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열정은 불꽃의 속성을 닮았다. 모든 견고한 것들은 모두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랑과 그것을 지속시키는 열정은 스스로를 태우며 빛을 내기 때문에 더 빠른 소멸을 피할 수 없다. 대부분 시대를 잘못 타고난 인간의 삶은 후세에 상상력과 과장의 힘을 빌려서 덧칠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어둠 속에서 멀리 떨어진 빛이 실제보다 밝아 보이는 왜곡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정월 나혜석의 삶도 그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혜석의 삶에 대한 조명은 흔히 말초적인 흥미에서 시작된다. 최초의 여성 전업화가 겸 소설가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녀의 삶과 예술작품을 살펴보기 보다는 연애와 불륜(그것도 프랑스 파리에서!) 1930년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혼소송서’의 제시로 인한 화제의 인물로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첫사랑의 무덤 근처로 떠난 신혼여행, 파리에서 친일파 관료 최린과의 불륜, 남편에게 이혼당한 뒤에 제시한 이혼소송서. 당대의 잡지와 신문은 이것을 대서특필하면서 그녀의 삶을 난도질했으며 그 대중적 호기심의 자장(磁場)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 풍경이 직조되면 그 기원이 은폐되듯이.
최근 일제시대 문학과 일상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녀의 삶과 문학, 미술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일제시대 문인들의 작품들이 새로운 해석과 함께 발간되고 있으며 당시 여성의 삶과 여성작가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이와 같은 흐름에 맞춰서 나혜석의 삶과 예술에 대한 위상정립도 새롭게 진행 중이다. 다만 폭넓은 행적 때문에 그녀는 때로는 ‘소설가’로, 때로는 ‘여성운동가’와 ‘화가’로 호명된다. 현재는 ‘풍속사 연구’ 중심으로 흐르는 국문학 연구풍토 탓에 대부분 그녀의 문학을 통해서 당대의 일상사와 여성의 삶에 대한 응시가 주로 행해지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 책 <화가 나혜석>은 미술사를 전공한 저자(윤범모)에 의해 ‘화가’ 나혜석의 면모를 밝히면서, 문학과 풍속사 연구로 기울어진 나혜석에 대해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유학이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는 점, 글쓰기가 특정한 시기에 편중된 것에 비해서 삶의 전반에서 그녀를 지배했던 것은 미술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녀를 ‘화가’로 명명한다. |
이러한 저자의 시도에 상당부분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언어를 크게 신뢰하지 못한다. 문학의 언어는 은폐와 방어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속성들이 문학을 위대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지만. 언어는 또한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일정부분 회화의 변종이 아닐까. 한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심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회화는 언어보다 우월하므로. 그러니까 에드바르트 뭉크나 에곤 쉴레의 경우처럼.
일본 유학시절에 겪은 첫사랑과의 사별, 남편과의 결혼시절,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타지에서 겪은 문화적인 각성과 불륜, 그리고 이혼소송서를 계기로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갖은 오해와 갈등들, 핍박받는 조국의 민중에 대한 애정들은 그녀의 그림에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녀가 글과 회화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삶을 통해서 추구했던 것은 바로 ‘자유’가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솔직하게 사랑할 수 있는, 시대와의 불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 이 자유는,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