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 김은배, 마라톤 세계신기록 수립하다
2시간 26분 20초로 세계기록 5분이상 단축
“우리 육상경기계의 지보(至寶) 양정고보 김은배(金恩培)군은 이십육리사분일(二十六哩四分一/26마일4분의1,42.195㎞) 마라손에 2시간 26분 20초로써 세계기록을 돌파하야 사계(斯界)에서 일대 ‘센세이슌’을 야기하엿다. 이 기록은 제8회 만국올림픽대회에서 분란(芬蘭/핀란드) 콜랜마이넨(Kolehmainen) 선수 2시간32분5초38(기록들)을 모다 돌파한 경이적 신기록이다. 아즉 연소한 군으로서 이가튼 호성적을 수습한 것은 우리의 자랑하고도 남을 일이다.”(1931년 10월 20일자)
1931년 10월 18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7회 조선 신궁대회 마라톤에서 18세의 김은배가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면서 온 나라가 들썩였다.
조선체육회와 운동기자단 등 7개단체는 이튿날 바로 김의‘세계기록돌파 표창식’을 열기로 결정했다. 조선일보는 이를 10월 21일자 사회면 톱으로, 다시 한번 '양정 김은배군, 세계적 기록 돌파 표창식' '조선 체육회 외 6단체 연합주최' '보라! 세계적 용사를'이란 화려한 제목을 붙였다.
11월 15일 수송학교 운동장에서 조선체육회장 윤치호(尹致昊)와 조선일보 안재홍(安在鴻), 동아일보 송진우(宋鎭禹) 사장을 비롯한 운동방면 관계자 수백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표창식을 개최했다. 이자리에서 김의 ‘만국올림픽’ 출전을 위한 장려금 모집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11월 16일자).
그 해 말 잡지 동광이 실시한 ‘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 조사에서 김은, 야구ㆍ축구 선수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이영민에 이어 일약 2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급상승했다.(동광 1931년 12월 27일자)
그런데, 이듬해 5월 8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10회 만국올림픽 마라톤 대표선발 1차 예선전에서 스포트 라이트는 노장 권태하(權泰夏ㆍ26)에게 돌아갔다. 이틀전 ‘마라손’ 연습을 하다 일본인 교통 순사에게 연행돼 구타를 당해, 대회 출전이 불가능 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음에도(1932년 5월 8일자) 출전, 당당히 우승했기 때문.
조선일보는 “우리는 운동경기 사상 금일가튼 감격무비한 장면을 접할 시(時)가 별무하얏스며, 따러서 권군의 분기와 원기는 ‘애들리트(athlete)’들에게 얼마나 만흔 감동을 주엇는지 군의 공훈을 감사하야 마지안는 바”라며, 그의 분전을 치하했다. 김은 전해 세운 세계기록을 인정받아 마라톤 대신 1만에 출전, 신예 손기정과 접전을 벌인 끝에 우승했다. 손은 1만선 2위였으나 5천선 조선신기록으로 우승, 4년뒤 ‘올림픽 돌풍’을 예고했다.(5월 9일자)
김은배ㆍ권태하ㆍ황을수, "최초로 올림픽 무대를 밟다"
동경에서 치러진 최종 선발전에서도 권ㆍ김은 각각 1,2착을 차지(5월 27일자), 나란히 일본 마라톤 대표에 선발됐다.(5월 31일자)
이어 6월 19일 열린 올림픽 권투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조선이 나흔 천재 권투선수’ 황을수(黃乙秀)가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 조선 선수로는 3번째 올림픽 티켓을 따냈다.
권ㆍ김은 6월 23일, 황은 6월 30일 각각 미국 ‘로산젤스(LA)’ 현지로 떠났고, 8월 7일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김은 2시간 37분 28초로 6위, 권은 9위를 기록했다. 황은 8월 9일 열린 1회전 경기에서 독일 카르츠 선수에게 판정패했다. ‘일본 대표’ 였긴 했지만,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무대에 출전해 거둔 기록이었다.
이들의 선전과 경험은 다음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을 일궈낸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김영철/I'm the Blogger 2012/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