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19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08 - 카스트로 쿠바 최고 지도자, 전격 사임 오늘의 역사 (2월 19일)[2008년] 카스트로 쿠바 최고 지도자, 전격 사임 2008년 2월 19일(현지시간) 쿠바의 최고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Castro·81)가 성명에서 “육체적 감당이 힘든 상황에서 중책을 맡는 것은 양심에 반대된다”며 전격 사퇴했다. 카스트로의 철권 통치는 49년 전 쿠바 혁명과 함께 시작됐다. 부유한 농장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아바나 대학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쿠바인들의 궁핍한 생활을 바꾸기 위해 ‘좌파 혁명가’로 변신했다. 1953년 미국의 지지를 받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Batista)를 축출하기 위해 10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군 부대를 공격했다가 체포됐으며 1955년 특사로 풀려났다. 멕시코로 망명한 그는 1956년 11월 25일 새벽 동생 라울(Raul)과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자 체 게바라(Guevara) 등과 힘을 모아 82명이 탄 선박 ‘그란마 호’를 타고 출항, 일주일 뒤 쿠바 해안에 상륙해 동부 산악지대에 거점을 마련했다. 이후 1959년 1월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기까지 혁명적 이념들로 쿠바인들을 열광시켰다. 총리에 오른 카스트로는 외국자본 몰수와 토지 분배 등의 개혁을 단행해 나갔다. 미국은 카스트로 혁명을 인정한 첫 번째 국가였다. 그러나 1961년 4월 16일 공산혁명을 선언하면서 미국과 등을 돌렸고, 하루 뒤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아 쿠바의 피그만(Bay of Pig)에 침입한 미국 내 쿠바 망명인사들의 반(反)혁명군은 카스트로 정부에 격퇴됐다. 쿠바는 냉전(冷戰)의 최전선으로 변했고, 1962년 10월에는 소련의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려다가 미국과 소련 간에 핵전쟁 위기까지 초래했다. 이후 쿠바 경제는 미국의 고사(枯死) 작전에 시달렸고, 냉전이 붕괴된 뒤 소련이 쿠바의 주요 수출품목인 설탕 수입을 중단하면서 쿠바는 완전히 고립됐다. 생활고를 못 이긴 쿠바인들의 ‘엑소더스’가 이어졌고, 1993년엔 카스트로의 친딸인 알리나 페르난데스 마저 미국에 망명했다. 2006년 7월 장출혈 등 증상으로 쓰러진 카스트로는 국방장관인 동생 라울에게 한시적으로 권력을 넘겼고 이후 잇달아 병상 성명을 공개하며 사망 우려를 불식시키려 했지만, 결국 이날 체력적 한계를 인정하고 스스로 사임을 결정했다. 카스트로는 지도자로 있는 동안 전국민 무상의료 제도, 2%대에 불과한 문맹률, 선진국 수준의 낮은 아동 사망률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한편 미국 CIA는 600차례 이상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닷컴 2017-02-19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100310_0007
한국의 금맥인 쇼트트랙에서 19일(한국시각)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가 쏟아졌다. 안현수는 토리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우승해 2관왕에 올랐고, 진선유는 여자 1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호석과 최은경은 각각 은메달을 차지했다. /조선
2004 - 일본, 독도우표 제작 개인주문 거절 일본 우정공사가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는 우표를 제작해 달라는 개인주문을 거절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20일 보도했다.보도에 따르면 우정공사는 19일 열린 자민당 ‘우정사업개혁에 관한 특명위원회’에서 “독도 사진에 ‘다케시마(竹島ㆍ독도의 일본명)는 우리나라고유 영토다’라는 문구를 넣은 우표 1만 시트(10만장)를 만들어 달라는한 남자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보고했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한국일보 2004-02-20 18:56 /독도 지킴이-독도 사랑 http://hidream.or.kr/dokdo/?arc=2004_05&id=dokdo#132
2002 - 부시 미국 대통령 취임 후 첫 방한, 도라산역 방문 오늘의 역사 (2월 19일)[2002년] 부시 미국 대통령 취임 후 첫 방한, 도라산역 방문 한·중·일 동북아 3개국 순방에 나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2년 2월 19일 오후 일본 방문을 마치고 미 공군1호기 편으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취임 후 첫 방한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일 청와대에서 1시간35분 동안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와 미사일 문제가 대화를 통해 조속히 해결되는 것이 긴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양국이 공동 노력을 기울여 나가기로 했으며, 북한에 대해 조속히 대화에 응할 것을 촉구했다. 부시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김 대통령과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회견이 끝난 뒤 이날 오후 경의선 남측 종착역인 도라산역을 방문, 경의선 철도 연결 사업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뒤, 각각 연설을 통해 대북대화 의지를 밝히고, 북측의 호응을 거듭 촉구했다. /조선닷컴 2017-02-19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20514_0003
- 'Night of the Drinker' - 'The Spiral Tree'
- 'Window Right' - 'Peace Treaty with Nature'
- 'Hundertwasser House' - 'Black Hatter'
- '99 Heads' - 'Fragrance of Humus'
2000 - 오스트리아의 화가, 건축가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 Friedensreich) 사망 훈데르트바서 [Hundertwasser, Friedensreich, 1928.12.15~2000.2.19] 오스트리아의 화가이며 건축가. 강렬한 색채와 유기적인 형태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 나갔으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주장하며 환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본문 본명은 프리드리히 스토바서(Friedrich Stowasser). 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대인인 어머니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으로 외가 친척 69명이 몰살당했으며, 그와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 거주지구(게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전 생애에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신념을 갖도록 했다. 그 스스로 개명한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라는 뜻으로 그의 삶과 예술에 흐르는 정신을 일깨워준다. 훈데르트바서는 일찍이 색채와 형태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지녀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다. 전쟁 후 빈 미술아카데미에서 3개월 동안 공부했으며, 이후에는 유럽 전 지역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과 야외, 레스토랑, 기차나 비행기 등 자신이 머무르는 곳은 어디에서든 그림을 그렸다. 또한 이젤을 사용하는 대신 캔버스나 종이를 펼쳐놓고 작업했다. 하나의 작품에 수채 물감, 유화 물감, 유성 펜, 아크릴, 템페라, 오일, 금속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으며, 종이와 캔버스는 물론 프린트지, 포장지, 나무판, 천 조각, 버려진 종이 등 다양한 곳에 그림을 그렸다. 물감의 대부분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훈데르트바서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나선’의 형태이다. 그에게 나선은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고 끝없이 돌고 있는 나선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릴 정도로 색을 조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색의 조합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대담한 컬러를 사용했다. 그의 특유의 색감은 회화에서 주제를 드러내는 데 주조적인 역할을 했으며, 생명의 다양함과 무한함을 색채를 통해 표현했다. 1983년 훈데르트바서는 빈의 시의회가 의뢰한 공공주택 리모델링 작업에 착수했다. ‘건축은 네모다’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탄생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는 건축을 통해 지상낙원을 실현하려는 그의 꿈이 녹아 있다. 그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건축 안에 쏟아 부었다. 빈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쿤스트하우스 빈》 역시 그의 이러한 철학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는 도시의 메마른 건축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건축 치료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훈데르트바서는 자연보호, 산림운동, 반핵운동 등 예술 밖에서도 활발한 운동을 실천한 환경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생태주의 복음을 설파하며 캠페인 포스터를 제작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피력했다. 일생을 환경보호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 그는 2000년 태평양을 항해하던 엘리자베스 2호 갑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그는 유언에 따라 뉴질랜드에 있는 그의 땅 ‘행복한 죽음의 정원’ 안에 있는 튤립나무 아래 자연과 어우러져 영원히 잠들었다. 주요 작품에는 《대성당 1 Cathedral 1》(1951), 《노란 집들-질투 Yellow Houses-Jealousy》(1966), 《작은 길 The Small Way》(1991) 등의 회화 작품과 《쿤데르트바서 하우스 Hundertwasserhaus》(1983~1986, 오스트리아 빈),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Wien, 오스트리아 빈》(1991), 《블루마우 온천마을 Blumau》(1993~1997,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주) 등의 건축물이 있다. /네이버
덩샤오핑 [鄧小平, 1904.8.22~1997.2.19] 오늘의 역사 (2월 19일)[1997년] 중국 등소평 사망 중국의 막후 실력자 등소평이 1997년 2월 19일 향년 93세로 사망함으로써 모택동, 화국봉에 이은 세번째 최고지도자 ‘부도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1978년 3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부터 시작된 ‘등소평시대’는 개방-개혁의 시대였다. 그러나 경제개혁은 추진하면서도 정치개혁은 외면, 과감한 정치개혁을 추진한 ‘고르바초프 바람’에 밀려 한때는 인기를 잃기도 했다. 등은 사천성에서 태어나 14살 때인 1918년 프랑스로 유학해 20년대 초반에 파리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발을 담그면서 혁명의 역정을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고 1929년 귀국한 등은 공산당원으로 맹활약, 대장정 초기인 1934년에 이미 당중앙비서장이 되어있었다. 팔로군 정치위원을 거쳐 1956년 중공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그러나 국가주석 유소기와 함께 경제발전을 위해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던 그는 1966년 문화대혁명의 회오리속에서 홍위병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실각했다. 1973년 주은래 총리의 추천으로 복권돼 국무원 부총리가 됐지만 1976년 주은래 사후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이른바 4인방에 의해 다시 권력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모택동이 사망하고 화국봉이 4인방을 제거하자 재기해 ‘실사구시’의 논법으로 중국 최고지도자 자리를 차지했다. /조선닷컴 2017-02-19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910_0025
1992 - 동계올림픽 사상 첫 메달 획득 [어제의 오늘]1992년 동계올림픽 사상 첫 메달 획득 ㆍ‘동계스포츠 강국’ 신호탄 쏘다 동계스포츠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대한민국이 ‘다크호스’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92년 제16회 프랑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때부터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동계올림픽 출전 사상 첫 메달을 따냈다. 김윤만 선수(당시 19세)가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는 낭보는 1992년 2월19일 새벽에 날아들었다. 한국 동계스포츠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이 대회에서 한국은 금2, 은1, 동1개로 이전까지 아시아 정상을 뽐내던 일본(11위)을 제치고 종합 10위의 성적을 거둔다. 정진호 기자 hotmail@kyunghyang.com /경향닷컴 2011-02-18 21:56:1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2182156125&code=100100&s_code=ap005
코모로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79년 2월에 수교하여 케냐 대한민국대사관에서 업무를 겸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5년 수교하였고 1983년 미얀마에서 일어난 아웅산묘소 폭파 암살 사건 이후 단교하였다가 1989년 재개하였다. 1987년에는 아브달라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2005년 기준 대한(對韓) 수입은 3만 3000달러이고, 대한 수출은 없다. 주요 수입품은 원자로·보일러 기계류, 타이어류, 가전제품 등이다. 2005년 한국 기업은 없으며, 교민 가족 4명이 체류 중이다. /naver
1960 - 영국의 앤드루 왕자(Prince Andrew) 출생 앤드루 왕자 [Prince Andrew, Duke of York, 1960.2.19~ ] 요크 공작 앤드루(Andrew Albert Christian Edward; 1960년 2월 19일 - )는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아들이자 요크 공작이며, 정식 칭호는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York’이다. /위키백과 요크 공작(Duke of York)은 영국의 작위중 하나이며 귀족의 칭호이다. 요크 공작의 작위가 생겨난 15세기부터, 요크 공작의 칭호는 대게 잉글랜드 군주의 두번째 아들에게 주어졌다. 두번째 창시 이래로 (1474), 요크 공작 칭호의 수여자중 그것을 후대에 물려주게 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들은 남성 상속인이 없이 사망하거나,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현재의 요크 공작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2번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이다. 현재 앤드루에게는 남성 상속인이 없다. 요크 공작의 부인은 요크 공작부인(Duchess Of York)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
- Treaty Signing Establishing Republic, 20th Anniv.
오늘의 역사 (2월 19일)[1959년] 영국-그리스- 터키, 키프로스협정 키프로스는 그리스계와 터키계 2개 민족으로 형성된 1개 국가로 국민들의 반목은 이미 고질화된 상태의 국가였다. 분리를 원하는 터키계 국민들에 비해 그리스계는 그리스와의 병합을 갈망해 왔다. 그리스계 국민수는 8대 1로 터키계를 압도하고 있었다. 섬을 둘러싼 그리스·터키의 대립으로 양국간의 감정이 점점 격화되자 서방국가 반공군사동맹의 분열을 두려워한 영국과 미국이 중재에 나서, 1959년 2월 마침내 취리히에서 양국 수뇌의 비밀회담이 실현됐다. 뒤이어 양국에 영국·미국 대표를 포함한 회의가 2월 19일 런던에서 개최되어, 런던 협정으로 불리는 키프로스 독립협정이 성립됐다. 이 협정으로 1960년 8월 키프로스는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12월 14일에는 마카리오스 주교가 터키계 경쟁상대를 물리치고 키프로스 대통령에 선출됐다. /조선닷컴 2017-02-19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6_0382
- Tour de France Bicycle Race, Cent., Maurice Garin, Winner of 1903 Race.
1957 - 제1회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자 모리스 가랭(Maurice Garin) 사망 가랭 [Garin, Maurice, 1871.3.3~1957.2.19] Maurice Garin (March 3 1871 - February 19 1957) was a road bicycle racer. He is best known for winning the 1903 Tour de France - the very first running of the race. Garin was born in Arvier in the Aosta Valley in north-west Italy. He became a naturalized French citizen only in December 1901, when he was already a champion cyclist, winner of the second Paris-Roubaix. He was declared the winner of the 1904 Tour de France, but was later disqualified. The Tour de France organisation and the French cycling authorities have not said why. They were said to have taken a train through part of the route. In the early days stages were much longer than today, sometimes starting in the dark. When he retired from professional cycling he ran a small garage in Lens until his death. He is buried in the Cimetière Est in the neighbouring suburb of Sallaumines. Major Wins http://simple.wikipedia.org/wiki/Maurice_Garin (참고) [어제의 오늘]1903년 제1회 투르 드 프랑스 개최 ㆍ신문 판촉 수단으로 탄생… 2400㎞ 질주 1903년 7월19일 프랑스 파리 외곽지역의 사이클 경기장. 32살의 모리스 가랭은 거친 숨을 내쉬며 경기장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순간 경기장 안팎에 운집한 시민 2만여명은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19일 동안 프랑스 동서남북을 가로질러 2400여㎞를 달려온 가랭은 자신이 우승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가랭은 처음 열린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투르 드 프랑스는 한 스포츠 신문의 판촉 수단으로 탄생했다. 당시 막 창간한 신문 로토(L’Auto)는 독자를 늘리기 위한 묘책이 필요했다. 로토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프랑스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최장거리 자전거 경주 대회였다. 하지만 이 대회는 모험이자 도박이었다. 프랑스에서 자전거 경주 대회는 많았지만 대부분 1000㎞를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7-18 18:18:5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181818505&code=100100&s_code=ap005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는 동남아시아의 지역적 집단안전보장을 목적으로 1954년 결성되어 1977년까지 존속하였다. 국제연합헌장 제52조의 지역적 집단안전보장 규정을 근거로 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지도하에 있던 반공산주의 군사블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CENTO(중앙조약기구)와 동일한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1954년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프랑스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Dulles, John F., 1888~1959) 등이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봉쇄할 목적으로 결성을 서둘렀고, 그해 9월 8일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열린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 ·파키스탄 등 8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동남아시아집단방위조약(마닐라조약)'(1955년 2월 19일 발효, 무기한) 및 의정서 등에 조인함으로써 결성되었다. 가맹국은 상기 8개국이고, 중심 기관은 각국 외무장관으로 구성되는 이사회이며, 본부는 타이의 방콕에 두었다. 베트남전쟁의 과정에서 프랑스 ·파키스탄이 사실상 탈퇴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도 1973년 1월의 베트남평화협정 성립 후에 정식으로 이탈하였다. 1975년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에 따라 붕괴 상태에 빠졌으며, 1977년 6월 30일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 기구의 법적 기초가 된 조약 자체는 존속한다. naver
함순 [Hamsun, Knut, 1859.8.4~1952.2.19] 본명은 Knut Pederson. 노르웨이의 소설가·극작가·시인. 19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신낭만주의의 반항의 기수로서 과도한 자연주의적 경향으로부터 소설을 구해냈다. 농부 출신으로,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로포텐 섬에서 보냈고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19세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그때는 노르웨이 북부에 있는 보되에서 구두공의 도제로 일할 때였다. 다음 10년 동안은 임시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미국을 2번 방문했는데, 시카고에서는 시가 전차 차장으로, 노스다코타에서는 농장 일꾼으로 일했다. 그의 첫번째 출판물은 소설 〈굶주림 Sult〉(1890)으로, 노르웨이의 한 굶주린 젊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굶주림〉은 당대의 전형적인 노르웨이 소설에서 보이는 사회적 리얼리즘과는 명백하게 구분되었다. 이 작품의 신선한 관점과 자극적·서정적인 문체는 유럽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첫번째 성공에 이어 그는 톨스토이와 입센 같은 우상들을 공격하는 일련의 강론들을 잇달아 발표했고,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작품들을 썼다. 〈신비 Mysterier〉(1892)·〈판 Pan〉(1894)·〈빅토리아 Victoria〉(1898) 등의 초기 작품들에 나오는 비사회적인 주인공들처럼 그 역시 진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불손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원숙한 문체로 씌어진 〈대지의 성장 Markens grøde〉(1917)에서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철학을 표현했다. 그러나 니체나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받은 맹렬한 개인주의적 메시지는 끝까지 현대 서양 문명에 대한 반감을 유지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을 지지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반역자로 수감되었지만 나이 때문에 감형되었다. 그의 평판은 나치 협력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사후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적 관심이 새로워졌고, 새로운 해석들이 나옴으로써 그의 작품은 다시 국제적인 독자층을 얻었다. 그의 사려깊은 비합리주의와 자기 멋대로의 방식, 돌발적이며 인상주의적인 문체는 유럽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막심 고리키, 토마스 만, 아이작 B. 싱어 같은 작가들이 그를 거장으로 인정했다. /위키백과
지드 [Gide. Andre, 1869.11.22~1951.2.19] [역사속의 인물] 소설가 앙드레 지드 '방황과 번민…그리고 사랑' 1970, 80년대 젊은이들에겐 소설가 앙드레 지드와 헤르만 헤세가 '우상'이었다. 마치 자신의 일인 듯 가슴 두근거리며 자유를 찾아 방황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 성경 문구로 시작하는 '좁은 문'을 붙잡고 씨름했던 때가 있었다. 시적 언어와 심리해부적 독백으로 가득한, 어려운 문장을 소화하면 지식인이 되지 않을까 싶어 꽤 용을 썼다. 아리사의 처연한 슬픔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메날크여! 나는 너를 생각한다./ 말해다오! 파도의 거품으로 얼룩진 너의 배는 어느 바다를 항해하려는가?'(지상의 양식) '사랑은 내 속에 있으면서 내 것이 아니었다.'(좁은 문) 앙드레 지드는 평생을 반듯한 自我(자아)와 방황하고픈 자아의 갈등 속에서 보냈다. 부인을 처녀로 지내게 한 강박적 금욕주의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다른 여자에게서 딸을 낳고, 동성애에 빠져 들었다. 노년에 들어서야 개인적인 번민에서 빠져나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1951년 오늘 사망해 부인과 나란히 프랑스 귀베르빌에 묻혔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그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고 싶다. 왜 내가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2월 19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800&yy=2009
1950 - 쿠바의 생물학자 라 토레(La Torre y Huerta, Carlos de) 사망 라 토레 [La Torre y Huerta, Carlos de, 1858.5.15~1950.2.19] Carlos de la Torre y Huerta (Cuban naturalist) Summary Carlos de la Torre y Huerta was on e of Cuba’s most notable naturalists. La Torre worked diligently in the field of mollusks, even contributing several specimens to what is now the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Additionally, he cared about teaching and aimed to continue the legacy of his own influential professor, Felipe Poey y Aloy. La Torre would take his students on excursions to best expose them to the world of natural sciences. His students responded well to this teaching style, which made difficult subject matter easy to understand. He was known to be eccentric and bohemian, but his ability to tell stories and jokes made him well liked by his colleagues and students. Highlights * 1858 – May 15 – Born in Matanzas, Cuba * 1881 – Graduates from the University of Havana * 1883 – Earns a doctorate in natural science from the University of Central Madrid (now the Complutense University of Madrid) * 1893 – Acts as a judge of the Mineralogy and Geology section of the World’s Columbian Exposition * 1911 – Named Honorary Life Member of 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 1912 – Receives an honorary doctorate from Harvard University * 1922 – Earns a Doctorate of Medicine from the University of Havana * 1938 – Becomes president of the American Malacological Union * 1939 – Becomes an Honorary Member of the Washington Academy of Sciences * 1950 – Dies in Havana http://latinonaturalhistory.biodiversityexhibition.com/en/card/carlos-de-la-torre-y-huerta
1945 - 미국 해병대, 일본 이오지마[硫黃島]에 상륙 오늘의 역사 (2월 19일)[1945년] 미군, 일본 이오지마(硫黃島)에 상륙 일본 도쿄 남쪽 약 1200km 지점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태평양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년 2월19일, 미 함대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가 상륙했다. 4일간의 공방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2월23일, 산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맹폭으로 마침내 산 정상 스리바치산(摺鉢山)이 함락됐다. 일본군은 거의 90%에 가까운 1만 9,900여명이 옥쇄했고, 미군도 6,800여명이나 전사했다. 이오지마 함락으로 일본은 개전후 처음, 식민지가 아닌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해야 했지만 태평양전쟁은 비로소 종전으로 물꼬를 틀었다. 성조기를 스리바치산 정상에 힘있게 꽂는 6인 용사들의 모습(사진)이 AP를 타고 미 언론에 보도되자 감동과 환희의 물결이 미국 전역에 퍼져갔다. 7번째 전시 국채를 발행한 미 정부도 국채 판매를 위해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장면보다 영웅적인 화면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기자에게 퓰리쳐상을 안겨주며 우표와 아이스크림 등에도 사용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진짜 영웅이 아니었다. 함락순간을 놓친 사진기자 로젠탈스가 뒤늦게 산에 올라 연출한 사진임이 밝혀졌다. /조선닷컴 2017-02-19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219_0001
- Turkmenistan, 100 Manat (2005, Banknote)
1940 -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 니야조프(Nyýazow, Saparmyrat) 출생 니야조프 [Nyýazow, Saparmyrat, 1940.2.19~ 2006.12.21] [역사 속의 인물] '21세기 유례없는 독재자' 니아조프 소련연방이 해체되던 20년 전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에 간 적이 있다. 일정이 바뀌어 우연히 들른 곳이었는데 사막이 빚어낸 풍경이 황량했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까만 눈, 높은 콧대에 동서양의 장점을 고루 섞어놓은 듯했는데 그네들의 수줍은 미소가 기억에 아직 남아 있다. 그 후 유례 없는 독재자가 등장, 철권통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는 가슴이 아팠다. 종신 대통령이었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1940~2006)는 1940년 오늘 태어났고 어릴 때 고아원에서 지내다 먼 친척에게 맡겨져 성장했다. 1985년 투르크멘 공산당 제1비서로 있다가 1991년 독립해 대통령이 됐다. 그때부터 황당한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전국 곳곳에 커다란 자신의 황금 동상을 세우고, 자신이 예수의 7사도 중 맏형이라며 어록집도 집필했다. 어록집은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수도인 아쉬가바드 외에는 전국의 병원, 도서관을 모두 없앴다. "수도로 오기 힘들면 아예 아프지 말라"는 유명한 개그까지 남겼다. 심장마비로 급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후계자도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하니 언제쯤 그 나라의 비극이 끝날까. 박병선(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2월 19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980&yy=2011
브란데스 [Brandes, Georg, 1842.2.4∼1927.2.19] 덴마크 비평가·학자. 코펜하겐 출생. 1864년 코펜하겐대학교를 졸업한 뒤 1865∼1871년 유럽 여행 중 J. 르낭·H. 테인·J.S. 밀 등의 영향을 받아 덴마크를 문화적 고립과 지방적 편협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1871년 귀국하여 코펜하겐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을 《19세기 문학의 주류(6권, 1872∼90)》로 출판하여 유명해졌다. 그것은 세계문학적 견지에서 서유럽 각국 문화의 교류와 상호 영향을 파악, 작자의 개성을 선명하게 그려낸 뛰어난 문학비평이다. 1880년대 후반에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귀족적 급진주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주요 저서로는 《덴마크 시인들(1877)》 《현대 약동기의 사람들(1883)》 《귀족적 급진주의(1889)》 《셰익스피어(1895∼96)》 《괴테(1915)》 등이 있다. /yahoo
1915 - 독일의 군인, 전차 격파 에이스 요하네스 뵐터(Bölter, Johannes) 출생 뵐터 [Bölter, (Hauptmann) Johannes, 1915.2.19~1987.9.16] Johannes Bölter Hauptmann Johannes Bölter (born February 19, 1915 in Mülheim an der Ruhr, North Rhine-Westphalia, died September 16, 1987 in Mülheim an der Ruhr) was a German Heer tank commander during World War II. He was also a recipient of the Knight's Cross of the Iron Cross with Oak Leaves. The Knight's Cross of the Iron Cross and its higher grade Oak Leaves was awarded to recognise extreme battlefield bravery or successful military leadership. Johannes Bölter destroyed 139 tanks (some sources place his score as high as 144) during World War II. Together with Kurt Knispel, Otto Carius, Ernst Barkmann and Michael Wittmann h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ost successful tank commanders in history. Awards
고칼레 [Gokhale, Gopal Krishna, 1866.5.9~1915.2.19] 인도의 정치가, 교육가. 라트나기리 출생. 19세기 말부터 제l차 세계대전에 걸쳐서 활동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의 기조(基調)는 인도 사회의 점진적 개혁에 있었으며, 국민회의파 안에서는 인도의 완전독립을 위한다면 테러리즘도 불사하겠다는 티라크 등의 민족파와 정면으로 맞서는 온건파 지도자였다. 1884년부터 사학(私學)의 경영과 교육에 종사하였고, 역사와 경제학을 가르쳤다. 그 후 인도정청(政廳)의 고문이 되었고, 인도 국민의 경제개선을 위하여 여러 위원회에 참가하였다. 1905년 바나라스에서 열린 국민회의파 연차대회에서 의장이 되었다. 그해 인도사회봉사자협회(Servants of India Society)를 창립하여, 이를 거점으로 청년들의 교육과 훈련에 힘썼다. 그의 유럽적인 합헌주의는 1920년대 국민회의파 내의 입헌파 사이에서 계승되었?만?, 그에게 사사(師事)한 간디는 그를 갠지스강(江)에 비유하였다. /naver
[오늘의 역사]한성은행 설립 1897년 오늘 김종한과 이보응 등이 자본금 20만 원으로 한성은행을 설립했다. 민간인에 대한 환전 및 금융 업무를 주요 목표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개점 휴업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1903년 영업목표를 황실 및 정부의 재산관리와 금융으로 전환한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하였다. 은행의 대주주들이 이완용의 인척과 같은 친일파가 대부분이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맹렬한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943년 일제의 은행통합 정책에 의해 동일은행과 합병해 조흥은행으로 재설립됐다. 충청투데이 2008.02.18 19:00
리베라 [Rivera, Jose Eustasio, 1889.2.19~1928.7.17] 콜롬비아의 시인·소설가. 아마존 강 상류의 정글 지대에서 고무 채집 인부들이 당하는 착취형태를 강력히 고발한 소설 〈소용돌이 La vorágine〉(1924)는 정글을 배경으로 한 많은 남아메리카 소설들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변호사를 본업으로 가진 리베라는 〈약속의 땅 Tierra de promisión〉(1921)을 써서 문학적 명성을 얻었는데, 이 작품은 콜롬비아 열대지방의 천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소네트집이다. 1922년 베네수엘라와의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한 정부특사로 임명되어 오리노코 강을 따라 아마존 지역을 여행하게 되었다. 여행 중에 그는 인디언들과 잠시 같이 지내면서 정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폭력과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 관해 상세한 정보를 얻었다. 걸작 〈소용돌이〉는 정글에서 베리베리라는 풍토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회복기에 쓴 소설로서, 자신의 체험과 시적 상상 및 생생한 묘사의 재능을 결합시킨 작품이다. 이 소설은 모험소설인 동시에 사회저항소설로도 성공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소용돌이〉는 그가 쓴 유일한 소설이었다. /브리태니커 1887 - 네덜란드의 소설가 물타툴리(Multatuli) 사망 물타툴리 [Multatuli, 1820.3.2~1887.2.19] 물타툴리 에뒤아르트 다우어스 데커르(Eduard Douwes Dekker, 1820년 3월 2일 ~ 1887년 2월 19일 잉겔하임)는 물타툴리(Multatuli, 라틴어로 '많이 고생했다'라는 뜻)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네덜란드의 작가이다. 에뒤아르트 데커르는 1820년 암스테르담에서 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난다. 18살 때인 1838년 아버지와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자바 섬에 와 그곳에서 식민 관료로 일하게 된다. 그의 식민관료 생활은 1856년 레박 부통감에 있을 때 전임자가 관련된 비리를 고발하지만, 오히려 해고 위협을 받게 된다. 이에 자진하여 퇴직하고 유럽으로 돌아온다. 식민사회의 모순에 큰 염증을 느낀 데커르는 신문기사와 팜플릿을 통해 고발을 계속하지만, 이러한 투쟁은 크게 반향을 얻지 못한다. 1860년 물타툴리라는 필명으로 네덜란드 식민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소설인 대표작 <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를 발표하며, 이 소설은 네덜란드 뿐 아닌 유럽 전역에 널리 읽히면서 네덜란드 식민지에서의 노동 착취를 알렸다. /위키백과
[오늘의 역사] (1878.2.19) 에디슨, 축음기 특허권 획득 1878년 2월 19일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Edison, Thomas A., 1847~1931)이 납관식 축음기에 대한 특허권을 획득했다. 백열전구, 키네토스코프 등을 비롯해 모두 1,093개의 특허권을 얻어 이 분야 세계기록을 세운 에디슨의 재능은 1875년 뉴저지 주의 멘로파크 근교로 이사하면서 빛을 발했다. 1877년말 에디슨은 현대 전화기의 전신인 탄소송화기를 개발했으며, 이듬해 전화에서 수신된 메시지를 사람의 음성 형태로 바꿔 줄 기구를 개발하던 중 축음기를 발명했다. 축음기로 녹음된 최초의 노래는 동요 <메리가 어린 양을 데리고 있네 Mary Has A Little Lamb>였다. /브리태니커 2017-02-19
- 'Couple Laying on Grass'
- MURNAU A. STAFFELSEE --- Kandinsky-Münter-Jawlensky-Werefkin, vor 100 Jahren in Murnau (베를린 허 진 님 자료제공)
뮌터 [Münter, Gabriele, 1877.2.19~1962.5.19] 독일 표현주의 화가이자 ‘청기사’파의 중요한 여성작가. 1877년 2월 19일 독일 베를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7년 뒤셀도르프에서 그림 개인교습을 받았으며 1901년 뮌헨 여성화가협회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겨울 팔랑스 미술학교(Phalanx School)로 옮기게 되는데 그곳에서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를 만난다. 칸딘스키는 팔랑스 미술학교의 설립자이며 그곳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 Armenia, 5000 Dram (2003 Banknote)
1869 - 아르메니아의 작가, 시인 투마니안(Tumanyan, Hovhannes) 출생 투마니안 [Tumanyan, Hovhannes, 1869.2.19~1923.3.23] Hovhannes Tumanyan (Armenian: Հովհաննես Թումանյան) (February 19, 1869 - March 23, 1923),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greatest Armenian poets and writers. His work was mostly written in tragic form, often centering on the harsh lives of villagers in the Lori region.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Hovhannes_Tumanyan
Envelope of a letter from Sven Hedin to his sister Alma with Chinese stamps issued on the occasion of the Sino-Swedish Expedition. /wikipedia
헤딘 [Hedin, Sven Anders, 1865.2.19~1952.11.26] 스벤 헤딘(Sven Hedin, 1865년2월 19일 ~ 1952년11월 26일)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탐험한 마지막 지리학자였다. 독일 베를린 대학과 웁살라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했고, 1893년부터 1930년까지 네 번에 걸쳐 중앙 아시아를 학술탐사하였다. 이 탐사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동부에서 고대 왕국 누란(樓蘭)의 유적을 발굴해 전 세계의 지리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면서 그 당시 서양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타클라마칸과 티베트를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하였다. 수많은 다양한 주제의 과학 논문과 여행기 전기 선언문 소설등의 65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의 친척이자 법률 자문이었던 에리크 벤네르홀름(Eric Wennerholm)은 헤딘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헤딘에 의한 모든 것은 거대하다 그가 탐사한 높은 산, 광대한 사막, 긴 탐험의 여정, 수많은 저작 그가 그린 수많은 지도, 수많은 훈장 그리고 정치문제에 있어서 판단력의 부족도 그러하다." 세계를 탐사하면서 수많은 유명인사를 만났던 헤딘은 1908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초청으로 일본과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을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에게 조선은 곧 일본의 지배를 받을 것이고, 순종은 정치범으로 구금될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히로부미가 헤딘을 초청한 것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술책으로 평가된다. 헤딘은 그의 책에서 고종과 순종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하며, 순종에 대한 서술은 오류 투성이라고 한다. /위키백과
아레니우스 [Arrhenius, Svante (August), 1859.2.19~1927.10.2] 스웨덴의 화학자. 웁살라 근처의 비크 출생. 1876년 웁살라대학에 입학, 물리학을 전공하는 한편, 화학과 수학을 배워 1881년에 졸업하였다. E.에들룬드의 실험실에서 전해질희석수용액의 전기전도도에 관하여 연구, 1884년 과학아카데미에 논문으로 발표하여 이온화설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논문으로 1884년 웁살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크게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W.오스트발트의 추천으로 웁살라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곧 사임, 과학아카데미의 해외연구생으로 5년간 여러 나라에 유학하였다. 1891년 독일의 기센대학에 물리화학강좌가 신설되어 아레니우스를 조교수로 초청하기에 이르러서야 스톡홀름대학에서 물리학강사의 지위를 얻어 스웨덴에 머물기로 하였다. 1896년 이온화설의 업적으로 독일의 전기화학학회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었고, 이듬해 스톡홀름대학 학장에 임명, 1901년에는 스웨덴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02년 영국의 왕립학회로부터 데이비상을 받고, 1903년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05년 스웨덴 정부는 노벨물리화학연구소를 설립, 아레니우스를 소장에 임명하였다. 1927년까지 그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방면에 걸친 연구를 하였다. 주요 업적은 이온화설, 화학반응속도 및 면역화학의 이론, 우주물리학에서는 오로라의 기원에 관한 가설, 지학에서는 화산 활동의 원인에 대한 가설 등이 있다. 또한 많은 저서가 있는데, 《사적으로 본 우주관의 변천》 등이 유명하다. /naver
뷔히너 [Büchner, Georg, 1813.10.7~1837.2.19] 독일의 극작가. 헤세다름슈타트 근교 고델라우 출생. 의사의 아들로 유물론자 L.뷔히너의 형이기도 하다. 슈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자유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기센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정치활동에 참가하였다. 비합법적인 팸플릿 《헤센의 급사(急使) Der Hessische Landbote》를 기초(起草)한 혐의로 당국에 쫓기게 되자, 망명비용의 장만을 위해 희곡 《당통의 죽음 Dantons Tod》을 집필(1835), 청년독일파의 작가 구츠코의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단편 《렌츠 Lenz》, 희극 《레온체와 레나 Leonce und Lena》(1850, 사후 간행)를 쓰는 한편, 해부학연구를 계속하였으며, 그 업적으로 취리히대학의 강사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희곡은 20세기에 들어서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자연주의자와 표현주의자는 그를 선구자로 보았다. 냉철한 사실주의, 섬뜩한 비전과 리드미컬한 극작법(劇作法), 그로테스크 ·니힐리즘 ·부조리 ·소외 등, 모든 요소들을 내포한 그의 희곡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내려져 있으며, 그는 현대연극의 여러 과제를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다룬 극작가로 불린다. 패혈증(敗血症)으로 23세에 요절하였으며, 유작으로는 비극 《보이체크 Woyzeck》(1879, 사후 간행) 등이 있다. /naver
로키탄스키 [Rokitansky, Karl Freiherr von, 1804.2.19~1878.7.23] 10만 번의 부검(그 가운데 3만 번은 자신이 직접 부검했음) 사례를 통해 질병에 걸린 장기(臟器)의 병리(病理)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했는데 이것은 해부병리학이 현대의학에 꼭 필요한 기초가 되게 했으며, 19세기 후반 신(新)빈대학교가 세계 의학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빈 종합병원의 해부병리 교수로 있을 때(1844~74) 보헤미아 출신 학생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에게 의학공부를 하도록 영향을 주었는데(1846) 그는 뒤에 소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유럽의 산과(産科) 병동을 깨끗하게 유지하여 산욕열(産褥熱)을 추방하려고 노력한 로키탄스키를 도와주었다. 심장 내면을 덮고 있는 막에 생기는 염증으로 때로는 급격하게 악화되어 죽기도 하는 악성심내막염(惡性心內膜炎) 원인균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를 하다가 로키탄스키는 대엽성폐렴(大葉性肺炎:폐의 하엽에서 주로 시작되는 폐렴)과 소엽성폐렴(小葉性肺炎:기관지폐렴이라고도 하는데 세기관지에서 시작되는 폐렴)을 구별할 수 있는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는 또 급성황색간위축(急性黃色肝萎縮:지금은 로키탄스키병이라고 함, 1843)도 연구했고 종말세기관지보다 원위부에 있는 폐포의 공기공간이 늘어나는 폐기종(肺氣腫)의 현미경적 소견을 밝혀냈으며, 척추뼈가 앞으로 튀어나오는 척추전방전위증(脊椎前方轉位症)을 처음으로 기술하였다(1839). 그밖에 〈해부병리지침서 Handbuch der Pathologischen Anatomie〉(3권, 1842~46)는 해부병리 기술을 정립된 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브리태니커
- Poland, 1,000 Zlotych (Banknote)
1473 -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 출생 코페르니쿠스 [Copernicus, Nicolaus, 1473.2.19~1543.5.24] [오늘의 인물] (1473.2.19)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태어남 / 1543년 5월 24일 죽음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libri Ⅵ>(1543)라는 저술을 통해 서구사상에 커다란 공헌을 한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중세 교회에 의해 공인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의심을 품고 지동설을 구상했다. 당시 신부와 신학자들에게 용납될 수 없었던 지동설은 후에 갈릴레오를 시작으로 케플러와 뉴턴의 연구로 지지를 받았고, 18세기말 시차 측정을 통해 완전한 진리로 실증되었다.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고는 그때까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우주관의 완전한 변혁을 요구한 것으로서, 인간은 우주에 대한 철학적인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야만 했다. /브리태니커 2017-02-19 "우리가 비참할 정도로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것은 짧은 삶, 약한 감각, 태만의 무딘 감각, 무의미한 활동들 탓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도 종종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과 지식의 기만적인 적(敵)인 부단한 망각을 통해 감각에서 사라져버린다."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 Uzbekistan, 500 Sum (1999, Banknote)
1405 - 중앙아시아의 정복자 티무르(Timur) 사망 티무르 [帖木兒, Timur, 1336(4.8?)~1405.2.19(18)] 중앙아시아 티무르제국의 건설자(재위 1369∼1405). 해마다 사방으로 원정하여 코라즘을 병합하였고 동차가타이 한국을 복종시켰으며 카르토왕조를 멸망시키고 인도에 침입하여 델리를 점령하였다. 학자·문인을 보호하고 산업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본문 게시(현재의 샤흐리사브즈)의 귀족 출신으로, 그 가계(家系)는 칭기즈칸에 이어진다고 전한다. 서차가타이한국(汗國)의 카잔의 딸을 정비(正妃)로 삼았기 때문에 크레겐이라 불리고, 또 시스탄전투에서 오른발을 다쳤기 때문에 '티무르 이랑(절름발이 티무르)'이라고도 불렀으며, 유럽인은 Tamerlane이라 불렀다. 1360년 동차가타이의 칸이 침입했을 때 일단 항복하였으나, 곧 처남 후사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이를 몰아내었다. 1369년 바르프에서 즉위하고, 1370년 마와란나하르의 군주가 되어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후 티무르는 해마다 사방으로 원정하여, 1380년에는 코라즘을 병합하였고, 5회에 걸쳐 동차가타이 한국에 침입, 1397년에는 이를 복종시켰다. 이란지방에 대해서는 1380년에 카르토왕조를 멸망시키고, 1393년에는 자라일왕조의 군주 아마드를 바그다드에서 몰아냈다. 한편, 킵차크한국의 토크타미시와 다투어 1395년 테레크 강변에서 이를 크게 격파하고 모스크바 부근까지 진군하였다. 1398년에는 인도에 침입하여 델리를 점령하고 많은 재화를 약탈하였다. 이때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바야지트 1세는 이집트의 맘루크왕조와 결탁하여 아마드를 도와서 서경(西境)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시리아에서 아나토리아로 진군시켜, 1402년 7월 앙카라전투에서 바야지트를 격파하고 그를 포로로 잡았다. 전후(戰後) 사절(使節) 요하네스를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하였는데, 카스틸랴로부터 클라비호가 사신으로 왔다. 마지막으로 그는 동방의 명(明)나라를 정벌하려고 떠났으나, 도중 오트라르에서 병사하였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구르 아미르는 그의 무덤이며, 1941년 그 유적이 발굴되었다. 대담·용맹하고 의지가 강하며 준엄하였지만, 또한 학자·문인을 보호하고 산업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naver 1404년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격파하여 원나라의 옛 영지를 탈환한다는 목표를 갖고 중국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티무르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1405년 2월 오트랄에서 병사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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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