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 - (창세기 6:13-22) / 양병모 목사님
노아의 방주는 신화가 아니다. 이것은 역사적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 여러나라의 고대로부터,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구전들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홍수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북아메리카 미국의 원주민들에게도 그런 내용들이 있었고 유럽등
그 대 홍수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이 홍수는 어느 한 지역의 국지적인 홍수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지구적인 홍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지질학적으로도 히말라야 산에 올라가다 보면 거기 화석이 나오는데,
어떤 화석이 나오는가 하면 바다 속에 있었던 조개껍질 같은 화석이 나온다.
화석은 노천에 오래도록 놔 두면 화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뭔가 위에서 순식간에 확 덮어놔야
그것이 그대로 부스러지지 않고 원형상태로 보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굳어가지고 말이다.
그런 것을 보면, 엄청난 지각변동이 있어서 히말라야산맥 같은 것도 바다 속에 있었는데 이것이
지각의 융기가 되어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하늘의 물층이 있어서 온실효과
비슷하게 되어 지구가 온난화 비슷하게 지구가 아열대우림지역으로 덮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들도 크고 식물들도 많았다. 그래서 이때에 공룡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공룡의 발자국등 문화적으로 보존하는 곳도 있지 않나? 그래서 이런 거대한 짐승들이
살았다. 그런데 하늘의 물층이 내려오다 보니까 사계절이 생기고 온실효과가 없으지니까...
이 큰 짐승들이 살 수 없고, 우선 지각변동 때문에 덩치가 큰 것이 먼저 굴러간 것이다. 개미?
안 굴러간다.
큰 덩치 큰 것들이 굴러가서 골짜기들을 메우고 흙으로 덮히고 나서, 이것을 우리가 빨대 꽂아서
뽑아 쓰는 것이 기름이다. 석유인 것이다. 특히 중동지역에 많이 살았는지 거기서 많이 나고 있다.
못 발견한 것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무들이 산사태가 일어나서 한군데 모여서 여기 흙이 덮히니까
썩어서 그것을 또 우리가 캐서 쓰는 것이 석탄 아닌가?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와중에서도 정말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고 우리를 위해 저축하신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공의 뒤편에 있는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엄하신 하나님 뒤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긍휼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그 양축을 다 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을 무섭게만 또는 하나님은 물러 터지신 솜사탕 같은 분이야...?
아니다. 하나님의 양면을 다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강은 균형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찬양한 그 평화, 평화...그 샬롬은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아주 균형 된 평강이다.
사랑과 공의는 어느 한 면으로 기울지 않는 하나님의 두 축이다.
우리가 배 선船자를 보면 - 船 - 배인데 여덟명이 탄 배다. 그런데 이 배는 선박, 그런 큰 배를 뜻한다.
그런데 그 큰 배에 여덟명이 타고 있어...? 그 때 노아와 아들들 셋, 그의 아내들, 하여 8명이 탔다.
이것이 중국의 한자 뜻글자 속에도 있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은 다 같은 것이다. 노아의 자녀인 셈, 함, 야벳에서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누려는 것은 이 역사적 사실을 어떤 고고학적인 측면으로 올라가 더듬어 보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로 정말 노아홍수가 있어서 그것이 세계적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라는 ...
그리고 노아 방주에서 짐승들이 들어가는데 그 짐승의 숫자를 다 더해보니까,
현재 지금 세계적으로 있는 것이 17600여종의 포유류, 조류 이런 숫자다.
이것을 두 마리씩만 하더라도 35200마리이지 않나?
그런데 이 방주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용량을 계산해 보니 이것이 다 들어가고도 반 이상이 남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과학적으로라도, 창조 과학회 이런 것을 떠나서라도 실제적으로 있는 것이다.
결코 성경은 신화가 아니다.
그것을 우선 아시고, 지금 우리는 역사 신화를 배우는 시간은 또 아니다. 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역사공부시간이 아니라,
이시간은, 시간과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바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뜻이 있음에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계속 말하지만 성경은 안팎으로 씌여진 책임을 알아야만 한다.
밖에 있는 것도 알아야 하지만, 이것이 오늘 내게,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넘어 내게 다가오지 않으면
이것은 살아있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역사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제, 노아가 방주를 짓게 된다.
우리가 오전에 6-7절, 아버지의 아픔, ‘나함’ 이라는 뜻의 가슴 찢어지는 아버지의 한탄을 보았다.
6-7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내 요구사항 들어주는 로버트로 알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그 마음을 지니시고 당신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다.
인격을 가지고 오신 분이시다.
이제 1노아가 방주를 지으라는 임무를 받는다.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여기서 끝 날은 무엇을 끝내는 날인가? 땅을 끝내는 날이다. 죄악가운데 만연한 그 땅을 끝내는 날,
땅의 인생을 끝내내는 날, 이제 그것을 끝내면 어디 속에 들어가 살게 되나? 방주 속에 삶을 사는 날...
그럼 그 날이 아주 멸망의 날인? 은혜의 날인가? 복된 날인가?
우리는 끝 날에 대한 생각을 잘 가져야 한다. 끝 날은 복된 날이다. 세상의 악을 끝내는 날이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바로 은혜의 날이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날로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아 33장 3절에 보면,
“너는 네게 부르짖으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들을
보여 주겠다“ 고 하시지 않나? 그러면 보라, 부르짖어서 무엇이 빨리 오도록 하라는 것인가?
바로, 끝 날이 빨리 오도록이다. 그 끝 날이 빨리 오도록 하라고 기도하라 하시는데,
사람들이 무얼 가지고 부르짖는 것인가? 끝 날이 더디 오도록, 그리고 끝 날이 안 오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저 분의 생각과 의도와 우리의 생각과 의도가 어긋나는 것이다. 안 맞게 된다.
그래서 빨리 그 끝 날을 맞아 너희들이 그 죄악들을 끝내고 바빌론에 가서 좀 고난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와서 새롭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내 인생의 끝날이 빨리 오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우리는 끝날을 더디게 오게 해 달라고 하고..아예 끝날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럼, 저 분의 섭리를 이루어갈 수가 없다. 새로운 인생을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끝났으니...”가 못 박혔으니가 되는 것을 알라.
그러므로 이제 새롭게 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안 박히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믿노라 하지만 신앙이 더디 가고, 영 고치지 못하고 그냥 옛사람으로 살아가는 참담한 인생,
그런 인생이 되면 안 되지 않나? 그래서 여기 끝 날이 바로 새롭게 되는 날을 뜻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 이제 그 방주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 에 대해 이야기 하고 계심을 보자,
14절,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여기를 보라,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짓는데
15-16절,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보라, 길이가 삼백규빗이라..
일규빗은 우리 손끝에서부터 발꿈치까지이다. 다소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표준으로 45Cm를 이야기 한다.
이것은 135m, 즉 축구장보다 좀 넓다.
넓이는 오십규빗이니 23m ,
높이는 14m...
상상해 보면, 길이는 축구장 보다 크고 넓이는 적고 이것을 3층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3층에 창문을 냈다.
이 배를 만든 나무를 보니 고페르라고 되어 있는데 개역성경에는 바로 잣나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럼 잣나무로 만드는 뜻을 한번 보자,
호세아서, 14장8절,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나는 푸른 잣나무 같다. 에브라임, 바로 회복된 에브라임이 푸른 잣나무 같다는 것이다.
그럼 이 잣나무로 무엇을 하냐 하면,
열왕기상 5장 8절,
“이에 솔로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이 사람을 보내어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거니와
내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에 대하여는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할지라”
잣나무 재목은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는 나무다. 여기서 솔로몬 성전의 재목이 되는 것이 잣나무다.
그럼 다시 에베소서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어가는 그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잣나무는 우리 자신을 이야기 한다.
우리가 즉 성전의 구성원, 곧 교회의 구성원이구나, 거기에 구성원이 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가?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사람들이 바로 교회이지 않나?
그 사람이 바로 개인적 교회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것이 단체적 교회다. 그러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잣나무다. 아멘~
그렇기에 ‘고페르’, 즉 잣나무는 말씀이 새겨진 사람들을 뜻한다.
이제 그 잣나무에 안팎으로 역청을 바른다.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이 역청도 발음이 비슷하다. ‘코베르’다. 이 역청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이와 똑같은 말이
레위기 17장에 나와 있다.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여기 ‘속죄’가 이것이 똑같은 글자다. 발음은 비슷하게‘카파르’이다.
그러므로 역청은 속죄의 뜻이다. 속죄는 피를 바르는 것이다. 이 속죄의 장면을 보자.
출애굽기 12장 7절,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이 때 그 피를 문 아래위 좌우에 바른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못 들어오는 것이다.
생명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역청을 바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바르는 것이다.
바로 새 언약의 피를 바르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이 잣나무는 고페르와 역청은 코페르가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결국 방주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으로 만들어지되 그 말씀이 새로 깨달아진 말씀으로 다가 온
마음속에 할례 된, 그러한 말씀으로 다가 왔을 때는 물이 안 들어 간다.
결국 방주는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저 분이 우리의 바로 방주다.
사도행전 16장 35절에도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방주다. 그런데 그 방주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다?
잣나무, 즉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런 사람들...말씀이 각인 된 사람들,
그리고 그 말씀이 역청으로 즉 바로 새 언약으로 된 말씀을 지닌 자들..
바로 그들이 모여서 방주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방주가 그리스도다. 그 방주 안에 들어가야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내 피를 마셔라, 내 피를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말씀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그 말씀이 안팎으로 칠해져야 된다. 밖에 있는 말씀으로만 끝나면 안 된다.
이 잣나무는 곧 말씀, 언약을 뜻하는 것이다. 이 언약이 새겨진 자들,
그 언약이 역청으로 발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새 언약으로 깨달아져서
가슴팍에 안팎으로 칠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밖의 돌비로 있을 때는 세상 물이 숭숭 들어온다. 역청으로 바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피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식 때 포도주 마시는 것은
바로 새 언약이다. 이제 말씀이 네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그 마음에다 전부 바르는 것이다.
방부제로다가...
어둠이..죄악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전에는 이 언약이 이 말씀이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오셔서 새 언약으로 내 마음속을 말씀으로 다 바르는 것이다.
이 방주, 그러니까 온전히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결국, 그리스도 안에 내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네 안에 들어가면 그 순간에 네가 내 안에 들어온 거아..” 아멘~
저 분이 내 안에 들어온 줄 알았는데 결국은 저 분이 들어온 그 안에 다시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아멘~
그래서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그러시는 것이다.
창세기 6장에 넘어가서,
그래서 전체적인 그림을 여기 그려보았지만 이제 단면도라고 할까?
그런 측면에서 또 보면, 배를 중간을 잘라서 보면 그 3층이 이렇게 될 것이다.
2충, 1층...3층에선 창문을 내고...
자, 밖에는 바다가 있어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있다.
이제 그 많은 포유류, 짐승, 새들이 들어오면 그들이 각 층마다 들어간다.
1층에는 짐승 중에서도 배로 기어 다니는 짐승을 넣는다.
2층에는 육축이나 네발 가지고 걷는 짐승들
3층에는 사람이 들어간다. 노아와 가족들은 창문이 있는 3층에, 그리고 날아다니는 새들이 산다.
그럼 오늘 방주를 1-3층으로 지으라는 이 뜻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
이 방주가 바로, 히브리어, 테바, 이것은 출애굽기 2장에 나오는 갈대상자 (테바)와 똑같다.
여러분이 나일강의 갈대상자를 작은 바구니로 생각할 수 있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방주와 갈대상자가 똑같다.
글자의 점하나 안 틀린다. 똑같은 방주를 뜻하고 거기서부터 구출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층을 만드신 뜻을 알아야 한다.
먼저, 비록 방주 안에서는 그것이 1층에 있거나 2층, 3층에 있어도 모두 바다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방주의 1층과 2층 사이에 바다가 넘실된다. 그러므로 바다밑에 있는 층이 1층이나,
때로는 2층이다. 즉 방주는 우리가 가야한 신앙의 여정으로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즉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고 2층에서 3층으로 가야되는 단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생의 기는 수준에서 네발로 걷는 수준으로 가고 마침내 사람의 단계에 가고 또 날개 달린 독수리처럼
날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경속에서는 이렇게 모두 셋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성막에서도 성막을 들어가면 먼저 있는 것이 성막안에 있는 성막뜰이다.
여기서 제사지내고 다 지냈다고 하는 사람들을 뭐라 하나?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사야서 1장에서 그렇게 책망하시지 않나?
어디로 가야 되나? 성소에 가야 한다. 레위인만 들어간다. 레위인이 아니면 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세마포 입고 거룩한 모습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장소가 거룩한 성소이다. 그런데, 그 성소에서 멈추어선 안 된다. 지성소까지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는 대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다. 일 년에 한번씩...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들어가길 원하시나? 그래서 우리를 왕제사장이라 하신다.
대제사장이 더 큰가? 왕제사장이 더 큰가? 우리에게 하나님은 대제사장 이상 되는
왕 같은 제사장 자격을 우리에게 주고 싶으신 것이다.
지성소까지 가라고....그런데 성전 뜰만 밟고 간다. 방주 1층에서만 놀다 간다.
3층의 사람단계까지 올라가라...
지성소까지 가라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이제 마른 땅이 드러나면 거기서 뭐가 자라기 시작한다.
맨 먼저 자라는 것이, 풀이 자란다. (씨 없음)
두 번째 자라는 것이, 씨 맺는 채소가
세 번 째 ......열매 맺는 나무가 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가야 하는 것이 생명나무다. 생명나무로 가야 한다.
고린도전서 3장 속에서도 너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나? 를 거기 6가지가 무엇인가?
금과 은과 보석과 풀과 나무와 짚 이다.
풀, 짚의 존재..풀석 타버린다.
나무 존재는 불과 상관이 없지만 세상바람에 타 버린다.
우리는 2층을 넘어서서 파도와 상관없는 방주의 3층 단계까지 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금은보석의 단계다.
물론 풀과 짚, 나무, 이 사람들도 구원은 받지만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온 몸에 숯검댕이 묻히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너희는 부디 금과 은과 보석같이 되어라” 하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성의 만들어진 모든 건축 재료들이 금은보석 진주다. 아멘~
이것이 건축재료다. 이런 인생들이 올라가는 것이다.
고린도 12장2절에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갔다 온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공중을 붕 떠서 은하수 저 편에 갔다 온 것인가?
삼층천, 바로 지성소에 올라간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들어갔던 것이다.
내 마음속에 삼층천, 하나님의 그 거룩한 임재의 자리에 그는 갔던 것이다. 늘 우리는 밖으로
어딘가...외형적으로...
주님은, 바로 내 안에 들어와서 성전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거룩한 지성소를 만들어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 보질 못하니까..사도바울은 나는 그 지성소 삼층천에 갔다 왔다..고 하는 것이다.
유두보라는 청년이 사도행전에 보면 삼층에 앉았다가 떨어진다. 1층으로 떨어지나 죽었다 하지 않는다.
다시 올라간다. 수준이 일층수준인데 삼층에 같이 앉아 있으니 삼층의 내용을 알 수 없으니 떨어지고 만다.
여러분, 우리의 목표는 삼층이다. 더 높은 곳도 아니고 우리의 목표는 삼층이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세 단계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계신 것이다.
자, 창세기 6장으로 가서,
16절, 그 삼층에 창문을 낸다. 소망의 창은 삼층에 있는 것이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 삼층에 있다.
17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즉, 생명의 기운을 선할 곳에 쓰지 않고, 외형적인 누리고 있는 것에 미쳐 사는 저들의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시겠다...그들과는 함께 하지 못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아에게는 언약을 세우신다.
그리고 방주로 들어고 모든 생물, 생명있는 것들을 데리고 가 그들을 보존하라 고 하신다.
18-20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그리고 먹을 것을 저축하라 하신다.
오늘 양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 시간 마치려고 한다. 양식을 가지고 오라...
이 당시 노아는 이들 생물들이 먹을 풀들이나 이런 것들을 준비했을 것이다.
21절,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자, 그럼 오늘 우리에게도 저축하라 하시는 이 양식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 하시다가 제자들이 찾아 와 식사를 권하니
잡수셨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나의 양식은 따로 있다 하시는데 그 양식은 무엇인가?
바로 사마리아여인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한 것이다. 즉 예수님의 양식은 무엇이다? 바로 당신의 진리의 말씀이 양식이었다.
그래서 광야에서 사단이 와서 “저 돌덩이를 떡 덩이 만들어..배고프잖아? ”했을 때
단호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그것이 양식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이 영혼의 양식을
어떻게 육체의 양식으로 바꾸는, 하늘의 것을 땅의 것으로 바꾸는 참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믿고 성경책도 밥 먹는 것으로 생각하여
세상의 것을 얻는 도구와 수단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락시켜 버렸다.
그래서 마치 알라딘 램프처럼 밥 나오라 뚝딱, 아파트 나와라 뚝딱.. 사업 성공해라 뚝딱,
자식들 좋은 무슨 대학가라 뚝딱, 이것을 무슨 마술책으로 안다.
그리고 그것을 간증이라고 이야기 하고 다닌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장 7절에 보면, 어디에 오시나? 짐승의 먹이통에 오신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계속 이야기 하시는 것이 요한복음 6장에서 주욱 넘어가면서
50-51절에 가면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나는 생명의 떡이야, 나를 먹어야 영원히 산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영혼의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럼 주님께서 이야기 하신다. 요한복음 14장6절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그 길인데..
그 지성소까지 가는 길을 열어 놓은 내가 길인데 거기 가는 영혼의 양식인 진리가 있어
그것을 먹으면 너희들이 영원한 생명, 그곳으로 가는 거야.”
결국, 우리의 양식은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밥상이 있는 여관에 들어와 주무시지 않고...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뜻은 짐승 같은 너희들이 1층 단계에 있는 너희들이 나를 먹고 2층으로 올라가고
나를 먹고 3층에 올라가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짐승의 먹이통, 이런 저속한 단계로 오실 수 밖에 없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이지 않나? 그러나 그 분은 우리를 사람으로
또 수준 높은 독수리단계까지 키우고 싶으신 것이다.
바다와 상관없는 단계로 우리를 키우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아멘~
그런데 거기엔 관심을 별로 안 갖는 것이다.
“저게 무슨 뜻이야? 어렵다. 우리 보고 식인종이 되라는 거야? 그러면서 전부 다 떠난다.
바로 얼마 전 기적과 이적 앞에 몰려 왔던 사람들이....
그러니까 기적과 이적으로 주는 누룩을 잔뜩 먹고 있으니까,
괜찮은 모습인 것 같은데 자꾸 기는 단계로 내려가고, 사람인 것 같았는데 다시 짐승이 되어 버리네...
누룩을 먹으니까 그렇다. 먹는 양식이 그토록 중요한데 아무거나 먹으니까 그렇다.
이것은 아주 중병에 걸릴 수 밖에 없다.
몸이 건강하려면 먹는 것을 잘 가려 먹지 않나?
돈을 들여가면서도 왜? 신선한 무공해식품을 먹으려고 하나? 건강 때문 아닌가?
그런데 영혼에 양식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을 갖나?
바로 이것 때문에 저 분은 오셔서 온 몸을 던져 살점을 찢겨가면서 피 흘려가면서 그 순전한 양식,
누룩 없는 양식을 이 땅에 우리에게 주시고자 오셨는데 ...
다시한번 주목하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누룩 없는 양식 주러 오셨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에 누룩을 없애러 오셨다. 할렐루야, 아멘!!
누룩 없애러 오신 것을 우리 알자, 너무나 만연한 누룩 때문에
외식하는 신앙, 수많은 네피림을 이 땅에서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풍조가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야 함에도 그 신의 성품을 갖기는커녕,
천박한 성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들이 손가락질 당하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님이 믿는 신을 안 믿겠다고 하고 저 사람이 가는 교회, 안가겠다고 하며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짐승수준에 머무니까...
그래서 노아에게 주어진 임무는 “너는 양식을 준비하라, 안식에 이른 자여, 나의 마음을 아는 자여.
너는 양식을 준비하라. 그래서 저들에게 양식을 먹이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준엄한 사명이 양식을
준비하라는 말씀이다. 저 짐승들을 좀 살려 사람 되게 좀 만들어라.
“내가 수 많은 짐승들의 저 밤마다 들려오는 늑대와 이리들의 소리 때문에 내가 잠을 설친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야기 하신다.
자, 잠언 31장을 보자,
10-15절,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우리의 참 신랑 되신 그 분은 우리 현숙한 여인을 믿어주는 그런 분이다.
네가 바로 현숙한 여인이 되지 않겠니? 우리에게 이야기 하시는 것이다.
그 누룩 없는 영혼의 양식이 있는 곳이라면 이 여인은 먼데서도 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집안사람들, 아직도 참담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그 짐승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어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 신랑 되신, 그 떡 되신, 짐승의 먹이 되어 오신 그 분의 뜻을 받들어 일하는 그 여인,
현숙한 여인이다. 옥토 밭에 그 씨앗이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나누 주는 그러한 여인이 현숙한 여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삼층의 인생을 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니 독수리 날개 되어 날아가는
도무지 세상과 상관없는 멋진 인생, 염려 근심 걱정을 뛰어 넘는 인생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도 이끌어 올리는, 그 양식을 나누어 주어 이끌어 올리는 그런 아름다운 일을 하는 것이다. 아멘~
그리하여 오늘 창세기 6장의 마지막은
22절,“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그 말씀을 다 준행한다. 은혜 받은 자의 사명은 충성이다. 다 준행하였더라,
그 엄청난 기간 동안에 노아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손해 보는 것 아니야? 뭐 그것이 밥 먹여줘..
이런 저런 이야기 듣더라고 포기하지 않고 다 준행하는 사람, 충성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아다.
하나님은 아픔의 한탄 속에서도 그 노아를 보시고 소망을 가지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아픔 속에서 저와 여러분 저 분의 기쁨이 되십시다.
저 분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드리고, 기필코 내가 그 자리에 가리라, 기필코 내가 삼층의 인생이 되리라.
기필코 내가, 그 한 인생을 삼층에 사는 인생으로 바꾸어 내리라.
그 앎과 삶속에서 실제화 시켜 나가는 그런 복된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구가 넓은 것 같아도
내가 자리하여 누울 공간은 얼마나 작으며
이 땅에 그 많은 가게에 먹거리가 있어도
한끼 내 식사의 분량은 고작, 작은 그릇일 뿐인데...
인간이 일구어 낸 문명은 거대한 듯
그 문명의 숲에서 본향 가는 길,
영혼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온갖 번쩍이는 네온싸인의 현혹으로
지진과 폭풍, 자연재해 앞에서는
작은 목소리하나 내지 못하고 무능해지는 인간임에도
그 많이 쌓인 서점에 책들은
오히려, 푸른 하늘을 가리우는 먼지와도 같은
견해들....
이 아버지께서 주신 최대의 아름다운 선물,
그 말씀, 사랑의 편지 절절히
너무도 모든 자가, 그 알량한 자기이론만 접으면
간결하고도 쉽게,
인생의 살고 죽는 의미가
담겨 있건만
자기학설이 많아져 버린 세상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무분별로 받아드려진 상식과 관념들이
말씀보다 앞서니
그토록 찾아다니는 모든 수고가
계절이 찾아오듯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무익할 진대....
오, 주님, 진리를 알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삼층천을 내 안에 마련해 주시고자 하시는
그 신묘막측한 하늘의 섭리와
사랑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무것도 인생을 함부로 할 수 없군요.
당신이 우리 안에 살아가시고
우리가 당신 안의 방주에 계단을 오르니...
간절히 기도 하옵기는, 당신의 임재로 우주도 떨
그 삼층천 지성소에서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주소서.
태양의 촉수마저 밝히 바라볼 수 있는
독수리의 시력을 주소서.
그리스도, 당신을 모시고, 이 모든 말씀을 모시고
현숙한 여인이 되어 살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신랑의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이 세상 어떤, 번쩍이며 알록달록 유혹하는 이론과
네피림의 속임수에도 빠지지 않게 도우소서.
노아의 안식으로 들어가, 날마다
감람나무 잎사귀 문 비둘기를 내 보내듯
세상을 향해 무지개를 띄우신
아버지 마음을 더욱 알게 하시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아버지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첫댓글 우리의 마음을 아름다운글로 향기나는 기도로 표현해 주시니 감사..... 이기도가 우리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요.아멘
네~ 이런 지면에 기도를 올리는 것이 좀 그렇기도 하다고 생각했는데...말씀의 은혜에 푹 젖어 기록하다 보니..기도가 나오더라구요..감사하지요..마음을 나누게 하여 주신 이 곳...^^* 오늘 전화로 목소리 들으니 참 감사하고 좋았어요..사랑을 전해요~^^*
파도와 상관없는 삼층에 이르기위해 최선을 다하기 원하오니 성령이여 도와주소서 아멘
아멘 권사님 샬롬 &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