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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栢栗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 말사 경북 경주시 동천동 406-1번지
경주시 동천동에 있는 소금강산 백률사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백률사는 신라 법흥왕 14년(527년)에 불교 전파를 위하여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색 피가 솟았고 잘린 목은 하늘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젔는데, 바로 그 떨어진 곳이 지금의 백률사 자리였다고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이 슬프하며 다음해인 법흥왕15년(528년) 그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자추사(刺楸寺)로서 훗날 백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음이나 뜻이 같으면 쉽게 이름이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곧 "자"(刺)는 잣이니 백(栢)과 같고 "추"(楸)는 밤이니 율(栗)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현덕왕9년(817년) 이차돈을 추모하며 석당(碩幢)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으로 페허가 된 이 절을 1600년 경주부윤 윤승순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창한 기록이 있다, 대웅전 앞쪽 암벽에 삼층탑이 음각되어있으나 상륜부를 재외하고는 알아보기 힘들다, 신라시대의 작품이며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소금강산 암벽에 조성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석등의 지붕돌이 남아있다,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제28호) 이차돈의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며 이곳에는 마애삼존불좌상, 마애탑 굴불사지석불상, (보물제121호), 기타 선원1동과 석탑, 석등재 등이 있다,
백률사 대웅전 (栢栗寺 大雄殿)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호 백률사는『삼국유사, 三國遺事』 등의 기록에 나오는 자추사(刺楸寺)일 것이라 한다. 자추사가 맞다면 신라 법흥왕(法興王) 14년(527)에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삼도록 순교(殉敎)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리기 위한 절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그 후 다시 지어졌다. 단층의 목조 기와집으로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집으로 좌우 협칸에 쌍여닫이문을 두었다. 기단부는 일부 신라시대 양식을 지니고 있다.
백률사 대웅전
백률사 대웅전 벽화
이차돈(異次頓) 506-527 성은 박씨 이름은 염촉, 거차돈인 이차돈은 신라가 차츰 고대국가로 자리를 잡아가던 506년에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이차돈은 일찍부터 불교를 믿었으나 신라에서 법으로 불교를 허용하지 않는것에 대해 늘 마음이 아팠다, 자증왕의 뒤를이어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법을 제정하고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를 기르는 등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법흥왕은 또 불교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불교의 힘을빌어 나라를 발전 시키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법흥왕은 불교를 인정할 수 없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이미 눌지왕 때 부터 고구려 에서 온 묵호자에 의해 불교가 전파 되었다, 그때 사인 벼슬에 있던 이차돈은 법흥왕의 뜻을 혜아리고 왕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올바른 도리" 라고 아뢰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왕명을 잘못 전달한 것처름 꾸며 자신의 목을베면 모두 굴복하여 왕명을 따를 것입니다,
법흥왕은 말렸으나 이차돈은 " 모든것 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목숨이지만 이몸이 저녁 에 죽어 아침에 불교가 행해지면 부처가 하늘에 오르고 임금의 길이 편안할 것이라"며 왕에게 허락해 줄것을 청하였다, 법흥왕의 허락을 얻은 이차돈은 마침내 청경림 이란곳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차돈이 왕명을 따라 절을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하들이 법흥왕에게 따져 물었다,이에 법흥왕은 자신이 시킨일이 아니라면서 이차돈을 불렀다, 이차돈은 법흥왕과 신하들 앞에서 부처님의 뜻에따라 자신이 혼자 절을 짓는일을 시작했으며 왕명을 받은 것처럼 속였다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이차돈과 미리 약속한 법흥왕은 왕명을 속인 죄로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 죽기에 앞서 이차돈은 "만일 부처님이 있다면 내가 죽으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것" 이라말하고 기도를 하였다, 이차돈의 목을베자 머리는 날아가 소금강산(경주 북쪽에 있는 산) 꼭대기에 떨어 졌고 그의 목에서는 흰 피가 나왔다, 이에 깜짝놀란 귀족들은 마음을 돌려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받아 들이는데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이차돈은 자신의 죽음으로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이차돈이 죽은 뒤 법흥왕은 534년에 천경림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 를 완성하였고 진흥왕에에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백률사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굴불사지 사면석불상 보물 제121호
경주의 북쪽산인 소금강산(小金剛山) 기슭에 위치한 굴불사터에 있는 이 불상은 서쪽에는 아미타여래불,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북쪽에는 미륵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四方佛) 형태이다. 『삼국유사』 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때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아미타여래는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어 꼭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좌우에는 다른 돌로 보살입상을 세워 놓아서 3존불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동쪽의 약사여래는 양 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데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져 있다. 북쪽면의 오른쪽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입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6개의 손이 달려있는 관음보살을 얕은 선으로 새겼다. 남쪽면은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표현한 것인데, 굴곡이 진 신체의 모습과 얇은 옷주름의 묘사가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있게 배치한 점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백률사종무소 ☎ 054-772-8634
사진.2011.8. 12.금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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