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비망록 - 김인육
최후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이다
서늘한 눈매로 서 있는 가을나무는
지는 해 저녁놀 곱게 물들이듯
떠나는 모습이 아름답고 싶은 것이다
한때 뜨겁게 사랑하지 않은 자
어디 있겠고
마침내 결별이 아프지 않은 자
어디 있겠는가
가을은
노랗게 혹은 발갛게 울음의 색깔을 고르며
불꽃처럼 마지막을 타오르고 있다
빛나는 한 때를 간직한 가을나무는
알고 있다
하나 둘 떨구는 이파리마다
그리운 이름들을 호명하며
막막한 절망을 지워 가는 법을
그 간절함의 빛깔로
눈감아도 선연히 되살아오는 얼굴들
가슴 깊숙이
나이테로 새겨두는 법을
낙엽의 에필로그 - 김인육
떠나야 한다는 걸 안다
한때의 눈부신 푸름을 접고
내 운명 여기 어디쯤에서
가지런히 손 모으고
이젠 안식해야 한다는 것
온종일 서늘한 빛으로 퍼부어 대는
늦가을 햇살이
마지막까지 나를 아파하는
그대의 아린 사랑임을 안다
머잖아 그대가 다스렸던 영토에도
눈이 내리고
그대에게로 가는 길도
내게로 오는 길도
하얗게 묻히어
가끔 그대 생각에 꿈속에서도 까무러치다가
나는 선연하게 삭아갈 것이다
서슬 퍼런 바람이 불어
그리움에 여위어간 가지들이
바이올린처럼 울어대는 동안
어느새
짓밟힌 눈들이 녹고
흙으로 스며 내린 여린 뼈마디마다
문득 내 영혼의 젖꼭지가 가려운 봄날
치운 겨울 내내 마려웠던 그리움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고
그대 훤히 바라보이는 꼭대기까지
싱그러운 수액으로 기어올라
내 사랑, 깃발처럼 푸르게 팔랑일 것이다 그대.
사랑의 물리학 -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칠판에 기대어 2 - 김인육
- 눈오는 날에 -
창 밖을 보아라
어깨동무를 하고
가야할 곳 어디든 두려워 않고
달려가는
저 눈꽃들을 보아라
하나, 둘, 무수히
제 목숨 땅에 눕히어
하얗게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위대한 정신을 보아라
혁명의 자세를 보아라
죽음이 축조하는
눈부신 평등의 세계를
보아라
미안하다
죽음으로 더욱 빛나는
저 눈발같이
스무 살의 들녘에선
나 또한 순결한 눈꽃이고 싶었던 것을
미안하다
꽃이 되지 못하는
언어의 시든 풀씨여
하얗게 백묵가루로 부서져 가는
고독한 나의 정신이여
오늘은
타성으로 부끄러운 교과서를 덮고
저 눈발 속에서
눈동자 맑은 너희들 웃음꽃 속에서
두 팔 벌려 용서받고 싶구나
영혼의 눈 하얗게 뜨고 싶구나.
잘 가라, 여우 - 김 인 육
바람 속으로 긴 꼬리 가오리연을 띄운다
여름이 가고 있다
폭풍 속
영혼을 탕진한 나의 여름은 컹컹 울부짖으며 가고 있다
꼬리가 긴, 그녀는 틀림없는 여우
나의 간을 빼내어 호호 갖고 놀던 여우
바람이 부는 저녁
긴 머릿결의 여우가 날아오른다
살랑대며 바람을 타는 유연한 꼬리
나, 홀딱 홀리어서 죽음도 두렵지 않던 마법의 긴 꼬리
빙글빙글 바람을 굴리며 재주를 넘는다
붉게 울음 우는, 미친 꽃아
두 눈 숭숭 불타버린, 청맹과니 꽃아!
너도 더듬더듬 허공을 짚으며 길 떠나는구나
거친 바람 속 선혈의 낙화송이 흩날리는 해거름
내 간을 빼내, 호호 갖고 놀던
홀린 사랑을 날려보낸다
깊은 어둠이
어둠보다 더 깊은 절망이 야수처럼 오기 전에
손목의 동맥을 끊듯 이제 연줄을 끊어야 할 시간
바보 같은 열망을 뚝, 끊어야 할 시간
빙글, 재주를 넘으며 내 넋 달뜨게 호리던
긴 머릿결의 여우를
푸드득, 새처럼 날려 보내야 할 시간
김인육
1963년 울산에서 태어남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1986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2001년)
<<시와생명>>의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2000년)
<<중동신문>>의 편집위원, 빈터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서울 양천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