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 분 | 1945년 이전 |
1945년 광복후 ~1960년대 |
1970년대 | 1980년대 |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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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밭생산성kg/10a (표준농가) |
평균 10~20 ( - ) |
평균 20~30
(40~50) |
30~58
(80) |
63~53
(100) |
50(추정)
(100~120) |
뽕밭형태 |
주택,논밭 주변,야상 |
논밭주변, 야상 교목 순뽕밭 보급 |
순뽕밭 (보통1열식) |
병열식밀식뽕밭 (비닐피복) |
병열식밀식뽕밭 또는 광휴식 기계화 뽕밭 |
식재거리 (식재주수 /10a) |
- 골사이 1.5m, 1.8m - 그루사이 0.75m, 0.9m |
- 골사이 1.8m - 그루사이 0.75m, 0.6m (740~926주/10a) |
- 넓은골사이 1.5m - 좁은골사이 0.6m - 그루사이 0.5m (1,667주/10a) |
80년대와 대동소이, 초밀식뽕밭 1.2m×0.4m (1,200~2,000) | |
뽕수확법 |
봄:순따기 |
봄 : 순따기 가을 : 잎따기 |
봄 : 가지뽕수확 가을 : 잎따기 |
봄 : 가지뽕수확 가을 : 가지뽕수확 |
연간 다회 가지뽕수확 |
수확방법 |
인력 |
뽕낫,전정가위, 뽕가락지(가을) |
전정가위 뽕예취기 보급 |
뽕예취기 및 뽕전용수확기 개발 보급 |
좌 동 |
관리방법 |
축력 및 인력 |
축력 및 인력 |
경운기중심 |
다목적관리기 |
중소형 트랙터 보급 |
제초방법 |
인력 |
인력 및 토양 처리제 |
토양 처리제 |
경엽 처리제 중심 |
경엽 처리제 중심 |
누에 품종 개량에 대한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찍부터 우량형질의 향상을 목표로 계획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졌던 일본의 누에품종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권업모범장 용산지장은 우리나라의 기후풍토가 일본품종의 사육에 문제점이 없고 사육결과도 우수하다는 결론으로 일본에서 품종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분별한 품종의 유입은 결과적으로 견사질의 악화만을 초래하게 되므로 누에고치의 품질 통일이 절실하게 요구됨에 따라 조선총독부 훈령 제11호(1912. 3. 12)로 장려품종의 지정 보급이라는 수급제도로 발효되었다. 이때에 지정된 누에품종들은 일본에서 도입된 순수종인 봄누에 품종으로는 우석(又昔), 소석환(小石丸), 청숙(靑熟)이였고 여름누에품종으로는 신옥(新屋), 가을누에 품종으로서는 백룡(白龍)이 있었다.
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인공부화에 대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연중 보급을 위해서는 누에의 화성(化性)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즉 실용형질이 우수한 1화성품종은 충질이 약한점을 고려하여 봄누에 때에 보급하고 온습도가 높고 장마가 겹치며 뽕잎의 질 등이 봄누에 때보다 사육환경이 좋지 않은 여름가을 누에 때에는 사량은 1화성보다 못하지만 충질이 강건한 2화성의 2화기(化期) 때를 하추잠으로 사육하는 기술체계다. 이후 1917년에 이태리 파도바 잠업시험장에서 수입된 품종을 선발 도태를 거쳐 우리나라의 양잠여건에 적합하게 개량된 구주종계(歐州種系) 노랑고치 품종인 조구1호와 조구2호가 봄누에용 장려품종으로 추가 고시되었다. 이들 품종들은 이후 1대 잡종으로 완전 대체되는 1932년까지 20여 년간 보급되던 품종들이었다.
1917년 우리나라 최초로 4개 교배조 즉 자료벨사×지나20호특대(支那20號特大), 지나20호특대×애구1호(愛歐1號), 적숙(赤熟)×지나20호특대 및 지나7호 (支那7號)×부람비율이 장려품종으로 추가되었다.
이 품종들은 1931년까지 14년 동안 보급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국잠일1호×국잠지4호등 31개품종이 추가되어 대부분 광복 이전까지 보급되었으나 그중 일9×지108호, 일9호×지107호, 일9호×지17호, 국잠일111호×국잠지17호는 1937년에 지정되어 1950년도까지 보급되었고, 신일114호×지107호, 일112호×지110호 및 일115호×지108호는 1940년도에 지정되어 광복이후 1958년도까지 보급되었다.
우리나라의 누에 품종 발전단계는 1화성 3면잠을 이용하던 재래종 품종에서 도입 순수종으로 또 도입 순수종에서 도입 교잡종 시대로 발전하고 다시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품종시대로 발전한다. 이를 도표화하면 그림 2와 같다.
1대 잡종의 보급과 동시에 누에품종으로서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다름 아닌 인공부화기술(人工孵化技術)의 개발이 그것이다. 누에의 화성(化性)은 특히 알깨기 중의 온도(溫度) 및 광선(光線) 조건에 의하여 2화성이 1화성으로 변화된다. 이 현상을 일시변화(Modification)라고 한다.
우리나라 재래종 시대에 그랬듯이 1화성 품종으로 1년에 1번밖에 누에가 부화되지 않기 때문에 봄누에 때 외에는 누에를 칠 수가 없다. 여름가을 누에 때를 위해서는 2화성의 2화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본래 1화성은 고치질과 양이 우수한 반면 유충의 저항성이 약하고 2화성은 1화성에 비해 고치질은 떨어지지만 유충의 저항성이 강하다. 이때 2화성 품종을 1화성으로 일시 변화시키면 2화성의 유충저항성에 1화성의 고치질이 보완된 소위 강건 다사량이 기대된다. 이를 인공부화법과 접목시킨 것이 오늘날의 잠종 기술의 중추적 기능이다.
이는 월년종을 위한 별도의 증식이 필요 없고 위험 부담도 작다. 따라서 2화성을 1화성으로 일시변화를 시키는 방법은 대단한 기술적 발전이다. 일시 변화된 1화성을 염산(Hcl)처리를 하여 휴면이 타파되면 관리된 온습도 조건 하에서 10일만에 다시 알이 깨므로 여름가을누에 사육뿐만 아니라 연중 알깨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인공부화기술의 개발이야말로 1대 잡종의 이용에 버금가는 큰 기술적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든 기술적 발전에 힘입어 누에품종의 생산력은 괄목할 만큼 발전되었다.
그 결과를 보면(표 2) 개미누에 10g당 생사량은 재래종의 2.17kg지수 100에 비하여 순수종은 4.58kg으로 지수 211, 교잡종은 5.69kg 지수 262로서 그 생산성은 초기 교잡종 시대 대비 2.6배나 향상되었다.
광복이후 육종사업은 일제시대의 품종을 계승하여 봄누에 품종으로 일9호×중108호, 여름가을 누에품종으로 일115호×중108호가 1950년대 초반까지 보급되었다. 한편으로는 그 동안 보급되던 품종과 도입품종을 근간으로 순계분리와 교잡육성에 의한 실용형질의 안정도 향상, 그리고 우리나라 기후 풍토에 대한 적응도 향상에 대한 사업이 소규모이기는 하나 이루어졌다. 이 기술적 정비와 교배조합작성은 이후 제도적 정비기를 거쳐 그 후의 본격적인 우량품종 육성의 근간이 되었다.
표 2. 재래종 도입 순수종 및 초기 교잡종의 생산성 (한국잠업사, 1989)
주요성상 |
경과 일시 (일시) |
사육 온도 (℃) |
(A) 수견량 개미누에 10g당/kg |
전견 중 (g) |
견층 중 (cg) |
1ℓ 과수 (과) |
견사 장 (m) |
(B) 생사량비율 (%) |
(C) 생사량 개미누에10g당/kg |
비고 |
---|---|---|---|---|---|---|---|---|---|---|
연대 | ||||||||||
1919 ~ 재래종 |
29.13 |
22.1 |
22.3 |
1.10 |
12.9 |
164 |
506 |
9.73 |
2.17 (100) |
전재래종 평균 |
1910~1927 순수종 |
30.11 |
22.1 |
36.6 |
1.92 |
26.3 |
136 |
659 |
12.81 |
4.58 (211) |
소석환 |
1918~1930 초기교잡종 |
30.01 |
21.9 |
37.2 |
2.06 |
33.0 |
81 |
953 |
15.29 |
5.69 (262) |
지나20호 특대×자 로벨샤등 3개평균 |
주) 생산력(C) = A×B
이 시대의 품종으로서는 1953년도에 봄누에 품종으로서 북악(北岳)×한강(漢江) 봄가을겸용품종으로서 백두(白頭)×금강(錦江)이 최초로 장려품종으로 지정이 되었고, 1956년도에 가을누에 품종으로 태백(太白)×낙동(洛東), 1958년도에 봄누에용 품종으로 묘향(妙香)×청천(淸川)이 지정되었다. 이 품종들의 생산력은 생사량비율이 17~18%, 1만두당 고치수량이 15~17kg으로서 1만두당의 생실량이 3.0kg의 수준이었다. 그후 1962년도에 봄누에 품종으로 설악(雪岳)×소양(昭陽), 1963년 가을누에 품종으로서 모란(牡丹)×대동(大同)이 지정되었는데 이들의 생사량비율이 18~19%, 1만두당 고치수량이 17.5~18.5kg, 1만두당 생실량이 3.3kg으로서 그 이전 품종보다 생실량이 10%나 증수되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품종이었다. 그리고 누에치기가 쉽고 농가사육에서 강건하여 1970년대 중반까지 사랑 받던 품종들이었다.
이러한 신품종들의 보급과 1962년부터 시작된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의 추진에 힘입어 농가의 누에고치 생산이 날로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시대의 특기할 사항은 우리나라의 품종육성에 있어서 사상 처음으로 생사량비율이 20%를 넘어서는 다사량 시대로 진입되었다는 사실이다. 1966년도에 봄가을 겸용 장려 잠품종으로 지정된 수원잠101×수원잠102는 화용비율은 보통이었지만 단견중이 무거워 고치수량이 1만두 당 고치수량이 18.5kg이나 되고 생사량비율이 20.10%로서 1만두 당 생사량이 3.7kg이나 되는 대표적인 다사량 품종이었다. 그러나 이 품종은 원종의 산란성이 좋지 못하여 잠종 제조업체의 생산기피로 각광을 받지 못하고 5년 만에 폐기되었다. 뒤를 이어 1968년도에 봄누에 품종으로 지정된 잠103×잠104는 생사량비율이 수원잠101×수원잠102 보다는 다소 낮으나 원종의 산란성이 우수하고 단견중이 무거워 1만두 당 수견량도 19.3kg으로 당시로서는 많은 편이어서 농민들의 기호도가 높았다. 한편 이 품종은 가을에도 우수한 생산성을 보여 1974년에는 봄가을 겸용 품종으로 재지정 되어 1970년대 후반까지 잠업전성기의 주역을 담당했던 수훈 품종이었다.
1969년도에 봄가을 겸용품종으로 육성된 잠105×잠106은 우리나라 최초로 양원종이 모두 민누에로서 1대 교잡종 역시 민누에인 품종이었으나 사육환경이 좋을 때는 견사질도 우수하고 단견중도 무거우나 사육조건이 다소라도 나쁘면 강건성에 문제가 있어서 농가의 호응도가 낮았다. 그러나 실용형질이 우량한 일본종계 민누에 라는 점에서 기초품종으로서의 가치는 높았다.
1971년도 봄누에용 품종으로 지정된 잠107×잠108, 1984년 이후 칠보잠(七寶蠶)병기)은 화용비율이 높아(93%) 강건하고 생사량비율이 21.43%인 다사량 품종이면서 기르기가 쉬워서 농가의 호응도가 지극히 높아서 1992년도까지 보급된 우리나라 장수품종 중의 하나였다. 또한 가을 누에품종으로 1974년도에 지정된 잠113×잠114, 1984년부터 사성잠(四星蠶)병기) 역시 충견질 면에서 탁월한 생산성을 보였고 누에치기도 쉬워서 2000년 현재까지도 보급되고 있는 최장수 품종이다. 1970년대 중반은 우리나라 잠사업의 최전성기여서 누에고치 생산량은 1976년도의 41,700톤을 정점을 이루었고 이후 점증되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한 노임상승을 예견하여 장차 생력품종의 필요성에 대비해야 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걸맞게 1978년에 봄누에 품종으로 지정된 잠119×잠120, 1984년부터 장춘잠(長春蠶)병기)은 중국종계 잠120이 한성유전(限性遺傳)을 이용하여 암컷은 얼룩무늬, 수컷은 민무늬를 갖는 중국종계 편친한성 품종으로서 우리나라의 돌연변이 육종의 효시품종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대 잡종을 만들기 위하여 생식선에 의하여 암수를 구별하던 것을 유충무늬에 의하여 쉽게 암수를 감별함으로서 잠종제조 노력를 20%나 절감할 수 있어서 잠종생산의 기술 혁신에 일대 전기가 된 획기적인 품종이었다. 이들 실용품종의 생산력의 발전상을 살펴보면 표 3과 같다. 1940년대로부터 1980년대까지 10년 간격으로 각 연대를 대표하는 춘·추품종의 주요형질의 평균치들이다. 1940년대의 춘잠품종 '일9호×중108호'와 하추잠품종 '일115호×중108호'의 평균치를 대조로 1980년대 춘잠품종 용강잠과 하추잠품종 대성잠의 평균치를 비교하여 보면 사육경과는 25일 3시간에서 23일 13시간으로 6%나 짧아진 반면, 소잠 1만두 수견량(대4령기잠 옥견포함 상견)은 15.7kg에서 23.6kg으로 50%나 많아졌다. 이는 전견중이 2.00g에서 2.51g으로 26%나 무거워진 것 외에 감잠비율이 줄고 화용비율이 높아지는 등 누에의 강건성 향상에 기인되었다. 견사장은 872m에서 1,489m로 무려 70%나 길어지고 특히 일정 고치량에서 얻어지는 생사량비율이 14.79%에서 21.01%로 42%라는 획기적인 향상을 보여 수견량×생사량비율로 환산한 종합적 생사생산력은 1만두 생사량 2.32kg에서 4.96kg으로 무려 2.14배 향상되었다.
표 3. 광복 이후 누에품종의 생산력 발전 (누에품종연구35년, 1996)
성상 |
경과 일수 (일시) |
(A) 1만두수견량 (kg) |
전견중 (g) |
견층중 (cg) |
1ℓ 과수 (과) |
견사장 (m) |
(B) 생사량비율 (%) |
(C) 1만두생사량 (kg) |
춘 추 대표품종 |
---|---|---|---|---|---|---|---|---|---|
연대 | |||||||||
1940 | 25.03 (100) |
15.7 (100) |
2.00 (100) |
37.0 (100) |
86 (100) |
872 (100) |
14.79 (100) |
2.32 (100) |
일9×지108 일115×지108 |
1950 | 25.04 | 18.3 | 2.08 | 42.5 | 85 | 975 | 16.72 | 3.06 (132) |
백두×금강 태백×낙동 |
1960 | 24.03 | 18.2 | 2.10 | 43.9 | 82 | 1,219 | 18.06 | 3.29 (142) |
설악×소양 모란×대동 |
1970 | 23.11 | 20.0 | 2.29 | 53.6 | 69 | 1,488 | 20.53 | 4.11 (177) |
칠보잠 잠109×잠110 |
1980 | 23.13 (94) |
23.6 (150) |
2.51 (126) |
61.0 (165) |
60 (70) |
1,489 (170) |
21.01 (142) |
4.96 (214) |
용강잠 대성잠 |
주 : 1) 생산력(C) = (A)×(B)
2) 1962년 이전 : 대소잠1만두 정견(상견+중견) 수견량
3) 1963~1971 : 대4령기잠 1만두 수견량
4) 1972년 이후 : 대4령기잠 옥견포함 상견 1만두 수견량
1980년대 이후 품종의 생산력은 시대의 요구에 따른 특수품종의 육성이 위주가 됨으로서 의미가 없어 생략한다.
대한제국이 1900년에 농상공부내에 잠업과시험장을 설치하고 그 다음해 1월부터 양잠의 전습(傳習)을 개시하여 매년 50명의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도 재래식 양잠이 계속 전래되었으나 1906년 통감부 권업모범장 관제가 공포되면서 양잠에 대한 근대적 시험 및 조사가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 무렵부터 2화성 4면 하추잠 장려품종이 보급되므로서 이를 이용한 하추잠 사육이 이루어져 1910년에 5,394매, 1920년에는 321,711매로 보급이 급증되었으며 특히 1924년에 확립된 인공부화의 실용화는 하추잠 사육을 본격화시켰다.
일본은 한국 잠업장려 식민지 정책 중에서 애누에 공동육 보급을 잠업증산의 기본정책으로 삼아 지방비, 군농회 또는 면의 경비 등으로 보조금을 교부하여 적극 장려하였다.
그 결과 1932년의 애누에 공동사육장은 1,742개소, 공동사육 호수는 70,396호, 소잠량 68,233매 그리고 수견량은 1,310.6톤(42,085석)으로서 전체에 대한 점유비율이 양잠호수의 경우 9%, 수견량의 경우 7.1%이었다. 공동사육 성적은 대체로 양호하였으며 잠종 매당 수견량에 있어서 춘잠은 20kg(6.44두), 하추잠은 16.6kg (5.32두)로써 동년 총수견량 평균인 춘잠 18.9kg(6.08두), 하추잠 15.8kg(5.09두)에 비하여 5% 내외의 증수를 나타내고 있다.
광복후 6.25 동란을 거쳐 1962년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기 전까지 무려 15년 이상의 긴 기간은 한국 양잠은 재기를 위한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었으나, 활기를 찾지 못하고 거의 제자리걸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누에사육 시험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누에 사육시기 시험을 실시하여 춘추잠 2회 사육을 하추잠 및 만추잠 사육의 가능성을 조사하여 농가에 보급코자 하였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3년에 걸쳐 그때까지 실시하여 오던 각종 경제적 사육방법(애누에 : 상자육·습포육 또는 비닐 덮개육 등, 큰누에 : 보통육·가지뽕치기 및 야외육 등) 중에서 우리 농가실정에 적합하고 사육성적이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방법을 재검토하여 조속히 보급하고자 경제육 시험을 실시한 결과 봄누에때는 1~2령 상자육, 3령 이후 보통육구와 1~2령 상자육, 3령 복개육, 4령 이후 보통육구는 대조구에 비해 별차이가 없으나 다른 구는 모두 다소 떨어졌다. 여름누에는 대조구가 다른구에 비해 좋은 성적이었는데, 가을누에는 봄누에 때와 같은 경향으로 대조구와 별차이가 없는 두구는 경제육 방법으로 농가에 장려할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1971년도부터는 애누에 공동육용 항온항습 잠실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잠실에는 기계실, 저상실 외 누에씨깨기실을 갖추고 2령까지 사육량을 기준으로 주로 500 상자육용부터 1,500 상자육용까지의 잠실을 국고보조 50%, 장기융자 50%로 설치하였다. 따라서 1971년부터 1986년까지의 사이에 2령까지 100 상자육용 2동, 200 상자육용 1동, 500 상자육용 75동, 700 상자육용 6동, 1,000 상자육용 7동, 1,200 상자육용 1동, 1,500 상자육용 8동 등 100동이란 많은 잠실이 보급되어 이로서 1회 2령까지의 사육 가능량은 62,300 상자분의 애누에 공동육용 항온항습 잠실이 보급되었다. 이와 같은 잠실을 각도에 설치한 것은 애누에 공동육 보급이란 차원과 애누에치기용 새로운 잠실 및 기술도입이란 측면에서 우리나라 양잠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 처음으로 서울대 농대에서 누에 인공사료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사료의 장기저장에 대한 기초연구가 이루어 진 이래, 잠업관련 대학 및 연구기관에서 누에 인공사료에 대한 기초연구가 이루어 졌으며, 또한 1971년 한국과학기술원 동물사료 연구실과 1973년 농촌진흥청 잠업시험장(현 잠사곤충부)에서 누에 인공사료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이래, 실용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1980년에는 동방유량(주)에서 한국과학기술원이 개발한 누에인공사료를 인수하여 동방사료로서 1982년까지 4,300상자가 농가에 시범적으로 보급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잠업시험장은 1983년과 1984년에 걸쳐 동방사료에 의한 애누에 인공사료 농가 실증시험을 실시하였고 대한잠사회에서도 1985년 동방사료에 의한 애누에 인공사료육 시험사업을 실시하여 농가 실증 시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짐에 따라 본격적인 우리나라의 애누에 인공사료육은 1987년부터 농수산부에 의해서 정부차원에서 농가에 보급되었다.
특히 1991년 대한잠사회 잠업기술연수원내에 누에 인공사료센터가 설립되고, 1994년에는 4개도 잠업사업소(충남, 전북, 경북, 경남 잠업사업소)에 애누에 인공사료 자동사육장을 설치하여 다단순환식 애누에 자동사육장치에 의한 사료를 자동적으로 급이하게 됨으로서 애누에 인공사료육은 본격적으로 농가에 보급되었다.
누에 생물 공학은 누에의 각종 유전자의 발현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 즉 'DNA makes mRNA makes Protein'의 분자 생물학의 Central dogma에 관련된 학문·연구·기술 분야로 우리나라에서의 본격적인 연구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생물체의 대 잇기의 핵심주체인 유전자에 관한 연구는 1950년 미국의 생물학자 J. Watson과 영국의 물리학자 F.Crick이 공동으로 연구한 DNA모델을 발표하여 학계의 인정을 받음으로 급속히 진전되었다. 그후 세계최초로 일본인 과학자 Suzuki가 진핵 생물인 누에의 후부견사선에서 mRNA를 분리 동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누에 생물공학연구는 일본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하였으나 우리나라는 현재의 농업과학기술원 잠사곤충부와 전신인 잠사곤충연구소 또는 잠업시험장과 일부 대학을 중심으로 비교적 최근에 연구가 시작되어 그 역사가 매우 짧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누에 생물공학 연구 중 최초의 DNA 및 RNA 관련 연구는 누에알의 발육에 따른 RNA 함량의 변동과 누에, 메뚜기 및 지네 정소의 DNA분석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까지는 소위 누에 분자 생물학은 거의 발전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의 우리나라 전체의 '유전공학'열풍에 자극 받아 누에 분자 생물학연구는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 1990년 이후에 행하여진 누에 분자생물학의 주요 연구내용은 첫째, DNA다형 현상을 이용한 유전자 해석 둘째, 누에 생체 방어관련 단백질 유전자 연구 셋째, 누에 Fibroin단백질 유전자연구 넷째, 형질 전환 누에 창출 등 4개 제목으로 요약된다. 여기서는 상기 내용과 관련하여 DNA(또는 RNA) 및 해당 유전자와 관련된 일련의 단백질연구에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기술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양잠은 1976년을 정점으로 하여 점차 감소되어 1990년 이후에는 거의 기반마저 무너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부득이 전통양잠으로부터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중 고의서에 많이 수록되어 있는 양잠산물을 이용한 기능성물질을 응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래서 1991년부터 경희대약대와 공동으로 기능성효과 등을 탐색한 결과 1995년 누에분말이 혈당강하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어 우리나라 양잠산업이 새로운 형태로 소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즉 이듬해인 1996년부터 소잠량이 급격히 증가되어 1998년에는 1995년 대비 소잠량이 50%이상 증가되었으며 농가소득도 280억원으로 증대되었다.
1995년부터 누에동충하초 대량생산 및 유용물질 개발 과제를 수행하면서 얻어지는 결과에 대하여는 년차적으로 특허를 출원하였다. 즉 1997년 12월 '가잠을 이용한 동충하초(Paecilomyces japonica)의 인공재배방법', '가잠을 이용한 동충하초(P.sp J300)의 인공재배방법'에 대하여 국내특허를 출원하였고 1999년 1월 특허를 획득하였다. 또한 1998년 12월에 '가잠을 이용한 번데기 봉형눈꽃동충하초(P.farinosa)의 인공재배방법', '가잠을 이용한 번데기동충하초(Cordyceps militaris)의 인공재배방법'에 대하여 국내특허를 출원하였고, 미국, 일본, 중국에 '가잠을 이용한 동충하초(Paecilomyces sp.)의 인공재배방법'에 대하여 국제특허를 출원하여 1999년 8월에 우선 미국으로부터 특허를 획득하였다.
2001년에는 발아 직전 미교미 수나방을 이용한 강정제인 '누에그라'를 개발하여 특허출원(2001-13729호)하고 제약회사에 기술이전 산업화하므로서 국내 잠업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양잠이 시작된 이래 수 천년 동안은 양잠농가에서 생산된 고치는 모두 자가 실켜기하고 견직을 하여 왔기 때문에 고치의 거래가 없어서 고치의 검사는 행하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1910년 이후부터 양잠이 활발하여지면서 고치가 많이 생산되고 이를 필요로 하는 민간제사 공장이 설립됨에 따라, 각 군청에서 고치의 판매를 알선하게 되어 공동판매가 이루어지면서부터 고치의 육안검사가 시작되었다. 그 후 1923년 2월 조선농회령의 공포와 동시에 농회의 사업으로 고치의 판매를 알선하게 됨에 따라, 고치의 공동판매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부터 도령에 의한 고치의 육안검사가 전국적으로 행하여졌다. 한편 1929년에는 전라남도에서 도령으로 고치 기계검사 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도의 생산고치중 기계검사 신청고치에 대하여 처음으로 기계검사를 실시하게 되었고, 뒤이어 다른 도시에서도 고치의 기계검사를 실시함으로써 고치의 육안검사와 기계검사가 병행되었다. 그러나 고치의 공동판매가 실시된 이후에도 자가제사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는데, 1932년까지도 고치생산량의 41.1%가 자가 실켜기되고 58.9%만 공동 판매되었다. 그 후 고치의 공동판매량이 점차 많아져서, 1941년에는 전국의 고치 공판장소가 896개소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각 도의 고치기계검사 시설도 증설되어 7개도의 고치 검정용 좌조기는 67대로 증가되었다.
표 4. 누에고치 육안검사 등급 변천 추이
년도 | 기준 생실량 비율(%) |
19 | 18 | 17 | 16 | 15 | 14 | 13 | 12 | 11 | 10 | 9 | 8 | 7 | 6 |
---|---|---|---|---|---|---|---|---|---|---|---|---|---|---|---|
1910 | 봄 가을 |
특등 |
1 특등 |
2 1 |
3 2 |
4 3 |
등외 4 |
등외 | |||||||
1930 | 봄 가을 |
우등 |
특등 우등 |
1 특등 |
2 1 |
3 2 |
4 3 |
5 4 |
5 | ||||||
1955 | 봄 가을 |
우등 |
특등 우등 |
1 특등 |
2 1 |
3 2 |
4 3 |
5 4 |
6 5 |
6 |
등외 등외 | ||||
1963 | 봄 가을 |
수등 |
우등 수등 |
특등 우등 |
1 특등 |
2 1 |
3 2 |
4 3 |
5 4 |
5 |
등외 |
등외 | |||
1966 | 봄 가을 |
2수등 |
수등 2수등 |
우등 수등 |
특등 우등 |
1 특등 |
2 1 |
3 2 |
4 3 |
5 4 |
5 |
등외 |
등외 | ||
1968 | 봄 가을 |
1 |
2 1 |
3 2 |
4 3 |
4 |
5 |
5 |
6 |
등외 |
등외 | ||||
1973 | 봄 가을 |
수등 |
1 수등 |
2 1 |
3 2 |
4 3 |
4 |
5 |
5 |
등외 등외 |
|||||
1980 | 봄 가을 |
2수등 |
수등 2수등 |
1 수등 |
2 2 |
3 2 |
3 |
중견 중견 |
등외 등외 |
||||||
1985 | 봄 가을 |
2수등 |
수등 2수등 |
1 수등 |
2 2 |
2 |
중견 |
중견 |
등외 등외 |
||||||
1990 | 봄 가을 |
1등 |
2 1등 |
3 2 |
3 |
겉물든고치 |
겉물든고치 |
중고치 중고치 |
한편 고치의 판매 알선을 조선잠사회가 하게 됨과 동시에 도령으로 제정한 육안검사에 의하여 고치가 거래되었다. 그 후 1949년 8월 농산물검사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고치의 육안검사는 도령 검사로부터 농산물검사소로 이관되어 농산물검사소의 주관하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후 현재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고치의 육안검사는 인간의 5관능을 통하여 행하는 주관적인 검사방법으로 객관성이 결여되어 고치 거래의 공정을 기하는 문제가 되어 왔다. 따라서, 고치검사의 정확으로 거래의 공정을 기하고자 농림부령 제221호(1966. 6. 3)로 고치기계검사 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각도 잠업검사소로 하여금 고치의 기계검사를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1967년부터 또 다시 고치의 육안검사와 기계검사를 병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8년 무렵에는 고치의 생산량이 격감하여 잠업법이 폐지되고 농수산물 품질관리법(1999년 1월 21일 제정, 법률 제5667호)에 의거 고치검사는 시, 도지사에게 위임하게 되었다. 한편 누에고치 가격 결정은 1946년부터 1947년까지 군정청의 통제가격제도와 1948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잠사회 주관하의 협정가격제도,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잠사가격안정기금법에 의한 농림부장관이 결정 고시한 가격제도, 1971년부터 잠업법에 의한 농림부장관이 결정 고시하게 된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제사기술은 중국으로부터 구전된 기술로서 2000년 훨씬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이어 왔는데 최초의 제사방법은 고치를 삶아서 간단한 실켜기 연모인 '왕채'를 이용하여 손으로 직접 실을 잡아당겨 켜낸 실을 채반 위에 놓아 가면서 실켜기하는 것이었다. 그 후 1300년대의 실켜기 방법은 큰 얼레 수방식 '왕채'를 가지고 큰 얼레에 실을 감아 켜서 얼레에 감긴 실을 빼내 가며 실켜기하는 방법으로 개선되었으며, 이는 다시 족답식 '왕채'로 개선하여 얼레에 연결된 발판을 발로 밟아 얼레를 돌리면서 손으로는 고치를 붙여 실켜기하는 방법으로 발전하였는데, 이와 같은 재래식 제사방법은 1900년대까지 계속되어 왔다. 한편, 1910년대에는 일본에서 새로 개발된 좌조조사기가 도입되고 민간제사공장이 설립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제사기술은 근대화되기 시작하여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즉 1910년대에 일본에서 도입된 좌조조사기가 1940년대에는 다조조사기로 대체되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에는 다조조사기가 자동조사기로 교체되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 말부터는 보통자동조사에 비하여 능률이 2배 이상 향상되는 고속자동조사기가 개발 보급됨으로서 현재에는 완전 자동조사기 시대에 이르렀다.
..국내 실크산업은 1960년 초에 시작된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간 많은 구조적 변화를 이루어 왔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양잠업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왔고, 주로 생실 생산 및 수출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일본이 한국산 생실의 주요 수입국 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실크가공산업의 발전이 시작되었고, 몇 개소의 제사 공장들이 수출견직물의 연사, 제직까지 그들의 업무 영역을 확대하였고, 197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현상이 국내 실크의 재고를 증가시킨 일본의 수입규제정책에 의해 가속화되었으며, 한국정부로 하여금 고치생산 감소와 새로운 수출시장 개척을 위한 실크제품의 다양화, 특히 1975년경부터 시작된 염색 및 직접 날염, 1980년경에 시작된 발염날염 등 새로운 실크가공기술의 개발을 추진하게 하였다.
생실을 원료로 하는 견(Silk)은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복 및 화복지 등에만 주로 이용되어 왔으나 1970년대에 들어서 부터는 경제발전과 함께 실크에 대한 소비욕구가 증대되었고 실크제품도 브라우스, 넥타이, 스카프, 드레스 및 편물 등 실용성이 요구되는 양장제품으로 용도가 점차 다양화되었다. 이러한 소비욕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보통생사에 유연성, 신축성, 팽화성, 의마성 및 내구김성 등 실용성이 보완된 새로운 특성을 가지는 신소재 견사의 개발이 절실히 요구되었으며 따라서 이 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추진되어 왔다. 그 동안 개발된 주요 신소재 견사로는 복합견사(Hybrid silk), 세섬도 견사, 신축팽화성 견사, 이수축성 견사 및 모시실크 등이 있다.
1970년대 말부터 국내고치 생산기반의 감축이 시작됨에 따라 실크가공기술의 개발이 본격화되었고, 이태리 실크가공기술의 도입과 함께 자체 개발기술을 국내 견직 가공 업체에 보급함으로써 실크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는 실크의 부가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하여 첨단 기능성 신소재로의 이용 가능성을 검토하게 되었다.
특히, 양잠부산물로 생산되는 자른 누에고치와 부잠사의 섬유상 실크단백질을 액상분말화하여 이용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기능성 식품과 화장품 첨가제로 실용화 시켰으며, 의약용 소재개발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실크의 새로운 용도개발에 큰 성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견피브로인은 천연고분자 소재의 하나로서 옛부터 수술용 봉합사로 사용될 정도로 인체에 대한 친화성이 높은 재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천연고분자 재료와는 달리 견피브로인은 곤충(누에)을 통하여 순수한 단백질을 대량으로 쉽게 얻을 수 있으며, 생체적합성이 우수하여 특별한 정제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인체에 대한 거부반응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분말, 막, 다공질체 및 겔 등 다양한 형태로 성형화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결정성, 용해성, 분자형태 및 분자 응집성 등을 메탄올과 같은 용제 처리나 연신, 열처리 등의 방법으로 쉽게 조절할 수 있으며, 화학 반응성이 우수한 관능기가 견 피브로인의 측쇄에 존재하므로 화학적으로 개질이 가능하다는 특성이 있다. 최근 실크의 의약용 소재화를 위하여 창상피복제, 산소투과성 막, 콘텍트 렌즈, 바이오센서, 수술용 색전물질, 인공뼈 및 인대, 인공혈관, 약물방출제제 등에 관한 연구가 추진되고 있으며, 가까운 장래에 실용화 될 전망이다.
한국잠업사. 1989.
누에품종연구 35년(이상풍 박사 정년퇴임 기념집). 1996.
한국 잠사기술 발달 100년사. 2000.
출처:농업과학기술원 잠사곤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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