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재
(1) 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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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도지정 문화재
2. 옛가요 호남가- 함평천지음반제작사에서 제작한 박계향선생님의 소리입니다. 함평천지(咸平天地) 늙은 몸이 광주(光州) 고향(故鄕)을 보랴하고 제주어선(濟州漁船) 빌려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갈제 흥양(興陽)의 돋는 해는 보성(寶城)에 비쳐있고 고산(高山)에 아침안개 영암(靈巖)을 둘러있네 태인(泰仁)하신 우리성군(聖君) 예악(禮樂)을 장흥(長興)하니 삼태육경(三台六卿) 순천(順天)이요 방백수령(方伯守令)이 진안(鎭安)현이라 고창(高敞)성 높이 앉아 나주(羅州)풍경 바라보니 만장운봉(萬丈雲峰) 높이 솟아 층층(層層)한 익산(益山)이요 백리 담양(潭陽)의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만경(萬頃)인데 용담(龍潭)의 맑은 물은 이 아니 용안처(龍安處)며 능주(陵州)의 붉은 꽃은 골골마다 금산(錦山)이라 남원(南原)에 봄이 들어 각색(各色) 화초(花草) 무장(茂長)허니 나무나무 임실(任實)이요 가지가지 옥과(玉果(로다 풍속(風俗)은 화순(和順)이요 인심은 함열(咸悅)인디 기초(奇草)는 무주(茂朱)하고 서기(瑞氣)는 영광(靈光)이라 창평(昌平)한 좋은세상 무안(務安)을 일 삼으니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낙안(樂安)이요 부자형제(父子兄弟) 동복(同福)이로구나 강진(康津)의 상고선(商賈船)은 진도(珍島)로 건너갈제 금구(金溝)의 금(金)을 이뤄 쌓인제 김제(金堤)로다. 농사(農事)하던 옥구(沃溝)의 백성(百姓) 임피상의(臨陂裳衣) 둘러입고 정읍(井邑)의 정전법(井田法)은 납세인심(納稅人心) 순창(淳昌)허니 고부청정(古阜靑靑) 양유색(楊柳色)은 광양(光陽)춘색(春色)이 팔도(八道)에 왔네 곡성(谷城)에 숨은 선비 구례(求禮)도 하려니와 흥덕(興德)을 일삼으니 부안(扶安)제가(齊家)이 아니냐 우리 호남(湖南)의 굳은 법성(法聖) 전주백성(全州百姓)을 거나리고 장성(長城)을 멀리 쌓고 장수(長水)를 돌아들어 여산석(礪山石)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꽃았으니 삼례(參禮)가 으뜸인가 거드렁 거리누나
호남가는 단가의 일종이며 남도소리 곡조이고 장단은 중머리이며 4,3각이 있다. 호남출신이면 누구나 직접 부르지는 못할 망정 한번 들으면 곧바로 흥을 느끼게 되고 특히 첫머리인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하고"까지는 거의가 부를줄 아는 노래다. 그래서 "호남가"의 이름은 몰라도 "함평천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이 노래 제목이 "함평천지"인줄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이 노래의 가사를 지은 사람에 대해 국악보(國樂譜)에는 이 서구(李書九1754∼1825)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다른 고을처럼 제 고장에 대한 노래가 없는 것을 아쉬워 하여 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재효(申在孝) 계통에서는 신(申)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하다. 이 노래는 전라도 주군현(州郡縣, 조선조 때) 57고을중 40개 고을의 이름을 산수와 순후한 풍속, 그리고 충효와 선행에 따라 말 풀이를 하였다. 함평에서 시작하여 임피(臨陂)에서 끝나는 호남가는 1백년만에 볼까말까한 목소리라는 임방울(林芳蔚)에 의해 불려 지면서 진가를 나타냈다. 1821∼1823년까지 함평현감을 지낸 권복(權馥)이 함평을 노래한 함산가(咸産歌)의 첫 구절에 "호남의 여러 고을을 노래한 호남가도, 첫머리에 함평을 부르지 않았던가"라고 한 것을 보면 170년전에도 호남가가 널리 불리어 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호남가가 함평에서 머리를 잡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이 있으나 다음과 같이 귀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함평(咸平)이라는 이름이 호남에서 제일 좋기 때문인 것이다. "咸"은 모든 것이 가득차고 원숙함을 뜻하며 "平"은 평탄할 평, 바를평, 다스릴 평, 화할 평,고를 평, 쉬울 평, 거듭 풍년들 평 등의 뜻을 가지고 있고 제왕(帝王)의 가장 보람된 꿈인 태평성세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것이 두루 화평스럽고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 천지(天地),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없고 이러한 속에서 늙은 노인네가 빛고을(光州) 고향의 길을 떠나는 것은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함평이 맨 먼저 노래되었을 것이다. 기성가 기성가는 나산면 삼축리 출신의 박봉혁이 38세 되던 1874년에 지은 노래입니다. 함평의 여러 마을에 대한 충효와 경관을 노래한 것으로 풍수지리에 연계한 유교적사상을 근간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함평의 유림들에 의해 민요조 또는 단가조로 불려졌다는데 단가풍으로 부르는게 더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함평의 52개 마을, 54명의 인물, 그리고 14개의 산과 18점의 유적, 유물이 소개된 가사부피만도 2백여구에 달하는 대작입니다. 따라서 기성가를 외우면 함평의 역사를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성가는 함평의 객사였던 기성관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나산면 삼축리인 쌀울에서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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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산가
함산가는 1821년부터 1823년까지 함평현감을 지냈던 권복이 지은 7언귀의 한시입니다. 이 시는 당시 동헌으로 사용되던 녹죽당에 현판으로 걸려 있어서 군민들에게 애송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판은 없어지고 1907년 간행된 군지의 제영조에 수록됨으로서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함평의 절경과 명승지를 예찬한 함산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호남의 여러고을 노래하는 호남가도
첫머리에 함평천지 부르지 않았던가.
경치 좋은 기산봉은 영수천과 어울리고
영찰은 용천사요 군유산은 명산일세
군의 동쪽7개면은 선비 많은 고을이라
집집마다 글을 읽혀 밝은 덕 다져가며
서쪽에선 이따금씩 기재들이 태어나고
영중마냥 백설같은 미인들 생겨나네
이름하여 이 노래를 함산가라 하였으니
함산이여 늙지 않고 만고에 푸르러라.
칠실(漆室)우국가(憂國歌)28장
이 단가(시조)는 정유재란때 무장(武將)으로 이순신 막하에서 공을 세웠으며 수군통제우후를 지내다가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벼슬을 버린 이덕일이 향리인 대동면 향교리로 돌아와 담쟁이 덩굴, 칡덩굴 등이 우거진 곳에 띠집(芽屋)을 짓어 "칠실"이라 명하고 임진, 정유재란때 치욕의 분통과 당쟁에 대한 격분 고뇌가 담긴 작품으로 "칠실유고"에 수록되어 있으며 국문학사중 단가문학(短歌文學)의 귀중한 자료로 일찍이 유명한 교수들의 저서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칠실유고의 원전은 그의 5대손 세습이 보관해 오다가 1708년에 진사 이사성이 유고의 체제로 펴낸 것을 영조 8년(1732)에 증보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