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다양성의 중재자 [제4편]
시의 화자 내면에는 강변 집에서 오손도손 살려는 소망이 일렁인다. 이 소망 공간에 “엄마야 누나야”를 초대하는데, 부재하는 그들이 합류할 때 목가적 삶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왜 아빠와 형이 아니고, 엄마와 누나인가? 문면(文面) 뒤에 숨은 시의 화자는 어른-아이에 머물고, 부성의 원리를 습득하지 못한, 그래서 아직 부성 영역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른-아이는 모성 영역에 대한 향수병을 앓으면서 자꾸 어린시절로 퇴행한다. 어른-아이는 신체는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모성 영역에서 겨우 젖을 뗀 채 머문다.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존재는 아버지의 권력을 승계하지 못한다. 정신분석가들에 따르면 이들은 “상징적 위치 교대”를 하지 못하는 미성숙에 머문 존재들이다.
엄마와 누나는 아기를 낳고 수유하는 존재들이다. 반면 아빠와 형은 조련하는 존재들이다. 가부장적 가족의 위계에서 엄마와 누나는 아빠와 형보다 낮은 서열에 속한다. 이 시의 숨은 화자는 아버지에게서 분할되고 쪼개지는 자다. 아버지는 교황, 신의 대리인, 전능과 무오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에서 야심과 경쟁, 허풍과 거짓의 존재다. 숨은 화자는 아버지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어리고 순결하고 연약한 자다. 서열이 낮은 시의 화자는 아빠와 형보다는 엄마와 누나에 더 친밀감을 느끼며 이끌린다. 화자가 엄마와 누나를 호명하는 것은 이들이 자신과 동병상련 존재인 까닭이다. 이 시는 “강변”과 강변 아닌 곳의 대립, “뜰”과 “뒷문 밖”의 대립, 반짝이는 “금모래빛”과 “갈잎의 노래”라는 차이를 거느린다. 추측건대 앞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있는 강변이고, 뒷문 밖은 갈잎들이 서걱이는 소리가 울려오는 산이다. 앞이 ‘반짝이는’ 것들로 만들어진 평화와 공존의 원리가 작동하는 여성 공간이라면 뒤는 ‘서걱거리는’ 것으로 이루어진 경쟁과 분리의 원리가 작동하는 남성 공간이다. 여성 공간을 물들이는 것은 슬픔과 연민이다. 남성 공간을 물들이는 것은 웃음과 아이러니다. “엄마야 누나야”로 호명되는 여성적 존재들과 호명되지 않은 “아빠야 형아야”의 대립이 은폐 차원에 숨어 있다. ‘나’는 모성적 존재들을 애타게 부르며 “강변[에서] 살자”고 청유한다. 집 뒤의 산이 깊고 음침하며 동물들이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위험 공간이라면, 집 앞의 강변은 밝은 햇빛이 내리는 자연 공간이다. 또한 물과 땅이 경계를 이뤄 경관이 수려한 장소, 생명이 어우러진 평화 공간이다.
「엄마야 누나야」의 숨은 화자는 여러 면에서 뜻밖의 중재자다. 숨은 화자는 모성 영역과 부성 영역, “뜰”의 세계와 “뒷문 밖”의 세계, 현존의 공간과 부재의 공간, 흘러간 과거- 시간과 다가올 미래시간, 자연의 생태공간과 비-자연적 문명공간 사이에서 중재자인 것이다. 숨은 화자가 이 중재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강변이라는 시공에서 목가적 삶이 실현될 것이다. 강변에서 엄마와 누나와 더불어 사는 것은 지상의 지복을 누리는 일이다. 과연 이 목가적 삶의 소망은 이루어졌을까? 아마도 그 꿈은 무산되었을 것이다. 이승의 꿈들은 끝없이 실패한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일 테다. 꿈들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목가적 소망의 노래는, 혹은 평화로움을 갈망하는 노래는 여전히 현실 세계에서 유효하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