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당과 아미산 언저리(문지회 골목투어 제2코스)
<현대백화점 앞-관덕당-염매시장-나무전봇대-최초여류비행사 박경원집터-곡주사-반월당-아미산-보현사-관덕정순교기념관-김울산-대구석빙고-남산교회-상덕사-문우관>
1.관덕당
가, 유래: 고려 때부터 ‘관덕정’이란 이름의 전각이 여러 곳에 존재했는데 ‘觀德’이란 이름은 禮記 射義편에 “활쏘기란 진퇴와 주선(周旋)이 반드시 禮에 맞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고 자세가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을 때 안정되고 든든하며, 이런 다음에야 과녁을 맞힐 수 있다. 이것으로써 덕행을 보게 되는(觀德)것이다.” 평시에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를 연습하던 곳이다.
나. 설립 및 용도: 1749년(영조 25), 관찰사 민백상이 처음 세워 무과의 하나인 都試를 행하던 都試廳으로 사용. 세시의 하나인 줄다리기도 함. 앞뜰은 아미산까지 연결.
다. 있던 곳: 동아쇼핑 뒤 현 문화아파트 자리
라. 최재우와 천주교도 처형장 : 최재우는 1863년 경주에서 체포-서울로 압송 중-철종 죽음(1864)-대구감영으로 이송 후-邪徒로서 正學을 어지럽힌(혹세무민)죄로 처형함. “망나니가 칼춤을 추면서 수운의 목을 몇 차례 내리쳤으나 목에 검은 흔적조차 나지 않아 형졸이 당황했다. 수운이 ‘맑은 물 한 그릇 내 놓으라’한 후 묵도를 했다. ‘이제 안심하고 베라’고 목을 내놓았다. 맑은 하늘에 광풍이 불고 폭우가 내렸다고 한다. 수운의 머리는 남문 밖 장대(남장대)에 3일간 걸렸다가 아들 세정과 제자들에게 넘겨졌다. 관덕정에서 처형된 천주교 순교자는 3차례 14명, 감영 감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도 3차례 31명에 이르렀다.
2.염매시장
염매시장(염가판매설, 소금판매설)의 기원은 대구신장으로 1791년까지 덕산동에 있었다가 동문으로 옮겨간 뒤 1917년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곧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1937년 현재의 남문시장으로 옮겨가면서 시장이 작아졌다. 동아쇼핑 입점 후 더욱더 작아졌고, 현재는 떡전골목, 염매시장 등을 통해 옛날 화려했던 남문, 동문시장의 위세를 찾아볼 수 있다. 골목 안 나무 전봇대 하나가 시장을 지켜주는 듯하다.
3.박경원(朴敬元: 1897~1933)
박경원은 덕산정 42번지(삼성금융플라자 북쮹 곡주사 서쪽)에서 6남매 중 막내 딸로 출생-명신여학교(복명초등)-신명여학교-1917년 일본행-귀국후 2년 간 자혜의원(경북대병원 전신)간호사-일본 가마다비행학교 졸업 후 3등비행사자격증-비행경기대회 3등 입상 후 2등비행사자격-1933년 일본 하네다 공항을 출발 만주로 가는 비행 도중 모국을 방문하여 시범 비행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시즈오카현 겐가쿠산에서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아끼던 비행기 청연(靑燕)과 함께 추락사했다. 2005년 개봉된 영화 ‘청연’은 박경원을 다룬 것인데 친일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민간 여류비행사 1호였다. 일제강점기를 살다 간 그는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순종적인 삶을 거부하고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하였던 비행사가 되기 위해 남성들과 경쟁하는 한편 조선의 여성으로 일본의 여성비행사와 승부를 다투기도 했다. 딸, 여성,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중삼중의 억압 속에서 ‘처음, 으뜸(元)’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여류비행사가 된 점은 한국여성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
4.곡주사(哭呪士)를 아십니까(이종원의 블로그에서 발췌)
‘유신을 저주하며 통곡하는 대학생(士)들이 모이는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집 주모 정옥순 여사 시절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다. 상주에서 5남매 교육을 위해 대구로 올라와 자그만 식당을 운영하며 당시 유신반대 데모를 하다 쫓기는 대학생들을 이층 다락방에 숨겨주고 허기를 채워주었단 곳이 바로 곡주사다.
태종학 대구시장 시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에 오면 수성관광호텔 203호에 묵었다. 하루는 곡주사가 데모학생들의 집결지요, 피신처라는 소문을 듣고 달랑 비서관 한 명만 대동하고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당연히 정옥순 여사는 박대통령을 알아볼 리 없었다.
박대통령이 시치미를 떼고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주모, 여기에 오는 손님들이 박대통령이 일을 잘한다고 하던가요?’ 주모 왈 ‘일은 많이 했는데 과욕이 많아. 계속 집권하면 명대로 못산다.’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요?’ 주모 왈 ‘이제 그만 해 먹어야지. 영남대나 맡아 운영하면 되지.’ 뭐 이런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데모하던 학생이 재판을 받는 날, 정여사는 단골손님(?)을 위해 방청을 했고 혹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까 하여 빨간 손수건을 흔들기도 했다고 한다. 어는 대학생은 술값으로 결혼시계를 잡혀두기도 했는데 가난한 대학생들의 외상까지 받아 준 술집이었다.
5.반월당(半月堂)
1936년 약전골목에서 돈을 번 차병곤이 남산2동 926,927 일대에 차린 화장품, 수예품 등을 판매하던 목조 2층가게 이름이다. 1943년 경영난으로 공신백화점이 되었으나 문을 닫았는데 한국인이 경영한 최초의 백화점이라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고, 이 일대는 대구 최고 번화가가 되었다. (남산2동 925, 오안과 앞쪽)
<1936년 12월 반월당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연말을 기념해서 차병곤 사장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며 1936년 왼쪽에 화환 글씨가 ‘대구공립고보학교졸업생일동’이며 1936년 12월 연말사은행사를 기념하는 화환인 것 같다. 바로 옆의 글씨는 세모대매중歲暮大賣中이라는 연말특별판매기간을 뜻한다. 반월당 백화점의 전화번호는 일제시대 당시 번호로 1404번으로 나오며 간판에는 반월당 가게명과 와이셔츠, 셔츠 등이 적혀있다.>
6.아미산(蛾眉山)
옛날 지석묘가 있던 야트막한 산. 풍수지리적으로 비슬산-대덕산-용두산-마태산-수도산-아미산-영남제일관으로 이어진다. 무당골로 부르다가 보현사(동화사 포교당)가 들어오면서 아미산이 되다. SK스카이허브에 교남학교(1921년 우현서루 교남학원 인가-1924년 교남학교로, 남산동657로 이사-1939년 폐교 후-서병조의 후원으로 대붕교육재단설립-1942년 수성들로 이사-1988년 만촌동으로 이사), 오산불교학교(능인학교 전신), 남명학교(대성학교 전신)도 있었다. 남산동 교남학교 이사후 상고(尙古: 이상화, 이장희)예술학원 설립 운영함.
7.관덕정순교기념관
가톨릭대구대교구는 한국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영남지방에서 가장 큰 순교지인 이곳에 순교기념관을 세우기로 하여 1983~1985년 세 차례로 155평 8합의 부지를 매입하고, 영남대학교 김영태(바오로) 교수에게 건축설계를 의뢰하는 한편 1985년 9월 20일 기공식을 거행하고, 1986년 2월 27일 착공하여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302평에 한식 누각이 있는 콘크리트 건물로 준공되어 지난 1991년 1월 20일 지하 1층에 마련된 경당과 제대의 축성식과 아울러 사도·요한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제대 밑에 봉안되었다.
개관식은 지난 5월 31일 오후 5시 30분 교황대사 이반디아스 대주교 · 주교회의 의장 김남수 주교 ·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를 비롯 성직자 · 수도자 · 평신자 대표들 그리고 대구시장(이해봉) 등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현판제막 · 개관테이프 절단 · 기념관 축복기도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관덕정 순교기념관(觀德亭 殉敎紀念館)으로 현판을 건 기념관은 지하에 경당 · 성인유해 안치소 · 제1전시실, 1층은 현관 · 홀 · 사제관 · 안내소 · 사무실, 2층은 제2전시실 · 영남교회사연구소, 3층은 제3전시실 · 누각(樓閣)이 있다.
건물 서쪽 외벽의 부조 도안은 문 크리스티나 수녀(포교 베네딕도회), 1층 홀의 색유리창 도안과 제작은 김은호(뽈리나) 씨이다. 기념관 관장은 김경식(보니파시오)신부, 총 공사비는 5억원이 들었다.
8.김울산
1910년 순종황제 하사금 등으로 명신여자소학교가 개교한 뒤 운영난에 빠져 있었는데 1926년 울산의 정3품 통정대부 김철보의 장녀로 출생한 김울산(1858년~1944년, 16세 때 아버지 별세' 19세에 남편과 사별)이 관기가 되어 정미소, 술집 운영 등으로 돈을 모아 쌀 4천 석에 해당하는 8만 원에 인수한 학교가 바로 복명초등이다. 해마다 운영비로 3천 원을 내어 학교를 꾸려나갔으며 지금 돈으로 약 200억~250억에 해당하는 큰돈을 아낌없이 바친 것이다. 복명초등은 범물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경혜여중에 이어 동부교육지원청이 들어서 있으며, 후손이 없이 조야동에 찾는 이 없이 묻혀 있다고 한다. 돈은 벌기가 힘든 게 아니고 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겠는가. 누가 이 여인에게 미천한 신분이라 업신여기고 돌팔매를 던질 수 있단 말인가.
9.대구석빙고
대구석빙고의 위치는 남산교회 부근 북향 경사지였다. 석빙고가 1907년 철거되자 비석만 남게 되고, 대구측후소 옆 천주교순교기념관 부근으로 옮겼고, 측후소가 신암동으로 옮기자 함께 옮겼다가 지금은 경북대학교에 서있다. 이 비석은 유명악이 판관으로 재임하던 1713년(숙종39)에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대형석빙고로 개축하여 민폐를 덜어주게 된 것이다.
10.남산교회
대구 두 번째 개신교 예배당. 1914년 대구제일교회에서 분립, 브루엔 선교사에 의해 1915년 신축건물 준공. 백남채 장로가 설계함. 대구3.8독립선언을 주도한 백남채, 이만집, 김태련 등을 배출하다.
11.상덕사(尙德祠)
이숙(李䎘:1626〜1688)은 1672년(현종 13)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를 역임했고, 유척기(俞拓基: 1691〜1767)는 경상도 관찰사를 두 번(1726.5〜1727.5, 1737.4〜1738.5)이나 역임한 인물로 이들의 비석을 모시는 사당이 상덕사다. 대문 정면이 상덕사 비각인데 비석은 셋이 서 있다. 이숙의 비석은 순찰사이상공숙청덕선정비(巡察使李相公䎘淸德善政碑)라 새겨져 있고, 유척기의 비석 하나는 순찰사유상국휘척기영세불망비(巡察使劉相國諱拓基永世不忘碑)와 관찰사유공척기영세불망비(觀察使劉公拓基永世不忘碑)라 새겨진 비석이 서있다. 대구이사청 자리에 서있었는데 1910년 현위치로 옮겼다.
임란 때 대구에서는 낙제 서사원(徐思遠)과 모당 손처눌(孫處訥)이 여론을 주도하면서 의병활동에 참여하게 한다.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숙은 서인이었지만 남인의 본고장에서 백성을 정성으로 보살핀 목민관이었다. 그의 생전에 사당을 지어 그를 기리게 된다.
12.문우관(文友館)
문우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역의 전통 교육기관인 낙육재(樂育齋)와 양사재(養士齋)가 폐쇄되자 지역 문인들이 학문을 연마할 곳이 없어졌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채헌식 선생이 구달서 선생과 함께 1918년에 선비들을 모아 학문수양을 목적으로 건립한 것이 문우관이다.
『문우관은 50~60년대 영남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한 달에 한 차례 모여 시회를 벌인 처사들의 사랑채였다. 문우관은 근처 남산동 향교에서 다 소화시키지 못한 경전강좌까지도 떠맡았다. 문우관의 기품은 영남 낙육재(樂育齋)에서 건너온다. 낙육재는 경상감사 조태억이 1721년(경종 1년) 인재양성과 문풍진작을 위해 대구부 남문 밖 현 문우관 일대에 세운 대구 첫 관립도서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지방제도의 재편과 일제통감부 설치로 낙육재도 폐쇄됐다가 1900년 향교 내에 복원된다. 상덕사비각도 원래 경상감영공원 내에 있었다. 1910년 일제가 대구이사청(현 대구시청의 전신) 신축 때 문우관 경내로 옮긴다.
현재 문우관 외관은 무척 옹색해 보인다. 지붕도 많이 패어 비닐 천막으로 대충 가려놓은 상태.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다. 빈 공터에 달셋방이 들어서기도 했다. 문우관이 살림집으로 전락해버린 걸 애석하게 생각한 대구시 등이 나서 문우관 살리기에 나선다. 88년에서야 담장, 진덕문, 화장실 등이 보수된다. 봄의 문우관 마당은 황홀하다. 예전 선비들이 좋아했던 나무를 거의 볼 수 있다. 대나무, 매화, 국화, 라일락, 모란, 천리향, 목련….』(『 』이 부분은 영남일보 2007. 2.2.)
<현대백화점 동쪽 염매시장 입구의 관덕당 안내판>
<골목투어에 참여한 회원님들. 동아백화점 뒤 허름한 3층 문화아파트가 보인다.>
<염매시장 골목안의 나무전주, 보기 귀한 존재가 되다>
<관덕당 자리에 들어선 문화아파트, 시장안 골목으로 들어와서 뒷면을 볼 수 있다.>
첫댓글 ""https://blog.naver.com/jooyun11/222371742581" -이 주소는 이 종원 명예회장님의 Blog 주소 입니다. 회장님께서 문지회 소식지에 올려놓은 주소창을 열어보면 '많은 사진과 글로써 도배를 해 만들어 놓았습디다. Blog 방을 매번 열어 보라는 의도 이겠지만, 제 역량으로
아미산 의 글과 사진을 카페 방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많은 회원님들을 관람케 할 목적입니다. 옮겨 오는 과정에서 '사진들을 UP-Road
하면서 발견, 사진 옮기는 것도 20장이 한도 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 많은 사진을 카페 방으로 옮겨 오면서 몇 번의 실패 한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Image 사진 옮기는 것도 20장 이내야 됩니다. 카페에 올리시는 회원들이 계신다면 20장 이상으로 사진은 만들지
마십시다. 좋은 경헙 했습니다. 글과 경치 사진을 참관 하시옵소서...참, 사과인사가 늦었습니다. 명예회장님! 회장님의 작품을
제 이름으로 옮겨 놓아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Blog 방을 방문하는 회원들 보담 카페방을 활용하는 회원님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요.
감사합니다
역시 우리 이미선 쌤 이시다 존경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맨날맨날 행복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