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신동 바이올린니스트였지만 그 압박감을 못이겨내고 35살에 요절한
마이클 래빈, Micheal Rabin(5.2 1936-1.19 1972)

미국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동시대의 바이올리니스트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한편으로는 가장 비극적인 삶을 보낸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35살의 짧은 생을 살았으나 미국태생 최고의 비루투소로 평가되고 있다. 신동으로 불리우며 성인 연주자로 성장했지만 그의 감수성의 성장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고 그것이 결국 그의 연주경력의 단축을 가져왔다.
그는 35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지만 같은 문하에서 후학했던 주커만(Pinchas Zukerman)처럼 음악가나 청중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중 한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래빈은 뉴욕에서 태어났다. 래빈의 아버지는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주자였으며 어머니 제인은 줄리어드 출신의 피아니스트였다. 아버지 조지는 뉴욕필에 바이올린주자였다. 래빈은 1살에 정확한 박자를 칠줄 알았으며 3살에는 완벽한 음감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5살까지는 피아노를 배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올린을 취미로 연주했던 의사를 방문했을 때 사무실에 있던 작은 바이올린을 들고 조율하더니 연주하고 나서는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바로 래빈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다섯 번째 레슨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게 그를 뛰어넘는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아챘다. 하이페츠에게서 렛슨을 받기도 했고 그는 이반 갈라미안에게 사사받을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결국 래빈은 후에 쥴리어드 음악원에 들어가 이자크 펄만과 핀커스 주커만을 가르친 이반 갈라미안에게 사사하였다.
1947년 10세에 래빈은 아르투르 로진스키가 이끄는 하바나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비엔냐스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면서 전문연주가로 데뷔하였다. 51년 11월 29일 카네기홀에서 뉴욕필(지휘 디미트르 미트로폴루스)와 파나니니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데뷔하기 전에는 오케스트라 멤버로 활약했다. 카네기홀 데뷔나이가 불과 15세였다. 이미 13살 때 솔리스트로 카네기홀 연주를 한바 있었다. 영국런던에는 BBC교향악단과 로얄앨버트홀에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으로 첫 연주회가 있었다. 라빈은 멘델스존, 글라주노프, 파가니니 비엔야프스키, 차이코프스키 뿐만 아니라 브르흐 스코티스 환상곡 파가니니 카프리치오 등을 레코드 했다. 라빈은 벨칸도 스타일로 연주했다.
카네기홀에 데뷔연주후 뉴욕타임스는 그를 두고 이미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다, 정말로 아름답고 우아한 톤을 가졌다라며 갈채를 보냈다. 지휘자 조지 셀은 래빈을 두고 지난 30년 동안 그가 주목했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재능 중 최고라며 극찬했고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는 레빈을 미래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50년대말 래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녹음활동을 중단했다. 카네기홀 리싸이틀 도중에 갑자기 균형감각을 잃고 쓰러졌고 이것이 그의 병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의 감정의 불안정과 안정되지 못한 사생활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재능이 퇴보하는 징후가 전혀 없음에도 신동에서 성인연주가로 변모하는데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1960년 말에는 만성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는 얘기도 있었으며, 무대에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같은 불필요한 노이로제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어떤 것도 래빈이 그의 녹음 경력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래빈은 1959년 이후로 다시는 녹음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1972년 아직도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그는 복도에서 미끌어지면서 의자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사망하고 말았다. 마약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최근에 앤소니 파인스타인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머리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서 죽었다고 한다.
레빈의 연주는 벨칸토 스타일의 테크닉을 바탕으로 풍부하고 굵은 음색을 들려준다. 레빈의 연구 대부분이 그의 이러한 특징을 대변해주는 호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가 남긴 명반 중의 하나로 1959년 녹음한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을 빼 놓을 수 없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루지에로 리치가 1947년 이곡 전곡을 녹음한 이후 바이올리니스들에게 이곡 전곡을 녹음하는 것은 함부로 도전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래빈의 1959년 녹음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이자크 펄만이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을 녹음한 이후에야 래빈이 먼저 레코딩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당시 래빈의 레코딩을 들은 이후 만약 자신이 녹음을 하기전 래빈이 먼저 녹음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며 절대로 이 곡을 녹음하지 않았을 거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물론 펄만의 파가니니연주도 훌륭하지만 래빈의 연주를 들어보면 그가 느꼈을 심정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주옥같은 음반들을 남겼을텐데, 아쉽게도 현재까지 레코딩한 대략 시디6장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렇게 적은 레코딩에도 불구하고 한곡 한곡에서 그의 꽃같은 음악적 열정이 살아 숨쉬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래빈이 남긴 음반은 EMI카탈로그에 집중되어 있다.
강철 같은 음색과 놀라운 테크닉으로 무장한 20세기 중반 미국 출신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다 돌연 사라졌던 마이클 래빈... 그의 미공개 실황 녹음을 모은 이 세 장짜리 선집 음반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연주자였는가를 유감없는 보여주는 음악의 보물이다. 특유의 얼음장 같은 음색과 뜨거운 프레이징이 하나로 융합된 비에냐프스키나 브루흐의 협주곡은 래빈만의 개성이 전편을 휘감아돌며, 테너 브라이언 설리반이 반주한 마스네의 <엘레지>는 래빈의 벨칸토풍 연주가 마치 20세기 초 엔리코 카루소와 미샤 엘만의 명연주를 다시 보는 것 같은 절묘한 명연이다. 데뷔 직후인 1952년에서 69년까지 사실상 그의 전 경력이 망라되어 있어서 더욱 소중하다.
최근 그의 LP레코드 소품을 구할 수 있었다. 재발매되어 가격도 저렴한편(과거 소품원반은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가격도 최소 10만원이상이었음)이다. 그중에서도 Magic Bow, Mosaics은 개인적으로는 다른 어떤 바이올린 소품집보다 기대해도 좋은 음반이다.
Masic Bow 중에서도 마스네의 타이스 명상곡이나 사라사테 찌고네르바이젠 곡, 상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는 최상의 연주라고 생각한다.
재발매반(2010.10)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음반이라서가 아니라 음질이 정말 좋다. 그리고 수록내용곡들도 귀에 익을 곡들이 많다. 어떤 수집가의 표현대로 이놈이 나를 몸살나게 만들었던 음반이다.

판 한장에 40만원, 25만원 17만원 부르는게 값이었다.

그의 소품집으로 인메모리엄도 있다.

첫댓글 손열음 피아니스트가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인데
좋은 글 고맙소
태어난 생일 5월 2일
손열음과 마이클 래빈
두 분 다 같은 날이라는 거
마이클 래빈은 신동이었지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면서 갖추어야 될 보통의 친구관계, 사회적 경험과 기술등이 부족한 가운데, 점점 공연 무대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어 신경증이 생겨서 barbiturate계열의 약물을 복용해오다가, 사망 당일에는 이 약과 함께 감기약을 많이 먹어서 쓰러지면서 의자에 머리를 부딪혔다는 인터넷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여튼 참 안타까운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임은 틀림없습니다.
이제 테디님의 약물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설명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