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22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2 - 미국의 기자 마리 콜빈과 프랑스의 사진 기자 레미 오슐리크 사망 콜빈 [Colvin, Marie, 1956.1.12~2012.2.22] 오슐리크 [Ochlik, Remi, 1983.10.16~2012.2.22] 시리아 사태 점입가경..정부군 폭격에 기자 2명 사망 정부군 폭격에 美·弗 기자 사망 유혈사태가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에서 정부군 폭격에 외신기자 두 명이 사망했다. 지난해 3월부터 현재까지 사망자는 7600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2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군이 이날 오전 시리아 반정부 세력의 거점인 홈스 중심부 바바 아므르를 집중 포격, 이곳에서 취재하던 마리 콜빈 영국 선데이타임스 기자와 레미 오슐리크 프랑스 사진기자가 현장에서 숨졌다. 안혜신 기자 ahnhye@ /이데일리 2012.02.23 08:55 http://www.edaily.co.kr/news/issue/IssueRead.asp?DCD=A00902&hot_gb= 5&hot_cd=2781&newsid=01351366599433472
2011 - ‘뽀로로 우표’ 발행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110여 나라에 수출돼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만화 캐릭터 ‘뽀로로’를 소재로 한 기념우표가 오는 22일부터 전국 우체국에서 판매된다.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는 한국의 캐릭터 우표시리즈를 매년 1차례씩 4회에 걸쳐 발행하며, 올해 첫 번째로 ‘뽀롱뽀롱 뽀로로 기념우표’를 발행했다고 17일 밝혔다. 우정사업본부 제공 /한겨레 2011-02-17 오후 07:49:21 http://www.hani.co.kr/arti/economy/finance/463964.html
2007 - 노무현 대통령 열린우리당 탈당 의사 공식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2일 정세균(丁世均) 의장 등 열린우리당 새 지도부를 초청, 만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열린우리당 탈당 의사를 공식화했다. 이달 말까지 탈당 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이로써 열린우리당 창당(2003년11월11일) 3년3개월 만에 노 대통령은 당을 떠나고, 당은 여당 지위를 잃게 됐다. 그러나 이 자리는 고별의 자리이면서도 ‘결별’의 자리가 아니었다.노 대통령은 당의 성공을 축원했고, 당 지도부는 국정 지원을 강조했다. 탈당하는 대통령이 당 지도부를 불러 식사를 하는 형식부터가 이례적 이었다. 오간 말들도 ‘언젠가 다시 만나리’ 계열이었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출범 자체가 역사적 의의가 있고, (남은) 역사적 과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열린우리당이 계속해서 성공해 나가고 잘 되길 기원한다”고 했다. 이어 “(2월14일) 전당대회가 무사하게만 치러졌으면 하고 기원했는데 스페인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는 보고를 받고 기뻤다”고 했다. 정세균 의장은 “전당대회를 통해 앞으로도 대통령이 하시는 일을 잘 뒷받침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면서 “대통령이 당적을 갖고 있든 아니든 우리는 참여정부 성공을 책임져야 하는 책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또 “항상 마음 써주시는 대통령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격려와 지도 바란다”고 했다. 이날 만찬은 예정시간을 35분 넘겨 2시간5분 동안 포도주를 곁들여 진행됐다. /조선
2007 - 제1회 ‘아동성폭력 추방의 날’ 기념식 비명에 간 어린 넋이 지핀 ‘아동성폭력 추방의 날’ 안전한 세상 만들기…너를 잊지 못할거야 한 어린 영혼의 희생이 어린이 성폭력에 무심했던 어른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게 될까? 22일 오전 11시 서울 ㄱ초등학교 강당에서 제1회 ‘아동성폭력 추방의 날’ 기념식이 여성가족부와 국가청소년위원회, 38개 여성·청소년·학부모 단체의 주선으로 열렸다. 지난해 2월 일어난 용산 어린이 성폭력 살해사건 1주기를 맞아 연 행사였다. 피해 어린이(당시 11살)가 다니던 학교에 모인 부모와 친구, 지역 주민 400여명은 그의 해맑은 옛 모습이 담긴 추모 영상을 보면서 어린 넋을 달랬다.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게 쉽지가 않구나. 네가 친구와 동생들이 더 이상 무서운 일을 겪지 않도록 보탬이 된 데 위안을 갖는다. 네가 다음 세상에 왔을 때는 정말 안전한 세상이 되길 간절히 기원한단다. 엄마 아빠의 딸로서 10년 동안 같이 해준 걸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 꼭 만나자.” 피해 어린이의 아버지 허아무개씨는 비명에 보낸 외딸에게 쓴 편지를 눈물로 읽어내려갔다. 행사에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가해자를 쉽게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다”며 “피해자가 순진한 어린이라는 걸 감안해 맨 첫 범죄 때부터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치료를 함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 가해자가 그전에도 5살짜리 여자 아이를 성추행한 뒤 공탁금을 내고 집행유예로 풀려나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피해 어린이의 어머니인 이아무개씨는 “이제 재판부에 여성 판사들도 많아진다고 하니 (성폭력 범죄에 대한 선고가)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또 이들은 국회 계류 중인 청소년 성보호법(<한겨레> 1월31일치 26면)에 △가해자의 취업금지 제한 폭 확대 △가해자 등록정보 열람 지역 확대 △공소시효 폐지 등을 보태 하루빨리 시행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피해 어린이의 친구들도 어른들의 노력을 당부했다. 어린이들은 편지를 쓴 팻말을 든 채 눈물을 펑펑 쏟으며 “어른들이 빨리 대책 마련을 서둘러 주었더라면 이렇게 내 친구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경찰, 교사, 보육단체, 의사 등 각계의 대표 ‘어른’들은 △피해아동과 보호자에 대한 상담과 지원 △피해아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수사 △예방 교육 강화 등을 다짐했다. 강당 뒤에서 내내 울며 행사를 지켜보던 피해 어린이의 외할머니 김아무개씨는 “부모가 얼마나 힘들게 낳아 고이 길렀는데 이렇게 일찍 가려고 그랬는지 어려서부터 예쁜 짓만 골라서 했다”며 “진작 대책을 마련했어야 하고, 처음부터 확실히 처벌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한겨레 2007-02-22 오후 05:09:5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92207.html
2007 -미 역사상 최대 갑부는 석유재벌 록펠러 ‘포천’ 조사결과…밴더빌트 2위 19세기 석유재벌인 존 록펠러가 미국 역사상 최대 갑부인 것으로 분석됐다고 경제주간지 〈포천〉이 22일 보도했다. 생존자로는 유일하게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갑부 서열 10위 안에 올랐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개인자산의 비율을 산출한 결과, 록펠러는 사망 당시인 1937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의 1.54%에 해당하는 14억달러(약 1조3천억원)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철도 건설과 금융, 해운업까지 다양한 업종을 두루 거친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오른쪽)가 지디피의 1.15%인 1억500만달러를 보유해 2위를 차지했다. 모피 무역업자 존 제이콥 애스터와 퍼스트 뱅크의 최대투자자인 은행가 스티븐 지라드는 각각 3위(지디피의 0.93%)와 4위(지디피의 0.67%)를 기록했다. 5위는 게이츠 회장으로 2006년 기준으로 지디피의 0.66%에 해당하는 820억달러(약 76조9천억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그는 지난해까지 줄곧 5위 자리를 차지해온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를 누루고 갑부 서열에서 한 단계 뛰어오르는 저력을 보였다. 잡지는 평가 방식에 대해 “부는 상대적이고 달러의 가치도 고정된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망 당시 개인의 자산이 지디피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한겨레 2007-02-22 오후 06:28:5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92243.html
2006 - '열하일기' 한글 필사본 새로 발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한글 필사본이 새로 발견돼 22일 공개됐다. 권두환 서울대 교수(인문대 학장·국문학)가 이날 공개한 필사본은 <연암열하일긔>라는 제목에 254쪽 분량으로, 유일한 한글 번역본으로 알려져온 명지대 소장본보다 4배쯤 양이 많다. 정본이 없는 가운데 지금까지 최대치로 여겨지는 번역본(이가원 역)의 6분의 1 수준이다. 때문에 당대 서민들의 언어 생활을 잘 보여준다고 권 교수는 설명했다. 이 필사본은 경성제국대학과 도쿄제국대학에 재직했던 한국어 연구의 대가 오구라 신페이(소창진평·1882∼1944)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상권 150쪽, 하권 104쪽으로 돼 있고 각각의 표지에 ‘熱河記 乾(열하기 건)’, ‘熱河記 坤(열하기 곤)’이라고 적혀 있다. 권 교수는 “현대에 나온 이가원 선생의 <연암일기> 번역본이나 북한 번역본과 비교해도 훨씬 우리 어투에 맞다”며 “번역투를 완전히 버리고, 눈높이를 낮추면서도 이처럼 우아한 언어로 썼다는 것에 감탄할 뿐”이라고 말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한겨레 2006-02-22 오후 07:49:43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4228.html
- 이은주(씨네 21) (공중전화카드)
2005 - 영화배우 이은주(李恩宙) 자살 이은주 [李恩宙, 1980.11.16~2005.2.22] 드라마 <불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홍글씨> 등에 출연해 인기를 얻었던 영화배우 겸 탤런트 이은주(25)씨가 22일 오후 1시10분께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이날 새벽 6시까지 함께 사는 오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방에 들어갔으며, 오후 1시가 넘도록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긴 이씨의 오빠가 옷방에 들어가 보니 이씨가 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씨의 유서에는 “엄마 미안해. 일이 너무 하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돈이 있음 좋은데, 돈을 벌고 싶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이씨가 쓴 것으로 보이는 “엄마 미안해, 사랑해”라는 혈서도 발견됐다. 또 이씨의 노트에는 “인간사도 이제 지겹습니다. 자존심도 바닥을 쳤고 더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런 모습 더이상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벌써 2월이 중순으로 가고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고 있습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씨가 지난해 10월 개봉한 <주홍글씨> 이후 연기활동을 쉬고 있었으나 지난해 말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잠도 잘 못 자는 등 심한 우울증 증세를 앓았다고 한다. 12월 들어 스포츠센터에도 나가고 청룡상 시상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새해 들어 증세가 심해지면서 최근 “연기 활동이 너무 힘들어서 더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주변 사람에게 해왔다는 것이다. 지난 3일에는 분당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으며 “만사가 귀찮고 기억력·집중력이 떨어지고 밥맛이 없다. 하루에 1시간밖에 못 잤다”고 호소했으며, 2주일치 우울증 완화제와 함께 치료 권유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인추모단 차승재 대표(싸이더스 대표)는 자살 동기와 관련해 “자기 직업에 대한 고민의 강도가 다른 연기자들보다 더 강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씨의 정확한 자살 경위와 동기 등을 조사 중이며, 이씨의 주검은 분당 서울대병원에 안치됐다. 이씨는 1997년 텔레비전 드라마 <스타트>로 데뷔했으며 99년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인기를 얻은 뒤 영화 <송어>(99년)에 출연했다. 그 뒤 <오! 수정> <번지점프를 하다> <태극기 휘날리며> <주홍글씨> 등에 출연하며 인기 여배우로 위치를 굳혔다. 임범 김기성 기자 rpqkfk@hani.co.kr /한겨레 2005.02.22(화) 17:21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221721282.html
1997 - 복제 양 '돌리' 탄생 공식 발표 1997년 오늘, /YTN 2005-02-22 http://ytn.co.kr/_pn/0422_200502220202137877
- Peace and Freedom, 1995
- Andy Warhol and 'Portrait of Elvis' - Andy Warhol and 'the Flower'
- 'Marilyn', 1964 - 'Marilyn', 1967
워홀 [Warhol, Andy, 1928.8.6~1987.2.22]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1987년 2월 22일 사망했다. 소수의 `가진 자` 혹은 `고급 대중`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미술이 `일반대중`에게까지 참여의 문이 넓혀진 것은 전적으로 앤디 워홀의 공로였다. 그의 팝아트가 선보이기 전까지 서양미술은 고급스럽고 난해한 추상표현주의가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워홀이 이루어 낸 미술의 대중화는 그가 선택한 작품의 소재에서부터 비롯된다. 콜라병, 수프 깡통, 가루비누 통, 마릴린 먼로같은 대중스타 등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중적 이미지들은 일반인들에게 `낯익은 것들`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일반인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이제는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주체라는 느낌이 들게 한 것이다. 미국의 체코 이민2세로 태어난 워홀은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며 늘 스타를 동경했다. 대학시절에는 교수들로부터 `가장 장래성 없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백화점 점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상업예술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뉴욕으로 진출, 광고그래픽 초상화 삽화 등 닥치는대로 일거리를 맡았다. 고상한 예술가들이 고집하는 전통적 예술관을 뒤집고 상업예술에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그는 마침내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으며 자신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스타들보다 더 유명한 `대중스타`의 자리에 올라섰다. 워홀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는 `미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찬사와 `지나친 상업주의` 라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다. /조선
1979년 10.26 사태 이후 얼마간은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짓눌려 있던 언론·출판이 기지개를 펴는 순간이었다. 장기독재에 눌려 사장되었던 여러 종류의 출판물이 간행되거나 출판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5.17사태가 발생했고, 정국은 다시 경직체제로 이어졌다.
1980 - 한국-나이지리아 국교수립 나이지리아는 한국과 1980년 2월에 수교하고, 북한과는 1976년 5월에 수교하여 남·북한에 다같이 상주공관을 두고 있다. 1980년 10월에 나이지리아 하원의원단(下院議員團)이 방한하였고, 이후 경제교류·통상관계가 활발하다. 1982년 8월, 대통령 전두환(全斗換)은 아프리카 4개국 순방 길에 대통령 샤가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경제협력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2000년 7월에는 대통령 오바산조가 한국을 국빈 방문하였다. 양국은 1982년 경제과학 기술 협력협정, 1989년 해운협정, 1998년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였다. 2000년 현재 대(對)한국 수출 8만 7000달러, 수입 2억 482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이며 수입품은 전자제품, 자동차, 섬유, 기계부품류 등이다. 2001년 3월 현재 교민은 100여 명, 체류자는 250여 명이다. /naver
- 'Swan', Tapestry - 'Self-portrait'
- 'Self-portrait' - 'Konrad Adenauer'
코코슈카 [Kokoschka, Oskar, 1886.3.1~1980.2.22]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작가. 1886년 푀힐라른에서 출생하여, 빈미술공예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8년 표현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심리적 초상화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으나 부상으로 귀환하였다. 1919년에는 드레스덴미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유럽 각지를 여행하여 1935∼1938년 프라하에 체류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으로 망명하여 대독일항쟁을 하였다. 판화·풍경화(주로 도시의 경치)·우의화(寓意畵)를 바로크적인 표현으로 묘사하였으며, 만년에는 P.보나르의 영향을 받아 화면의 색조가 밝아졌다. 대표적인 회화 작품으로는 《폭풍우》 《빨간 달걀》 《로렐라이》 등이 있으며, 또한 극작가로서도 뛰어나 1907년 발표한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은 그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 밖에 희곡으로 《히오프 Hiob》(1917),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Orpheus und Eurydike》(1923), 시집으로 《꿈꾸는 소년들 Die träumenden Knaben》(1918)이 있다. /naver
1502년 콜럼버스가 발견하였으며 ‘세인트루시아(Saint Lucia)’라고 명명되었다. 그후 1605년과 1638년 영국인(人)에 의한 이민이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이어 프랑스인에 의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후 두 나라가 서로 영유대립·항쟁을 되풀이하여 40년 동안 14회의 쟁탈전이 벌어진 끝에 1814년 파리조약의 체결에 의해 영국령(領)으로 결정되어 영국이 직접 통치하였다. 영국 통치가 시작되고 150년 후인 1967년 3월 세인트루시아는 영국으로부터 외교와 방위의 일부를 제외한 내정자치권을 획득하고 영국령 서인도 연합주의 한 주(州)가 되었다. 그후 1978년 12월 영국의회가 그 독립을 승인하여 이듬해 2월 (22일)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정식 독립하였다. /naver
1973 - 미·중 연락사무소 개설 합의문 발표 [어제의 오늘]1973년 미·중 연락사무소 개설 합의문 발표 ㆍ20년간 단절됐던 관계에 전환점 그 유명한 ‘핑퐁 외교’를 발판으로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전격 방문했다. 닉슨의 방중은 20년간 단절됐던 미·중 관계에 새로운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꼭 1년 후인 73년 2월22일 양국 정부는 워싱턴과 베이징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이날의 발표는 누가 봐도 닉슨 방중 1주년을 의식한 것이었다. 그래서 연락사무소 개설 뉴스는 한층 더 극적으로 비쳤다. 두 나라의 연락사무소 개설 합의는 관계 정상화를 위한 선언이자 수교를 향한 첫 걸음이었다. 연락사무소는 정식으로 국교를 맺지 않은 나라 사이에 외교관계를 맺기 위한 전 단계로, 상호 간에 설치하는 사무소를 일컫는다. 연락사무소의 활동은 공식 외교 행위로 인정되지 않지만 중요한 외교 통로로 활용된 사례가 많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연락사무소 직원들에게 외교특권을 부여할 것을 합의문에 명시했는데, 이는 사실상 외교관계 수립을 의미했다. 합의문 발표 직후 미 국무성이 브리핑에서 연락사무소와 대사관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딱 부러지는 답변을 내놓지 못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2-21 17:47: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2211747165&code=100100&s_code=ap005
1966 - 소련, 개 두마리 탑승한 인공위성 코스모스 110호 발사 우주비행에 미국은 원숭이·침팬지 등의 영장류를 활용하였고 러시아는 주로 개를 채택했다. 양국의 동물 탑승 우주경쟁은 유인우주선 프로젝트의 대리전인 셈이었다. 결국 유인우주선 프로젝트는 61년 4월 12일 보스토크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이 먼저 우주비행을 함으로써 러시아가 승리했다. 63년에는 프랑스도 베로니크 과학로켓에 고양이를 실어 우주에 발사했다. 고양이는 낙하산으로 하강한 후 성공적으로 돌아왔다. 사설칼럼 [과학칼럼] /중앙일보 2008.11.01 00:25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3361897
- World's 1st Communications Satellite, Echo 1, placed in orbit by NASA, Aug. 12, 1960
위성을 이용한 통신의 시도는 1960년 미국의 에코(Echo) 1호가 최초였으며, 에코 1호가 처음으로 선을 보인지 10년 만에 통신위성은 전 세계 통신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현재 위성방송 및 이동통신 등으로 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통신위성은 주로 정지위성으로 지구와 같은 속도로 회전을 하면서 항상 같은 위치에 있으므로 넓은 지역을 계속적으로 통신에 필요한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다. 한겨레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336365.html
한스 숄 [Scholl, Hans, 1918.9.22~1943.2.22] 조피 숄 [Scholl, Sophie, 1921.5.9~1943.2.22] ‘1943년 2월 18일. 화창한 목요일 아침, 백장미 회원들이 대학의 모든 강의실과 복도에 유인물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한스 숄과 소피 숄은 대담하게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유인물을 살포했다. [김성호 / 논설위원] /문화일보 2003-12-03 11:44
[심야통신-백장미의 기도] 나치 독일 시대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조피 숄(Scholl, Sophie, 1921~1943)은 오빠 한스 숄(Scholl, Hans, 1918~1943) 및 동료들과 함께 ‘백장미(Die weisse Rose)’라는 반나치 저항조직에서 활동했는데, 1943년 2월18일 오빠와 함께 체포돼 4일 뒤 처형당했다. 조피는 21살, 한스는 24살이었다. 백장미 저항운동이란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2년 6월 익명의 유인물이 뮌헨지역의 불특정 시민들에게 우송됐다. “무책임한 어두운 충동에 몸을 맡긴 지배자 무리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고 통치를 허용할만큼 문화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시작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모든 절대국가 조직”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저항을 해야 한다.- <백장미 통신>이라 이름붙인 유인물은 나치의 전쟁수행정책에 대한 ‘소극적 저항’(비폭력불복종)을 촉구했다. <백장미 통신> 제1호는 뮌헨대학 의학부 학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썼다. 제4호까지 냈을 때 그들은 동부전선에 동원돼 전장의 무참한 현실과 유대인 학살 등을 직접 체험한 뒤 더욱 저항 신념을 굳혔다. 1942년 11월에 전선에서 돌아온 그들은 동지들을 늘리는 한편 베를린이나 다른 지역 저항그룹들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사실을 안 그들은 <백장미 통신> 제6호를 만들었다. 제6호는 “남녀학생 여러분, 우리 민족은 스탈린그라드 괴멸에 떨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우리 민족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유럽 노예화에 저항하고 자유와 명예의 새로운 신념으로 가득찬 진군을 시작하려 한다”고 끝맺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한 쿠르트 후버 교수가 썼다. 최후의 통신이 된 제6호를 조피와 한스는 대학 구내에 배포하다가 대학 직원의 고발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2월22일 열린 민족재판소는 조피와 한스, 크리스툴 프로프스트 등 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뒤 관련자 체포가 잇따라 43년 4월의 제2차 재판에서는 후버 교수,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3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됐다. 백장미 그룹에 대한 재판은 1944년 10월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모두 1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서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은 시민은 100만명을 넘는다. 민족재판소는 ‘국가반역죄’를 처리할 목적으로 1934년에 설립됐는데, 패전까지 5200건의 사형판결을 내렸다. 백장미는 비좌익계 저항운동을 대표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한겨레 2006-02-16 오후 04:15:00 http://www.hani.co.kr/arti/BOOK/102802.html
츠바이크 [Zweig, Stefan, 1881.11.28~1942.2.22] 빈 출생. 특히 영국의 L.스트레이치, 프랑스의 A.모루아와 함께 20세기의 3대 전기작가로 일컬어진다. 20세에 시집 《은(銀)의 현(絃) Silberne Saiten》(1901)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고 23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소설 ·희곡 ·평론 등을 썼다. 신낭만주의와 빈 인상주의 영향을 받았고, 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도 심취하였다. 그 기조(基調)는 평화주의 ·인도주의적인 생활감정에 있으며, E.베르하렌, R.롤랑과 친교를 맺으면서 그 예술관을 심화시켜 세계적 시야에서 정신적 풍토를 가꾸었다. 1935년 나치스에 쫓겨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41년에는 브라질로 이주하였으나, 유럽의 전도를 비관하며 그의 젊은 아내와 동반자살하였다. 주요 저작으로 《로맹 롤랑 Romain Rolland》(1920)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1932) 《에라스무스의 승리와 비극 Triumph und Tragik des Erasmus von Rotterdam》(1934) 《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1935) 《발자크 Honore de Balzac》(1946) 등 전기작품이 있다. 또 수필가로도 뛰어나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세 사람의 거장(巨匠) Drei Meister》1920),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를 거론한 《악신(惡神)과의 싸움 Der Kampf mit dem Damon》(1925),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를 다룬 《3인의 자서전 작가》(1932)가 있다. 그 밖에 소설《아모크 Amok》(1922) 《감정의 혼란 Verwirrung der Gefuhle》(1926), 희곡 《폴포네 Volpone》(1927), 자서전 《어제의 세계 Die Welt von Gestern》(1943)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naver
"11월 28일, 그 열망의 곶을 떠나온 이래 수평선상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이제는 지도도, 척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팔레이루가 고향에서 측정한 거리는 모조리 거짓으로 드러났다. 마젤란은 이미 오래전에 지팡구(일본)를 지나쳤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이제 겨우 이 낮선 대양의 3분의 1을 지났을 뿐이었다. 마젤란은 그 잔잔한 바람 때문에 이 바다를 '일 파시피코'(태평양)라고 명명하였다. ..."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젤란'에서
- Mongolia, 50 Tugrik (Banknote)
1923 - 몽골의 정치가, 혁명가 수흐바타르(Sükhbaatar, Damdin) 사망 수흐바타르 [Sükhbaatar, Damdin, 1893.2.2~1923.2.22] Sühbaatar는 Sükhbaatar, Sukebator라고도 씀. 몽골 인민혁명당의 공동 창당인물, 혁명지도자. 몽골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년시절 군대에 들어가 기관총 사수 훈련을 받았고, 친일세력들과 싸운 대가로 '바타르'(영웅)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제대 후에 식자공(植字工) 훈련을 받았으나 곧 정치에 입문했다. 1919년 '준하라 조직'으로 알려진 혁명단체를 조직해 다음해에 초이발산(1895~1952)이 이끄는 조직과 연합했다. 1920년 러시아를 방문했고, 1921년 인민군을 조직해 운게른 슈테른베르크 남작의 지휘 아래 몽골 북부를 점령하고 있던 반(反)볼셰비키 패잔병들과 대항했다. 1921년 3월 인민군은 중국군을 물리쳤고, 7월 6일에 우르가를 점령했으며, 7월 10일에 영구적인 정부를 세웠다. 그는 새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 Central African Republic, 10000 Francs (Banknote) (출처 화여자.)
보카사 [Bokassa, Jean Bedel, 1921.2.22~1996.11.3] 보방기 및 브라자빌의 미션스쿨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39년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였다. 1960년 8월 13일 중앙아프리카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귀국하여 대위(大尉)로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국민군 편성에 힘썼다. 1963년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1965년 12월 31일 쿠데타로 대통령 D.다코를 축출한 뒤 1966년 1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하여 총리를 겸하였다.
- Mexico, 500 Pesos (Banknote)
1913 - 멕시코의 혁명가 마데로(Madero, Francisco) 사망 마데로 [Madero, Francisco (Indalécio), 1873.10.30~1913.2.22] 멕시코의 혁명가. 1873년 10월 30일 파라스에서 출생하였다. 포르투갈계 이민의 자손으로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베르사유, 미국 볼티모어와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P.디아스의 독재정권 아래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던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보고 1904년 B.P.후아레스와 함께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03 - 캐나다의 소설가 몰리 캘러핸(Callaghan, Morley) 출생 캘러핸(캘러헌) [Callaghan, Morley Edward, 1903.2.22~1990.8.25] 아일랜드계 캐나다의 작가. 법률을 전공하였으나 일찍부터 작가로서 활약하여 헤밍웨이 등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과 교류하였다. 처녀작 《수상한 도망자 Strange Fugitive》(1928)를 발표한 이후 개인의 모랄을 예리하게 추구, 사회주의와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대한 밀도 높은 작품으로 캐나다 작가 중 독보적인 존재였다. 주요작품에 《내가 사랑하는 것 Such is my Beloved》(1934) 《그들은 대지를 계승한다 They Shall Inherit the Earth》(1935) 《하늘에 기쁨 있다 More Joy in Heaven》(1937) 《사랑받는 것과 잃는 것 The Loved and the Lost》(1951) 등이 있다. /네이버
1902 - 독일의 물리 화학자 슈트라스만(Strassmann, Fritz) 출생 슈트라스만 [Strassmann, Fritz, 1902.2.22~1980.4.22] 보파르트 출생. 카이저 빌헬름대학을 졸업한 후 1929년부터 모교에서 화학연구생으로 있다가 카이저 빌헬름연구소의 화학부장 O.한의 조수로서 한과 L.마이트너가 실시하고 있던 중성자선에 의한 물질의 충격에 관한 실험에 협력하였다. 마이트너가 스웨덴으로 간 뒤 그 실험을 이어받아 1938년 우라늄의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였다. 실험의 당사자들은 그 결과의 해석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마이트너와 R.프리시가 그것에 대하여 내린 ‘핵분열’이라는 해석이 원자핵시대의 막을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 우라늄과 토륨으로부터 인공방사성동위원소를 만들었다. 1946∼1970년 마인츠대학 화학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66년 페르미상을 수상하였다. /naver
부뉴엘 [Bunuel (Portolés), Luis, 1900.2.22~1983.7.29] 아라곤 출생. 마드리드대학 졸업. 청년시절 프랑스로 이주, 사일런트 말기의 전위영화 전성기에 장 에프스탱의 조감독을 하다가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초현실주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1928)를 감독하였다. 1930년 반동정치와 종교를 규탄한 전위적 걸작 《황금시대 L’Age d’or》(1930)를 제작했다. 에스파냐에 돌아와서 만든 기록영화 《빵 없는 땅 Terre sans pain》(1932)은 너무 사실적이라 4년 후에야 공개가 허가되었다. 그는 프랑코에게 쫓겨날 때까지 마드리드에서 영화활동을 계속하였으며, 그 후 미국·멕시코로 옮기며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1950년 비행소년들을 다룬 사실영화(寫實映畵) 《잊혀진 사람들 Los Olvidados》(1950,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로 재기하였다. 그 후 활동범위를 멕시코 ·에스파냐 ·프랑스로 넓혀 《로빈슨 표류기》(1952) 《나사렛사람 Nazar?n》(1958) 《비리디아나 Viridiana》(1961,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몰살하는 천사 El angel exterminador》(1962, 칸 영화제 입상) 《하녀의 일기 Le journal d’une femme de chambre》(1964) 《사막의 시몽》(1965, 베니스 영화제 입상) 《메꽃 Belle de jour》(1967,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부르주아지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1972, 1973년 아카데미상 수상) 등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현대 리얼리즘 영화의 첨단으로 평가된다. 엄격한 상징적 사실문체(寫實文體)를 써서 철저하게 객관화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군더더기를 없애버린 영상에는 종전의 영화가 바로 보지 않으려고 했던 인간의 악행(惡行)과 약점까지 그대로 드러냈다. /naver
오스타이옌 [Ostaijen, Paul van, 1896.2.22∼1928.3.18] 벨기에 시인. 앙베르 출생. 표현주의의 일인자로, 일상어를 구사하여 근대 도시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시집 《뮤직홀(1916)》이 데뷔작이다. 시 형식뿐만 아니라 활자 크기·배치 등 인쇄법도 새롭게 시도했다. 시집 《신호(信號, 1918)》 《점령된 마을(1921)》은 언어의 음악적 효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각 단어는 어떤 상호 관계도 없이 독립적으로 나열되고, 이것이 음악의 주제와 같이 율동적으로 반복된다. 그 밖에 소설과 평론이 있다. /yahoo
밀레이 [Millay, Edna St. Vincent, 1892.2.22~1950.10.19] 메인주(州) 로클랜드 출생. 바사여자대학 재학 중에 연극에도 관계하였고 시작(詩作)에도 정진하여, 서정시 《재생(再生) Renascence》(1912)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호평을 받아 시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1917년에는 처녀시집 《재생 기타 Renascence and other Poems》를 발표하였고, 《두 번째의 4월 Second April》(1921) 《하프 제작자 The Harp-Weaver》(1923, 퓰리처상 수상) 등으로 서정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그 후 《한밤중의 대화 Conversation at Midnight》(1937) 등 많은 시집을 냈다. 그는 소네트를 가장 장기로 한 순수한 서정시인이었지만, 1930년대 이후는 정치·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한편, 프로빈스타운 극단을 위하여 여배우로서 무대에 섰으며, 또한 《왕녀와 시동(侍童)과의 결혼 The Princess Marries the Page》(1918) 등의 희곡도 썼다. 그가 죽은 후에 《전시집 Collected Poems》(1957) 《서간집 Letters》(1952) 등이 출판되었다. /naver
- 'All the Love Poems of Shakespeare' 길 [Gill, (Arthur) Eric (Rowton), 1882.2.22~1940.11.17] 브라이턴 출생. 치체스터의 미술학교에서 배우고 처음에는 건축에 종사하였는데 그가 제작한 모형(母型)은 길타입으로 알려진다. 1910년경부터 조각을 시작하여 처음엔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경향을 가졌었는데, 1913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조각·그래픽·삽화 등을 제작하였다. 한편 T. 아퀴나스의 설에 기초를 둔 특이한 예술론 및 근대문명비판을 발표했다. 기계적인 생산보다 수공예를 중히 여기는 견해가 저서 《타이포그래피론(論)》에 나타나 있다. 작품에 《십자가의 길(1913)》 《대금업자(貸金業者)들을 좇는 예수 그리스도(1934)》 등이 있다. /yahoo
1878 -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초연 [책갈피 속의 오늘]1878년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초연 “절대로 서로 만나지 않도록 할 것, 설령 마주치더라도 대화하지 말 것.”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1840∼1893)를 후원했던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1830∼1894). 그녀는 1876년부터 차이콥스키에게 매년 6000루블이라는 연금을 제공해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15년간 아낌없는 후원을 했지만 그들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당신의 음악 안에서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안에서 당신의 감정을 함께합니다.” 차이콥스키는 37세의 나이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아 이바노브나 밀류코바와 결혼했다. 어릴 적부터 동성애적 기질을 갖고 있던 차이콥스키는 불행했고 결혼 2주 만에 모스크바의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끝내 파경을 맞은 그를 격려하고 후원해 준 사람이 폰 메크 부인이었다. 폰 메크 부인은 11명의 자녀를 둔 46세의 미망인이었다. 러시아 광산 재벌의 부인인 그녀의 후원 아래 차이콥스키는 불후의 명작을 쏟아냈다. 특히 1878년 2월 22일 초연된 ‘교향곡 4번’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괴로워하던 시절의 산물로서 차이콥스키의 ‘운명교향곡’으로도 불린다.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의 교향곡’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들의 교향곡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주는 이 교향곡 전체의 핵심과 정수입니다. 이것은 운명입니다.…제2악장은 비애의 다른 일면을 보입니다. 이것은 일에 지쳐 쓰러진 자가 밤중에 홀로 앉았을 때 그를 싸고도는 우울한 감정입니다. 읽으려고 든 책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고 많은 추억이 샘솟습니다.”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이 주고받은 1100여 통의 편지는 서간집으로 출판됐다. 차이콥스키의 작곡 배경을 알 수 있어 음악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1890년 10월 폰 메크 부인은 “파산해서 더는 연금을 보낼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차이콥스키는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에 크게 낙심했으며 1893년 11월 콜레라에 걸려 타계했다. 슈만과 클라라, 베토벤과 ‘불멸의 연인’과 같이 음악사에는 작곡가에게 열정을 북돋워 준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의 사랑과 우정은 순수하다 못해 기묘하기까지 하다. 또한 ‘조건 없는 후원’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닷컴 2007-02-22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70222/8410012/1
- 'Bridge at Mantes' - 'Self-portrait'
- 'Louis Laure Sennegon, Painter's Niece' - 'The Augustus Bridge over the Nera River'
- 'The Gardens of the Villa D'Este, Tivoli'
1875 - 프랑스의 화가 코로(Corot, Camille) 사망 코로 [Corot, (Jean-Baptiste-)Camille, 1796.7.16~1875.2.22] 파리 출생. 처음에는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1822년부터 미샤롱과 베르탱에게 사사하여 그림을 공부하였다. 1825년부터 2년간 동경하던 이탈리아에 유학, 자연과 고전작품을 스승으로 한 정확한 색가(色價)에 의한 섬세한 화풍을 발전시켜, 1827년 《나르니다리》로서 살롱에 등장하였다. 그 후는 프랑스에 살면서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을 비롯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다. 《샤르트르 대성당》《회상》 등이 유명하며, 풍경화 이외에도 《진주의 여인》《푸른 옷의 여인》《샤르모아 부인상》 등이 있다. 코로의 작품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채조(彩調)를 쓰면서 우아한 정경을 드높여 주어, 단순한 풍경에도 시와 음악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특색이다. 동시에 착실한 관찰자로서 자연을 감싸주는 대기와 광선의 효과에도 민감하여, 빛의 처리면에서 훗날 인상파화가의 선구자적 존재였다. /naver
배든 포얼 [Baden-Powel, Robert Smyth, 1857.2.22~1941.1.8] [역사 속의 인물] 스카우트 창설자, 배든 포얼 "아이들이 군인 못지않아…." 1900년 보어전쟁 당시 남아프리카 마페킹 요새를 수비하던 로버트 배든 포얼(1857~1941) 영국군 대령은 소년(少年)들의 활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많은 보어군에게 포위당한 요새에서 영국계 아이들은 부족한 군인 대신 보초를 서고, 적진을 정찰했다. 그는 아이들의 도움으로 217일간 포위된 요새를 방어할 수 있었고, 국민적 영웅이 됐다. 영국으로 돌아와 1907년 22명의 소년을 모아 섬에서 야영을 했다. 보이스카우트의 시작이다. 그는 1857년 오늘, 런던에서 대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에 들어갔다. 보이스카우트에 전념하기 위해 1910년 중장으로 퇴역할 때까지 34년간 복무했다. 군대에서 체득한 야외 생활법, 기병대 정찰, 아프리카인의 생활을 아이들에게 맞도록 정리하고 자연 속에서 소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전 세계적으로 보이스카우트 운동이 퍼져 나갔고 1910년 그의 여동생이 걸스카우트를 창설했다. '소년 군대'를 보유하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됐지만, 자연 속에서 소년들의 심신을 단련시키자는 그의 꿈과 이상은 여전히 각광받고 있다. 박병선/동부지역본부장 /매일신문 2012년 02월 2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2752&yy=2012
1857 -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Hertz, Heinrich) 출생 헤르츠 [Hertz, Heinrich (Rudolf), 1857.2.22~1894.1.1]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 Heinrich Rudolf Hertz, 1857년2월 22일 - 1894년1월 1일)는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쓰는 주파수의 단위 헤르츠는 이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헤르츠는 라디오파를 만들어 내는 장치를 만들어 전자기파의 존재를 처음 실증해 보였다. 헤르츠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가정이었으며,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의사의 딸이었다. 학창시절 과학과 언어에 재능을 보인다. 이 시절 아랍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기도 한다. 드레스덴, 뮌헨, 베를린의 대학에서 과학과 공학을 공부한다.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헤르만 폰 헬름홀츠 밑에서 공부를 한다. 1880년 박사 학위를 받고 1883년킬 대학교에서 이론 물리학 교수자리를 얻을 때까지 헬름홀츠 밑에서 공부한다. 1885년에는 칼스루에대학교의 정교수가 되며 그곳에서 전자기파를 발견한다. 에테르가 없다고 밝혀낸 1887년의 마이켈슨-몰리 실험의 전조였던 1881년의 앨버트 마이켈슨의 실험 후에 그 실험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맥스웰 방정식을 다시 정리한다. 실험을 통해 전기 신호가 공기 중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마이클 패러데이의 예견을 실증한다. 이는 무선통신을 발명하게 된 기초가 된다. 그는 또한 후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설명하게 되는 광전효과를 처음으로 발견한다. 광전효과는 물체에 주파수가 높은 빛을 비출 수록 전자를 잘 내놓는 현상을 말한다. 헤르츠는 독일 본에서 사망한다. 그의 조카 구스타프 루드비히 헤르츠 또한 노벨상 수상자이고, 구스타프의 아들 카를 헬무트 헤르츠 또한 초음파검사를 발명한 과학자이다. /위키백과
- Zachary Taylor 1847년 2월 22일 미국과 멕시코가 텍사스 합병을 둘러싸고 벌인 멕시코 전쟁 중 몬테레이 근처에서 부에나비스타 전투(Battle of Buena Vista)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미국은 멕시코시티를 점령함으로써 멕시코 전쟁에서의 승리가 확실해졌다. 1847년 2월 21일 멕시코군의 진격 소식을 듣고 미군은 부에나비스타 농장 근처 라앙고스투라로 이동했다. 다음 날부터 테일러(Taylor, Zachary, 1784~1850)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과 산타 안나(Santa Anna, Antonio Lopez de, 1794~1876)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23일 멕시코군은 1,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그해 4월 산타 안나 장군은 세로고르도 전투에서 스콧(Scott, Winfield, 1786~1866) 장군이 이끄는 미군에게 또다시 패배했다. 부에나비스타 전투의 승리로 명성을 얻은 테일러는 1848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브리태니커
1840 - 독일의 사회주의자 베벨(Bebel, August) 출생 베벨 [Bebel, August (Ferdinand), 1840.2.22~1913.8.13] 쾰른 출생. 3세 때 부친과 사별하였다. 초등학교를 중퇴하였는데, 재학 중에도 병든 모친과 어린 동생을 돌보면서 사환 등으로 일하였다. 모친의 영향을 받아 군주제를 찬성하기도 하고 또 자유주의적 견해를 지지하기도 하였으나, 1861년 라이프치히노동자교육협회에 참가하여 회장이 되고, W.리프크네히트의 사상에 크게 공명하여, 1860년대 후반에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활동을 시작하고 1869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설, 지도자가 되었다. 27세 때 독일제국에 국회가 개설되자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독일사회민주당의 의회전술의 기초를 닦아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1870∼1871), 그리고 알자스-로렌합병(1871)에 반대하여 반역죄로 2년의 옥고를 치렀다. 1878년 라살파와 협동하여 사회주의진압법에 반대하였으나, 실패하여 라이프치히에서 퇴거할 것을 명령받았다. 1886년 지하활동을 하다가 9개월 간 투옥되었으며, 1889년 제2인터내셔널 창립에 참가하였다. 노동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일 뿐 아니라 여러 차례 계속된 옥중생활에서 경제학을 독학하여 훌륭한 이론가가 되기도 하였다. 또 저명한 《여성과 사회주의 Die Frau und der Sozialismus》(1883)의 저자로서 여성운동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으며, 당시 이미 남녀의 완전한 사회적 동등권을 주장하였다. /naver
1836 -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사망 조선 후기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36년 2월 22일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762년 경기도 남양주에서 진주목사 정재원에게서 태어난 다산은 22세 때 진사, 27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1792년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정조가 부왕 영조를 생각하며 축조 중인 수원성 건립에 기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로웰 [Lowell, James Russell, 1819.2.22~1891.8.12] 매사추세츠주(州) 출생.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법률에 종사하였으나, 곧 문필생활로 들어가 1841년 처녀 시집을 냈다. 여류 시인이며, 노예폐지론자인 마라이아 화이트와 1844년에 결혼,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아내가 죽은 뒤1855년부터 1872년까지 모교의 유럽문학 교수로 있었다. 그 동안에 《애틀랜틱 먼슬리 Atlantic Monthly》지, 《북미평론 North American Review》지 등을 주재하고 전통파 평론가로서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만년에는 에스파냐와 영국 공사를 역임하였다. 저서에는 《나의 장서 Among My Books》(2권, 1870) 《서재의 창 My Study Windows》(1871) 외에 시집 《버드나무 아래 Under the Willows》(1869) 《대성당 Cathedral》(1869) 및 평론 《정치적 에세이 Political Essays》(1888) 등이 있다. /naver
케틀레 [Quetelet, (Lambert) Adolphe (Jacques), 1796.2.22~1874.2.17] 헨트 출생. 강대학에서 수학하고, 천문학을 연구하여, 24세에 브뤼셀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P.S.라플라스, S.D.푸아송, J.J.푸리에 등 프랑스 학자들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23년 이후 정부의 명을 받아 천문대 건설에 진력하였고, 1833년 천문대가 완성되자 대장이 되어 천문학 ·기상학 ·지구물리학을 연구하였다. 천문학의 주기현상(週期現象)으로부터 유추하여 사회현상을 해명하려는 시도 끝에, 《인간과 능력 개발에 대하여 Sur l’homme et le developpement de ses faculte s, ou essai de physique sociale》(1835)를 집필하여 근대통계학을 확립하였다. 또한 《사회체계(社會體系) Du syste me sociale et des lois qui le re gissent》(1848), 《사회물리학론(社會物理學論) Physique sociale:ou essai sur le de veloppement de faculte s de I’homme》(1869) 등에서 그 통계학체계를 한층 강화하였다. 1853년 국제통계학회를 조직하여 통계자료의 국제적 통일에 공헌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류학분야에 통계학을 도입하여 생물통계학을 개척하였고, 인간의 능력을 수적으로 표현하는 평균인(平均人) 개념을 도입하였다. /naver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Arthur, 1788.2.22~1860.9.21] 쇼펜하우어는 실존철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의 철학자이다. 1819년에 주요 작품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발표했는데, 칸트와 고대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책에는 인식론, 자연철학, 미학, 윤리학 등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칸트의 물자체란 다름아닌 의지라고 보았으며, 맹목적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라고 믿었다. 또한 예술이나 종교적 금욕 및 자선을 진정한 해방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염세주의의 바탕이 된 이 사상은 이후에 별다른 변모나 발전이 없었다. 1820년 그는 베를린대학교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했지만, 헤겔과 공공연히 경쟁하다가 결국 교수직을 내놓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의 사상은 철학 고유의 영역에서보다 문학, 음악 등의 분야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브리태니커
"정신에 있어 의지력이란 눈뜬 절름발이를 어깨에 태우고 가는 힘센 장님과도 같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Rubens Peale with a Geranium' - 'Thomas Jefferson'
1778 - 미국의 초상화가 필(Peale, Rembrandt) 출생 필 [Peale, Rembrandt, 1778.2.22~1860.10.3] 찰스 윌슨 필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미술을 배웠는데 그의 대표작이자 현존하는 제퍼슨의 초상화 중 최고의 걸작인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1805, 뉴욕 역사학회) 속에 아버지의 입체적인 신고전주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필은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계속했고 1808~10년 파리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나폴레옹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평을 받은 이후 몇 년 동안 그림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선례를 따라 볼티모어에 미술관 겸 초상화 화랑을 열었으며 그곳에서 처음으로 가스 조명을 이용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1822년 그는 그 미술관을 팔았는데, 그것은 현재 필 미술관으로 그 지방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브리태니커
- USA, 1 Dollar (Banknote) 1732 -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Washington, George) 출생 별칭은 Father of His Country(國父).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워싱턴은 1752년 이복 형에게 마운트버넌의 부동산을 물려받으며 어린 나이에 대지주가 되었다. 이복 형이 죽은 후 워싱턴은 버지니아 남부의 부대장이 되어 군대 생활을 시작하였다. 워싱턴은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연대장으로 임명되었고, 23세 때 버지니아 식민지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버지니아 식민지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전역했다. 워싱턴은 전역 후 과부였던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하고 대지주로서 만족스런 생활을 해나갔다. 또한 의회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페어팩스 군 치안판사로도 일했다. 1764년 새로운 영국 내각이 식민지에 대해 새로운 과세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면서 혁명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났다. 워싱턴은 제1차 대륙회의의 버지니아 대표 가운데 하나로 선출되었고, 이를 통해 그는 정치 무대에 들어섰다. 이후 제2차 대륙회의에서도 버지니아의 대표로 뽑힌 그는 아메리카 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총사령관이 된 이후 워싱턴은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몰아냈지만 이후 몇 년 동안 암울한 패배를 거듭했다. 하지만 1778년 아메리카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워싱턴은 제헌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178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재선에 성공하며 8년 동안 미국의 대통령으로 일했으며 3번째 임기를 거부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브리태니커
[책갈피 속의 오늘]1630년 2월 22일 - 팝콘 첫 등장 ‘옥수수알에 간을 하여 튀긴 식품.’ 국어사전에 나오는 팝콘에 대한 정의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펑 하고 터진(pop) 옥수수(corn)’란 뜻이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222/8277648/1
1512 - 이탈리아 항해가 아메리고 베스푸치(Vespucci, Amerigo) 사망 베스푸치 [Vespucci, Amerigo, 1454.3.9~1512.2.22] [역사 속의 인물] 신대륙과 '아메리카'…아메리고 베스푸치 사람들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 중세까지 유럽사람들의 두뇌는 프롤레마이오스의 지도에 의해 형성된 세계관에 지배돼 있었다. 이 지도에는 대륙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곳뿐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는 유럽인 최초로 신대륙을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지도에 관념이 묶여 있었다. 그에게 그 땅은 인도의 서쪽 어느 지역이어야 했다. 죽을 때까지 그는 신대륙 발견 사실을 몰랐다. 콜럼버스와 몇 차례 항해에 동행한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달랐다. 인도라고 치부하기에는 기후, 군락, 사람들, 문화 등 많은 것이 다른 땅이었다. 숙고 끝에 그는 "우리가 도착한 새로운 땅은 대륙으로 인정된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 같은 결론을 항해보고서와 팸플릿에 남겼다. 이 문건을 본 독일의 지리학자 발트제뮐러는 베스푸치를 신대륙 발견자라고 착각했다. 발트제뮐러는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신대륙을 '아메리카'라고 부르자고 제창했다. 뒤늦게 그는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려고 했지만, 아메리카라는 용어가 대세가 된 뒤였다. 자신의 이름이 신대륙 이름으로 차용될 줄 꿈에도 몰랐던 베스푸치는 1512년 오늘, 스페인 세비야에서 말라리아로 세상을 떴다. 김해용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3년 02월 2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9200&yy=2013
샤를 7세 [Charles VII, 1403.2.22~1461.7.22] 샤를 6세의 아들이다. 모후 이사보가 왕의 동생 오를레앙공(公)과 관계를 맺은 일 때문에 그의 출생이 의심스럽다 하여 영국왕 헨리 5세에게 왕위계승권을 양도당하자(1402) 그는 자신을 잃고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城)에 도피해 있었다. 그 때 잔 다르크는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영국군을 물리쳐 프랑스에서 그가 대관식을 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샤를 7세는 1436년 파리를 수복하고, 1453년 카스티용의 승리를 계기로 백년전쟁을 끝맺었다. 왕은 J.쿠르를 등용하여 레방트 무역을 진흥, 상업의 발전에도 진력하였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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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