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RE:30년 전 놀이문화 속의 나 차경미(chakyung@kebi.com) 2000/12/20
요새 아아들은 이해 못할 '통금시간'하며 점심시간을 알리는 '오포' 싸이렌(종로국민학교 아아들만 알란가?), 공부 시작할때 치던 땡땡땡 종소리, 점심시간에 급식으로 주던 그 맛있던 강냉이 빵, 그라고 서문로에서 경북여고까지 매일 걸어댕깄다 카마 우리 아들들이 믿을란가 모르겠다.
동일계 무시험 진학만 안 했으마 내가 공부를 좀더 열심히 했을런지 모르지만 우쨌던 배짱 좋게 노는 덕분에 쌓은 추억들이 한두 가지가 아인기라.
중 3때 국어담당 유남식 선생님(영자의 탁월한 기억 속에서 성함을 알아냈다)한테 그리도 설움을 받아가면서(흑~흑~)...
보는 아아들마다 목에다가 긴 막대기로 바이올린 키던(사랑의 표현을 그렇게 하셨던가? 궁금. 그래도 우리는 그걸 너무 싫어했었다) 유남식 선생님!
동일계 진학 건으로 우리를 제일 많이 뽂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정병호 물상 선생님이었는데 눈동자가 우리하고 색깔이 쪼메 달랐제.. 석가탄(정확하게는 석화탄이던가?) 개발하시가 돈 많이 버셨는가도 궁금하구나.
중3 처음 올라와 시험 치고, 성적 나쁜 아아들을 불러다 놓고 "집에 가서 엄마 불러오라" 캐가 내가 얼메나 울었는지 너거는 모를끼다. 악따받게 그런데도 공부 안 하고 놀 거 다 논 아아가 바로 내다.
고1 올라와 처음 치룬 시험에서 모든 선생님들이 동일계 진학한 우리들의 성적에 무진장 궁금해 하셨고, 결과를 보시고 비로소 안심, 그리고 인정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내 기억이 맞제...
나는 운동은 못했지만 몇몇 종목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보이데. 자전거 얘기가 나오니 말인데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 머시마 내 동생 타라고 사준 자전거를 30분 만에 내가 먼저 마스터해서 우리집 마당 한가운데 있는 감나무를 뺑뺑 돌며 동생을 약올렸었고, 중학교 땐지 고등학교 땐지 모르겠는데 평균대 위에서 뛰면서 발바닥을 다섯 번 마주쳐야 되는 시험에서는 내만 A를 받았단다. 이건 자다가 일어나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더라.
지금도 생각나는 큰 느티나무 아래의 '돌집' 그거 체육도구들 넣어놓던데 맞제? (나는 그집에서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들이 살아야 어울린다고 생각했단다.) 그 앞에 놓여진 큰 바위 위에 앉아서 사진도 찍고, 축축 늘어진 히말라야시다 아래에서 온갖 폼 다 제가며 시커먼 흑백사진도 찍었고, 학교안 담 밑에 송송 올라와 있던 딸기밭에서 몇 개 안 되는 딸기도 훔쳐 따먹었던 추억이 지금의 나한테는 젊음을 되찾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그동안 잊고 살다가 너거들 만나고 나니 그 옛날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송년, 신년에 있었던 통금해제를 즐기러 무조건 길바닥을 헤메던 일 등이 생각나네...
요즈음 선화가 산다는 동촌강과 수성못은 겨울만 되면 우리들 놀이터 아이가. 눈만 뜨면 스케이트 들고 나가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얼음판에 출근도장 찍으러 갔었잖아. 그때 갈고 닦은 실력으로 미국에서 우리 큰아들 데리고 아이스 링크에 갔다가 아들한테 괜찮은 엄마가 되 보기도 했다.
하교길에 들리던 제일여상 앞에 단팥죽집(여원당)과 그 길을 따라 대구영수학원 쪽으로 쭉 내려오면서 늘어서 있던 헌책방을 들려 매일 한 권씩 바꿔가며 소설책을 빌려 읽었었지. 하루 만에 다 볼려는 욕심에 공부시간에 교과서로 가리고 소설 읽다가 선생님한테 걸리기도 하고... 하기사 책으로 가리고 학교 식당에서 팔던 찐고구마까지 먹던 우린데.. 별짓을 다하는 우리를 선생님들은 미워했을까?
그때 내가 즐겨 읽었던 것으로는 일본판 무협소설이 많았었고, 지금도 생각나는 순정소설 '빙점' '살얼음을 딛는 소녀' 그런 것들이 생각나네. 김판구 선생님의 '테스 보시오, 테스'하시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지.
지워져가는 추억들을 영자 덕분에 떠올려보니 나한테도 아름다운 과거가 있었네.
술도 한잔 안 했는데 혼자 분위기에 젖어 횡설수설했다.
미안테이....
28. 나도 한 추억 하자 노명희(mhroe@kebi.com) 2000/12/21
1. 중학교 때 미술실 복도에 책가방 던져두고 문정순이와 재봉실 바깥 모퉁이 근처에서 대판 싸우고 난 뒤 책가방이 사라져서 하늘이 노랬던 일. 며칠간 집에다 말도 못하고 헝겊가방에다 대도극장 부근 문흥당서점에서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마련한 헌책 넣어 다녔다.
2. 최명주 교장님의 기습 속치마 및 손수건 소지 여부 검사 시, 먼저 끝낸 반에 가서 빌려 검사 받았던 일~(나는 맨 머스마 구디에서 자랐느니).
3. 중 3-1반 때 합창대회 출전, <사냥꾼의 합창>을 열나게 부르다가 지휘자 임정순의 안경이 그만 손에 받혀 코끝에 아슬하게 걸렸는기라, 제일 앞줄에서 노래하던 나와 몇몇이 그걸 보고 웃기 시작하여 멈추지도 못하고 계속 킬킬거렸던 기라. 그날 교실에 돌아온 죄인들의 손바닥 위에서 담임 유남식 선생님의 몽땅한 막대기가 불춤을 추었느니.
4. 체육시간에 투포환 던지기 일등한 일이 찜찜하니 기억에 남는 이유--여자애가 쇳덩어리 멀리 던져 무슨 영광 보겠다고...뿐이랴, 고교 때 800m달리기에서 같은 반의 금향순이를 빼고 나 일등했다, 쪼매난 기..
5. 교정의 열매류는 모조리 섭렵, 딸기(누가 경쟁자인가 했더니 차경미도 부지런히 뒤졌던 모양), 벽오동나무 열매, 은행(냄새 끝내 주지), 탱자, 호박(강당 부근) 등등.
6. 여원당, 장미서점은 매일 들리던 루틴코스, 박계형 소설은 씨리즈로 다 읽었고, 무시험이라 입시걱정 없어 아침에(신천동이 집인데 중간에 삼덕동 들러 이명희 불러 같이 걸어다녔다) 소설 한 권 빌려 책상 밑에 숨겨 다 읽고 하교길에 반납 후 또 한 권 빌려 집에서 읽기를 되풀이했다. 그때 다진 문장력으로 운동회 때 응원가 개사 작업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 내 나이가 어찌하여 마흔 여덟인겨?
30. 영자 글에 이어서... 차경미(chakyung@kebi.com) 2000/12/22
나도 생각나는 거 있다.
놀이는 영자가 무척 많이 기억하고 있네.
사다리가생 말고 십자가생도 있었데이. 이 놀이에서는 그 당시 신향이가 선수였던 걸로 기억난다. 십자가생 하면서 팔 잡고 땡기다가 여름 하복 팔이 떨어져 나가 집에 가서 엄마한테 혼난 적도 있다.
손바닥 마주치며 '가을이라 가을바람~~' 이런 것도 있었고 너거는 알란가 모리겠는데 우리집은 딸이 많아 언니들하고 같이 하던 놀이인데 공을 튀기면서 다리 사이로 넣었다가 뺐다가 뒤로 돌았다가 하면서 하는 공놀이인데 그때 같이 부르던 노래가 생각난다.
보보보름달 보름달이 솟았네
진주 못가에 행야 징야 오랑캐
오늘은 내생일 아하하하 즐겁다
민자 숙자 애자야 아리랑 고개를~ 아리랑 고개를~
먼 산에 아지라앙이 품안에 잠들고
산골짝에 흐르는 물 또다시 흐른다
고목에도 잎이 피고 범나비도 꽃을 찾는데
옛 동무는 봄이 온 줄 왜 모르시나요.
어깨동무 하고 좌우로 흔들면서 부르던 노랜데 멋모르고 불렀지만,
가사 내용이 모두 요새 같으면 운동권 노래인기라. 아마도 일제시대 때부터 불렸던 노래 겉제.
경대 의대 앞 USIS 회관 기억 나나, 그 옆에 국화빵집 정말 맛있었데이. USIS 도서관에 간답시고 열심히 들락거리면서 국화빵집에만 열심히 들락거맀던 기라. 그 시절 고교 써클들이 유행하던 때 나는 SCC(student cultural club) 영어회화 클럽이었다. 그런데 국화빵집에 드나드느라고 내 영어실력은 아직도 엉망~~ (무신 조화인지?)
여원당 단팥죽은~ 팥죽은 영자 말대로 전부 녹말가루로 풀을 쑨 기라. 그런데 그 위에 얹어주던 찹쌀로 부친 납짝한 찌짐 쪼가리가 너무 맛있데.. 지금도 생각난다.
효고 앞 라면집 우째 생각해냈노. 영자 기억 하나 끝내준다!
대도극장 앞 남문시장 길에서 서서 먹던 '납딱만두'. 그 안에 잡채만 들었제. 몇 년 전 그거 생각이 나서 계대 담장 끼고 남광교회(어릴 적 신향이하고 다니던 교회, 크리스마스날 둘이서 손가락에 종이로 만든 꽃 달고 찡글벨 무용했던 기 생각난다.)로 내려오는 길에 포장마차가 쭉 늘어서 있길래 들어갔더니 납딱만두 팔더라. 실컷 먹었는데 옛날 맛이 안 나더만.. (참고로 포항사람들은 납딱만두를 모르더라.)
많은공기 하느라 치마가 찢어지도록 치맛자락에 싸 가지고 다니면서 그게 무신 보물인양 끌어안고 댕깄다. 하도 공기를 많이 해서 넷째손가락의 손톱은 아예 빼딱하게 닳아 깎을 필요도 없었던 기라.
또 생각나는 대로 올리 보께.. 너거도 기억을 한번 까디비 봐라. 뭔가 나올 끼다.
야들아 와이래 재밌노!
참! '와이래 좋노오오/ 와이래 좋노오오?' 이런 것도 있었제?
호~호~호~
33. 휴게실 라면이 유죄 문정순(leeping@kebi.com) 2000/12/23
내가 살이 찌기 시작한 게 휴게실 라면을 만나고 난 뒤부터라면 믿을런지?
어찌나 맛이 있던지 2인분을 쓱싹한 적이 한두 번이겠나?
지금도 그 맛을 못 잊어 이 방법 저 방법 이용하여 끓여 보지만 그 맛이 안 나데.
라면이 먹고 샆어 외출증이 없을 땐 수위 아저씨한테 안 들킬려고 담벼락에 붙어 살금살금 기어다니곤 했지.(수위실이 높이 있었기 때문에)
명희야! 우리가 싸움도 그렇게 열씸히 했나?
그 어려웠던 상황을 얘기하지 그랬노?
그건 기억 나나?
치마 옆의 흰칼이 끊어져서 핀으로 근근히 이어서 검사 맡던 일.
중3년 때 학교 구루마를 우리(노영옥, 이명희, 니, 내) 자가용이라고 번호판도 달고
한 사람은 앞에서 끌고 나머지는 구루마에 타고는 운동장을 돌아다녔던 일.
무슨 공부가 재미있다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방과 후 학교에 남아 선생과 학생을 분담하여 놀던 일.
아마 학생은 니하고 나 둘뿐이었을걸?
선생이야 많았지. 노영옥, 이명희, 아마 고임기도 몇 번 참가한 것 같은데,
임기야, 이 글 보거든 답해주라, 맞는지.
그땐 소설가나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아주 잠시 동안.
설문조사 비슷한 거 할 때 장래희망난에 뜻도 모르고 현모양처라고 썼었는데
공통수는 주부뿐이네..
졸업 후 한 번도 학교에 안 갔는데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다.
첫댓글 명희야 명희야 노명희야!!
정말 너 땜에 내가 또 웃는다.ㅋㅋㅋ
익히 알고 있건만 또 웃게 되는 꿀잼. 이 글 쓴 때가 마흔 여덟이었다니 어언 16년이 지났구나. 우리 참 재미나게 마이 놀았다 그자?
요즘 안보이는 차경미 보고접다. 경미야 니 미국 갔뿠나? 니가 부르던 시원한 노랫소리 그립다♥
남명희, 노명희, 이명희 ,...
이번 90주년 행사에 이명희는 안 왔제?
차경미가 우리 30주년 행사 때 사회도 보고
강신자의 아이디어로 "떼 빼고 광내고 "
우리 목욕 타올만 걸치고 허식이 무대에 서니 우리 친구들 모두 함성을 지르고
눈이 휘둥거레 졌던 것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목욕탕집 남자들> 드라마가 막 히트치고 나서였지?
하얀 목욕타월만 두르고 하얀 어깨와 허벅다리를 쎅쉬하게 내보인 '목욕탕집 여자들'...ㅋㅋㅋ
서울팀이 역쉬 문화적으로 앞서간다는 생각을 하게 한 퍼포먼스였다는~~!
참 돌이켜 생각해보면 유쾌하고도 잼난 사건들이 많이 있었네, .했노, ., ., 흐잉.......,
내는 저 시절에 뭐
아마도,,,
기억의 필름이 끊긴 걸로봐서는....
내는 억쑤로 조용한 아아라서리,
맨날 젤 앞 아니면 둘째 줄에 앉았으니,,,,,
그 주위의 친구들캉만 재재거리며 하라는 대로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돼
우째 이래 기억이 없겠노
그래도 딱 한가지 정말 내 사전에 기상천외한 사건이 하나 있었제
이 사건은 절때로 잊을 수가 없고 잊혀지지도 않는다....
영자야
무슨 사건인지 억수로 궁금하네.
이런 답글에서 말고 시원하게 한바닥 올려보셔^^
@남명희 킄!!!~~~,
그래 큰 기대는 안하는 게~~,ㅎㅎㅎ.
그당시 내 사전에는 대단한 사건이었으니....ㅎㅎㅎ.
실지 풀어놓으면 너거들한테는 대도못할 별 사건도 아이다.... ^.^^.^^.^
@쁘띠 최영자 응~~궁금타~~!
어서 올리봐라~~!
@최영자 아궁~~~~,
참말로 별 것도 아이라~~,
내게는 획기적인 일이었지만서두요~~~,
너거들에겐 대도못할 미미한 일이라카이요~~,
부끕구만요~~~!!!!
풀어놔봤자 별 거도 아이거든요~~~,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