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17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이상화, 여자 빙속 첫 금메달 오늘의 역사 (2월 17일)[2010년] 이상화, 여자 빙속 첫 금메달 2010년 2월 17일(한국시간)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의 ’단거리 간판’ 이상화(21.한국체대)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리치몬드 오벌에서 열린 2010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1차 레이스(38초249)와 2차 레이스(37초850) 합계 76초09를 기록, 금메달을 따냈다. 세계기록 보유자인 예니볼프(76초14·독일)와는 0.05초 차이였다. 특히 이번 금메달은 역대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부 전 종목에 걸쳐 아시아 선수가 획득한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 여자 3,000m에서 북한의 한필화가 아시아 여자선수 중 처음으로 은메달을 목에 건 뒤로 일본과 중국 선수들이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금메달은 이상화가 처음이다.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은 1960년 미국 스쿼밸리에서 열린 제8회 대회 때 김경희와 한혜자가 출전하면서 처음 동계올림픽 무대를 밟았지만 메달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등장한 간판 여자 스프린터 유선희는 1988년 캘거리 대회에서 500m 13위에 오르고 1994년 릴레함메르 대회 500m에서 5위에 오르는 등 선전했지만 유선희가 은퇴하면서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은 다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이후 12년만에 등장한 여자 스프린터가 이상화다. 이상화는 초등학생 때부터 국내 1인자 자리를 지키며 국내 전국대회와 선수권대회에 나설 때마다 대회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기대주로 꼽혔다. 휘경여고에 재학 중이던 2004년 겨울부터 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 나서기 시작한 이상화는 500m와 1,000m 등 단거리 전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상화는 올림픽 데뷔전인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여자 500m에서 5위에 올라 아쉽게 메달을 놓치기도 했다. 이어서 그해 1~5차 월드컵 시리즈 500m에서는 1, 2위만 4차례씩 기록하며 국제무대의 강자로 떠올랐고, 이듬해 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부상 투혼을 보이며 은메달을 따냈다. 잠시 주춤했던 이상화는 2009년 2월 하얼빈 동계유니버시아드 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어진 월드컵 시리즈에서 경기에 나설 때마다 한국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자신의 두번째 올림픽인 이번 벤쿠버 올림픽에서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편 이상화와 모태범이 금메달을 따내면서 한국은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녀 500m를 동반 석권한 최초의 국가가 됐다. /조선닷컴 2017-02-17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100218_0002
2009 - 트럼프 엔터테인먼트 리조트 카지노 파산보호 신청 오늘의 역사 (2월 17일)[2009년] 트럼프 엔터테인먼트 리조트 카지노 파산보호 신청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한때 운영했던 카지노업체인 트럼프 엔터테인먼트 리조트(TRMP)가 2009년 2월 17일 뉴저지주 파산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미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의 트럼프 마리나호텔 카지노와 트럼프 타지마할 카지노, 트럼프 플라자호텔.카지노 등 3개의 카지노 리조트를 운영하는 TRMP는 벌써 두차례 파산보호를 신청한 적이 있어 이번이 세번째다. TRMP의 자회사 9개도 함께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TRMP의 파산보호 신청은 부동산업을 하는 트럼프의 다른 사업과는 무관하지만 트럼프가 이 회사의 주식을 상당수 소유하고 있고 회사명에도 그의 이름이 쓰이는 점 등에서 그의 이미지에도 타격이 될 전망이다. 2004년 회사명이 트럼프 호텔앤드카지노리조트였던 이 회사가 파산보호 신청에 들어가 2005년 현재의 회사명으로 다시 회생하는 과정에서 트럼프는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났고 이후 이사회 의장직을 갖고 있었지만 의장직에서도 지난 13일 물러났다. 그의 딸인 이반카도 같은 날 이사직을 그만뒀다. 회사가 미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트럼프는 TRMP의 지분 28%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로이터와 AP 통신 등에 따르면 트럼프는 TRMP가 자신의 재산의 1%도 되지 않는다면서 “이제 TRMP에 대한 투자는 나에게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또 “회사명에 내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나는 회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거리를 뒀다. 트럼프는 이 회사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제한적인 권리를 갖고 있으나 이제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을 중단토록 하는 법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고 AP 통신은 전했다. 카지노와 리조트 사업을 하고 있는 TRMP의 채무는 17억4천만달러, 자산은 20억6천만달러 규모인 것으로 법원제출 서류에 기재돼 있다. TRMP는 경기침체로 카지노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작년 12월1일이었던 5천310만달러의 채권 이자 지급 기한을 맞추지 못한 뒤 채권단과 12억5천만달러에 달하는 부채의 재융자와 관련한 협의를 벌여왔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해 파산보호 신청에 이르게 됐다. TRMP는 파산보호를 신청했지만 영업은 정상적으로 할 계획이며 트럼프 마리나 호텔의 매각작업도 지속할 예정이다. 줄리아노 CEO는 “청산이 아니라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라며 납품업체와 직원들에 대한 대금과 임금 지급은 물론 영업도 정상적으로 이뤄진다고 밝혔다. 앞서 카지노업체인 트로피카나 엔터테인먼트도 작년 5월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등 미 카지노업계에 구조조정의 물결이 일고 있다. /조선닷컴 2017-02-17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90218_0002
2009 - ‘아파치 추장’ 증손 “할아버지 유골 돌려달라” 북미 대륙의 원주민인 아파치족의 추장 제로니모(1829~1909·사진). 그 전설적인 전사의 증손자 할린 제로니모(61)가 할아버지의 유골을 돌려달라고 제로니모가 숨진 지 100주년이 되는 17일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포트실의 인디언 죄수 묘역에 묻힌 제로니모의 유골 일부가 다른 곳으로 빼돌려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소송 대상은 ‘해골과 뼈’라는 예일대 출신들로 이뤄진 최고 엘리트 비밀조직과 연방정부다. <에이피>(AP) 통신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등이 회원인 이 조직은 해골 등에 입맞춤을 하는 등 괴이한 의식을 치르는데, 1차대전 중인 1918년 이 조직의 회원인 예일대 학도병들이 제로니모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옮겼다는 의혹을 받아왔다고 18일 전했다. 2005년에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 조직 회원의 편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조각가 겸 배우인 할린은 “할아버지의 영혼이 아직도 풀려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며 “고향 땅에 묻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유골을 고향인 뉴멕시코주 질라의 황야에 묻겠다고 밝혔다. 제로니모는 미군 군대와 백인 정착자에 맞서 인디언의 전투를 이끌며 이름을 떨쳤다. 백인 군대가 그의 가족을 학살하자, 보호구역으로 이주를 거부하고 저항과 복수의 전쟁을 벌였다. 제로니모는 그를 잡으려 파견된 5천명의 군대를 조롱하며 신출귀물한 작전을 펼쳤지만, 1886년 결국 35명의 전사들과 함께 투항했다. 이후 ‘대서부쇼’ 등에 출연했으며,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신자가 됐고 폐렴으로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 2009-02-19 오후 06:27:53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339813.html
윙거 [Jünger, Ernst, 1895.3.29~1998.2.17] 하이델베르크 출생. 하노버대학 ·라이프치히대학 ·나폴리대학을 다녔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으며, 전 후에는 사회주의 그룹과 어울렸다. 니체의 유미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고 전쟁체험과 융합시켜서 영웅주의적인 사상과 즉물적인 문체를 창조하였다. 《철(鐵)의 폭풍 속에서 In Stahlgewittern》(1920) 《내적 체험으로서의 전투 Der Kampf als inneres Erlebnis》(1922) 《대리석 절벽 위에서 Auf den Marmorklippen》(1939) 등 나치스 정체를 비난하는 작품을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파리에 체재하면서, 유럽의 낡은 계급질서의 병폐를 보고는 횡행하는 폭력에 맞서 평화와 자유를 역설하였다. 전후에는 그리스도교에 접근하여 《Strahlungen》(1949) 《평화 Der Friede》(1948) 《헬리오폴리스 Heliopolis》(1949)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naver
1993 - 국립민속박물관, 옛 국립중앙박물관 터로 이전 개관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 National Folk Museum)의 연혁을 보면, 8·15광복과 함께 송석하(宋錫夏)의 노력으로 개관되었던 남산민족박물관이 1950년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된 후, 16년 만인 1966년 10월 4일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에서 경복궁 수정전(修政殿)에 1600여 점의 민속자료를 수집하여 임시 기구로 민속박물관의 개관을 보았다.
1988 - 남극 세종과학기지 준공 오늘의 역사 (2월 17일)[1988년] 남극 세종과학기지 준공 남극지역의 대기, 지질, 동식물 분포, 천연자원 등을 조사할 남극 세종기지가 1988년 2월 17일 준공됐다. ‘대한민국 남극 세종과학기지’ 가 정식 명칭인 세종기지는 420평 규모이며 남셰틀랜드 군도에서 제일 큰 섬인 킹조지 섬에 위치하고 있다. 남미끝에서 1200Km,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약1만7천Km 떨어져 있는 남위 62도5분, 서경 58도45분으로 한국과는 지구의 거의 반대편이다. 남극은 천연가스, 석유, 철광석 등 막대한 양의 천연자원과 크롤새우 등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기상학, 생물학, 지구물리학 등 기초과학 분야의 거대한 실험장이란 점에서 세계각국이 앞다투어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조선닷컴 2017-02-17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420_0021
1976 - 한국의 동양화가 변관식(卞寬植) 사망 변관식 [卞寬植, 1899.3.19~1976.2.17] 한국의 동양화가. 1899년 3월 19일 황해도 옹진(甕津)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소정(小亭)이다. 관립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에서 도화(陶畵)수업을 받은 후 외조부인 소림 조석진(趙錫晋)이 관여하던 서화미술원에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등과 함께 공부하고, 1925년 일본에 가서 동경미술학교(청강생)를 수료하였다. 8·15광복 후 초기 국전에 참여하였으나 심사부조리를 개탄, 국전을 포기 외면하고 이후 작품제작에만 몰두했다. 화법의 특징은 첫째, 화면상의 시점이 부감시( 瞰視)에 따른 일종의 심원(深遠)의 형식이면서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시점을 구사하여 박진감과 입체파풍의 구조적 해석을 보였다. 둘째, 청전(靑田)과 달리 적묵법(積墨法)에 의해 변화를 주었으며 관념적인 산수가 아니라 엄격한 사경(寫景)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풍치가 배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산세에 접경되는 인물들은 비탈진 산길을 뒤뚱거리며 올라가는 흰 두루마기의 촌로들이 보여주는 해학적인 풍정에서 진정한 한국적인 야취(野趣)를 맛볼 수 있다. 작품으로는 일련의 금강산 시리즈인 《외금강 삼선암(外金剛三仙岩)》 《내금강 진주담(內金剛眞珠潭)》 《옥류청풍(玉流淸風)》 등과 《이어(鯉魚)》 등의 어해도(魚蟹圖)가 있다. /naver
역사속 오늘[1975년 2월 17일] 미·소 우주 랑데부 연습 1975년 오늘! /YTN 2013-02-17
- Israel, 50 New Sheqalim (Banknote)
1970 - 이스라엘의 소설가 슈무엘 아그논(Agnon, Samuel) 사망 아그논 [Agnon, Samuel Yosef, 1888.7.17~1970.2.17] 현대 이스라엘이 낳은 가장 위대한 헤브라이어의 문학자로서, 1913년 독일로 가서 헤브라이 문학을 강의하였고, 1924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국하여 문필활동에 전념하였다. 그의 작품은 대개가 유대인의 전통적인 종교생활을 배경으로 하여 묘사하였는데, 그 필치는 유머가 넘쳤고 그 사상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였으며, 문체 또한 화려하고 헤브라이적 교양의 독특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196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프랑스는 과학위성 D-1호를 1966년 2월 17일 알제리의 함마귀르(Hammaguir)에서 발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0년 가봉은 자유 프랑스의 점령에 들어갔고, 그후 1946년 프랑스 연합의 해외 영토, 1958년 프랑스 공동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으며, 1960년 8월 17일 가봉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1964년 2월 쿠데타가 있었으나, 프랑스군이 개입하여 대통령 레옹 음바(Leon Mba)를 보호하였다. 1967년 11월 대통령 레옹 음바의 병사로 부통령 봉고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1993년 대선에서 5선에 성공하였다. /naver
1963 - 미국의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Jordan, Michael) 출생 조던 [Jordan, Michael Jeffrey, 1963.2.17~ ] 미국 대학부 및 프로 농구 선수. 본명은 Michael Jeffrey Jordan, 별명은 Air Jordan. 농구 역사상 다방면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로 널리 인정받았다. 미국 프로 농구협회(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NBA) 소속 시카고 불스를 6차례나 우승으로 이끌었다(1991~93, 1996~98). 조던은 노스캐롤라이나 주 윌밍턴에서 자라, 1981년 채펄힐에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때인 1982년 전미국대회에서 조지타운대학교에 이겨 우승했다. 조던은 2~3학년 두 해에 걸쳐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받았고, 3학년을 마치고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와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 농구팀을 올림픽 금메달로 이끌었다. 1984년 조던은 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 프로 선수로서의 첫 시즌(1984~85)에 점수를 내는 데 공헌했고, 올해의 신인선수로 뽑혔다. 다리 부상으로 나머지 경기 시즌 대부분을 놓친 후 돌아와, 연속 7시즌 동안 한 게임당 평균 32점을 획득하며 NBA를 이끌었다. 그는 단일 시즌(1986~87)에 3,000점을 낸 2번째(윌트 체임벌린 이후) 선수였다. 조던은 5번(1988, 1991, 1992, 1996, 1998)이나 NBA의 최우수선수(MVP)에 오르면서 1988년에는 동시에 올해의 수비수로 뽑히기도 했다. 1993년 10월 시카고 불스 팀을 3번 연속 우승으로 이끈 뒤,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길을 가기 위해 곧바로 은퇴했다. 그러나 그는 1995년 3월 농구에 복귀했다. 1995~96시즌에 조던은 불스 팀을 NBA 역사상 최고인 시즌 기록 72승 10패에 이르게 했다. 1996에서 98년까지 조던은 불스 팀을 다시 3회 연속 우승시켰고, 매번 NBA 결승전의 MVP로 뽑혔다. 1997~98시즌 이후 조던은 다시 은퇴했다. 당시 그의 이력은 총 2만 9,277득점(게임당 31.5점), 스틸 2,306점, 10개의 타이틀이 포함되었다. 조던은 2000년 1월 워싱턴 위저스의 지분을 매입하여 스포츠계 가까이 남아 있었다. 또한 그는 위저스 구단의 농구 운영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선수들과 팀의 연봉을 관리하는 등의 일만으로는 조던에게 뭔가 부족했고, 2001년 9월 그는 다시 선수가 되기 위해 위저스에서의 자신의 소유권과 직위를 포기했다. 1998년 그의 은퇴 이후 줄어든 농구 관중과 텔레비전 시청률로 고민해왔던 농구계는 그의 두 번째 NBA 복귀를 열렬히 환영했다. 2002~03시즌이 끝나고 조던은 마지막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총 3만 2,292점, 게임 평균 30.12점의 기록으로 은퇴했는데, 이는 농구 리그 사상 최고기록이었다. 2006년 조던은 NBA의 샬럿 보브캣츠의 소액주주이자 경영인이 되었다. 1m 98㎝의 조던은 수비수이자 특별한 재능의 슈터, 그리고 끈질긴 방어자였다. 그는 비상한 도약 기술과 곡예 같은 묘기 때문에 '에어 조던'이란 별명을 얻었다. 선수로서의 조던의 명성은 어느 선수도(또는 어떤 종류의 유명인도) 미치지 못할 만큼 높았다. 그는 광고수입(에어 조던 농구화로 가장 유명한)으로 수백 만 달러를 벌었다. 또한 그는 영화 〈스페이스 잼 Space Jam〉(1996)에 출연해 흥행에 성공했는데, 이 영화에서 만화 캐릭터인 벅스 버니와 대피 덕과 함께 주연을 맡았다. 1996년 NBA 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중 1명으로 뽑혔다. /브리태니커
오늘의 역사 (2월 17일)[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확정 1962년 2월 17일 5.16직후 군사정부가 민주당정권이 계획했던 경제개발계획을 토대로 제1차 5개년계획 (1962~1966)을 확정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농업 생산력 증대 2. 전력, 석탄 등 에너지 확충 및 사회간접자본 충족 3. 수출증대로 국제수지 개선 4. 유휴자원 활용 5. 기술진흥 등이다. 따라서 정유, 비료, 화학, 전기기계 등의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고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는 일본자본을 포함한 외국자본의 의존도가 60%에 이르렀으며 연평균 8.5%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했다. 1인당 GNP는 83달러에서 123달러로 증가했다. /조선닷컴 2017-02-17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6_0339
1960 -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개관 역사속 오늘[1960년 2월 17일]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개관 1960년 오늘! /YTN 2013-02-17
1914 - 푸에르토리코의 시인 훌리아 데 부르고스(de Burgos, Julia) 출생 데 부르고스 [de Burgos, Julia, 1914.2.17~1953.7.6] Julia de Burgos (February 17, 1914 – July 6, 1953) is considered by many as the greatest poet born in Puerto Rico, and, along with Gabriela Mistral, one of the greatest female poets of Latin America. As an advocate of Puerto Rican independence, she served as Secretary General of the Daughters of Freedom, the women's branch of the Puerto Rican Nationalist Party. She was also an ardent civil rights activist for women and African/Afro-Caribbean writers. Early years http://en.wikipedia.org/wiki/Julia_de_Burgos
1909 - 인디언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Geronimo) 사망 제로니모 [Geronimo, 1829.6~1909.2.17] 오늘의 역사 (2월 17일)[1909년] 인디언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 사망 ‘인디언 최후의 전사(戰士)’ 제로니모가 1909년 2월17일, 포로로 구금돼 있던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포트실 요새에서 80세로 숨졌다. 이로써 처절했던 인디언 항쟁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품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야틀라이가 원래 이름이었지만, 멕시코 군인들이 기독교 성자 세인트 제롬을 닮았다고 ‘제로니모’로 부르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제로니모가 전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와 처, 3명의 자식들이 멕시코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부터였다. 이때 보인 용기와 결단력으로 그는 아파치족 한 분파인 치리카후아족의 추장으로 우뚝서게 된다. 19세기 후반 지금의 애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 등 멕시코 접경지역에 주로 살았던 아파치족은 백인들이 “아파치와 싸우느니 차라리 애리조나를 그들에게 줘버리자”고 할 정도로 용맹한 부족이었다. 남북전쟁 뒤 시작된 미국의 서부개척은 인디언들을 강제로 ‘보호구역’에 몰아넣었지만 낯선 땅에 적응하지 못한 인디언들은 수시로 무력항쟁을 시도한다. 대표적인 싸움이 1876년 6월 수우족(族) 추장 시팅 불이 이끄는 인디언연합군이 미 제7기병대를 격파한 리틀빅 혼 전투. 제로니모도 보호구역으로부터 탈출과 체포를 반복하며 미국의 남서부지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5000명의 기병대가 5개월동안 2600km나 추적했지만 신출귀몰하는 그를 잡지 못해 기병대가 오히려 공포에 떨어야 했다. 1886년 8월 마지막으로 체포됨으로써 ‘전사’ 제로니모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갔다. /조선닷컴 2017-02-17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328_0002 1904 - 오페라 ‘나비 부인’ 초연 오늘의 역사 (2월 17일)[1904년] 오페라 ‘나비 부인’ 초연 1904년 2월 17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작곡가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이 첫 공연을 가졌다.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등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오페라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푸치니의 신작 발표였기 때문에 객석은 만원이었다. 입장료 수입은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 중에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푸치니는 2만 리라의 선금을 챙길 정도로 사람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비 부인’은 공연 시작과 함께 야유와 아우성에 파묻혔고, 결국 관객들의 모욕과 조소를 받으며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초연 이후에 모든 공연은 취소됐고, 푸치니는 선금을 반납해야했다. ‘나비 부인’은 미국 잡지 ‘센추리’에 실린 존 루더 롱의 단편소설(1898년)로 19세기 말 일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미국 해군장교 핑커튼과 기녀 초초상(초초는 일본어로 나비를 뜻함)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이다. 이후 극작가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각색해 1막짜리 연극으로 만들어 뉴욕에서 성공시킨 이후 1900년 런던에서도 공연하게 됐는데 1900년 5월 ‘토스카’ 공연에 맞춰 런던에 체류하던 푸치니가 ‘나비 부인’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푸치니의 ‘나비 부인’은 당시의 오페라들과 달리 동양적 선율에 2막이 1시간 반 동안이나 이어지는 지루한 구성이었고 여주인공의 기모노 의상도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푸치니는 ‘나비 부인’의 초연 1년 전에는 자동차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작곡 중에 인후병과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등 어렵게 곡을 완성했지만 출연자들은 처음 접하는 동양의 낯선 문화를 소화해내지 못했다. 관객의 싸늘한 반응으로 실패를 맛본 푸치니는 작품의 일부를 고쳐 3개월 뒤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다시 ‘나비 부인’을 무대에 올렸고 이번에는 열렬한 갈채 속에 성공적인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마지노 [Maginot, André, 1877.2.17~1932.1.7]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구축한 방어선인 마지노 선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마지노 선 때문에 프랑스는 느긋한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었고, 프랑스의 이같은 태도는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권력을 잡은 뒤 독일을 재무장하게 하는 주요인이 되었다. 원래 공무원이었던 그는 1910년에 프랑스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3년 뒤에는 육군부 차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사병으로 입대했고,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평생 동안 불구로 살아갔다. 그는 1915년에 정계로 돌아와 1920년대에 식민장관·원호처장관·육군장관으로 일했다. 다시 시작된 독일의 공격을 막기 위해 프랑스 북동쪽 국경을 따라 방어진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마지노의 거듭된 주장은, 그가 2번째로 육군장관에 임명된 1929년에야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육군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군대를 개편하고 프랑스 북동쪽 국경에 이른바 마지노 선을 구축하는 일을 감독했다. 그는 1932년에 죽었지만 그의 방어선 건설계획은 계속 추진되어 1938년에 완결되었다. /브리태니커
1869 - 독립운동가 이동녕(李東寧) 출생 이동녕 [李東寧, 1869.2.17~1940.3.13] 이동녕(李東寧, 1869년 2월 17일 ~ 1940년 3월 13일)은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제4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제6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대통령대리·주석·국무위원장·국무위원으로 활동했다. 종교는 기독교로서,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암산(巖山)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생애 /위키백과
- Australia, 10 Dollars (Banknote)
1864 - 오스트레일리아 시인, 언론인 패터슨(Paterson, A. B.) 출생 패터슨 [Paterson, A(ndrew) B(arton), 1864.2.17~1941.2.5] 별칭은 Banjo Paterson.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 〈춤추는 마틸다 Waltzing Matilda〉를 작사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 10만 권 이상 팔린 〈눈 덮인 강에서 온 사나이 외(外) The Man from Snowy River and Other Verses〉(1895)와 여러 차례 증판을 거듭한 〈그란데 강의 마지막 경주 외(外) Rio Grande's Last Race and Other Verses〉(1902)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패터슨은 시드니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여 1900년까지 일했으나 그뒤 언론인이 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어 전쟁을 취재했으며, 업무 수행차 중국과 필리핀을 돌아보았다. 1904년 〈시드니 이브닝 뉴스 Sydney Evening News〉의 편집장이 되었으며, 2년 뒤에는 〈타운 앤드 컨트리 저널 Town and Country Journal〉의 편집장이 되었다. 나중에 목장을 경영하기도 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시드니 모닝 헤럴드 Sydney Morning Herald〉의 특파원으로 유럽을 여행하며 취재했고 그뒤 프랑스와 이집트 군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여생을 언론인으로 보냈다. 1905년 패터슨은 오스트레일리아 대중가요의 모음집 〈늙은 관목의 노래 The Old Bush Songs:Composed and Sung in the Bushranging〉를 출판했으며, 그가 펴낸 또다른 모음집 〈산 넘고 들 건너 찾아 헤맨 나날들 Digging and Overlanding Days〉도 성공을 거두었다. 유명한 〈춤추는 마틸다〉는 〈솔트부시 빌과 제이 피 외(外) Saltbush Bill, J.P. and Other Verse〉라는 제목이 붙은 시모음집에 들어 있는 시로 1917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또 어린이들을 위한 시집 〈노아가 잊어버린 동물들 The Animals Noah Forgot〉(1933)과 몇 편의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64 - 슬로바키아의 발명가 무르가스(Murgas, Jozef) 출생 무르가스 [Murgas, Jozef, 1864.2.17~1929.5.11] Jozef Murgaš (English Joseph Murgas) (17 February 1864 – 11 May 1929) was a Slovak inventor, architect, botanist, painter, patriot, and Roman Catholic priest. He contributed to wireless telegraphy and help develop mobile communications and wireless transmission of information and human voice. Murgaš was nicknamed the Radio Priest and deemed a Renaissance man. http://en.wikipedia.org/wiki/Jozef_Murga%C5%A1
모리 오가이 [森鷗外, 1862.2.17~1922.7.9] 본명 하야시타로[林太郞]. 시마네현[島根縣] 출신. 1881년 도쿄[東京]대학 의학부 졸업 후 독일에 유학하였다. 1888년 귀국 후 육군대학 교관을 거쳐 군의총감·의무국장 등을 역임하고 1916년 퇴역, 제실박물관장(帝室博物館長) 겸 도서관장·제국미술원장(帝國美術院長) 등을 지냈다. 1901년에 번역한 안데르센의 《즉흥시인(卽興詩人)》은 원작 이상이라고 높이 평가되었으며, 소설에서는 《기러기》 《아베 일족[阿部一族]》 《산쇼다유[山椒大夫]》 등 수십 편의 명작을 남겼다.
1856 - 독일의 시인 하이네(Heine, Heinrich) 사망 오늘의 역사 (2월 17일)[1856년]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사망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1856년 2월 17일 사망했다. 향년 59세였다. 1797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하이네는 일찍이 본-괴팅겐-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젊은 시절 그의 주된 관심은 문학이나 저널리즘에 있었다. 1822년 처녀 시집 `시집`을 출간하고 1827년에 시집 `노래책`을 냈을 때 하이네의 명성은 이미 전 독일에 퍼져 있었다. 하이네는 프랑스의 1830년 7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급진적 문학운동을 벌인 `청년 독일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1835년 독일 의회는 이들 급진적 문학 그룹의 집필을 금한다고 결의했는데, 집필 금지 작가들의 명단 맨 앞에 하이네가 있을 정도였다. 하이네가 1830년대 후반 파리에 정착하게된 배경도 파리의 혁명적 분위기가 그를 매료시킨 탓도 있지만 `청년 독일파`가 독일에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844년 조국을 그리워하며 파리에서 쓴 `독일, 겨울동화`는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한탄하며 쓴 혁명적 장편 서사시다. /조선닷컴 2017-02-17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1108_0010
- Spain, 100 Pesetas (Banknote)
베케르 [Bécquer, Gustavo Adolfo, 1836.2.17~1870.12.22] 본명 도밍게스 바스티다(Gustavo Adolfo Dominguez Bastida). 세비야 출생. 10세에 고아가 되어 숙부 밑에서 자랐으며, 18세 때 문학을 지망하고 마드리드로 나왔다. 하급 관리·편집자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폐결핵과 불행한 가정생활에 시달리다 가난 속에서 요절하였다.
1827 - 스위스의 교육개혁가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 사망 페스탈로치 [Pestalozzi, Johann Heinrich, 1746.1.12~1827.2.17] [오늘의 역사]교육자 페스탈로치 사망 스의 교육자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가 1827년 오늘 사망했다. 페스탈로치는 청소년의 교육에 일생을 바친 위대한 교육자로 평가된다. 그는 교육을 통해 어떻게 사회를 풍요롭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당시 유럽 사회의 계층 간 불평등을 지적했다. /충청투데이 2010.02.17 00:02 1820 -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 비외탕(Vieuxtemps, Henry) 출생 비외탕 [Vieuxtemps, Henry, 1820.2.17~1881.6.6] 베르비에 출생.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를, 루쿨루와 안젤로 베리오(Angelo Berio)에게 바이올린을, 지몬 제히터(Simon Sechter)와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에게 작곡을 사사하였다. 1833년부터 유럽 각지와 러시아·미국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져 절찬을 받았고, 1846년부터 1852년까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음악 연주가로 있으면서 그곳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871년부터 1873년까지는 브뤼셀음악원의 교수로 있었다. 그는 근대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연주법은 근대 프랑스의 바이올린 연주에 큰 영향을 주었다. /naver
1796 - 독일계 네덜란드 의사, 생물학자 지볼트(Siebold, Philipp Franz von) 출생 지볼트 [Siebold, Philipp Franz von, 1796.2.17~1866.10.18] 독일계의 네덜란드 의사. 동물학자 K.T.E.지볼트의 사촌형이다. 1822년 네덜란드 동인도육군병원의 외과 소령으로 자바에 부임하였으며, 1823년에는 나가사키[長崎] 주재 데시마상사[出島商社]의 의사로서 일본에 대하여 연구하라는 명을 받았다. 7년 동안 재임 중 극동지역의 자연과 문물에 대한 자료를 수집, 1840년경 《일본 Nippon》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 책의 제7부에서 한국 및 그 주변국가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본문 161면, 자료 68면, 도록 15장 분량의 이 자료는 1828년 일본에 표류한 한국인들과의 면담과 이를 통해 얻은 자료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유합(類合)》 《천자문》 《왜어유해(倭語類解)》 등의 한국의 문헌과 서양인들의 저술, 일본측 사료 등을 참고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한국어 문법과 음운(音韻)의 특징을 유럽어 문법의 관점에서 파악 서술하고, 《천자문》과 《유합》을 독일어로 번역, 한국어의 실상을 서양에 알렸으며, 한국인의 모습을 인류학적 시각에서 다른 민족과 비교 기술하였다. 이 책은 1854년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으며, 프랑스의 로우니, 독일 상인 오페르트, 미국인 그리피스 등이 저술한 한국관계 책들은 모두 이 책을 참고하였다. /네이버
- 'Self-portrait' - 'Self-portrait with Lace Cravat'
- 'Voltaire' - '18 c. Child'
- France, 50 Francs (1991, Banknote)
1704 - 프랑스의 화가 라 투르(La Tour, Maurice-Quentin de) 출생 라 투르 [La Tour, Maurice-Quentin de, 1704.9.5~1788.2.17] Maurice Quentin de Latour라고도 씀. 프랑스의 파스텔 화가. 얼굴의 특징을 날카롭게 포착한 생생한 초상화들로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초상화가이자 가장 많이 모방되는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일찍이 젊은 시절에 파리로 간 라 투르는 플랑드르의 화가 자크 스푀드의 화실에 들어갔다. 그뒤 랭스·캄브레(1724)·잉글랜드(1725경) 등지를 다니다가 1727년경 파리로 되돌아와 그림 수업을 다시 했다. 1737년 150점의 훌륭한 초상화들을 처음으로 전시했다. 이 초상화들은 그후 37년 동안 살롱전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는 초상화의 모델들에게 매력과 지성을 갖춘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했으며 미묘한 얼굴 표정을 포착하는 데 뛰어났다. 그가 그린 인물들 중에는 작가인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 그리고 루이 15세와 그의 연인인 퐁파두르 부인 등이 있으며 특히 그 부인의 초상(1756)은 실물 크기로 그렸다. 1746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1751년에는 미술원의 평의원이 되었다. 1750년 왕의 초상화가가 되었고 1773년 신경쇠약에 걸려 그 직에서 물러났다. 라 투르는 나이 80세에 은퇴하여 생캉탱으로 갔다. /브리태니커
1781 - 프랑스의 의학자, 청진법의 창시자 르네 라에네크(Laënnec, René) 출생 라에네크 [Laënnec, René-Théophile-Hyacinthe, 1781.2.17~1826.8.13] [역사 속의 인물] 청진기 발명 르네 라에네크 1816년 어느 날 의사 르네 라에네크(Rene Laennec)는 파리 루브르궁의 안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눈에 아이들이 나무 막대를 서로의 귀에 대고서 재잘거리며 놀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라에네크의 머리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옳거니! 저런 식으로 사람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겠다.' 당시만 해도 의사들은 환자 가슴에 귀를 직접 대거나 가슴을 두드려보고 환자의 상태를 짐작했다. 그는 진찰실에서 종이를 말아 원통 모양으로 만든 뒤 환자의 가슴에 대 보았다. 심장 박동과 폐에 숨이 드나드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이 아닌가! 라에네크는 30cm가량의 빈 나무 원통을 만들어 진찰에 사용했고 이 기구를 'Stethoscope'(청진기)로 명명한 뒤 1819년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의사들의 필수품 청진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라에네크는 1781년 오늘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 캥페르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진기 발명으로 내질환 진찰에 혁신적 기여를 했지만 정작 자신은 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1826년 타계했다.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양이형(兩耳形) 청진기는 그가 세상을 뜬 뒤인 1850년대에 고안되었다. 김해용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2년 02월 1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1618&yy=2012
설리번 [Sullivan, John, 1740.2.17~1795.1.23] 이로쿼이 인디언족과 국왕파 연합군을 뉴욕 서부에서 무찌른 일로 이름을 떨쳤다(1779). 변호사로 일하다가 1774년 뉴햄프셔 식민지 의회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대륙회의 의원으로 일했다. 1775년 6월 대륙군 준장으로 임명받고 보스턴 포위전에서 원군으로 활약했다. 이듬해 캐나다로 가서 퀘벡 전투(1775. 12. 31)에서 크게 패하고 지휘관도 전사한 미국 군대를 철수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 직후 조지 워싱턴 장군의 군대와 합류하기도 했으며 소장으로 진급한 뒤에는 롱아일랜드 전투(1776. 8)에 참가했으나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12월 포로교환으로 풀려나 워싱턴 장군의 우익부대를 지휘해 뉴저지 주 트렌턴 공격(1776. 12)을승리로 이끄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이듬해 8월 스테이튼 섬에 대한 야간공격은 실패했다. 1779년 영국의 사주를 받은 인디언들이 뉴욕 주의 모호크 강 유역을 습격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해 조직된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4,000명의 병력으로 뉴욕 주 뉴타운(지금의 엘마이라 근처)에서 이로쿼이 부족과 국왕파의 연합군을 물리친 뒤 마을을 불사르고 농작물을 파괴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10월 의회의 치사를 받았으나 건강이 나빠져 얼마 뒤 전역해야 했다. 그러나 그뒤로도 15년 동안 계속 공직에 몸담아 대륙회의 의원(1780~81), 주 법무장관(1782~86), 뉴햄프셔 지사(1786~87, 1789)를 거쳐 1788년에는 연방헌법의 비준을 위해 열린 뉴욕 주의 협의회(con vention) 의장을 지냈고 미국 지방법원 판사(1789~95)로 일했다. /브리태니커
몰리에르 [Molière, 1622.1.15~1673.2.17] 오늘의 역사 (2월 17일)[1673년] 프랑스 극작자 겸 배우 몰리에르 사망 프랑스의 극작가 겸 배우 몰리에르가 1673년 2월 17일 사망했다. 평생을 연극인으로 살다간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때도 공연기간 중이었다. 무대 위에서 그의 마지막 걸작 `상상으로 아픈 사나이`를 연기하던 중 각혈이 심해 겨우 집에 돌아왔으나 그것이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몰리에르는 예명이고 장 바티스트 포클랭이 본명이다. 1622년 실내장식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중등교육도 파리의 명문 클레르몽 학원에서 주로 라틴어를, 오클레앙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643년 `광명극단`을 조직, 활발한 연극활동을 시작했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1656년 루이 14세의 동생 필립 도를레앙이 그를 지원하면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궁중에서까지 그의 연극이 공연됐다. 파리에서의 인기와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의 육체는 오히려 더 쇠약해졌고 가정생활도 원만치 않았다. 불행한 가정생활은 그를 더욱더 연극에 내몰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날 쓰려졌다. 그의 연극은 탐욕이나 위선 허풍 등 인간 내면의 허를 찌르며 관객을 웃음으로 내몰지만 언제나 삶에 대한 깊고 풍성한 통찰을 수반했다. 몰리에르 연극의 특징 중 하나는 극 중에서 비판하는 자나 비판받는 자나 모두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조선닷컴 2017-02-17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116_0018
코렐리 [Corelli, Arcangelo, 1653.2.17~1713.1.8] 푸지냐뇨 출생. 소년시절 볼로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그 뒤 교회 및 추기경관저의 바이올린 연주자와 악장을 지내다가 로마에서 생애를 마쳤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트리오소나타 48곡(작품 1∼4), 바이올린과 통주(通奏) 리듬을 위한 소나타 12곡(작품 5), 유명한 12곡의 합주협주곡(작품 6) 등이 전부인데, 성악곡은 한 곡도 없으며 기악곡도 모두가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한 현악기만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음악사에서 그의 최대의 공적은 합주협주곡의 형식을 확립한 점이지만 트리오소나타와 바이올린소나타도 그와 더불어 하나의 완성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기품이 넘치는 선율의 우미함과 균형이 잘 잡힌 형식감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낸 혁명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식의 완성을 가져다 준 고전적인 예술가로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제미니아니, 비발디, 로카텔리를 비롯하여, 독일의 J.S.바흐와 G.F.헨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naver
1600 - 이탈리아의 사상가,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Bruno, Giordano) 화형 브루노 [Bruno, Giordano, 1548~1600.2.17] 오늘의 역사 (2월 17일)[1600년] 르네상스의 대표적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 화형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가 1600년 2월 17일 로마에서 화형됐다. 교회나 국가는 시민들에게 특정한 생각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이단이라는 이유로 7년여를 감옥에 갇혀 있었다. 1548년 나폴리에서 태어난 브루노는 18세에 엄격하고 완고한 교리로 종교탄압에 앞장서고 있는 도미니크 교단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사제생활을 하며 고대와 자연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결국 가톨릭 교리에 적응하지 못해 1576년 이단혐의로 교단에서 추방됐다. 그후 그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그는 `자유 사상가`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가는 곳마다 경찰의 감시와 추방령에 시달려야 했다. 제네바, 리옹, 툴루즈, 파리, 옥스퍼드, 마르부르크, 비텐베르크, 프라하, 취리히, 베네치아 그가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던 도시들이다. 1592년 베네치아에서 이단신문에 회부되었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아 이날 로마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찬 그의 철학은 범신론적인 특징이 강했다. 우주는 무한하고, 신성(神性)은 전우주를 꿰뚫는 생명, 즉 `우주령(宇宙靈)`이라고 해석하고, 인간은 `영웅적 정열`로 이 우주령의 영원한 활동과 결부된 본성을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닷컴 2017-02-17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218_0014
세종 [世宗, 1397~1450] 오늘의 역사 (2월 17일)[1450년] 조선 제4대왕 세종대왕 별세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1450년 2월 17일 5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2살이던 1408년 충녕군에 봉해지고, 16살인 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었으며 22살이던 1418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아버지인 태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우선 국가체제를 완성해 창업의 대업을 매듭짓는 일이었다. 문물제도의 정비와 유교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그것이다. 따라서 세종2년(1420)에 정책연구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양성과 학술진흥에 주력했으니 조선에 맞는 문물과 제도를 창안하기 위해서도 옛 제도를 연구해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이들이 추진력이 돼 조선전기의 찬란한 문화를 이룩해낼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시대에는 황희 맹사성 유관 등과 같이 학덕을 겸비하고 균형감각있는 중후한 인물들이 세종의 태평성세를 보좌하였다. 이들은 모두 청백리에 오를 만큼 청렴결백한 인물들이었고 서로 절친한 친구 사이로 상호협력의 정치풍토를 일궈내었다. 또한 집현전을 중심으로 국가경영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각종서적을 편찬했다. ‘치평요람’ 을 비롯해 유교윤리의 실천서인 ‘삼강행실’, 전 왕조인 고려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 와 천문 지리 의서 농서 등의 기술서를 출판해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그의 업적은 한글창제에 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세계문자인 한문을 공부해 우리글을 창제 보급한 문화정책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의 소산이며 문화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한글 창제원리의 우수성은 민족문화 고양이라는 차원을 넘어 세계문화의 제고에 기여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조선닷컴 2017-02-17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6_0329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