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횡주
조 흥 제
1988. 6.19일 지리산 백무동, 세석, 삼신봉, 쌍계사 코스를 등산하기로 하고 집 사람과 함께 갔었다. 고속터미널에서 남원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10시20분에 남원에서 내리니 백무동 가는 차는 11시18분에 있다. 시간 여유가 있어 남원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광한루에 가 보았다. 광한루는 춘향전의 본 고장이라 평소 가 보고 싶은 곳이어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나마 다녀오기로 했다. 거기서 신랑-신부의 옷을 입고 사진사에게 사진 찍었다. 신랑 신부는 늙고 발에는 등산화가 보여 가관이었다. 50이 넘어 신혼사진이라니, 가히 우습다.
오작교 밑에는 커다란 비단 잉어들이 많은 것은 좋은데 물이 썩어 지저분하여 안타까웠다. 높은 그네가 있고 월매 집에 들러 표주박으로 막걸리 한 잔 하고 서둘러 터미널로 와서 버스에 올랐다.
“일반버스가 파업을 하여 중간에 세우겠으니 양해를 해 주세요”
마음 좋게 생긴 버스 기사는 계속 차를 세운다. 시골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11시30분에 백무동에서 하차. 공원 관리사무소를 지나서 조금 오르니 장터목 천왕봉이란 푯말이 있는 곳에서 갈라져 우측으로 오르니 하늘을 덮는 나무숲이 나온다. 1시간 쯤 오르니 계곡이 나오고 출렁다리가 있다. 다리 밑으로 첫 나들이 폭포, 오층 폭포 1.5㎞, 가내소 폭포 1㎞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다. 계곡 가에는 사람들이 목욕도 하고 놀기도 한다. 지각없는 어른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목욕하는 장면도 눈에 띄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백무동에서 세석까지는 10㎞, 지도에는 4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고 되어 있으나 나는 집 사람이 있어 시간을 충분히 잡았다. 얼마쯤 오르니 가냇 폭포라는 푯말이 있어 폭포 위에서 보니 높은 것 같지 않은데 30m라는 안내표지가 있다. 오층폭포(조그마한 폭포가 연하여 있다), 조금 오르니 한신폭포(길에서 떨어져 있어 가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집사람이 지쳤다. 집 사람이 진 배낭은 침랑 2개와 우산, 우의 등 무게는 가벼우나 덩치는 크다. 서울의 북한산 종주는 몇 번 해 보아 쉬엄쉬엄 올라가면 될 줄 알았는데 큰 일이다. 앞세우고 가니 이제는 더 못 가겠다고 털썩 주저앉는다. 나는 내 배낭 뒤에 집 사람 것을 올려놓고 걸었다. 지도상에 보니 정상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빨리 가자고 하니 원망이 쏟아진다. “유원지나 관광지는 안 데려 가고 힘든 산에만 끌고 다니니 어떻게 된 사람이냐”고 성질을 낸다. 10㎞가 이렇게 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이제 내려가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니 천천히 올라가자”고 달랬다. 경사가 심하고 고사목이 많은 것으로 보아 능선 정상이 거의 다 온 모양이다. 내 것을 세석산장에 갖다 놓고 ‘야호’를 위치니 반응이 없다. 큰일났다. 이 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 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한참 내려가야 하니. 200m 쯤 내려가다 보니 찬찬히 올라오고 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얼마 안 남았다고 안심시키고 배낭에서 간식과 과자를 꺼내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산장에 오니 7시다. 세석산장은 세석평전에 세웠는데 그 전에 있던 산장이 허물어져 84년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곳 세석 철쭉이 유명하며 철쭉제가 6월10일경에 열리는데 그때에 맞추어 온다는 것이 그만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산장 식수에 손을 담그니 얼음같이 차다. 밥을 해 가지고 들어가니 집 사람은 정신없이 자고 있다. 부엌에 들어가니 어떤 아주머니가
“아저씨 솥 좀 빌려 주이소”
산장에서 일 보는 남자에게 하는 아낙네의 말이다.
“안돼요. 아줌마들은 상습적이야. 앞으로는 안돼요.”
“어쩝니꺼? 밥은 해 묵으야 될 거 아닙니꺼.”
“그건 아주머니 사정이지……, 왜 취사도구는 안 가지고 다녀요.”
“다음에는 가지고 올랍니더, 이번 한 번만 봐 주이소.”
“안돼요, 벌써 몇 번 째요.”
“참말로 아저씨는 너무하십니다.”
그 아주머니는 산나물을 뜯으러 온 인근 마을 사람들인데 여기 와서 자면서도 취사도구를 산장에서 빌려서 해 먹었는데 매 번 그러니 산장에서도 잡아떼는 것이란다. 내가 코펠과 버너를 빌려 주었다. 경상도 아줌마의 “그럼 어쩔겁니꺼, 밥은 해 묵으야 될거 아닙니꺼.”하면서 눈을 껌벅껌벅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였다.
취침 시 남녀의 침상을 분리하였다. 여자는 여자들끼리 자고 남자는 남자들끼리 잤다. 오작교 건너 아내의 침상을 바라보면서 신혼사진을 광한루에서 찍었는데 첫날밤도 같이 못 자며 천리타향 이곳까지 와서 독수공방 신세를 져야 했다.
20일 아침 5시30분에 기상,
7시10분 세석 출발. 남쪽으로 난 가장 긴 능선인 삼신봉 코스를 타고 가다 쌍계사 쪽으로 내려 갈 예정이다. 20㎞, 집 사람이 문제 되기는 하지만 내려가는 길이니 괜찮을 것 같다. 이 코스가 날씨가 좋으면 좌측에 천왕봉,우측에 노고단까지 다 보이는 전망이 최고라는 글을 읽었기 때문에 코스를 변경할 수 없고 쌍계사와 불일폭포를 못 가 본 곳이라 꼭 그 곳으로 가리라 다짐했다. 더구나 불일폭포는 60m로 이산에서 제일 폭포다. 좌측에 하늘 높
이 솟아 있는 봉우리가 천왕봉, 우측에 노고단이 보인다고 하나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빛 샘 도착, 물을 뜨러 계곡으로 내려갔다. 올라오려니 어제 세석능선에 오르던 악몽이 되살아나 진절머리가 쳐졌다. 집 사람은 또 힘
이 들어 죽겠다고 엄살이다.
11시30분 삼신봉에 도착. 집 사람은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나만 혼자 올라갔다. 1288m 고지다. 정상에 평상복의 처녀가 앉아 있었다. 말을 걸어 보니 밑에 동네에 있는데 서울서 중앙대학생으로 여기 온지 여러날 되었다고 했다. 나도 상도동에서 왔다고하니 반가워하였다. 왜 왔느냐고 물으니 “그런게 있어요.”하고는 급히 내려간다. 87년 민주화운동 직후여서 지명수배내려져서 피해 온 학생 같았다. 조금 내려가니 숲속에 샘이 있고 쌍계사라고 남향표지가 있어 그리 내려갔는데 ‘어럽쇼’ 지도상에는 능선상으로 계속 길이 나 있는데 여기는 사면길과 계곡길이다. 무엇이 잘못됐다. 길 가운데 짐승의 똥이 가끔 있고 한 군데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시간이 얼마 안 됐다는 증거다. 낮에도 짐승이 다니는 모양이다. 길은 거의 평탄하고 벌목을 하는지 낙엽송 나무가 많이 쌓였다. 1시경 도로가 나오고 마을이 보인다. ‘어?’ 예상과 다른 것이다. 알고 보니 우리는 쌍계사 옆인 청학동 도인촌으로 빠져 있었다. 지도, 나침반, 안내서 다 가지고 다니면서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쌍계사로 가려면 거기서 8㎞를 더 가야 한다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휴게소에서 점심 해 먹고 뒤에 있는 도인촌에 가 보았다. 청학서당 옆으로 가니 살림집이 있는데 들어가니 한 할머니가 안마당에서 일을 한다. 훈장님을 찾으니 밭에 일하러 갔단다. 훈장님은 책상다리 하고 앉아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밭에 가서 일을 한다니 의외였다.
청학동은 예로부터 지리산 속에 있는 이상향으로 난리 때 피난고장이다. 6‧25 사변 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부락민을 한데 모아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유교(유불선 3교 통합)를 중심으로 하여 독특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청학동 내력을 그 할머니는 얘기해 주셨다. 그 할머니가 요즘 TV조선에서 실시하는 미스트롯에서 ‘미’를 차지한 김다현양의 할머니 같다. 그 언니 도현양이 그 할머니를 꼭 닮았다. 거기서 밥을 해 먹고 나오니 남자들은 흰 수건을 쓰고 다니는 것이 특이했다. 거기서 4㎞를 걸어오는데 학교에 갔다 오는 아이들이 우리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것이다. 때묻지 않은 산촌 아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학동에 사는 부모들의 교육이 그렇게 친절하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