들이 수상대상으로 거론되곤 했지만 결과는 항상 좋지 않았고, 이것은 한국의 문인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국민들도 ‘그러면 그렇지’ 하는 혹은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반응이었다. 외국어로의 번역시스템이 미비해서라든지 아니면 다른 여러 이유 등이 이야기되어오고 있는데 문학인들뿐 아니라 국민들도 첫 노벨문학상 수상을 간절히 바란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가 아직 없는지, 그 주변적 상황은 무엇인지에 대한 전문문학평론가의 얘기를 읽을 기회가 있어 이를 인용한다.
‘..우리처럼 작가에 대한 호, 불호가 극단적인 분위기에서는 장애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는 작가가 정치적으로 중립성을 유지해야 된다는 점이다. 이는 인권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작가의 현실참여와는 다른 개념이다. 과도한 민족주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자기 관리를 잘 해서 사이버공간에 비난이 없어야 한다. 최근 국민적 여망을 받았던 분들이 미투 운동이나 표절문제로 구설에 오른 점은 한탄스럽다. 여기에 더하여 민족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춘 인문학적 대가들이 작가로서 나라에 버티고 있는가 하는 점도 들어간다..(중략)..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자 발표 때 선정 이유로 인류의 보편성을 지역 민족의 특수성을 통해 들여다봤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일본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림 속의 아름답고 열렬한 사랑과 표정의 상징들은 인류의 생명이 결합되는 것을 나타낸다.”(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 “보편적 타당성과 언어적 독창성으로 중국 소설과 드라마의 새 길을 열었다”(가오싱젠·2000년) “고향 이스탄불의 우울한 영혼을 추적하면서 문화의 충돌과 교차에 대한 새 상징을 발견해냈다.”(오르한 파무크·2006년) 등이 그러하다. 더구나 최근에는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나(산문;체르노빌의 목소리), 2016년 밥 딜런(가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순수문학을 전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도 수상했다. 즉 인접 분야에서 경계를 넘은 문학적 활동으로 세계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도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유조, ‘노벨문학상 죄담회에 붙여서’ 국제문예, 2019 문학심포지엄보고서)‘
노벨상 얘기가 나왔으니 문학상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공업국으로 오늘날 세계 수준에 오른 이 시점에 과학 분야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아직 없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과학 분야에서 2019년까지 22명(물리학상 9명, 화학상 8명, 생리학 의학상 5명)이 노벨상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사실 창피한 일이다. 필자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1990년대 중반 당시 과학기술처장관이 취임 후 첫 번째 발표한 내용이 우리나라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도록 정부가 전력을 쏟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취임 첫 기자회견이 과천의 과학기술처 대회의실에서 개최되는 자리에 필자가 있었는데, 장관의 그 발표가 있자 조선일보의 젊은 기자가 바로 첫 질문을 하였다. ’우리 나라 과학기술처 장관이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받는 것을 제1의 정책과제로 추진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참 초라하다는 생각이 든다‘게 그 기자의 첫 언급이었다. 장관이 말을 이으려 하자 그 기자가 장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계속 날카로운 질문을 퍼부었다. 기자회견장 분위기가 싸해졌다. 물론 그 과기처장관 재임 시절 한국의 과학기술 분야 노벨상 수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25년이 지난 아직까지 그러하다. 참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이 사실은 한국의 과학기술인들에게 지속적인 좌절로 남아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과학기술인들도 나름 할 말이 있다. 정부 과학기술 부서는 단기적인 연구성과를 채근하면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밀어붙였다. 우수한 연구인, 대학교수 등 과학기술자들이 정부 과제를 따러 사무관, 서기관 등 공무원들을 만나러 과학기술처(부)를 기웃거려야 했고, 과제책임자로서 그 성과를 단기적으로 보여야 했다. 노벨상 같은 것은 아주 세부적인 한 분야에서 수십 년 연구를 파고드는 분야, 그런 걸 허용하는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많이 나온다고 얘기된다. 일본이 그러했다. 과학기술처장관이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과학기술 분야 노벨상 수상을 추진하겠다고 하였고 숱한 과학기술부서 장관들이 중간진입전략이니 프로젝트 관리시스템이니 블루텐션이니 하는 구호성 정책들을 내놓았지만, 일부는 그것에 의해 과학기술발전이 이루어진 분야도 있겠지만, 노벨상 수상에는 실패했다. 요즈음은 과학기술인들도, 언론에서도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다시 노벨문학상 얘기로 돌아가서, 필자는 1967년도 당시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이라고 요란하게 선전하던 남미 어느 나라의 ’미구엘 안헬 아스투리아스‘ 라는 작가의 ’대통령 각하‘라는 소설 한글번역판을 읽은 적이 있다. 느낌은 ’이게 뭐야‘ 였다. 당시 아직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번역이 시원찮아서 였을까, 대체 무슨 말인지 요령부득의 작품이었다. 이게 노벨상 수상작이라고? 나는 그 이후 노벨상 수상작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은 인정을 하였지만 말이다.
국내 문단에서 다양하게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냉철하게 성찰하고 있다고 하니 기대를 가져 본다. 위에서 평론가가 지적하였듯이 ’정치적 중립성, 과도한 정치성과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자기관리‘ 등을 기본으로 하고, 민족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문학적 바탕을 갖추고서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한 분야에서 창작하는 문학인들이 많이 나온다면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한국문학계의 숙원이, 쉽지는 않겠지만, 스르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